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촌은 19세기 80년대에 조선인들이 세운 마을로 1907년에 세워진 와룡교회와 1909년에 세워진 창동학교가 있었다.
현재 양로원 아파트로 변한 창동교회 터. 마을 끝자락에 교회가 있었다.
마을의 노인(90여 세에 가까운)에게 창동중학에서 공부한 엄노인이 회색 스레트 건물 자리가 교회 자리라고
알려 주었다. 해방 후에 까지 창동교회 건물이 유지되었다고 하였다. 그 분은 외지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왔 하였다.
창동교회 터. 교회에서 길쪽으로 40미터 내려오면 폐허가 된 슬레트 건물과 빈 부지가 있다.
그 곳이 처음 창동학교가 세워진 자리이다. 3-13 시위 때 창동교회 교인들과 창동학교 학생들 모두가
걸어서 용정 3.13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당시 교사였던 최익선은 부상으로 순국하여 순국자 묘지에 있다.
와룡산 산자락에 있는 창동중학교 은사 기념비. 창동학교 역사가 실려 있다.
창동학교는 15만원 탈취사건의 주역인 최봉설과 한상호의 고향이다. 그들은 와룡촌에서
태어났고 창동학교에 다녔고 창동교회 출신이며 창동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35년에 세원 창동학교 은사 기념비 (정면)
은사 기념비 우측면
은사 기념비 후면
은사 기념비 좌측면과 정면
은사 기념비가 있는 언덕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언덕 검프르게 보이는 둥그런 자리가
1920년 일제의 경신대학살 때 첫번째 학교가 불에 탄 뒤에 두번째 교사가 세워진 자리
검푸르게 보이는 둥실하게 올라온 부분이 창동학교 옛 터이다.
15만원 탈취사건을 일으킨 최봉설의 생가 터. 밭으로 변하였다. 양로원 아파트에서 300미터 정도 멀리에 있다. 바로 아래 사진에 보이는 골목길로 좌회전해서 4번째 집이 최봉설의 생가 예터이다.
최봉설 생가로 들어가는 골목길, 1920년 1월 4일 15만원 탈취사건이 일ㅇ어난 며칠 후에 2백여명의 순경이 몰려와서 최봉설의 집을 포위하였다. 그는 일행과 함께 블라디보스크로 들어갔으나 그의 아버지와 동생이 붙잡혀서 고문을 받았다.
골목길에서 싸리울타리 위로 찍은 사진.
집터여서 밭에는 타일이나 콘크리트 덩어리와 건축에 사용된 돌들이 흩어져 있다.
창동학교 은사 기념비에 올라갈 때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이다. 건물을 기고 죄회전해서 올라간다.
최봉설 생가 터, 주춧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최봉설 생가의 터
최봉설 생각의 터. 최봉설의 할아버지는 창동학교를 세울 때 학교창립위원이었으며 마을의
지도자였다. 학교 위원들은 학전을 일구었고 장학금을 모아서 타지에서 오는 학생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였다. 창동교회는 캐나다장로회 산하의 지회였으며 초기에 세워진 교회로서
20세기 초기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온상이었다.
연길 시내에서 6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 연길의 서북쪽에 위치한다.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고속철도
가 지나간다. 연변대학교 앞길에서 서쪽으로 4키로미터 거리 정도에 와룡사거리가 있고 거기서 좌회전해서 직진.
30미터 정도 직진 후에 양걀래 길이 나오는데 우측으로 들어서면 와룡촌 마을로 들어가는 외길이다.
와룡산 아래 세워진 창동마을과 와룡교회는 1910년대 부터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을 주도하였다. 창동학교 창동의 뜻은 동쪽나라인 조선의 창대함을 비는 그들의 간절한 기원이 담겨있다.
간도국민회 서부지방회가 있었고 그 때문에 일제에 의한 대학살 때 교회와 학교가 불에 탔다.
간도국민회 통신부장이었던 정기선은 얼굴이 칼로 난도질 당하였고 가죽이 벗겨진 채 죽임을 당했다.
그의 아내는 정신이 돌아서 물에 뛰러들어 죽었다.
정기선 기념비가 은사기념비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와룡교회와 창동학교는 북간도 독립운동사의 한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2023년 6월 20일.화요일.인시
우담초라하니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