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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 857~ ? )은 신라말기의 학자요, 문장가입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 입니다. 최치원 선생은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원성왕(신라38대-내물왕12세손)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관계한 견일(肩逸)의 아들이며,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으로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사람으로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868년(경문왕8년-임금님 귀는 당나귀귀의 주인공)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에 과거에 급제, 선주 율수현위(宣州 水縣尉)가 되고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읍니다. 최치원이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 부터였읍니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表), 장(狀), 격(檄), 서(書), 위곡(委曲), 거첩(擧牒), 제문(祭文), 소계장(疏啓狀), 잡서(雜書), 시 등 1만여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읍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읍니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 태산(太山 : 지금의 전북 태인)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냈읍니다. 894년 시무(時務) 10여조(條)를 상소, 아찬(阿)이 되었다가 그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읍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며, 쌍계사의《신감선사비문》이 유명합니다. 선생은 또한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표 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입니다. 여기에는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 마립간(麻立干)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이 모두 야비하여 족히 칭할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여 왕(王)으로 바꾸었는데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신라문화를 이해하려는 역사 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고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 (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읍니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금체시>,<오언칠언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 등과 사서(史書)로 《제왕연대력》이 있으며, 불교 관련되는 저술로 <부석존자존>,<법장화상전>, <석이성전> 등이 있었으나,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四山碑銘)> 뿐이고 그 외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 원문(原文), 찬(讚) 등이 전할 뿐입니다. [출처] 고운 최치원 ( 857~ ? )|작성자 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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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묘지명(金之祐墓誌銘 1152년, 의종6년)이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68년 이난영이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 中央大出版部)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1982년 김연옥이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으로 [고려시대 경주김씨의 가계](숙대사론, 11·12합, 숙명여대)를 쓰면서 김지우 묘지명을 논문의 주요 사료로 인용하였다.
김연옥의 논문 [고려시대 경주김씨의 가계]는 여러 고려사학자들의 글이나 논문에 인용되었다.
1984년 허흥식 교수가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한국금석전문)』中世上(亞細亞文化社)를 발표하면서 김지우 묘지명의 원문이 실렸고, 이 전문을 김용선 교수가 해석하여 2001년 『고려묘지명집성』(한림대학출판부)을 펴내면서 김지우 묘지명이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국역고려사열전, 2006, 동아대학교석당학술원(심봉근원장)은 각주를 달면서 김지우 묘지명을 인용하였다.
김지우 묘지명이 학자들의 논문에 주요 자료로 인용되는 것은 그만큼 사료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김지우묘지명(金之祐墓誌銘)은 고려 의종 6년(1152년)에 만들어졌으며, 크기는 세로 4.2cm, 가로 7.2cm, 글자크기 1.5cm로 전형적인 고려시대묘지명의 형태이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묘지명에 김지우의 고조부 평장사공 휘 인위(因謂)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 경주김씨 계보를 연구하는데 매주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묘지명인 김지우 묘지명을 살펴봄으로써 경주김씨 계림군파와 예의판서공파의 조상인 평장사공 휘 인위의 상계를 논하고자 한다.
김지우묘지명(金之祐墓誌銘 1152년)
閤門祗侯金君墓誌銘」
君諱之祐字福基其先新羅國」
元聖大王之後大王生大匡金」
禮禮生三韓功臣三重大匡仁」
允允生大子大保左僕射信雄」
雄生司徒內史侍郎平章事因」
謂謂生兵部尙書中樞使元晃」
晃生中書令樂浪公景庸庸生」
中書侍郎平章事判尙書工部」
事仁揆揆生之祐初功臣仁允」
仕大祖統合三國有功隨大祖」
入京家焉金氏之族世世衣冠」
顯達金姓自此始矣至今稱爲」
貴姓母開州郡夫人左僕射?」
知政事王?之女也君爲人寬」
厚有節少好文學以祖蔭入仕」
爲良?令同正初受寫經院判」
官遷大樂署丞遷禮賓注簿至」
善慶府舍人天德三年戊辰二」
月日超拜閤門祗侯出安西都」
護府判官爲郡淸直臨事善決」
三年以▨聞辛未年七月二十」
六日因病卒于京城享年四十」
四歲娶金氏女王大妃延壽宮」
主之兄也追封戶部尙書金」
之女也生子二人長衛尉丞同」
正忠彦一男最幼女三人長適」
禮賓主夫黃文富餘?幼壬申」
年十月十九日葬于松林縣白古」
浦銘曰天難測命靡常世素貴」
壽不長銘於石永以藏」
판독자: 허흥식
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출전: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합문지후 김군(閤門祗候 金君) 묘지명
군의 이름은 지우(之祐)이고, 자는 복기(福基)로, 선조는 신라국(新羅國) 원성대왕(元聖大王)의 후손이다. 대왕은 대광(大匡) 김예(金禮)를 낳고,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을 낳고, 윤은 대자대보 좌복야(大子大保 左僕射) 신웅(信雄)을 낳고, 웅은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를 낳고, 위는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을 낳고, 황은 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을 낳고, 용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를 낳고, 규가 지우(之祐)를 낳았다.
처음 공신 인윤이 대조(大祖, 太祖)를 섬겨 삼국을 통합하는 데 공로가 있었으므로 대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 와 가문을 일구었다. 김씨 집안이 대대로 벼슬하여 현달하였으니, 김씨 성이 이로부터 비롯하였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귀성(貴姓)으로 불리운다.
어머니는 개주군부인(開州郡夫人)으로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知政事) 왕하(王?)의 딸이다.
군은 사람됨이 관대하고 너그럽고 지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글공부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조음(祖蔭)으로 벼슬하여 양온령동정(良?令同正)이 되었다. 처음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이 되었다가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오르고, 예빈주부(禮賓注簿)로 바뀌었다가 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에 이르렀다. 천덕(天德) 3년 무진년 2월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특별히 임명되면서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으로 나갔다. 군(郡)을 청렴하고 정직하게 다스리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3년이 되자 잘 다스린다는 평판이 있었다. 신미년(의종 5, 1151) 7월 26일에 병으로 서울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4세이다.
김씨 집안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왕대비(王大妃) 연수궁주(延壽宮主)의 언니이며,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추봉된 김선(金瑄)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으니, 큰아들은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충언(忠彦)이고, 다음 아들은 가장 어리다. 딸은 세 명이 있는데, 큰딸은 예빈주부(禮賓主夫) 황문부(黃文富)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신년(의종 6, 1152) 10월 19일에 송림현 백고포(松林縣 白古浦)에 장례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려워 사람의 목숨도 항상 같을 수는 없네.
대대로 본래 귀한 가문이지만 수명이 길지 못하였네.
돌에 명(銘)을 새겼으니 영원토록 간직되리라.
해석자: 김용선
金龍善, 2001,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출전: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신라 원성대왕(元聖大王) 후손
대광(大匡) 김예(金禮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
태자태보 좌복야(太子太保 左僕射) 신웅(信雄)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
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
합문지후(閤門祗候) 지우(之祐)
원성대왕(元聖大王)--대광(大匡) 김예(金禮)--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태자태보 좌복야(大子大保 左僕射) 신웅(信雄)--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합문지후 지우(之祐)--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충언(忠彦)
“신미년(의종 5, 1151년) 7월 26일에 병으로 서울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3세이다”
김지우는 1151년 43세로 돌아가셨으니 그의 생년은 1108년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김지우(金之祐 : 1108~1151)의 자(字)는 복기(福基)이며, 경주사람으로 신라 원성왕(元聖王)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김인규(金仁揆), 조부(祖父)는 중서령(中書令) 김경용(金景庸), 증조부는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 고조부는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이다.
김지우의 어머니는 개주군부인(開州郡夫人)으로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參知政事) 왕하(王?)의 딸이다.
부인 김씨는 호부상서(戶部尙書) 김선(金瑄)의 딸로 인종의 차비인 왕대비(王大妃) 연수궁주(延壽宮主)의 언니이다.
김지우는 양온령동정(良?令同正),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 대악서승(大樂署丞), 예빈주부(禮賓注簿), 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 등을 거쳐 의종 2년(1148)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면서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이 되었다. 그러나 3년 후인 의종 5년(1151년)에 43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김지우 묘지명의 찬자는 고인의 유족으로부터 김지우의 조상들의 계보와 관직명을 기록의 형태(가첩이나 가보)로 전해 받았을 것이다.
김지우 묘지명은 먼저 김지우가 원성왕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다.
알지(閼智)-세한(勢漢)-아도(阿道)-수류(首留)-욱보(郁甫)-구도(仇道)-말구(末仇)-내물왕(奈勿王)-복호(卜好)-습보(習寶)-지증왕(智證王)-진종(眞宗)-흠운(欽運)-마차(摩次)-법선(法宣)-의관(義寬)-위문(魏文)-효양(孝讓)-원성왕(元聖王)
원성대왕(元聖大王) 후손---------------
예(禮)-인윤(仁允)-신웅(信雄)-인위(因謂)-원황(元晃)-경용(景庸)-인규(仁揆)-지우(之祐)-충언(忠彦)
"대왕(원성대왕)은 대광 김예를 낳고......."
