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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은 주(周)나라의 역(易)이라는 뜻이다.
지금 같은 시절에도 수많은 점술(占術)이 공존하고 있듯이,
과거에도 여러 종류의 역술(점술)이 공존했었다.
역사서에도 거북점을 친 다음에 시초점을 쳤다고 기록한다.
이미 수많은 점술이 생겨났다가 융성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는데
유독 주역이 지금까지 잔존한 것은,
아마도 그 정확성과 점의 결과를 확인하고 기록했던 객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점을 치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관리들이 있어서
한 해가 저물 때나 특정 기간이 지난 뒤에 과거의 점의 결과를 확인하고
그것을 점괘와 함께 기록했다.
보통 괘사와 효사를 주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이 지었다고 말하는 반면에,
누군가는 상당한 시간을 거치면서 수정되고 더해져서 완성된
여러 명의 복관(卜官)들의 기록이라 주장한다.
어쩌면 후자가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지도 모르겠다.
좌전(左傳)과 국어(國語) 속에 남겨진 점괘들을 보면 더 그렇다.
당시의 점괘에 대한 해설들은 지금처럼
괘사와 효사, 상수(象數)와 음양오행, 납갑에 의존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했던 주역이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며 상수와 음양오행론이 스며들었고,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관리요 사상가였던 왕필 이후로는 노장 사상이 스며들었고,
송나라 정이천 이후로는 유불선 3 교의 가르침들도 스며들었다.
주역이 의외로 소박하고 단출했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애초에 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변경되는 때의
척박한 삶을 살았던 주(周) 나라의 일상을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철학과 의리(義理)가 곁들어지지 않은 소박한 주역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김상섭 선생의 ‘내 눈으로 읽은 주역, 역경편’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의리(義理)와 상수(象數)의 균형이 잘 이루어져 있어서
주역 공부의 교과서와 같은 책으로는
총 3 권으로 구성된 대산 김석진 선생의 ‘주역 강해’를 빼놓을 수 없다.
만약에 이 책이 어렵고 부담스럽다면,
그의 제자인 최정준 박사가 출판한 ‘주역 개설’을 한 번 읽어보라.
독특한 책으로는 김승호 선생의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 인문학’도 괜찮다.
독특한 책으로는 심의용 교수의 정이천의 ‘주역’과
방인 교수의 ‘다산 정약용의 주역사전(周易四箋) 기호학으로 읽다’도 권한다.
주역은 괘사와 효사 내용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전체적으로 주역을 살펴보는 관점도 상당히 중요한데,
방인 교수의 책은 그런 측면에서 신선하다.
우리나라의 주역은 대체로 정이천의 역전(易傳)과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
이 두 가지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주역이란 그것을 사용하고 지켜보고 연구하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해설에 녹아들었고 수많은 책들이 저술되었다.
비록 공자와 정약용 선생이 천재이지만
의외로 주역 연구에 헌신한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주역(周易)은 그 자체로 그것에게 빠지게 만드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연구에 평생을 헌신했다.
그들 중에는 공자와 정약용, 정이천, 주희 처럼
자신의 연구를 책으로 남기고 후학을 기르지 않았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여러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관점도 살펴보라고 권한다.
어차피 주역은 인생사일 뿐이다.
다양한 각도로 살펴볼 수 있으면 분명 도움이 된다.
물론 공자의 혜안을 빌려서 살펴보거나
혹은 정이천과 김석진 선생의 혜안을 빌려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마도 가장 좋은 것은 자기만의 눈으로 인생사를 살피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혜안으로 살펴라.
다만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삶과 지금 우리의 삶이 다르고
그 표현 방법들도 다르고
발생한 사건에서 우선순위 또한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동일하다.
주역을 통해서 내재된 우리의 성명(性命)을 깨닫고
그 이치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따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역은 만물의 본성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그 변화 속에서 득실보다는 하늘의 올바른 뜻을 구하여 그것을 좇을 수 있게 돕는다.
물론 평범한 사람에게 점(占)은 더 많이 얻고 더 적게 잃어서
흉(凶)함은 피하고 길(吉)함은 누리려는 목적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주역을 깊이 깨달으면
그 길흉이 움직임에 따라서 발생하는 심리적인 반응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된다.
