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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論
김종훈(문학평론가)
주춤 주춤 늙어가는, 모호한 성장기
「여장남자 시코쿠」가 아직 세상에 선을 보이지 않았을 때, 황병승의 시들은 인터넷 상을 떠돌았다. 그것이 특별한 일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시가 여느 시처럼 낱개로 떠돌 뿐만 아니라 어떤 수집자들에 의해 묶여 소개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황병승 시의 가치와 좌표를 설득력 있게 설명했던 이장욱의 해설 「체셔 캣의 붉은 웃음과 함께하는 무한 전쟁(無限戰爭) 연대기」가 나오기 이전에 이미 독자들은 설명할 수 없는 그의 기운을 감지했으며, 거기에 자신의 열의를 더해 그 야릇한 느낌을 종합하고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황병승 시에 대한 이러한 호의는, 그의 시집이 세상에 나온 이후 조성된 반감이 깎아내리려 했던 지점을 옹호하는 것에서 비켜 갔다. 그의 시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눈들은 여러 소수자의 목소리, 장황한 길이, 다채로운 글꼴, 산재된 여러 언어, 하위문화에 대한 지나친 관심 등을 한때 들떴다가 가라앉곤 했던, 부정과 이탈을 목적으로 만든 전대의 실험들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당시의 호의는 이러한 시적 개성을 옹호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그것을 배경으로 돋아 있는 모호한 지점에 쏠려 있었다. 당시 초창기의 시를 보자.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 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 맞추던 시간들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 「검은 바지의 밤」, 『여장남자 시코쿠』, 랜덤하우스중앙, 2005.
시집이 발간된 이후 비판적 시각은 다른 텍스트가 개입한 흔적이기도 한 밤의 늙은 여왕과 호위하던 별들의 등장에서 구심력에 반하는 원심력을 감지한 뒤 불편해 했고, 분수를 “퉤퉤퉤”로 묘사한 것과 “질긴 자궁” 등의 등장을 악의적인 왜곡으로 여겨 또한 불편해 했다. 그리고 소통의 부재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황병승의 시를 모아서 읽었던 독자들의 호의는 같은 부분을 원심력과 자연스러움으로 고쳐 읽었기 때문에 비롯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슬픈 시간을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 맞추던”으로, 애정이 없는 것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로 묘사하는 데에 감탄하고 공감했다. 어떻게 애정 없음과, 슬픈 시간에 대한 감정을 저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내는가. 그들에게 황병승 시는 소통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확장하는 하나의 예였다. 자신의 모호한 느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황병승을 비롯한 2000년대 시인들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구축된, 낯섦에 대한 반감과 낯섦 자체의 옹호, 소통의 부재에 대한 비판과 부재의 소통에 대한 찬동 등 이분법의 인식 틀에 재고를 요구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매력의 모든 것이 해명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느낌을 소통의 확장이라고 여긴 독법은 반대편에서 비판하는 지점을 기존 시의 바깥 영역으로 설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시의 안쪽 영역을 고수하는 면이 보인다는 것으로 황병승 시의 매력을 해명하는 기제를 따른다. 문제는 조금 더 근본적이다.
그의 시는 기존 시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영역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어 재편한다. 가령, 반복해서 등장하는 구절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에서 ‘모두’는 무엇을 뜻하는가. 슬퍼하는 “모두”에 “밤”은 배경이 되는가, 주체가 되는가. 서른두 살의 나이를 통과하는 사람들은 밤 시간에 모두 슬퍼하는가, 아니면 그가 서른두 살임을 인식하는 그때 모든 밤이 슬퍼하는가. 서른둘의 나이가 빚어내는 슬픔은 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전체 정조를 염두에 두면 “모두”는 서른둘을 통과하는 사람을 뜻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기반을 둔 경우 일인칭 감정 노출에 충실한 시의 영역은 굳건해진다. 하지만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검은 바지의 밤이다”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등의 구절은 이 시의 전체 정조가 사람의 슬픔이라도 이미 그 슬픔이 밤에게 양도되었음을 일러준다.