대광이라는 관직은 신라의 관직이 아니고 고려의 관직이다.
919년부터 최고의 관제였는데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 관계를 16등급으로 정할 때 대광은 종1품, 제3등급으로 되었다.
따라서 대광 김예는 고려인이다.
상식적으로 신라 원성대왕이 고려초의 대광 김예(金禮)를 직접 낳을 수 없는데 왜 이렇게 썼을까?
문맥상 생(生)을 원성대왕이 김예를 낳았다는 의미보다는 김예는 원성대왕의 자손(子孫)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의미로 해석해 보면, 김지우 묘지명은 원성왕에서부터 김예(金禮)까지의 계보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광 예(禮)의 상계를 알 수가 없어서 기록하지 못했거나, 그 당시엔 계보의 기록이 있어서 알고 있었지만 묘지명의 특성상 김지우의 7대조까지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생략했을 수도 있다.
김지우 묘지명(1152년)에 기록된 계보의 인물들이 실존성과 신빙성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고려사의 기록 또는 관련 금석문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김지우 묘지명의 계보와 관직명, 그리고 고려사 또는 관련금서문 기록여부
예(禮)-대광(大匡)-기록없음
인윤(仁允)-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삼한공신명단 있음
신웅(信雄)-태자태보 좌복야(太子太保 左僕射) -기록없음
인위(因謂)-사도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고려사, 금석문 기록 있음
원황(元晃)-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고려사 기록 있음
경용(景庸)-중서령(中書令)-고려사 기록 있음
인규(仁揆)-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고려사, 고려도경 기록 있음
대광 김예(金禮)
우선 대광 김예(金禮)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의가 필요하다.
김예(金禮)의 관직은 대광(大匡)이다. 대광은 신라시대 관직이 아니고 고려초 관직이다. 궁예가 태봉을 건국하고 처음 사용하였는데 고려 태조는 태봉의 관제인 대광(大匡)을 그대로 썼다.
919년부터 최고의 관제였는데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 관계를 16등급으로 정할 때 대광은 종1품, 제3등급으로 되었다.
그 뒤 995년(성종 14)에 이르러서 중국식 문무산계(文武散階)를 채택하여 관계를 다시 정비했는데, 무산계에는 그대로 대광을 쓰고, 문산계에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고쳤다.
삼한공신 삼중대광 김인윤의 부친 김예는 고려초에 대광(大匡-종1품)에 오른 인물이고 그 또한 그 아들 인윤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는데 기여한 공신일 가능성이 높다.
대광(大匡) 김예(金禮)가 김자류 묘지명(金子?墓誌銘 1146년)에 기록된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겸(金禮謙)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로서는 그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논의를 진행하기 어렵다.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
김지우 묘지명에서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은 삼한공신명단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박천식 교수 논문 중 '삼한공신 일람표' 1988년-'전라문화논총'(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에서 발췌(拔萃)한 <고려삼한공신명단>이다.
배현경(裵玄慶) 경주인 (태조개국공신)경주배씨 시조
신숭겸(申崇謙) 곡성인 (개국벽상공신)평산신씨 시조
김 락(金 樂) 賜中和 (태조통합공신)
김 철(金 哲) 本순천인(태조통합공신)
복지겸(卜知謙) 면천인 (고려개국공신)면천복씨 시조
유금필(庾黔弼) 무송인 (태조익찬공신)평산유씨 시조
박술희(朴述熙) 혜성군인(개국공신)면천박씨 시조
최 응(崔 凝) 토선인 (훈공 많음)
윤 선(尹 瑄) 염주인 (歸附北岡以安)
왕 유(王 儒) 광해주인(공훈 많음)
왕순식(王順式) 명주인 (삼한공신)
왕 렴(王 廉) 명주인 (왕순식 아들)
왕관경(王官景) 명주인 (강릉우일파시조)
박수경(朴守卿) 평주인 (삼한공신)
박연윤(朴遲胤) 又竹州人(삼한공신)
박수문(朴守文) 평주인 (삼한공신)
박승위(朴承位) 평주인 (삼한공신)
박영규(朴英規) 승주인 (개국공신)
이총언(李총言) 拜碧晉장군(삼한공신)청주이씨 시조
서 필(徐 弼) 이천인 (刀筆進.奕世大殿)
강궁진(姜弓珍) 긍주인 (삼한벽상공신)
전종회(田宗會) 영광현인(태조공신)
윤 봉(尹 逢) 수안현인(삼한공신)
김유렴(金庾廉) 閼智후손(歸태조위공신)
윤신달(尹莘達) 파평현인(삼한공신)파평윤씨 시조
김인윤(金仁允) 경주인 (삼한공신)
김극렴(金克廉) 강릉인 (삼한공신)
최영휴(崔英休) 충주인 (삼한공신)
최준옹(崔俊邕) 창원군인(삼한공신)
김 길(金 吉) 광산현인(佐태조유공)
박기오(朴奇悟) 연창군인(삼한공신)
이희목(李希穆) 수주인 (벽상공신)
이능희(李能希) 청주인 (定삼한위공신)
이겸의(李謙宜) 청주인 (삼한공신)
차 달(車 達) 유주인 (삼한공신)
왕희순(王希順) 개성인 (定삼한위공신)
함 규(咸 規) 항양인 (삼한공신)
염형명(廉邢明) 봉성현인(삼한공신)파주염씨 시조
왕만세(王萬歲) 개주인 (태조종제녕해공)
금용식(琴容式) 賜籍김포(삼한공신)
나총례(羅聰禮) 나주인 (삼한공신)금성나씨 시조
이 의(李 誼) 금마인 (개국공신)
한 란(韓 蘭) 청주인 (삼한공신)
원극유(元克猷) 원주인 (삼한공신)원주원씨 시조
권 행(權 幸) 안동인 (삼한공신)
이금서(李金書) 경주인 (삼한공신)
이 도(李 棹) 전의인 (삼한공신)
왕 예(王 乂) 강릉인 (佐태조유공)
왕 경(王 景) 명주인 (삼한공신)
홍은열(洪殷悅) 남양인 (삼한공신)
임 희(林 曦) 진천인 (벽상공신)
이견원 안락 김지 김래 오금길 김근겸 이부율 윤신복 0궁열 이견웅 장원지 최정헌 이길권 조맹 김예겸(金禮謙) 김선평 김훤술 이극인 이서 박욱 박윤웅 장금용 장길 정예 황보능 전이갑 조정 이능일 이대평 이배환 방수홍 최필달 유천궁 유긍달 홍규 홍유 황보제공 김억렴 유덕용 0명필 이원 왕규 왕유 김행파 강기주 0영장 김선궁 평준 김긍율 배은우 최언위 신능길 신보 최지몽 최상훈 현일 왕식렴 왕평달 견금 능식 연익 홍현 태평 홍달 강여청 손긍훈 방계홍 문다성 허선문
김지우 묘지명은 김인윤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初功臣仁允
仕大祖統合三國有功隨大祖
入京家焉
"처음 공신 인윤이 태조(太祖)를 섬겨 삼국을 통합하는 데 공로가 있었으므로 태조를 따라 서울(개경)로 올라와 가문을 일구었다"
김인윤은 본래 신라에 있다가 고려 태조를 따라 개경으로 올라왔다는 건데, 그렇다면 그 때가 언제일까?
931년(태조 14년) 에 태조왕건은 신라왕(경순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보내어 만날 것을 재차 요청해 오자 2월에 기병 50여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내려왔다가 5월에 개경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태조왕건은 신라에 머물면서 신라국왕(김부)과 태후(太后) 죽방부인(竹房夫人), 상국 김유렴과 잡간(?干) 예문(禮文) 및 파진찬(波珍粲) 책궁(策宮)·윤유(尹儒), 한찬(韓粲) 책직(策直)·흔직(昕直)·의경(義卿)·양여(讓餘)·관봉(寬封)·함의(含宜)·희길(熙吉) 등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그리고 신라국왕(김부)은 태조 왕건이 돌아갈 때 혈성(穴城)까지 나와 배웅하고 사촌동생인 상국(相國) 김유렴을 따라 보냈다.
정황으로 볼 때 김인윤이 태조를 따라 개경으로 올라온 것은 상국 김유렴이 태조를 따라 개경으로 올라가던 그때가 아닌가 한다.
김인윤의 관직은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이다.
삼한공신 삼중대광은 고려초 관직중 최고 높은 관직이다.
김지우 묘지명에서,
삼한공신 삼중대광 인윤은 태자태보 좌복야(太子太保 左僕射) 신웅(信雄)을 낳고,
신웅은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를 낳았다.