어차피 길한 때에 도리어 흉과 허물을 짓기 쉽고
흉한 때에 선(善)이 진정한 가치를 갖는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선과 악이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주역이 길흉과 화복을 묻기 위한 기술의 하나로 만들어졌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수 천 년을 이어오면서
그 속에 유불선의 가르침들과 삶의 지혜들이 스며들어 있어서
인문학의 하나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주역 격언 중에는 주역에 도(道)가 통(通)하면 점을 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일상 속에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도 이미 징조가 들어 있기 때문에
굳이 점을 쳐보지 않더라도 그것을 잘 살피기만 해도
그 일의 길흉과 취해야 할 태도를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소강절 선생의 매화역수 또한 사물을 살펴서
그 안에 내재된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거기에서 주역의 괘상을 살펴서 알고
살피지 않고도 알고의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징조를 살필 때에는 공정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는 이미 하늘과 땅의 본성이 내재되어 있어서
무망(无妄)하기만 하면, 작은 일의 징조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주역점은 가장 중요한 것이 진실하게 점을 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고
중요하지는 않지만 점괘의 길흉을 살피는 것이다
길흉을 살피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은
길흉이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소인(小人)들에게는 물론 그 때와 지위(地位) 그리고 득실(得失)이 중요한 것은
자신의 그 나아가고 들어가는 움직임을 통해서
더 많이 얻고 더 편안한 자리를 찾아서 이동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대가 대인(大人)이라면
어느 때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다
무릇 소인은 더 편안한 자리를 두고도 득실을 좇아서
자신의 역량과 때를 무시하고 더 얻는 곳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인이라면 때를 살피는 것은 어디에 있든 편안하게 여길 수 있지만
이익보다는 올바름과 큰 틀에서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함이다
타로는 보다 구체적이기 위해서 예리함이 필요하다면
주역은 오히려 융통성이, 무던함이 필요하다
주역점을 쳐보면 너무 정확해서 정말 두렵게 될 때가 종종 있다
결혼 점을 쳐볼까요 했는데 아비는 정벌을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지어미는 아이를 가져도 기르지 못한다는 점괘가 나오기도 하고
사업을 할까요 했는데 3 세불흥, 3 년간 일어서지 못한다고 나온다
타로도 물론 정확하다
그러나 타로의 정확성과는 달리 주역의 효사들은 그 구체성이 놀랄 정도이다
그래서 주역을 조금 사용해보면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역 중에서 주나라의 역(주역)이 남아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더 사용하게 되면 마치 내가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고
모든 것이 설명이 되고 모든 것이 예측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미친 듯이 점을 치고 확인하다가 보면 그 순간은 반드시 온다
특히 납갑이나 음양오행, 상수를 사용하게 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결코 오만해져서는 안되고 확정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 의지를 제한하는 행위다
무엇보다 큰 틀의 줄기를 먼저 보고 그 가지들을 살펴야 한다
너무 세세하게 모두 살피는 것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주역의 괘명과 괘사는 말하자면 나무의 굵은 줄기와 같다
그 굵은 줄기에 가는 가지들이 여기 저기로 뻗어있다
처음에는 줄기가 6 개 밖에 안보일 것이다
그것조차도 그리 쉽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렇지 않다
6 개가 아니다
그 6 개의 효사가 어느 순간에 64 종류의 가지들로 보이게 되고
(마치 카발라에서 세상을 하나의 생명나무로 보다가
그 각각의 세피라가 사실상 하나의 생명나무로 분화되는 것과 같다)
거기에 각각 끊임없이 수많은 가지들이 펼쳐져 나간다
그러나 굵은 줄기, 큰 틀의 흐름은 동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역술가는 그 큰 틀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김승호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미래를 너무 밝게 보고 세세히 보아서도 안되고 볼 수도 없는데
그것은 모든 만물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새겨져 있고
그것을 우리가 보려는 순간 어느 정도 흐트려져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보는 것이 바르다고 강조하셨다
옛 어른들과 남희근 선생은 거기서 좀 더 나가서 이렇게 말하셨다
"깊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자는 불길하다"
역사상 앞날을 내다볼 수 있었던 사람 중에 삶이 평탄했던 사람은 드물었다
그것은 천명(天命)을 알고 총명한 사람이 그 지혜를 드러내지 않기는 쉽지 않고
만약 그것을 드러내면 결국 명을 재촉해서 흉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칭타로 해설서의 서론에서 분명히 말해두었다
처음에는 그냥 괘사만으로도 점을 치기에 충분한데
좀 더 익숙해지고 테크닉이 늘더라도 효사와 그 아래로 점점 더 나아가기보다는
괘사의 더 넓고 포괄적인 의미를 잊지 말고 여전히 융통성을 잃지 말라고....