이때의 밤은 ‘호주머니를 잃어버린 검은 바지’와 동일시되어 있다. 호주머니는 어떤 내밀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낮보다는 밤, 어른보다는 아이, 광장보다는 밀실이 상징하는 바와 가깝다. 서른두 살은 대개 내밀함을 기억 속에 간직하게 유도하고, 어른이 된 한 개인을 낮의 광장으로 밀어 넣는다. 어른인 그는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는 데 주력하게 되는데, 기억 속 내밀함은 정체성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런데 이 ‘호주머니를 잃어버린 검은 바지’가 밤과 동일시되면서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밤이 되어도 거기에는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내밀한 것이 없다. 광장에 대한 두려움이 밤 속에 호주머니를 삭제시킨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모호함은 이렇게 찾아온다. 시 속의 의미를 헤집고 들어갔을 때 남는 것은 정체성의 부재이다. 실체는 없고 관계만 있는 「불쌍한 처남들의 세계」도 이와 같은 심정을 대변한다. 거기에서 나온 주체들이 소수자들이다. 이들 모두의 마음은 슬프다. 황병승 시의 슬픔은 강력한 일인칭의 감정에서 비롯하기보다는 일인칭이 지워지는 것에서 비롯한다. 야릇한 매혹이란 이 새로운 주체들의 감정에 대한 모호한 공감이었다.
황병승이 「여장남자 시코꾸」를 발간했을 때, 시의 주체들은 비로소 모였다. 여장 남자 시코쿠는 트랜스젠더 대야미의 소녀와 동료였다. 이들 옆에 불쌍한 처남, 프랑스 이모 등이 있고, 모두 모여 밍따오 엑스프레스 C코스 밴드를 결성했다. 앨리스 맵에 표시된 소수자라고 불러도 좋을 이들의 말은 때로는 굵은 글씨로 때로는 뉘어진 글씨로 등장하며 시에서 난장을 벌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섞여 나타나되 독자성을 유지했다. 개별적인 슬픔의 목소리가 모이자, 그것은 단발적인 감정의 토로에 그치지 않고 슬픔의 연대를 형성했다. 또한 이들은 존재 자체로 낮과 광장과 어른의 세계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모호한 목소리는 뚜렷한 목소리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 낮과 광장과 어른의 세계는 주류 세계로 호명된 것이다. 물론 소수자들은 하위 문화의 영역을 차지했다. 이들은 자신의 슬픔을 배면에 옮겨 놓고 짐짓 주류 세계를 외면하듯 웃음과 재미를 찾았다. 밍따오 엑스프레스C코스 밴드의 경우 자신의 목소리를, “우리는 똥이 막 나오려고 하는 순간의 감정”(「밍따오 엑스프레스C코스 밴드의 변」)이라고 불렀다. 시에 고귀한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깨트리려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시어를 배치한 시도는 김수영과 최승자와 김영승의 시에도 찾을 수 있지만, 그 시어 속에서 그 저속함이란 자의식을 지운 것은 황병승 시부터가 아닐까 싶다.
그의 시에는 특별한 신념 자체를 촌스럽게 여기는 태도가 보인다. 주류 세계에 대한 그의 무기는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저 밴드는 한편으로는 언더그라운드의 위치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디밴드의 역할을 한다. 1980년대에 활약했던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주류 문화를 의식하며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며 연주했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한 인디밴드는 주류 문화라 불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연주한다. 밍따오 밴드의 위치는 언더에 있으나 그들의 성격은 인디와 가깝다.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가진 이들의 목소리는 강력한 일인칭의 서정으로 구축된 시의 영역을 재영토화한다.
