독립 운동가들이 모인 상해조선인교회
⌜한국 기독교의 역사Ⅱ⌟148~154쪽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중국의 정치 일번지는 북경이었지만 조선인의 정치 일번지는 상해였다.
상해는 조선인의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각국 조계가 있어서 은신하는 것이나 외교협상을 하는 일 등이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연해주의❰대한국민의회❱문창범과 협상을 벌인 끝에 임시정부의 수도로 삼은 곳이다.
임시정부 수립 전, 대부분의 망명 지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이나 북간도나 서간도로 망명하여 거점을 그곳에 두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자, 망명 지사들이 상해로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적을 두고 활동을 하였다. 당시 상해는 일본의 점령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북간도나 남만주, 연해주에서처럼 독립 운동가들이나 망명객들이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외피를 입지 않아도 되었다. 망명객이 대다수인 상해에서는 기독교 신앙생활 자체가 저항이고 독립운동이었다.
상해에서 조선인들이 기독교 예배를 시작한 것은 1913년 최재학이 상해에 오면서 부터였다고 알려져 있다. 1914년 가을부터는 여운형의 평양신학교 동기생인 김종상이 전도사를 맡았으며 그 뒤를 선우혁이 이어받았다. 그러다가 여운형이 남경에서 상하이로 온 뒤 부터는 그가 교회를 맡으면서 조선인교회가 제법 안정적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가 펴낸 ⌜한국 기독교의 역사Ⅱ⌟148~154쪽에 상해조선인교회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발췌해서 올린다.
상해에서 한국인 집회가 시작된 것은 1914년 11월이었다. ‘한일병탄’ 이후 서울에서 온 최재학이 중심이 되어 문석진 • 이기룡 • 이흥석 • 임학준 • 홍순겸 등 30여 명이 영조계 서화덕로에서 있는 미국 해군YMCA회관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1914년 9월부터 그곳의 중국인 YMCA 총무 락우드와 영어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독자적인 집회를 가질 필요성을 느껴 그의 지원으로 예배 처소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명칭을 ‘우호한인예배회’라 붙였으며, 깅종상 • 이흥석 • 임학준 • 최재학 등 4인을 위원으로 선출했고, 황성기독교청년회간사 출신인 김종상이 예배를 인도했다.
그 후 미국 해군YMCA는 국내에서 건너온 한국인이 미국으로 건너가는 중간기착지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일본영사관에서 미국영사관에 “밀항선인(密航鮮人)을 미국 해군 청년회관에서 보호한다”고 항의하여 외교문제로 비화되자 김종상은 상해를 떠났고 예배장소도 옮겨야 했다.
결국 1915년 8월 초 미국인 선교사 피취(Fitch)의 주선으로 사천로의 중국인 YMCA 식당을 빌려 예배를 드렸고, 이흥석이 예배 인도를 맡다가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망명을 온 선우혁이 그 역할을 이었다. 이 무렵 상해의 한국인은 200명 정도였는데 이들 중 40여명이 집회에 참석했다.