서두르지 마라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괘를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서둘러 위(位)를 살필 필요는 없다
괘는 괘대로 충분히 즐겨라
그리고 위(位)와 본성(음양)으로 넘어가고 그것도 이리 저리 살펴보라
그 보는 눈 그것이 바로 핵심이다
그 눈은 사실 이미 가지고 있다!
본인이 없다고 생각해서 못느낄 뿐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그대가 가진 눈이 그것을 살펴볼 시간을 주라
그것이 전부이다
그냥 관(觀)하면 보이고 알게 된다
관(觀)이 곧 아는 것(知)이고 맛보는 것이고 이미 갖고 있던 지혜이다
그냥 자주 계속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라
가장 좋은 것은 지식이 아니라 그 '눈'이다
주어진 일상의 것들 속에서 하나의 틀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지
뭐 입네 하고 유식하게 설명하는 테크닉이 필요치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점을 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그저 보는 것이다.
그저 판단없이 보는 것,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 가장 어렵다.
특히 자신의 욕심과 습관에서 벗어나서 보는 것이 그 목적이다.
주역은 하나의 틀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고
여러 책들의 내용에 매이지도 말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그저 점괘의 결과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켜보고 확인하길 부탁드린다.
주역의 괘사와 효사는 여러 배경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의 바탕 위에 기록된 효사들은 그 시대에만 이해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배경이 되는 사건들도,
그 글들의 진정한 의미들도 잊혀졌다.
특히 괘사와 효사에는 여러 고사(故事)들과
춘추 전국시대 이전의 중국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효사들의 지위(地位) 또한 당시의 사회 계급 체계와 관련이 있다.
대인(大人)이나 군자(君子)는 관직에 있거나 대부 이상의 높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소인(小人)은 단순히 아이가 아니라 지위가 낮은 평민과 천민들을 가리켰다.
후대에 철학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군자와 소인, 대인과 소인이 대비적으로 이해되었을 뿐이다.
초효는 가장 비천한 (백성) 지위이고
이효는 가장 하급의 귀족인 선비이고
삼효는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이고
사효는 등용된 (조정의) 대신이고
오효는 왕(천자)이고
상효는 국사(國師) 혹은 상왕(上王)이다.
실제로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천자가 제후들을 두어서 나라들을 다스리게 했고
제후는 경과 대부들을 두어서 다스리게 했고
대부들은 그 아래에 선비를 두어 백성들을 다스리게 했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는 아마 다소 변형시켜서 적용이 필요할 것이다.
초효는 해당하는 사건에서 아무런 주장을 할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아랫사람이고
이효는 일을 주도적으로 직접 처리해야 하는 실무자에 해당하고
삼효는 비록 크지 않더라도 자기 영역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 일을 키우느냐 그대로 머물러 있느냐 하는 갈등이 있는 사람에 해당하고
사효는 그 사건에서 주도적인 사람을 보좌하거나 돕는 사람에 해당하고
오효는 그 사건에서 가장 주도적인 사람으로 아랫사람들을 부리는 윗사람에 해당하고
육효는 그 사건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거나 예전에 윗자리에 있었던 사람에 해당한다.
여기에 초효와 육효는 그 사건의 시작과 마침이라는 시간적인 의미도 함께 갖는다.
효사들은 각각 공간적인 지위와 시간적인 성숙도 둘 모두를 상징한다
삼효와 육효는 각각 하괘와 상괘의 덕이 지극해서
조만간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삼효를 넘어서면 그 때는 점점 그 사건이 조금씩 무르익어가는 것으로도 본다.
주역의 효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소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효사들이 연결해서 읽었을 때 일관성이 없는 것도 하나의 근거이다.
또한 과거에 기록된 점괘들은 대단히 간략했던 것도 하나의 근거이다.
그것이 시대가 지나면서 고사(故事)들과, 시(詩), 가르침들이 첨가되었고
거기에 다른 구체적인 점사(占辭)들도 추가되었다.
그 고사들을 이해하려면
은(殷)과 주(周)를 비롯한 중국 고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황제 제을(帝乙)은 은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주왕(紂王)의 아버지였다.
