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스승들에 관하여
아파트 단지에 전단을 붙이며 돌아다니던 날이 있다.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고 적어놓은 전단이었다. 교사를 소개하는 난에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와 경력을 적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잡지사에서 근무했고 작은 문학상에서 작은 상을 탄 사실을 적었으나 미더운 글쓰기 교사로 보이기엔 충분치 않았다.
사실 이제 막 스물세 살이 된 참이었고 카페 알바만으로는 월세를 감당하기가 벅찰 뿐이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이야기를 듣거나 글을 읽는 것이 좋았다. 뭐라고 어필해야 할지 몰라 글쓰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아이도 글쓰기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적었다. 내가 썼지만 믿을 수 없는 문장이었다. 나야말로 글쓰기가 싫고 두려울 때가 잦았기 때문이다.
영등포와 목동 일대에 전단을 돌리자 가뭄에 콩 나듯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한 학부모는 어느 대학을 다녔냐고 물었다. 내가 대학의 이름을 대답하자 그는 심드렁하게 전화를 끊었다. 출신 대학을 딱히 궁금해하지 않는 학부모도 있었다. 그런 이의 자녀들이 내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수업준비물을 챙겨서 가정에 방문하면 엄마들은 나 보고 고등학생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수업에 대한 궁금증도 염려도 섞인 말이었다. 별다른 경력 없는 학부생에게 아이를 믿고 맡긴 고용주들이 후회하지 않도록 잘하고 싶었다.
무언가에 대해 쓰고 싶은 대로 쓰자고 제안하면 아이들은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고 했다. 혹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기억은 나는데 쓰기가 싫다고도 말했다. 좋은 이야기는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내가 먼저 무언가를 내주어야만 그들도 소중한 것을 나에게 내주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먼저 털어놓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거짓말’이라는 글감에 관해, 또는 ‘방귀’나 ‘눈물’이나 ‘도둑질’이나 ‘질투’나 ‘어떤 냄새’라는 글감에 관해. 어리석은 경험을 한두 개 말하다 보면 그 자리에서 가장 우스꽝스럽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아이들은 날 보며 웃었다. 그때 질문을 건네야 했다. 너희는 어떠냐고. 그럼 그들은 연필을 들고 회심의 미소 같은 것을 지었다. 재미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의 표정은 호기롭기 마련이었다. 어리석고 우스운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아이들은 원고지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들 중 하나였던 열 살의 최가희는 이런 문장을 썼다.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 방으로 가니까 왠지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찡했다. 뭔가 엄마한테 안기고 싶었다. 자다가 밝은 곳으로 가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온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언니랑 동생이 옆에 있어도 그리운 마음이 든다.”
옆에 있어도 그리운 마음이 든다니, 나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또 다른 하나인 열세 살의 이형원은 이런 문장을 썼다.
“우리는 함께 뒤섞여 놀다가 서로의 여름 냄새에 대해 다 알게 되었다. 우리의 두피에서는 찌든 걸레 냄새가 났다. 우리의 옷에선 중학생 남자 옆을 지나가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났다. 우리의 발에서는 가죽에 물을 묻히고 한동안 방치해둔 냄새가 났다. 웃음거리가 되던 우리의 여름 냄새들이었다.”
이런 글을 읽다보면 내 후각까지 생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여름 냄새’ 묘사는 탁월했다. 또 다른 하나인 열세 살 오승린은 이런 문장을 썼다.
“가끔씩 영화 찍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주로 절벽에서 서로의 손을 놓쳐 떨어지고 마는 시나리오였다. 왜 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꼭 마지막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영화를 찍으며 즐거움을 느꼈다.”
그가 쓴 것 덕분에 나는 이야기의 속성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란 우리를 몇 번이고 다시 살게 할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볼 수도 있고, 현실에서는 엄두도 안 날 스릴을 잠깐 체험해볼 수도 있고, 가짜로 비극을 겪으며 마음 근육을 키울 수도 있었다. 그사이에 우리는 어쩌면 더 강해지기도 했다.
그런 문장들을 읽으며 오년간 글쓰기 교사로 지냈다. 서울의 영등포와 목동과 판교와 전라남도의 여수 등을 돌며 보따리장수처럼 글쓰기 수업을 했다. 선생님이라고 불리면서도 가장 많이 배우는 건 나였다.
이슬아 작가·‘일간 이슬아’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