한국 근대 시사 초창기에는 시의 영역은 주지하다시피 김소월과 이상을 양극단으로 설정하여 조성되었다. 가장 서정적인 김소월과 가장 실험적인 이상은 다른 시 들을 그 사이에 둘 수 있게 하였다. 불완전하게나마 정치와 역사를 말할 수 있게 된 1960년대에 이르러 한국시는 그 내용을 풍부히 하여 두께를 확보하였다. 여러 실험이 있었고 여러 서정이 있었으나 이들의 공통 전제는 강력한 일인칭 화자였다. 김소월은 말할 것도 없고 이상이 과학과 수학을 시에 도입했을 때에도 그 도표와 수식을 배치한 일인칭의 힘은 지워지지 않았다. 김수영이나 박노해나 황지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2000년대 황병승은 일인칭의 강력한 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거기에 균열을 내었다. 그 가치를 따지는 일과는 별도로 이 점은 여러 2000년대 시인들을 아우르는 ‘낯선 감각’의 실체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의미의 확장가능성을 일컫는 시의 애매성은 뚜렷한 의미를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지만, 황병승 시에서 애매성은 뚜렷하지 않아 보이는 의미를 전제로 발생하였다. 방향을 바꾸어서 이해했을 때, 이것은 주류 언어로 환원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황병승 시의 이러한 특성은 표현도 모호하고 뜻의 갈피도 잡을 수 없는 헛소리로 받아들이게도 하였다. 앞서 보았듯, 성장의 두려움에서 비롯한 모호함의 출현 이유를 간과한다면, 황병승의 시에 자폐적, 소통 불가능이라는 오명을 붙이기는 쉬운 일이다.
1
눈을 씻고 봐도 죄인이 없으니
나라도 표적이 될래요 이름도 창녀로 바꿨죠, 대야미의 소녀
이곳은 작은 마을, 그녀는 정육점에서 그럴듯한 유방을 달지는 못했네
칼솜씨는 쓸 만했지만 바느질은 형편없었죠. 대야미의 소녀
그것으로 좋았네 내 손으로 처음 사과를 깎아 먹었을 때처럼, 나는 겸손해졌죠
…(중략)…
그곳에 키스해줘죠 불이나도록
그곳이 못쓰게 되도록 그곳이 멍해지도록
우유 마셨나요? 우유 마셨어요?
험악한 얼굴의 풋내기 아저씨
다정한 말투는 마나님에게
점잖은 충고는 조카들의 어깨에
키스해줘요 그곳에 불이 나도록
그곳이 못 쓰게 되도록 멍해지도록
내 뺨을 내 뺨을 갈겨봐요
당신이 쏘고 싶은 구멍에 대고
당신을 당신을 털어놔봐요
장전(裝塡)했나요? 장전했어요?
2
이곳 대야미에 번듯한 전철역이 들어서고 공장과 건물들
각양각색의 죄 많은 눈 코 입들이 이주해오기 전까지
대야미의 소녀는 작은 마을 대야미에 살았네
한때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었을 때, 말이죠
마구 벌을 내렸죠. 오로지 용서받고 싶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했어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며
정육점에서 뿌리째 잘라준, 이 쬐그만 녀석을 허리춤에 차고는
잔뜩 속상한 표정의 사내를 흉내내곤 하죠, 웃음……
웃음…… 대야미의 소녀.
- 「대야미의 소녀_황야의 트랜스젠더」 부분, 『여장남자 시코쿠』.