태자태보 좌복야(太子太保 左僕射) 신웅(信雄)
김용선 교수는 허흥식 교수의 판독을 가지고 대자대보 좌복야((大子大保 左僕射)로 해석했지만, 고려에서 대자대보라는 관직은 없고 태자태보라는 관직이 있다. 아마 태(太)자의 점하나가 마모되면서 대(大)자로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태자태보로 읽은 것이 옳다.
태자태보는 태자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정 1품이다.
김지우 묘지명에는 태자태보 좌복야 신웅(信雄)으로 새겨져 있는데 경주김씨족보에는 인위의 아버지가 대장군 순웅(順雄)으로 기록되었다.
좌복야는 상서좌복야를 줄인 말로 995년(성종14년) 상서성이 설치될 때 처음 두었던 것으로 정 2품이다.
태자태보 좌복야의 관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신웅은 성종 때 상서성을 설치하여 운영할 당시(995년) 생존해 있던 인물로 보인다.
1772년 경주김씨족보에 인위의 아버지 순웅은 강릉김씨 대상(大相 ) 선환의 3녀와 혼인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강릉김씨족보에도 김순웅은 선환의 세째 사위로 되어 있다.
주원-종기
헌창
신 -자사-동정-영진-식희-춘용-굉보
영길-선강-강명-수용
선희-예-밀
육
필
대명주원부인(태조14비)
순식-수원-정목부인(태조제8비)
장명
영견-견술
영환-선환-광열
광육
경겸
강명(사위)
김순웅(사위)
원충(사위)
경주김씨족보에는 기록이 없지만, 경주최씨대동보에 최승로(927-989)의 손자 최주(崔周)가 시중 김순웅의 딸과 혼인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최승로(崔承老)-최숙(崔淑)-최제안(崔濟顔)
최의(崔儀)-최주(崔周)------김순웅의 딸과 혼인
김지우 묘지명(1152년)에는 신웅(信雄)으로 되어 있지만, 경주김씨족보(1772년), 강릉김씨 사정공 이원청통보(1565년), 경주최씨대동보에는 순웅(順雄)으로 되어 있다.
인위의 아버지 이름이 신웅이 맞느냐, 순웅이 맞느냐는 문제는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년대가 강릉김씨 사정공 이원청통보(1565년)기록보다 413년 앞선다는 점에서 김지우 묘지명의 기록을 따르는 게 옳다고 본다.
경주김씨족보에는 대장군으로 되어 있지만, 김지우 묘지명에는 태자태보 좌복야로 되어 있다. 고려에서는 흔히 문무를 겸하고 있었으므로 기록상 관직의 차이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어 보인다.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
위에서 인위의 아버지 이름이 김지우 묘지명-신웅(信雄)과 경주김씨족보, 강릉김씨족보, 경주최씨대동보-선웅(順雄)의 차이가 났듯이, 인위의 이름에 쓰인 한자(漢字)도 차이가 난다.
김지우 묘지명(1152년)과 이정의 묘지명(1077년)에는 인위(因謂)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와 경주김씨족보에는 인위(因渭)로 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를 위(謂)와 강이름 위(渭)의 차이가 난다. 인위의 한자(漢字)는 김지우 묘지명(1152년)과 이정묘지명(1077년)이 초기 썼던 것이므로 因謂로 쓰는 것이 옳다.
사도내사시랑평장사 인위(因謂)는 김지우 묘지명(1152년) 뿐만 아니라 고려사열전 원순숙비 , 고려사절요, 이정 묘지명(1077년), 금산사혜덕왕사진흥탑비(1111년)에 등장한다.
고려사 열전 현종(顯宗) 후비 원순숙비(元順淑妃)
원순숙비 김씨는 기록에 그 관향이 누락되었다. 평장사(平章事) 김인위(金因渭)의 딸로 경성왕후(敬成王后)를 낳았다. 애초 경흥원주(景興院主)라고 부르다가 현종 15년(1024) 정월에 덕비(德妃)로 책봉하였다. 9월에 그 부친 김인위를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知政事)·주국(柱國)·경조현개국남(京兆縣開國男)으로 임명하고 식읍(食邑) 3백호를 내려준 뒤 은퇴시켰다
(출전: 국역 고려사,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06.11.20, 경인문화사 ).
평장사 김인위의 딸 경흥원주 김씨가 언제 궁궐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으나 1021년 현종 11년 8월에 김인위를 상서우복야로 삼고 치사(퇴임)하게 하였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021년(현종 11년)에 현종의 제 8비로 궁궐에 들어와 경흥원주가 된 것으로 보인다.
1024년 김인위는 원순숙비의 아버지, 현종의 장인으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주국 경조현개국남 식읍 300호를 받고 은퇴했다.
현종의 제 8비 원순숙비는 딸을 하나 낳았는데 후에 덕종의 왕비(경성왕후)로 책봉되었다.
이정(李?) 묘지명(墓誌銘)-1077년(문종31년)
아버지 자연(子淵)은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 中書令)이고 추증된 시호는 장화(章和)이다. 어머니 김씨는 계림국대부인(?林國大夫人)으로,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의 딸이다.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1111년(예종6년))
외조부(外祖父)의 휘는 ▨▨ ▨▨시랑(▨▨侍郞) 평장사(平章事) (결락) 왕실의 명신(名臣)이며, 충절(忠節)을 지켜 변하지 아니하고, 평탄함과 험난함을 겪어도 마음이 한결 같았다. 밖으로 나간 즉 장군으로서 모(?)과 장(杖)과 부월(?鉞)을 잡아서 사방이 격탁(擊柝)의 근심이 없고, 궐내(闕內)로 들어오면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논하며, 만승(萬乘)께서 수상(垂裳)할 한가로운 여가가 있었다.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여러 차례에 걸쳐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으로 추증(推贈)받았다. 성품은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장성(長成)해서는 (결락) 부인(婦人)의 사덕(四德)을 갖추어 영광스럽게 공족(公族)의 부인이 되고, 마음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법왕(法王)의 제자가 될 아들을 간구하였더니, 과연 부처님의 성응(感應)을 입어 임신하였다. 태평기력(太平紀曆) 17년 세재무인(歲在戊寅) 7월 재생명(哉生明)에 궁궐 남쪽 불령(佛嶺)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출처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1111년(예종6년)) 보물 24호
혜덕왕사는 이자연의 아들이므로 그의 외조부는 내사시랑평장사 김인위이다. 따라서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에서 마모가 되어 판독이 되지 않는 외조부(外祖父)의 휘는 ▨▨ ▨▨시랑(▨▨侍郞) 평장사(平章事) (결락) 이 부분에 들어갈 글자는 因謂(인위) 內史(내사)다.
혜덕왕사는 이자연의 다섯째 아들로 이름이 소현(1038-1097)이다.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1111년(예종6년) 비문 가운데 유독 눈길이 떠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는 부분이다.
인위는 고려조정의 고관이었으므로 신첩에 자신의 씨족을 기록한 계보가 있었을 것이다. 그 계보의 일부가 김지우 묘지명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자연(李子淵 묘지명(墓誌銘)-1061년(문종15년)
부인은 낙랑군(樂浪君) 김씨(金氏)로 왕비의 어머니인 까닭에 계림국대부인(鷄林國大夫人)이 되었다.
공은 낙랑군 경조씨(樂浪郡 京兆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내조하는 부덕(婦德)이 진실로 일대(一代)에 으뜸 갔다. 왕비의 어머니인 까닭에 거듭하여 계림국대부인(?林國大夫人)이 더해졌다.
출처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김인위의 사위 이자연(李子淵 : 1002~1061)은 인주(仁州) 사람으로 자는 약충(若沖), 시호는 장화(章和)이다.
고려사에서 고려 귀족 문벌을 이야기할 때 그의 이름은 언제나 빠지지 않는다.
현종(顯宗) 15년(1024) 3월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덕종 때 우보궐(右補闕)·이부낭중(吏部郞中)·어사잡단(御史雜端)·우승선(右承宣)이 되고, 정종 때 급사중(給事中)·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거쳐 1047년(문종 1) 이부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1050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승진되고, 1052년 수태위(守太尉)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러 공신이 되었다.
1055년 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 겸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그 후 추성좌운보사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부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상서이부 삼사사 상주국 감수국사(推誠佐運保社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太傅 三重大匡 門下侍中 判尙書吏部 三司事 上柱國 監修國史)가 되었고,
사후에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에 추증되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슬하에 8남 3녀를 두었는데, 세 딸은 모두 문종의 왕비가 되었다.
큰 딸은 인예태후(仁睿太后)로 순종(順宗)·선종(宣宗)·숙종(肅宗)의 세 왕과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의 어머니이다. 둘째는 인경현비(仁敬賢妃), 셋째는 인절현비(仁節賢妃)이다.