그는 제후국인 주나라를 다스렸던 문왕(文王)에게 그의 딸들을 시집보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딸들이 되돌아왔고
그 후로 주나라와 은나라는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것이 지천태와 뇌택귀매를 비롯해서 여러 괘의 효사에 등장한다
결국 문왕은 제을의 아들 주왕에 의해서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그러나 문왕은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지 않고
그의 생전에 제후로서의 처세를 잃지 않았다.
비록 모든 사람이 그를 따랐지만
문왕(文王.昌)은 끝까지 제후로서 은 주왕(殷 紂王)을 천자로 모셨다
은 주왕이 달기에게 빠져서 충신들을 죽이고 점점 기울어져가자
문왕의 사후에 그의 아들인 발(發) 즉, 무왕(武王)이 은 나라를 정벌했다.
문왕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지만
무왕이 아버지 문왕을 추존(고인에게 제왕의 칭호를 올림)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자 할 때
주변에 8 백 명의 제후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무왕이 황하를 건너려다가
아직 정벌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군대를 돌렸다.
무왕은 군사를 돌려 2년을 더 기다린 뒤에 은나라를 정벌했다.
목야에서 서로 마주한 무왕의 군대보다 주왕의 군대가 월등히 많았다.
그러나 주왕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고 전투가 벌어지자
주왕의 군대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거나 주나라 군대가 되었다.
주왕은 목야에서 수도로 도망쳤다가
스스로 불을 지른 뒤에 그 속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혹자는 팽형 즉, 주왕과 달기가 충신들에게 가했던
동일한 형벌을 받았다고도 말한다.
도읍을 주나라 옛 도읍인 풍읍에서 호(鎬)로 옮긴 무왕은
태공망 여상에게 제(齊)나라, 주공(周公) 단(旦)에게 노(魯), 소공은 연(燕),
그 밖의 공신들에게도 서열에 따라서 봉토를 주는 봉건 제도를 실시하였다.
무왕은 천자가 된 뒤에 제대로 쉬지도 않고 나랏일을 돌보다가
병이 나서 자리에 몸져 누웠다. 잠시 호전되는 듯하다가 죽고 말았다.
무왕이 죽자, 어린 나이의 태자 송(誦)이 뒤를 이어 성왕(成王)이 되었다.
성왕은 나이가 어려서 주공이 7 년간 섭정(곁에서 정치를 도와줌)을 하였다.
주공은 멸망한 은나라에서 일어난 반란과 수 차례의 반란들을 진압했고
성왕이 장성하자 일선에서 물러나서 제후로 돌아갔다.
성왕 때부터 그 다음 강왕(康王) 때까지가 주나라의 황금기가 되었다.
주역의 효사들에는 침략과 전쟁, 제사, 문왕과 주공의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다소 상징적으로 은나라는 흰색, 주나라는 붉은색으로
은나라는 동북 방향, 주나라는 서남방향에 있었기 때문에
지리적인 것을 가지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아마도 후대에 덧붙여진 상수와 음양오행, 의리적인 관점이 제거된 주역은
상당히 담백하고 소박한 일상 속에 전쟁의 여파가 고스란히 느껴질 지도 모른다.
전쟁과 농사, 먼 길을 나서고 목축을 하는 소소한 일상들도 등장하지만
아무래도 고대에는 점이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이 경험한 사건과 역사가 고스란히 효사들 속에 담겨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주역을 살피면 더욱 재미가 있다.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든지 하늘의 뜻을 물어볼 수 있으니 다행인 셈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제사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연례 행사였다.
심지어 제사와 전쟁은 그것을 위해 점을 치고
경건하게 날짜를 잡아야 할 만큼 큰일이었다.
의외로 점을 쳐 보아야 했던 이유들은 전혀 다른 목적에 있었다.
가장 흔한 이유는 제사였고
그 다음이 사냥이나 농사, 들어가고 나옴(길을 나서는 것),
그리고 정벌 즉 전쟁이나 날씨, 혼사의 순서였다.
당시에는 집을 나서서 먼 길을 가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섭대천(利涉大川), 용섭대천(用涉大川)이 그렇게도 많이 나오는 것이다.
중국 대륙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황하강과 왕쯔강이 그물망처럼 흐르고 있다
대부분의 전쟁과 여행에서 강을 건너는 것은 필수적이었고
특히 황하강은 범람이 심하고 험준해서 강을 건너는 것은 크게 위험했다
왕해(王亥)의 고사는 은나라는 원래 목축하던 나라였다는 것의 반증이다.