1917년 1월에는 여운형이 전도인, 임학준이 서기, 한진교가 회계를 맡았다. 여운형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다니다 1914년 휴학하고 남경 금릉대학교 영문과에 입학을 하였다가 1916년 말부터 상해로 나와서 정착할 준비를 하였으며 한인교회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교인과 세례 청원자들이 증가하였으나 목사가 없어 본국 교회에 목사 파송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18년 9월 선천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 여운형이 대표로 참석하여 상해한인교회 현황을 설명하고 목사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에 총회는 “5개월간만 일보게 하되 그 후에 형편을 따라 더 보게”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총회의 결정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는데, 1918년 말부터 1919년 3월 사이에 전개된 만세시위에 상해한인교회 지도자들이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파리강화회담에 소식을 미국인 크레인(C. R. Crane)으로부터 듣고 여운형 • 선우혁이 이를 국내에 전달했으며, 김철 • 장덕수 등 지도급 교인들도 이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1919년 초부터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이 무련 예배인도는 심경열이 맡았다.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상해는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더욱 많은 망명객들로 붐볐다. 이때 국내의 많은 교인들이 상해로 건너왔는데,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인 김병조 목사를 비롯해 상해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장이 된 손정도 목사, 국내 3 • 1운동을 주도한 김인전 • 송병조 • 안승원 • 이원익 •장적로 목사 그리고 김두봉 •김순애 • 김예진 • 여운홍 • 이병주 • 이창실 • 장붕 • 정애경 • 정인과 •조상섭 • 차경신 등이 그들이었다. 이에 따라 집회 장소가 비좁게 되자 피취선교사는 자기가 관리하는 영조계 북경로의 중국인 장로교회를 제공하였다. 1919년 7월 교인들은 투표로 김병조 목사를 담임자로 선출했으며, 김태연 •한진교를 집사, 박헌양 • 이화숙 • 최병선 • 최순신을 권찰로 임명했다. 그 해 11월 성탄절예배에는 교인 200여 명이 모이는 성홍을 이루었다.
교인이 계속 늘자 상해한인교회는 1920년 초 예배장소를 불조계 하비로의 교민단 사무실로 옮겨 1주 3회씩 예배드렸으며, 김인전• 손정도 • 이원익 • 장봉 •정인과 •조상섭 등으로 상의회를 조직하여 교회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주일학교도 조직되어 김태연이 교장, 김순애 • 김연실• 박영운 • 박지명 • 장필석 •정상인 • 정애경 •최명실 등이 교사로 봉직했다. 1921년 1월 김병조가 목사가 담임자로 재선되었고. 집사로 김순애• 김태연• 선우혁• 한진교가 선출되었으며, 이때부터 3개 구역으로 나누어 동구역은 강천복•선우푼, 서구역은 김예진 • 박치덕, 북구역은 최순신 등이 권찰로서 구역을 관리했다. 이해 2월에 불조계 서신교의 중국인 예배당을 인수하여 독자적 예배당을 마련하고 ‘삼일당(三一堂)이라 명명했으며, 같은 해 8월 부속공간인 ’모아당‘을 마련하고 ’삼일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이 무련 세례 교인만 130명을 헤아렸다.
한편 1918년 여운형을 장로교 총회에 파송한 이후 상해한인교회는 국내교회와의 연결을 계속 모색했다. ……1919년 담임자로 선출된 김병조 목사는 “작년에 선교사를 청원한 사(事)가 유하니 다시 총회에 치서문의한 후에 결정함이 가하다”고 하여 장로교 총호와의 여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해한인교회의 요청에 대해 본국 교회의 태도는 적극적이지 않았다.1919년 총회 때 상해의 교인들이 마펫에게 전달한 서신에 대해서는 회답조차 없었고, 그 후에도 청원건은 계소 유예되었다. 요청이 계속되자 1921년 총회는 남장로회 선교사 메큐첸을 시찰위원으로 파송키로 했으나 그는 산동성 내양까지만 왔다가 돌아가 상해의 “일반교인은 총회의 냉정함을 대단히 민울히 여기게”만들었다.
본국 교회의 이 같은 태도는 산동 선교와 만주 선교에 전력을 기울였기에 여력이 없었다는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3• 1운동 직후 교회의 사회참여를 우려하며 보수주의 신앙을 강조하던 국내교회가 입시정부와 밀접히 관련된 상해한인교회를 적극 지원하기 어려웠다고 볼 수도 있다.
결국 본국 교회와 유대관계를 맺는데 실패한 상해한인교회는 자체적으로 조직과 규칙을 마련해야 했으며, 그 결과 1922년 1월 ❰상해조선인예수교임시장정❱이 작성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 조직도 정비하여 담임목사로 김병조가 재선되었고, 집사에 김종상 • 선우훈• 윤종식 •
한진교, 권사에 강천복 •김영신 •김예진 • 김홍숙 • 도인권 • 박의륜 •신현창 •최순신 •주일학교 교장에 신현창 등이 선출되었으며, 치리회는 손정도• 송병조 목사로 구성되었다.