사도내사시랑평장사 인위(因謂)
김지우 묘지명(1152)-신웅의 아들, 원황의 아버지
고려사 열전- 현종의 제 8비 원순숙비의 아버지
이정 묘지명(1077)-이자연(1002-1061)의 처 계림국대부인의 아버지
혜덕왕사탑비(1111)-혜덕왕사(이자연-계림국대부인 아들)의 외조부
경주김씨족보- 순웅의 아들, 원정의 아버지, 현종의 장인, 이자연의 장인
모든 경주김씨족보에서 김인위의 아들을 김원정으로 기록하였는데, 수태위(守太尉)·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한 김원정(? -1063)은 고려사열전에도 등장한다.
1772년 경주김씨족보(임진보)를 보면 김원정의 사위 서정을 기록해 놓았는데,
서균 묘지명(徐鈞 墓誌銘 1132년)을 보면 김원정의 딸은 당대의 문벌출신으로 선종 때 평장사를 역임한 이천 서씨 서정(徐靖)과 결혼하여 인종 때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지낸 서균(徐鈞) 등을 낳았다.
[고려사열전 김원정(金元鼎)]
국역 고려사열전 김원정(金元鼎)
김원정(金元鼎)은 덕종 때 거듭 승진해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고, 정종 때 우사낭중(右司郞中)으로 임명되었다. 동북로병마사(東北路兵馬使) 김영기(金令器)가 장주(長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 및 원흥진(元興鎭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면 원흥리)에 성을 쌓을 당시, 김원정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략상 요지에 주둔해 수비하다가 적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김영기가 조정에 돌아와 포상을 베풀어주도록 요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문종 때 어사대부(御史大夫)·중추원사(中樞院使)·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知政事)를 역임했다. 당시 병부(兵部)에서 군사를 동계(東界)·서계(西界)의 양계에 파견해 국경을 방비하도록 건의하자, 김원정이 이렇게 아뢰었다.
“근래 북조(北朝 : 요나라)의 봉책사(封冊使)를 영접하고 환송하느라 군사들이 이미 피로한데다, 다시 흥왕사(興王寺)의 공사에 동원되어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양식도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바라옵건대 봉책군(封冊軍)의 예에 따라 물자를 내려주어 보내소서.”
이에 따라 시어사(侍御史) 진중(秦仲)에게 명령을 내려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이어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유중경(庾仲卿)은 공부상서(工部尙書) 유규(庾逵)의 아들인데, 왕이 그에게 등급을 낮추어 음직을 주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러자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인 시중(侍中) 이자연(李子淵) 등 열한 명이,
“유중경의 외조부되는 평장사(平章事) 이공(李?)이 자기 형인 소경(少卿) 이몽(李蒙)의 딸을 간음해 유중경의 어미를 낳았으니, 유중경을 조정의 반열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고 논박하였다. 그러나 김원정 등 네 명이,
“그것은 이공의 죄이지 유중경 부자의 죄가 아니며, 게다가 공신 유금필(庾黔弼)의 후예이니 벼슬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바라옵건대 앞서 내리신 분부에 따라 등급을 낮추어 음직에 임명하소서.”
라고 아뢰니 왕은 김원정 등의 건의를 따랐다. 수사도(守司徒)로 올랐고 곧이어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상주국(上柱國) 겸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승진하였다. 일찍이 개경에서 서경(西京)의 일을 감독하면서 올린 보고가 왕의 뜻에 거슬려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나갔다가 곧 소환되었다.
17년(1063)에 수태위(守太尉)·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진했다가 죽었다. 뒤에 삼사(三司)에서,
“김원정이 죽은지 벌써 4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부의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공부상서(工部尙書) 정층(鄭層)이 죽고 나서 대상(大祥)을 지났을 때 담당 관청에서 지체한 것을 꾸짖고 바로 부의를 내리도록 분부하신 바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앞의 분부와 같이 부의를 내리소서.”
라고 건의하자 왕이 허락하고 곡식 130석을 내려주었다.
(출전: 국역 고려사,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06.11.20, 경인문화사 )
서균 묘지명(徐鈞 墓誌銘 1132년)
아버지 정(靖)은 평장사(平章事)이며,
어머니 김씨(金氏)는 평장사 원정(元鼎)의 딸이다.
이처럼 1772년 임진보 경주김씨족보의 기록은 인위의 사위는 이자연이라는 기록이 이정 묘지명(1077년)과 일치하고 있는 점, 원정의 사위가 서정이라는 기록이 서균 묘지명(1132년)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경주김씨족보의 기록이 평장사공 인위까지의 기록만큼은 완벽하다는 증거다.
김인위의 아들은 김원정(경주김씨족보), 김원황(김지우묘지명) 그리고 김원충이라는 견해가 고려사학자들 사이에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원충이 김인위의 아들로 보는 근거는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1124년)의 기록이다.
“김경융(고려사에는 김인규의 부친이 김경용(金景庸)으로 되어 있다)은 숙종 때의 태보수중서령인데, 인규는 바로 그의 아들이다.
숙종의 부친 문종이 김씨의 딸을 맞이하였으므로 숙종은 김인규를 외숙으로 존대했다.
한교여 등이 반역하였을 때 이자겸이 인종을 보호하여 반역의 무리들을 베었다. 그때 김인규가 참여하여 공이 있었기 때문에 사공(司空)으로 승진시켜 중추부에 있도록 했다. 김인규는 풍채가 좋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모습은 특이하게 빼어났고 행동은 단정하였다” 서긍, 고려도경, p.141, 지평(2005년)
“숙종의 부친 문종이 김씨의 딸을 맞이하였으므로 숙종은 김인규를 외숙으로 존대했다”
그렇다면 김씨의 딸과 김인규는 한 집안 사람임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김씨의 딸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문종의 후비
인평왕후(仁平王后) 김씨(金氏),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이씨(李氏),
인경현비(仁敬賢妃) 이씨(李氏),
인절현비(仁節賢妃) 이씨(李氏),
인목덕비(仁穆德妃) 김씨(金氏)
인평왕후 김씨는 현종과 원성태후 김씨(김은부(金殷傅)의 딸)의 사이에 태어난 공주인데 문종의 비가 되었다.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이씨(李氏), 인경현비(仁敬賢妃) 이씨(李氏), 인절현비(仁節賢妃) 이씨(李氏)는 이자연과 계림국대부인 사이에 난 딸들이다.
인목덕비(仁穆德妃) 김씨(金氏)는 시중(侍中) 김원충(金元?)의 딸로, 숭화궁주(崇化宮主)라는 칭호를 받았다. 선종 11년 6월에 죽자 시호를 인목(仁穆)이라 하였다.
서긍이 말하는 김씨의 딸이란 바로 시중 김원충의 딸 인목덕비 김씨를 말한다.
그렇다면 시중 김원충과 김인규는 친족이다.
한국의 성씨와 족보(서울대출판부,2003)의 저자로 평생 보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이수건(李樹健 1935-2006) 교수는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197~198쪽에서 김원정, 김원황, 김원충은 김인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
이수건 박사는 1935년 경남 울산 출신으로 경북대 사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고려시대 土姓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를 지냈다.
서긍의 고려도경(1124년) 기록은 시중 김원충을 내사시랑평장사 김인위의 아들로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김원충의 두 딸 가운데 하나는 고려 제 10대 정종(靖宗)의 왕비 용절덕비(容節德妃) 김씨(金氏)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제 11대 문종의 왕비 인목덕비(仁穆德妃) 김씨(金氏)이다.
정종(靖宗 1018-1046, 재위기간 1034-1046년)
문종(文宗)1019-1083, 재위기간 1046-1083년)
용절덕비 김씨는 경주(慶州) 사람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김원충(金元?)의 딸이며, 칭호는 연흥궁주(延興宮主)라 했다.
숙종 7년(1102) 3월에 죽자 왕이 조의를 표하는 교서를 내렸으며, 덕비(德妃)로 추봉하고 시호를 용절(容節)이라 하였다.
원성왕 후손 김예-김인윤-김신웅-김인위
김인위-김원충(수사도 문하시중)-용절덕비(정종비)
인목덕비(문종비)
김원정(수태위 문하시중)-김지예(군기소감)
김원황(병부상서)-김경용(문하시중 상주국)
낙랑군대부인의(최유서의 처)
낙랑군대부인(유홍의 처)-명의태후(숙종비)-예종-인종
원순숙비(현종비)-경성왕후(덕종비)
계림국태부인(이자연처)-인예순덕태후(문종비)-순종
인경현비(문종비) 선종
인절현비(문종비) 숙종-예종-인종
이와같이 삼한공신 인윤이 일궈 놓은 가문이 손자 인위에 이르러 고려 최고의 귀족문벌로 성장하게 된다.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
김원황(金元晃?~1062 문종 16)
예(禮)-인윤(仁允)-신웅(信雄)-인위(因謂)-원황(元晃)-경용(景庸)-인규(仁揆)-지우(之祐)-충언(忠彦)
김원황은 1057년(문종 11)에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으며, 1061년에 병부상서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듬해 중추원사 병부상서(中樞院事兵部尙書)로 죽었다. 시호는 의경(毅敬)이다.