은나라 왕자 중의 하나였던 왕해가 목축하기 좋은 땅인 유역(有易)에 이르러서
방탕하게 즐기다가 그만 유역을 다스리던 왕의 아내와 통간하였고
처음에는 양들을 빼앗겼다가 뒤에 소들을 잃게 되고 결국 목숨도 잃게 되었다.
그것이 뇌천대장과 화산려의 효사에 등장한다.
중국이 목축에서 농경사회로 변화되던 시기에 주역이 자리잡게 되었는데,
원래 농경사회보다 목축을 주로 하는 사회에서 점성학이 더 발달했었다.
농경사회와는 달리 떠돌아 다녀야 했기 때문에 때와 방향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역 안에는 점성학적인 측면도 들어 있다.
물론 중국의 고사들을 일일이 다 훑어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춘추 전국시대의 흐름 중에서 주나라의 역사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은나라는 동쪽에 주나라는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동북은 은나라를 상징하고 서남은 주나라를 상징한다.
결국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해서 멸망시켰고
무왕의 형제인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반란을 정벌해서 태평하게 되었다.
이것 또한 주역의 효사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주역이 정립되던 시대에 서쪽은
은나라에 의해서 곤욕을 치루던 방향이다.
그래서 풍천소축에서 비가 오지 않는 것은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주역의 괘사와 효사들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역사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특히 몇몇 사회적인 관습과 역사, 사건들
그리고 한문의 가차(假借)를 염두에 두지 못하면
차라리 사(辭)를 보지 않고 상(象)만 보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
누누이 당부하지만 되도록 상(象)과 위(位), 본성(性)과 덕(德)
그리고 괘명(卦名)만으로 점괘의 길흉(吉凶)을
그리고 허물을 면하는 방법을 살피기를 권한다.
상이란 64 괘(卦)와 팔괘를 말하고 위(位)란 동효(動爻)를 말하고
본성(性)이란 음양(陰陽)을 말하고 덕(德)이란 정(正)과 중(中)을 말한다.
가능하면 효사(爻辭)는 가장 나중에 읽어보는 것이 좋다.
의외로 효사는 대단히 구체적이다.
효사만으로 묻고자하는 것의 답이 나오기 일쑤이다.
그러나 그 이유와 배경을 알지 못하면 답을 모르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서
상(象)과 위(位), 본성(性)과 덕(德)
그리고 그 상호관계를 먼저 살피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첫댓글 하늘이 준 이치에 따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어쩌면 넘치거나 모자라기가 쉬운지도 모르겠어요. 그 긴장을 유지하려면 늘 맑게 깨어있어야 하는지요?
깊은밤 주역책을 열게 만드는 글입니다.
남회근 선생님이 밤에는 주역책을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잠이 안온다나 어쨌다나...
주역 숙련방은 다음달에 없앨 예정이라 일부 글은 이쪽으로 옮겨왔습니다
늘 맑게 깨어 있으면 그게 도사님이지 범인이겠습니까? ㅎㅎㅎ
그냥 주제 파악이 안될 때와 좀 과할 때는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_^
제가 하고 싶은 한 마디는 '이유와 배경을 알지 못하면 답을 모르느니만 못하다' 요겁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특히 "이유와 배경을 알지 못하면 답을 모르니만 못하다" 명언입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저 주역 64괘를 외우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괘사를 번역한것을 읽고 또 읽기만 하였습니다
하다보니 효사보다는 象과 位, 本性과 德으로 점괘를 보게 되었씁니다
나는불꽃의 주역괘에 배경되는 역사적인 설명을 듣으니 효사도 새삼스럽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爻辭는 한자의 끊어 읽기와 뜻, 역사적 사회적 배경,
고대 한자의 뜻과 假借, 通用字 및 發語司나 衍文을 고려하지 못하면
거의 배가 산으로 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괘명(卦名)에 대해서도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한자는 많은 의미 변화를 거쳐왔습니다
단적으로 孚나休,惡과 같은 한자의 뜻도 지금과는 사뭇 다릅니다
심지어 왕의 이름 중에 惡도 있었습니다
죄와 벌을 받는 것 뿐만 아니라 벌을 주는 사람도 가리켰습니다
어순도 그렇지만 동사와 피동사의 구분 없이 사용되었지요
사로잡는 유부(有孚)는 은나라 시대의 노예 제도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대에는 흔히 승전 제사를 패잔병을 잡아서 모셨습니다
아는 만큼 보입니다
감사드림니다
깊이 새겨서 읽겠습니다. 감사합ㄴ디ㅏ.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