이 무렵에 상해한인교회에서 설립한 인성학교도 크게 발전했다. 1917년 2월 김철• 선우혁• 한진교• 여운형 등이 주도하여 미조계 조풍로의 셋방에서 학생 4명으로 시작된 이 학교는 ‘기독소학교’라 불렸으며, 1919년 3월 이후 국내로부터 망명이 계속되자 학생들이 늘어나 불조계 장안리로 이전했다가 하비로 강녕리에 독자건물을 마련했다. 교장은 김태연• 손정도 •안창호• 여운홍 등이 역임했고, 교사로는 김두봉 • 김송즙 • 김예진 • 김원경 • 김종상 • 김태연 • 박영윤• 박춘근• 유상규 •윤종식 • 이병주 •이선실 •정얘경 등이 봉직했다. 이들은 대부분 국내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그 때문에 인성학교는 독립군 양성학교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상해한인교회는 침체국면에 접어들었다. 본국교회의 지원은 여전히 미약했고, 임시정부와 한인사회의 갈등과 암투, 일제의 집요한 방해공작 등으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결국 김병조 목사는 1923년 상해를 떠나 봉천으로 갔고, 후임으로 송병조 목사가 부임하였으나 그도 1932년 임시정부와 함께 항주로 떠났다. 그 후 방화일 • 방효원 • 조상섭 목사 등이 교회를 이끌었으나 교세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임시정부의 항주 이주, 그리고 “공산당과 무정부주의자 기타 신사경향에 따라 반종교적인 기운이 한인 청년 간에 대두한 것과 또 일반인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 박약하여 간 것 등의 원인으로 1930년대 후반 교세는 더욱 침체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Ⅱ⌟148~154쪽
상해는 중국인들에게도 한국인들에게도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었다.
디아스포라 조선인들의 교회는 상해사변과 윤봉길 홍구공원 저격사건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집요한 일본의 제국주의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웠다. 그 뒤로 1932년 1월에 에 상해사변을 일으켜 5월에 19로군을 격퇴하고 상해를 점령하였다. 4월 29일 일본군의 천장절 기념 관병식에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저격사건으로 상해의 조선인들은 숨을 멈추었다. 상해에서 살아남으려면 일본에 순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상해의 한인교회 관계자들은 임시정부를 따라 피난을 떠났다. 남은 자들은 지하에 숨어야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는 로마의 카타콤 교회처럼 지하로 잠적해야 했다. 이로서 상해 한인교회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상해를 3차례 방문하면서 나라 잃고 방황하는 청년들이 서로 상처를 싸매주며 독립의 꿈을 꾸며 기도를 바쳤던 상해 조선인교회와 인성학교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언젠가 건물이 있었던 자리의 주소라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상해조선인교회는 20여년 동안 5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자기 땅, 자기 건물이 없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맨 마지막 예배처소는 상해교우들이 힘을 합하여 중국인예배당을 구입하여 리모델링해서 사용하였다. 주소를 헤아려보면서 상해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희망과 절망을 느껴본다.
영조계 서화덕로, (영국조계지역)
사천로의 중국인 YMCA 식당,
영조계 북경로의 중국인 장로교회, (영국조계지역)
불조계 하비로의 교민단 사무실,(프랑스조계지역)
불조계 서신교의 중국인 예배당(프랑스조계지역)을 개조한 삼일당, 모아당의 건물을 찾고 싶었다.
남의 땅에 세워진 상해한국인교회에서
유명, 무명지사들과 교우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함께 바친 눈물의 기도와 찬송 소리가 들린다.
2021.11.17.수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