국역 고려사 : 세가 문종 11년(1057) 정유년
3월 계묘일 이유충(異惟忠)38)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임종일(任從一)39)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왕무숭(王懋崇)40)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김원황(金元晃)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각각 임명했다.
국역 고려사 : 세가 문종 15년(1061) 신축년? 12월
병신일. 왕총지(王寵之)를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김원정(金元鼎)을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최유선(崔惟善)을 중서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로, 이유충(異惟忠)을 참지정사(?知政事)·주국(柱國)으로, 김원황(金元晃)을 중추원사(中樞院事)로, 김의진(金義珍)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김양지(金良贄)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각각 임명했다.
국역 고려사 : 세가 문종 16년(1062) 임인년? 가을 7월
경신일. 중추원사(中樞院使)·병부상서(兵部尙書) 김원황(金元晃)이 죽자, 시호를 의경(毅敬)이라 하고 그 아들 가운데 한 명에게 벼슬을 주었다.
병부상서 김원항은 1062년에 졸하였는데 수태위 문하시중 김원정은 1063년에 졸하였다. 김인위의 아들 원정과 원황은 동시대의 사람으로 나이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원황에겐 아들 김경용 외에 두 딸이 있었다.
최계방 묘지명(崔繼芳 墓誌銘 1117년)을 보면, 큰 딸은 호부시랑 최유서에게 시집을 갔고, 윤언영처유씨묘지명(尹彦榮妻柳氏墓誌銘-1117년)을 보면, 작은 딸은 청광록대부 검교태부 수사공 문하시중 상주국(銀靑光祿大夫 檢校太傅 守司空 門下侍中 上柱國) 광숙공(匡肅公) 유홍(柳洪)에게 시집을 갔다.
최계방의 묘지명(1117년)
증조 사위(士威)는 삼중대광 추충동덕진랑위주광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내사령 한남군 개국후 식읍 1,500호(三重大匡 推忠同德盡郞衛主匡國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太師 內史令 漢南郡 開國侯 食邑 一千五百戶)이고 정숙(貞肅)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조부 충공(忠恭)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고, 아버지 유서(惟恕)는 시상서공부원외랑(試尙書工部員外郞)으로 호부상서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김씨는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으로 봉해졌는데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 김원황(金元晃)의 딸로서, 명의태후(明懿太后)의 어머니의 언니이며, 선조는 신라(新羅) 사람이다.
최사위(崔士威 : 961-1041)-최충공(崔忠恭)-최유서(崔惟恕)-최계방(崔繼芳 : 1045~1116)
윤언영처유씨묘지명(尹彦榮妻柳氏墓誌銘)- 1117년(예종12년)
유씨(柳氏)는 은청광록대부 검교태부 수사공 문하시중 상주국(銀靑光祿大夫 檢校太傅 守司空 門下侍中 上柱國) 광숙공(匡肅公) 유홍(柳洪)의 넷째 딸이며, 조부는 내사문하시랑평장사 판상서형부사 상주국(內史門下侍郞平章事 判尙書刑部事 上柱國) 양의공(襄毅公) 소(韶)이다. 어머니는 낙랑국대부인 김씨(樂浪國大夫人 金氏)이며, 외조부는 검교태자태사 중추원사 병부상서(檢校太子太師 中樞院使 兵部尙書)를 지낸 원황(元晃)으로 모두 명문 대족이다.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원황의 딸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광숙공 유홍의 처)는 고려 제 15대 숙종(1054-1105, 재위 1095-1105)의 왕비 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柳氏 ?-1112년)를 낳고, 명의태후 유씨가 고려 제 16대 예종(1079-1122, 재위 1105-1122)을 낳는다.
원황-낙랑군대부인(유홍의 처)-명의태후 유씨(숙종비)-예종
최계방 묘지명(崔繼芳 墓誌銘 1117년)과 윤언영처유씨묘지명(尹彦榮妻柳氏墓誌銘 1117년)은 김지우 묘지명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관련 묘지명이라 하겠다.
김원황이 김인위의 아들이라는 김지우 묘지명의 기록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의 안산김씨 문중은 김원황이 김충찬(김은부의 아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안산김씨 김은부의 후손이라 자처하고 있으나 전혀 계보학적,역사학적 근거가 없다.
김은부-김충찬-김원황-김경용-김인규-김지우-(안산김씨족보, 1989년)
김신웅-김인위-김원황-김경용-김인규-김지우(김지우 묘지명, 1152년)
더군다나 경덕국사의 묘지명(1072년)을 가지고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기록이 오류라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경덕국사의 묘지명(1072년)은 경덕국사(김난원)의 아버지가 김은부이며, 형이 김충찬이라는 것을 밝혔을 뿐, 충찬의 아들이 원황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경덕국사 묘지명은 이를테면 충찬의 상계를 밝혔을 뿐, 충찬의 하계는 없다.
안산김씨 블로그 희망나라님에 따르면, 안산김씨 문중에서 1978년 족보를 만들면서 원황-경용-인규-지우를 넣었고, 1989년에 족보를 만들면서 충찬(안산김씨 김은부의 아들), 충언(김지우의 아들)을 임의대로 넣어서 충찬-원황-경용-인규-지우-충언의 계대를 만들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니 도무지 맞지 않는 계대가 나온 것 아니겠는가.
김지우 묘지명(1152년)과 안산김씨족보(1989년) 기록의 충돌은 더이상 논쟁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중서령(中書令) 경용(景庸)
예(禮)-인윤(仁允)-신웅(信雄)-인위(因謂)-원황(元晃)-경용(景庸)-인규(仁揆)-지우(之祐)-충언(忠彦)
국역 고려사 : 열전 김경용[ 金景庸 1040-1125)]
김경용(金景庸)은 경주(慶州) 사람이며 부친 김원황(金元晃)은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본래 신라 종실 출신이었다.
김경용은 용모가 빼어나고 행동이 미려하여 귀인의 풍채가 있었다. 젊었을 때는 방탕했으며 노래와 여색을 좋아하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과 길에서 싸우고 있는데 송나라 장사꾼이 보고, “제가 남의 관상을 잘 보는데, 지금 당신의 상을 보니 골격이 빼어나고 특이해 반드시 부귀 장수할 것이니 자중자애하시라.”고 말했다.
김경용은 이 때문에 자못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있다가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가서는, 가혹하게 다스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경외하였다.
어느 겨울철에 대취한 채로 준마(駿馬)를 타고 한강(漢江)을 달려 지나는데, 말발굽이 닿는 곳마다 얼음이 깨어져 물이 솟구쳐 올라 오는데도 빠지지 않으니 듣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있을 때 숙종이 동지(東池)에 행차하여 활 쏘는 것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김경용이 먼저 과녁 중앙을 맞히자 은그릇과 어구의 말을 하사했다. 이어 이부시랑(吏部侍郞)과 병부·호부·공부 3부의 상서(尙書)를 지냈다.
예종 초 참지정사(?知政事)가 되었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중서시랑 동 중서문하 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상주국(上柱國)으로 승진하였으며, 협모위사치리공신(?謀衛社致理功臣)·수태보(守太保)·판상서이·형부사(判尙書吏刑部事)·낙랑군개국백(樂浪郡開國伯)2)으로 봉하고 식읍(食邑) 1천호·식실봉(食實封) 2백호를 더했다. 여러 차례 표를 올려 사직을 간청하자, 왕은 좌부승선(左副承宣) 안당영(安唐穎)을 보내어 궤장(?杖)3)을 내려주고, 이어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허락하였다. 뒤에 왕이 종실과 재추들을 불러 상춘정(賞春亭)에서 주연을 베풀고, 즐거움이 고조되자 김경용을 돌아보며 “나라의 원로로 오직 경이 남았구려.” 하니, 김경용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절을 올렸다.
다시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聖功臣) 칭호를 더하고 식읍 3천호·식실봉 7백호를 내려주었으며, 공(公)으로 작위를 올려주었다. 권세를 믿고 재물을 마구 거두어 재산을 불리고 저택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치장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인종 3년(1125)에 죽으니 나이가 여든 다섯이었는데, 왕이 장례에 부의를 전하고 시호를 내려주게 하였다.
시호 : 김경용(金景庸)의 시호를 양의(襄懿)라 하였다.
김용선 편, 「이자원 녀 이씨(李資元女李氏) 묘지명(墓誌銘)」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김경용(金景庸)에 관한 고려사절요 기록들
고려사절요 제6권
숙종 명효대왕 1(肅宗明孝大王一) 병자 원년(1096), 송 소성 3년ㆍ요 수륭 2년
○ 동지사정(東池射亭)에 나와서 좌복야 황중보(黃仲寶) 등을 불러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쏘게 하였더니, 어사중승(御史中丞) 김경용(金景庸)이 먼저 곡(鵠)을 맞히자, 은접시 5개와 말(馬) 1필을 하사하고 그 밖에도 맞힌 자에게는 모두 하사품이 있었다.