밀실의 세계와도 같은 작은 마을 대야미는 그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공장과 건물들이 들어선 도시로 편입되었다. 대야미의 소년이 소녀가 되는 이상한 성장의 시간이 이 시기에 맞춰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한 까닭은 트랜스젠더로의 변환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트랜스젠더로의 성장기라면 소년은 성인 여성이 되어야 할 텐데 여전히 소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광장과 어른의 세계는 트렌스젠더로의 변환에서 한 번, 소녀로 남아 있는 것에서 다시 한 번 부정적인 대상으로 환기된다. 광장의 세계에 나아가야 하는 소년은 그 세계로 나아가는 대신 남근을 자른 뒤 허리에 차고 소녀로 남았다. 대야미 소녀에게 성장은 사회로의 편입이 아니라 사회에서의 누락을 뜻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동경했다고. ‘용서받지 못한 자’에 나오는 마초를 표상했던 배우를 흉내 내었던 소년은 이제 대야미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이 소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슬픔을 직접 토로하지 않는다. 이탤릭체 부분에서 그는 자신의 슬픔을 비속한 노래 가사로 정화시키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다른 글꼴이 제시되어 있고, 트랜스젠더 시적 주체를 내세우고,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시어들이 나열되어 있고, 시 구절들이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있는 점은 황병승 시에 대한 혐오감의 근거들이다. 그리고 호의를 가진 독자는 아마 남근을 자를 때의 느낌을 “그것으로 좋았네 내 손으로 처음 사과를 깎아 먹었을 때처럼, 나는 겸손해졌죠”라고 제시한 부분에서 자신이 겪은 그 불안한 성장에 대한 막연한 느낌이 비로소 선명해졌다고 여기며 저 불안한 감정에 동감을 표할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의 뜻으로 환원되지 않은 구절들이 남아 있다. 대개 아이러니에 기원을 둔 이들은 불안함을 겸손함으로 표현한다거나, 웃음 소리를 적는 대신 “웃음”이라고 쓰는 데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두터운 의미들이 생성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시에 여러 인근 텍스트들을 끌어들인 데에서도 의미가 두터워진다. 저 저속해 보이는 노래 가사, 클린트 이스트우드, 용서받지 못한 자, 지명 대야미 등은 시의 이해를 위해 알아야 할 다른 층위의 맥락을 구성한다. 그래서 그 뜻을 명확히 하고자 참조할 사전은 하나로는 부족하다.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황병승 시가 지닌 의미의 모호성과 확장성이 드러난다. ‘무엇’의 정체는 단 하나의 사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비속어, 영화, 하위 문화 등을 대상으로 한 여러 맥락의 사전이 필요한데, 많은 독자들은 그 일이 고되기 때문에 그 ‘무엇’의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시의 감상을 마쳤다고 여긴다. 황병승의 시에서는 주석을 단 다음에야 비로소 확장하는 의미들의 운동을 살필 수 있다. ‘무엇’을 해결하는 것으로 감상이 끝나는 시는 대개 그 가치가 떨어진다. 정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유도하여 문제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이 문학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좋은 시들은 ‘무엇’이 명료하지만 황병승의 좋은 시는 그 ‘무엇’이 불명료하다. 주체의 불명료함을 대변하기 위해서 그런 것인데, 하지만 이 둘의 ‘무엇’은 계속 의미를 생성한다. 황병승 시의 잡다한 맥락을 푸는 데 성공했다면 시 이해 과정에서 그 단계는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 부근이다.
황병승이 2년후에 『트랙과 들판의 별』을 발간했을 때, 그의 입장은 분명해졌지만 그에 대한 비평적 열의는 가라앉은 듯했다. 그의 시편들이 개인 황병승의 기록이 아니라 황병승의 친구들, 앞서 말한 목소리의 주체의 것이라는 점은 명확해졌다. 시인과 동일시되는 개인의 체험과 성장을 주로 말하는 여느 시와는 달리, 또한 전위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의 시어가 소재 측면에서 나열된 것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소수자의 위치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주류 언어에 굴곡을 내는 방법은 주지하다시피 매우 강밀한 언어나 매우 과장된 언어의 제시이다. 주류 언어가 보기에는 낯설게 느껴지는 이와 같은 시어들을 황병승은 계속해서 발설했다. 동시에 그는 다양한 층위의 언어들을 도입하며 시어의 범위를 넓히는 한편 주류 언어의 자리를 상대적으로 협소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에 관한 비평적 열의가 잦아든 것은 그 언어들의 범위를 멀리서 가늠한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재구성되는 주체의 자리는 전위나 실험에 배치하는 것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는 전위나 실험의 모습을 계속 바꾸어 놓는다.