숙종 명효대왕 1(肅宗明孝大王一) 신사 6년(1101), 송 휘종 건중 정국(建中靖國) 원년ㆍ요 천조제(天祚帝) 건통(乾統) 원년
○ 위계정(魏繼廷)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주국에, 이오(李?)를 참지정사 주국에, 오수증(吳壽增)을 상서 좌복야 겸 태자빈객(尙書左僕射兼太子賓客)에, 유신(柳伸)을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로, 김경용(金景庸)을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로 한형(韓瑩)을 상서우복야에 임명하였다.
숙종 명효대왕 2(肅宗明孝大王二) 계미 8년(1103), 송 숭녕 2년ㆍ요 건통 3년
○ 소태보를 수태부 판호부 서경유수사(守太傅判戶部西京留守事), 오수증(吳壽增)을 참지정사(?知政事), 김경용(金景庸)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삼았다.
예종 문효대왕 1(睿宗文孝大王一) 병술 원년(1106), 송 숭년 5년ㆍ요 건통 6년
○ 김경용을 좌복야 참지정사로 삼았다.
예종 문효대왕 1(睿宗文孝大王一) 임진 7년(1112), 송 정화 2년ㆍ요 천경 2년
○ 김경용을 수태보 판상서이부사, 오연총을 수사도 판상서병부사, 허경을 검교사도 판상서예부사, 유인저ㆍ이자겸을 참지정사, 최계방ㆍ고영신(高令臣)을 동지추밀원사로 삼았다.
○ 9월에 김경용을 문하시중, 오연총ㆍ이위를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유인저를 상서좌복야 판상서형부사, 이자겸을 수사공 병부상서 판삼사사, 최계방을 검교사공 추밀원사, 고영신을 이부상서 지추밀원사, 김연을 좌산기상시 동지추밀원사, 강증(康拯)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 12월에 최사추를 수태사중서령으로 치사하게 하고, 임간을 문하시랑동평장사로 치사하게 하고, 김경용에게 협모위사공신(協謀衛社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예종 문효대왕 2(睿宗文孝大王二) 계사 8년(1113), 송 정화 3년ㆍ요 천경 3년
12월에 김경용(金景庸)을 수태부 판상서이부사 낙랑백(樂浪伯)으로, 오연총(吳延寵)을 수태위 판례병부사, 최계방을 상서좌복야 판삼사사, 김연을 예부상서 정당문학 판한림원사, 조중장을 병부상서 추밀원사, 유자유(柳子維)를 상서우복야 판공부사, 강증(康拯)을 지추밀원사, 김준을 좌산기상시 동지추밀원사로 삼았다
예종 문효대왕 2(睿宗文孝大王二) 갑오 9년(1114), 송 정화 4년ㆍ요 천경 4년
○ 1월에 문하시중 김경용이 세 번이나 표문을 올려 노년으로 퇴직하기를 청하니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고, 일을 보게 하였다.
○ 3월에 유재(劉載)로 상서죄복야 문덕전 학사를 삼았다.
○ 문하시중 김경용과 참지정사 고영신(高令臣)이 치사하였다.
예종 문효대왕 2(睿宗文孝大王二) 을미 10년(1115), 송 정화 5년ㆍ요 천경 5년ㆍ금 태조 수국(收國) 원년
○ 왕이 여러 왕씨와 재신과 추신을 상춘정(賞春亭)으로 불러서 술 마시며 마음껏 즐겼는데 시중으로 치사한 김경용(金景庸)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나라의 원로는 경만이 남았다."고 하니, 경용이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사례하여 아뢰기를, “노신이 입는 은혜가 너무 지극하여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갚기 어렵습니다."하였다.
왕이 가사 두 곡조를 짓고 좌우를 시켜서 화답하여 바치게 하였다.
예종 문효대왕 2(睿宗文孝大王二) 병신 11년(1116), 송 정화 6년ㆍ요 천경 6년ㆍ금 수국 2년
○ 왕이 천수사에 행차하여 재를 올려 낙성하니, 길에 채색한 누각과 가무와 음악이 3일간이나 잇따랐다. 여러 신하들을 절문 밖에서 잔치하여 새벽에야 파하였으며, 대궐로 돌아와서는 사면령을 내리고, 공사를 감독한 관리와 공인과 장인ㆍ역부들에게 상을 차등 있게 주었다. 어가를 거리에 멈추니 여러 왕씨와 대신들이 잔을 드리며 헌수하였다. 왕이 김경용(金景庸)의 손을 잡고 선왕과 태후의 일을 언급하며 울면서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좌우의 사람들도 오열하였다.
김경용(金景庸)을 수태사 낙랑후(守太師樂浪侯), 이위(李瑋)를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이자겸을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 김연ㆍ조중장을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강증(康拯)을 수사공 참지정사, 김준(金晙)을 병부상서 추밀원사로 삼았다.
인종 공효대왕 1(仁宗恭孝大王一) 을사 3년(1125), 송 선화 7년ㆍ요 보대 5년ㆍ금 천회 3년
○ 9월에 낙랑백 김경용(金景庸)이 졸하였다.
김경용(金景庸)은 아들 김인규(金仁揆) 외에 두 딸이 있는데 사재경(司宰卿)·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지낸 경원 이씨(慶源李氏) 이자원(李資元)의 처, 참지정사(?知政事)를 지낸 부평 이씨[富平李氏·樹州李氏] 이숙(李璹)의 처가 있으니 김인규의 누나다.
김경용-김인규
이자원의 처
이숙의 처
참고: 김용선 편, 「이자원 녀 이씨(李資元女李氏) 묘지명(墓誌銘)」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참고:국역 고려사 : 열전 이숙(李璹)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
김인규(金仁揆 ?∼1142(인종 20)
아버지는 문하시중 경용(景庸)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1117년(예종 12) 급사중 추밀원좌승선 겸 태자좌찬선(給事中樞密院左承宣兼太子左贊善)이 되었고, 1122년 좌간의대부가 되었다.
이 해에 지주사(知奏事)로서 동지공거가 되어, 진사 나경순(羅景純) 등 31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1123년(인종 1) 동지추밀원사, 1124년 검교사공 이부상서 지문하성사(檢校司空吏部尙書知門下省事), 1125년 참지정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자겸의 아들 언(彦)이 사위였기 때문에 연좌되어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좌천되었다.
그 뒤 복직되어 1135년에 호부상서로서 예부낭중 왕창윤(王昌胤)과 금나라에 가서 희종(熙宗)의 등극을 축하하였고, 뒤에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守司空左僕射參知政事)를 지냈다.
국역 고려사 : 열전 김인규(金仁揆)
김경용의 아들 김인규(金仁揆)는 과거에 급제한 후 좌승선(左承宣)·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거쳐 예종 때 지주사(知奏事)로 승진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해 수태위(守太尉)·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딸이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지언(李之彦)3)에게 시집갔는데 이자겸이 패망하자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좌천되었다. 뒤에 소환되어 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知政事)를 지내다 죽었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후덕해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권세를 믿고 교만하게 굴지는 않았으나, 우유부단하여 녹봉과 지위를 보전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참고>국역 고려사 : 열전 이숙[ 李璹 ]
이숙(李璹)은 수주(樹州 :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사람이다. 부친 이정공(李靖恭)1)은 과거에 급제2)하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며 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숙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해서 옳은 행실이 없었으나, 과거에 급제한 후 아비의 권세에 기대어 예종과 인종의 두 왕을 섬겼고, 계속 승진해 참지정사(?知政事)에 이르렀다.
그의 처는 평장사(平章事) 김인규(金仁揆)의 누나였는데, 김인규가 이자겸(李資謙)의 친족 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자 이숙은 그것을 기회로 김인규의 집을 차지하고 재산과 노비를 빼앗았다. 김인규가 돌아와서 그를 꾸짖자 이숙은 부끄럽고 두려워서 몰래 자기 아들 이온경(李溫卿)과 함께 김인규가 반역을 꾀했다고 모함하기로 하고, 투서를 작성해 한 밤 중에 어사대(御史臺)에 던지다가 순검(巡檢)에게 잡히게 되었다. 해당 관청에서 유배보내자고 요청하였으나, 인종은 왕비 임씨(任氏)의 외조부의 형제라고 하여 파면만 시켰으며, 그 뒤 곧 죽었다. 동생은 이위(李瑋)이다.
김인규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들
국역 고려사 : 세가
인종 3년(1125) 을사년
12월 임술일. 척준경(拓俊京)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이수(李壽)를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박승중(朴昇中)·이자덕(李資德)·김인규(金仁揆)를 참지정사(?知政事)로, 허재(許載)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이지미(李之美)4)를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지녹연(智祿延)·김진(金縝)·김부일(金富佾)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각각 임명했다. 이 해에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인종 19년(1141) 신유년
12월 경인일. 임원애(任元?)와 이중(李仲)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최진(崔溱)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김인규(金仁揆)를 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로, 이지저(李之?)를 정당문학(政堂文學)·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로, 김정순(金正純)과 왕충(王?)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최관(崔灌)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각각 임명했다.
국역 동국통감
고려 인종 20년, 임술년(壬戌年), 1142년
여름 5월 ○참지정사(參知政事) 김인규(金仁揆)가 졸(卒)하였다. 김인규는 딸이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지언(李之彦)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이자겸이 패하자 지춘주(知春州)로 좌폄(坐貶)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소환(召還)하여 복직(復職)시켰다. 사람됨이 관후(寬厚)하여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인물을 가리지 않았으나, 우유부단(優遊不斷)하여 단지 녹봉(祿俸)과 지위(地位)만을 보전할 따름이었다.
지금까지 김지우 묘지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관련되는 금석문 고려사열전, 고려사절요를 통해 살펴보았다.
김인위, 김원황(金元晃?~1062 문종 16년), 김경용(金景庸 1040 정종 6년-1125 인종 3년) 김인규(金仁揆 ?∼1142 인종 20년) 일련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김지우 묘지명의 계보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김지우 묘지명은 경주김씨 김인위의 상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료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김지우 묘지명(1152년)을 따르면 경주김씨 계림군파, 예의판서공파는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고 원성왕의 후손이다.
고려청자 투각상감 연화 칠보문 베개
신라 원성대왕(元聖大王) 후손
대광(大匡) 김예(金禮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
태자태보 좌복야(太子太保 左僕射) 신웅(信雄)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
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
합문지후(閤門祗候) 지우(之祐)
원성왕 후손 김예-김인윤-김신웅-김인위
김인위-김원충(수사도 문하시중)-용절덕비(정종비)
인목덕비(문종비)
김원정(수태위문하시중)-김지예(군기소감)
김원황(병부상서)-김경용(문하시중 상주국)
낙랑군대부인(최유서의 처)
낙랑군대부인(유홍의 처)-명의태후(숙종비)-예종-인종
원순숙비(현종비)-경성왕후(덕종비)
계림국대부인-인예순덕태후(문종비)-순종
인경현비(문종비) 선종
인절현비(문종비) 숙종-예종-인종
김지우 묘지명과 충돌을 일으키는 조선시대 묘지명과 역사기록들
김지우 묘지명(1152년)이 작성될 당시만해도 김인위가 원성왕의 후손이며, 삼한공신 삼중대광 김인윤의 손자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기록은 김인위가 경순왕의 후손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경주부에 김인위에 대한 기록이다.
김인위(金因渭) 김부(金溥)의 후손이다.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김균(金?) 인위(因渭)의 후손이다. 태조조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성종 때 명(明)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1462년)가 수입되자 성종은 노사신·양성지·강희맹 등에 그것을 참고하여 세조 때의 《신찬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지리서를 편찬케 하였다. 그들은 성종 12년(1481년)에 50권을 완성하였고, 성종 17년(1486년)에 다시 증산(增刪)ㆍ수정하여 35권을 간행하였다. 이것이 <동국여지승람>이다.
그 후 연산군 5년에 개수(改修)를 거쳐 중종(中宗) 25년(1530년)에 이행(李荇) 등의 증보판이 나오니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김지우 묘지명(1152년)과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기록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김지우 묘지명(1152)-
대광 예(禮)는 원성왕의 후손이다.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 인윤을 낳고 윤(允)은 태자태보 좌복야 신웅을 낳고 웅(雄)은 사도내사시랑평장사 인위를 낳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김인위는 김부(경순왕)의 후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보다 연대가 조금 앞선 것이 1503년(연산군 9년) 박은(朴誾)이 쓴 김인로(김천령의 자) 명행기(名行記)라는 글이다.
"군은 휘가 천령(千齡)이니,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다. 경주 김씨는 보계(譜系)가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에게서 나왔다. 그 후예에 휘 곤(?)이 있었는데 여말(麗末)에 우리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開國)에 공로를 세워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그 손자에 종순(從舜)이란 이가 있었으니, 청덕(淸德)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졸(卒)한 뒤에 공호(恭胡)란 시호가 내려졌다. 공호의 아들은 치세(致世)이니, 관직은 홍주 통판(洪州通判)으로 마쳤다. 홍주 통판은 안씨(安氏)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군을 낳았으니, 그해는 기축(己丑)이요 그달은 건미(建未)요 그날은 경진(庚辰)이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33년 정축(1757,건륭 22) 3월26일 (정사)
친히 지은 대행 대왕 대비의 행록
<우리 대행 자성은 바로 우리 성고(聖考) 숙종 대왕의 계비(繼妃)로서,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인데,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니 세조(世祖)로 추존(追尊)되었다.
27대손 김부(金傅)는 고려조에서 경순왕(敬順王)으로 봉(封)하였다. 그의 후손 김지윤(金智允)은 충근 양절 찬화 공신(忠勤亮節贊化功臣) 지문화부사(知門下府事) 판도평의사(判都評議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 김균(金?)은 조선조에 들어와 개국 공신 좌찬성 계림군(鷄林君)으로,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손자인 김종순(金從舜)은 청백리(淸白吏)에 뽑히고 시호는 공호(恭胡)인데, 세종(世宗)·문종(文宗)·단종(端宗)·세조(世祖)·예종(睿宗)·성종(成宗)을 대대로
섬겼었다. 6대조 김만균(金萬勻)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헌에 이르렀는데, 공훈으로 영의정 월성 부원군(月城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생부(生父) 김천령(金千齡)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직제학에 이르렀다.
5대조 김명원(金命元)은 선묘조(宣廟朝)의 이름난 훈신(勳臣)인 좌의정 경림 부원군(慶林府院君)으로,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고조(高祖) 김수렴(金守廉)은 영의정 오원군(鰲原君)에 추증되었다. 증조(曾祖) 김남중(金南重)은 예조 판서 경천군(慶川君)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조(祖) 김일진(金一振)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고(考)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비(?)는 가림 부부인(嘉林府夫人) 조씨(趙氏)이다. > 말하자면, 1757년 영조대왕은 인원왕후 행록을 쓰면서 인원왕후는 경순왕의 후손이라고 쓴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왕실에서 계림군 김균은 경순왕 후손으로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 계림군 김균의 후손들 묘지명을 보면 대부분 한결같이 경순왕 후손으로 기록했다. 비교적 년대가 오래되고 명망이 높은 분들의 묘지명 몇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순왕의 후손으로 새겨진 조선시대 묘지명 1. 김천령(14069-1503)의 묘지명
1695년(숙종21년)에 세워졌는데 찬자는 천령의 7세손 통훈대부 황해도관찰사 김몽신이다.
"가계는 경주에서 나왔는데 신라 경순왕 후손인 개국공신 제숙공 휘 균(?)과 판서에 증직된 휘 계성과 판한성부윤 휘 종순과...."
2. 김명원(1534-1602)신도비
1695년(숙종21년) 에 세워졌는데, 이연귀가 찬하였다.
"그 선계는 경주를 본관으로 두었으니 신라 경순왕의 후예 중에 휘 균이라는 분이 있어서 우리 태조 강헌대왕을 도와 개국공신으로 책록되고 계림군으로 봉해졌으니......."로 썼다.
3. 김필진(1635-1691) 묘지명(1692년)
묘지명은 김주신의 요청으로 박세당이 지었다.
부군(府君)은 휘(諱)는 필진(必振), 자는 대옥(大玉)이고, 성은 김씨이다. 김씨는 본관이 경주(慶州)이니 보계(譜系)가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으로부터 나왔다. 고려조(高麗朝) 500년 내내 관작이 이어졌고, 제숙공(齊肅公) 균(?)에 이르러 태조(太祖)를 섬겨 개국 공신(開國功臣)이 되었다. 손자 종순(從舜)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고, 또 두 대를 지나서는 홍문관 직제학 천령(千齡)이다. 이분이 대사헌 만균(萬鈞)을 낳았으니, 부군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는 평난 공신(平難功臣)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휘 명원(命元)이고, 조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휘 수렴(守廉)이고, 부친은 예조 판서 경천군(慶川君) 휘 남중(南重)이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종실(宗室) 여원정(礪原正) 세헌(世憲)의 따님이다.
김주신(1661-1721) 신도비
1826년(순조26년) 임금의 어명으로 세워졌는데, 찬자는 박종훈이다.
"공의 이름은 주신이고 자는 하경, 호는 수곡이며 경주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경주김씨는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덕망을 갖춘 분이 연이어졌으며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김균이라는 분이 우너훈공신이 되어 계림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제숙이다"
4, 김균(1341-1398)신도비
1840년(헌종6년)에 세워졌는데 찬자는 송병선이다.