알코홀릭alcoholic, 그것은 연약한 한 존재가 자신을 열정적으로 위로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빠질 때까지, 더 나빠질 때까지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존재들, 끝없이 질문하는 존재들과도 같이, 지구 바깥에, 허공에 집을 짓는 사람들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대는 나도 너처럼 말수가 적었고
감당할 수 없는 질문엔 얼굴을 붉혔다
험한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고 가끔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즐기는 편은 아니었어…… 대신 호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땐
꿈꾸는 약을 샀지 매일 밤 계속될 것만 같은 아름다운 꿈들
돌이켜보면 조금은 지루하기도 했던 것 같군
아름답다는 건 때로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드는 어떤 결심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종교를 갖는다는 것, 찬물로 세수를 해라 이 엄마가 죽도록 때려줄 테다
공허해질 때까지, 더없이 공허해질 때까지
…(중략)…
웨이트리스waitress, 네가 먹을 음식과 네가 먹다 남긴 음식을 치워주겠다는 뜻이다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 「그리고 계속되는 밤」 부분, 『트랙과 벌판의 별』, 문학과지성사, 2007.
시의 서사는 한 편의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해결되지 않는 잉여를 남겨 다른 시편의 맥락과 닿게 한다.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에 요약되어 있는 그 성장의 느낌 속에 굵은 글씨와 얇은 글씨에 담긴 의미들은 수렴되지만, 마지막 웨이트리스를 언급하는 부분은 다른 시 「웨이트리스」와 연계된다. 앞선 시집에서 서사의 내용은 파악하기 힘들었으나, 이제는 조금 더 뚜렷해져 잉여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그것을 다른 시편들과 연결시켰다. 소수자들의 연대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리고 성장하는 것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던 아이러니는 ‘나쁨’의 의미를 얻으며 뚜렷해졌다. 이 뚜렷함들은, 주류 언어로 조금 더 가까이 갔다는 것을 뜻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그 중심으로 한 발짝 옮기는 움직임과 동시에 다른 한 쪽으로는 바깥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인용시에는 그것이 질문과 대답의 역학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의 시절은 끝났다. 질문의 시간이 마감되었기 때문이다. 대답의 시절이 찾아왔다. 어른인 그는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존재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대답을 “끝없이 질문하는 존재들”이 있는 위치와 동일시했다. 그곳은 “지구 바깥”이며 “허공”이다. “종교”는 신도에게 대답의 역할을 하지만 그에게는 “공허”의 역할을 한다. 결국 그는 “꿈꾸는 약”으로 지탱했던 아름다워지는 것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공허에 몸을 맡긴다. 그 과정이 바로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이다.
그는 성장에 몸을 맡기되 여느 성장이 담보로 하는 꿈을 좇는 과정을 외면한다. 그것은 이전보다 조금 더 강해진 하드코어 장면들의 빈번한 노출로 이어진다. 부카케, 알코홀, 만레이 필름, 오토바이 질주 등 마니아의 세계에 찾아드는 것으로 그는 성장의 시간을 거역한다. 그는 늙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빵 주세요 빵 먹고 싶습니다 배고픈 개들이 주춤 주춤 늙어가는 저녁”(「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쾌락의 향유라고 할 수 있는 곳에 그가 있다. 늙는 것을 견디는 장소가 그곳이다. 그러나 이를 탐닉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고 갈음하는 것은 무언가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 탐닉의 과정에는 자의식이 사라지나 그에게는 공허의 자의식이 짙게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탐닉하는 것으로 그 세계의 비정상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정상적인 성장 세계의 비정상성을 함께 드러낸다. 여전히 ‘밤은 계속’되고 있고, ‘호주머니’는 지금도 없다. 예전에 그는 낮의 세계에 편입되는 자신에 대해 슬퍼했으나 그 세계에 들어선 지금은 밤과 호주머니 시절까지도 조금은 “지루하기도 했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어른의 시간을 견디는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잘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잘 견뎌야 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김종훈: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2006년 <장자의 그림, 처남들의 연주: 문태준, 황병승론>으로 제13회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
출처: 계간 『서시』 2010년 봄호 발표
[출처] 황병승論 - 김종훈(문학평론가)|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