"공의 이름은 균인데 그 선대는 신라경순왕에서 나왔다.
순웅이라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은 고려조에 벼슬하여 장군이 되었으니 이때부터 대대로 대관이 나왔다"
위의 묘지명과 신도비를 보면 공통적으로 경순왕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경순왕 아들, 몇 째 아들이라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고, 막연히 경순왕 후손이라고만 기록하였다.
묘지명의 찬자와 유족이 경주김씨가 경순왕의 후손으로만 알았지 구체적인 계보는 모른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계보의 기록이 없이 막연히 경순왕의 후손, 후예로 기록한 것은
박은의 김인로(김천령)명행기(1503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영조가 지은 대행대비마마(인원왕후)행록(1757년)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인손(金麟孫. 1479-1552) 신도비 숭정대부 행예조판서 겸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정사룡(鄭士龍)이 글을 지었다. 김씨의 세계는 신라의 후손에게서 나와 대대로 경주에 적을 두었는데 휘 지윤(智允)은 고려말엽에 현달하여 관직이 지문하도평의사사사(知門下都評議使司事)에 이르렀다. 균(?)은 우리 태조의 중흥을 보좌하여 개국공신에 책훈되어 계림군(?林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중성(仲誠)은 판봉상시사를 지내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신민(新民)은 지중추원사를 지냈다.
묘지명-신도비의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경순왕의 후손으로 기록하면서도 경순왕과 연결되는 계보가 없다. 경순왕 후손이라는 막연한 기록뿐이다. 그 이유가 뭘까?
조선시대 계림군파-예판공파는 족보를 만들 때 고려 평장사 인위에서부터 조선시대로 계림군 균(?), 춘고공 순(恂)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정확히 기록하면서 인위의 상계에 대해서는 순웅까지만 기록하고 그 위 한대(경순왕의 아들 대)는 기록하지 못하고 경순왕 후손으로 이어놓았다. 왜 그랬을까? 평장사 인위(因謂)가 대안군의 후손으로 돼 있는 족보에 의문을 품고 평장사공 인위는 대안군 은열의 후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으니 김덕운(金德運=1687-1767)이다. 김덕운은 선대의 계보인 월성세승을 썼다. 월성세승은 송애 문정공 김경여 (松崖 文貞公 金慶餘)의 증손자인 참봉공 덕운(參奉公 德運=1687-1767)이 수기(手記)로 쓴 가승(家乘)이다. 조선시대 경주김씨 문중의 대표적인 보학자인 김덕운은 많은 사료들과 가승들을 참고하여 평장사 인위 아래로 계림군 균(?)까지의 계보를 명확하게 밝혔다. 김덕운은 은열(殷說) 子 계령 子 한공(漢公) 子 수서(壽西) 子 영고(永固) 子 순웅(順雄) 子 인위(因渭)로 되어 있는 족보에 대해 이런 논리를 편다. "인위가 1024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났는데, 나이가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7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위의 생년은 954년 이전일 것이다. 대안군 은열은 경순왕과 고려태조의 딸 낙랑공주 사이에 출생했으니 생년이 937-938년이다. 그런데 어찌 대안군의 5세손이 되겠느냐?" 모든 경주김씨족보가 경순왕과 순웅 사이의 계보를 밝히지 못하면서도 경순왕의 후손으로 이어 놓은 이유는 뭘까? 엄연히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계보가 있을 텐데, 김지우 묘지명과 같은 역사성과 신빙성 있는 계보는 사라지고 연대가 맞지도 않는 엉터리 계대로 만들어진 경주김씨족보만 무려 100여종이 넘는다.
족보는 실존인물의 기록이자, 혈통과 가문의 기록인데 무턱대고 경순왕 후손으로 붙이기식의 족보가 넘쳐나는 이유가 뭘까?
<경주김씨영분공파는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다>라는 글에서 밝혔듯이, 어찌보면 황당한 족보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경순왕 후손에게 주는 병역과 노역 면제라는 특혜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조선왕조는 경주김씨에게 병역과 노역 면제라는 특혜를 주었다. 왕의 전교로써 내리는 특혜였다. 관에서 조사를 할 때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근거가 있어야만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그 근거가 되는 경주김씨족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런 당시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실존계대가 맞지도 않는 이상한 족보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고 본다.
조선시대 경주김씨들-영분공파, 계림군파, 예판공파 조상들은 경주김씨족보를 근거로 병역과 노역 면제라는 특혜를 누렸을 것이다.
국역조선왕조실록 > 숙종 36년(1710) 9월16일의 기록을 보면 군역을 면하는 것과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민진후(閔鎭厚)가 을묘년에 정식(定式)한 선성(先聖)·선현(先賢)의 자손(子孫)과, 칠반 천역(七般賤役) 외에는 군역(軍役)을 탈면(?免)할 수 없게 하였던 것을 거듭 밝히고, 왕씨(王氏)의 사람들도 또한 이 예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을 청하자, 승지 이제(李濟)가 잇달아 말하기를, “기자(箕子)·문성공(文成公)·문익점(文益漸)의 자손(子孫)은 군역(軍役)을 면제한 구규(舊規)를 빙자하여, 그 해당된 부역(賦役)까지도 여러 가지로 계책을 내어 모면하고자 도모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은 병조(兵曹)의 하리(下吏)와 부동(符同)하여, 수교 문적(受敎文籍)을 도득(圖得)해 내고는 수령을 속여 중도에서 벗어나 빠졌으니,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신칙(申飭)하도록 명하였다. 국역 일성록 정조9년 을사(1785년) 2월10일(경인) 또 함흥(咸興)의 가솔(假率) 김종옥(金宗玉)이 경순왕의 자손이니 군역(軍役)으로 침해하지 말라는 일을 상언한 것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군역으로 침해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열조(列朝)의 수교(受敎)가 있었으니, 세파(世派)를 즉시 상고하여 처결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국역 일성록 정조11년 정미(1787년) 2월6일(갑진)
예조가 또 아뢰기를,
“용천(龍川)의 유학 김처강(金處江) 등의 상언에, ‘저희들은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로서 진졸(鎭卒)과 군교(軍校)의 역(役)에 억울하게 충정(充定)되었으니, 너무도 원통합니다. 다시는 잡역(雜役)에 충정하지 못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대개 경순왕의 후예를 군역에 충정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열성조(列聖朝)의 수교(受敎)가 있었는데, 지방 고을에서 어기는 것은 실로 놀랄 만합니다. 다만 혹 족보(族譜)를 베껴내어 투탁(投托)해서 모탈(冒?)하는 경우도 있어 그 폐단이 없지 않으니, 등소하는 대로 탈면(?免)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을 조사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경주김씨 영분공파, 경주김씨 계림군파,예판공파 계보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와서 이상하게 뒤틀리게 된 원인은 군역과 노역의 특혜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게 내 생각이다. 조선시대 태종 때부터 "경순왕의 후손들에겐 병역과 노역을 면제한다"는 수교가 역대 임금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왔는데, 본관이 경주인 경주김씨들이 특혜를 받으려면, 경순왕의 후손임을 입증할만한 문적, 세보,족보가 있어야 한다. 특히 경주김씨 대문중에서 만들어 놓은 족보는 공신력이 있다. 조선시대 모든 경주김씨들은 경순왕의 후손으로 확신하고 있었고, 경순왕 후손으로 족보를 만들었다. 요즘처럼 역사학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금석학 정보가 풍부한 시대도 아니므로 고려초의 계보는 누가 누구인지 고증이 되지 않는다. 관에서 군역과 노역을 면제해 주기 위해 경순왕 후손 여부를 조사할 때 대문중에서 만든 족보의 기록을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영조가 대행대비마마행록을 쓸 때 인원왕후를 경순왕 후손으로 썼던 것은 실제로 영조자신도 그렇게 믿었다는 이야기다. 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5년 무진(1868, 동치7) 8월 29일(계유)의 기록이다. 상(고종)이 경성전에 나아가 진강하였다. 이때 입시한 강관 정기세, 참찬관 이세용, 검토관 이태익, 가주서 정응철, 기사관 최봉구ㆍ이원용이 각각 《논어》 제5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중략> 상(고종)이 이르기를, “김씨는 모두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인가?” 하자, 정기세가 아뢰기를, “지금의 경주 김씨는 모두 그렇습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조차 경주김씨는 모두 경순왕의 후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지우 묘지명(1152년)을 따르면, 경주김씨 계림군파와 예판공파는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고 원성왕의 후손이다. 고려사학자들은 고려시대 귀족가문인 김인위의 가계를 경순왕계가 아니라 '상계를 알 수 없는 원성왕의 후손'으로 본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바로 고려 의종 6년(1152년)에 만들어진 김지우 묘지명이다. 2013년 6월 27일 경주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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