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몇 가지 방식들에 대해서 열거해 보고자 한다.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것 self-trivialization이 그 첫 번째다. 여성들은 중요한 일, 중요한 창조를 할 수 없다는 거짓말을 믿는 것 말이다. 우리들 자신의 필요와 욕구가 아니라 항상 남들의 욕구를 발견하고 채워주려고 애쓰면서, 우리들 스스로를 혹은 우리들 자신의 일을 진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말이다. 남성들을 모방하면서... 우리들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거짓을 말하면서, 우리들이 지닌 온전한 가능성들을 실험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우리가 아이들이나 연인에게 바치는 관심과 정성스런 노동을 우리들 자신의 가능성에는 충분히 기울이지 않는 것 말이다.
수평적 적대감 -다른 여성들에 대한 혐오- 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두 번째 방식이리라. 다른 여성들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 쏟아 붓는 공포와 불신 말이다. ‘여성들은 결코 실제로 무언가를 하려 들지 않는다’ 는 근거 없고 여성 폄훼적인 확신이라든가, 여성들의 자기결정권과 생존은 남성들이 이룩해낸 ‘진짜’ 혁명에 부차적이라는 허위적 맹신이라든가. ‘우리에게 최악의 적은 바로 여성들’이라는 잘못된 믿음이라든가 하는 것 말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길러진 자기혐오를 서로에게 이렇게 얄팍하게 투사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최악의 적이 되고 만다.
세 번째 파괴성은 엉뚱한 데 쏟아 붓는 측은지심/공감 misplaced compassion이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이 최근에 강간을 당했다. 그녀의 첫 번째 -그리고 매우 전형적인- 본능은, 자기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던 강간자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우리가 우리를 강간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서로에게 측은지심과 공감을 느낄 때라야, 우리는 자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네 번째 자기파괴방식은 중독이다. (대문자로 쓴) ‘사랑’ Love 에 대한 중독. 구원이라고도 불리며 여성의 커리어라고 여겨지는, 이기심 없는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관념에 대한 중독 말이다.... 우울증 중독. 이것은 여성으로서 실존을 살아내는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우울증에 빠진 자들에게는 책임을 지우지 않으며 의사들은 우리에게 약을 처방해주고 술을 통해서 우울한 황량함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성의 인정에 대한 중독. 성적으로든 지적으로든 자기를 지지해주는 남성을 발견할 수 있는 한, 괜찮다고 여기고 자기의 실존이 옹호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로 인해 치르게 되는 대가가 무엇이든지 말이다.
자기를 하찮게 여기는 것, 여성들에 대한 경멸, 엉뚱한데 쏟아 붓는 측은지심/공감, 그리고 중독. 이 사중의 독으로부터 우리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생존과 더 나은 삶의 재건을 위해 더욱 더 적절한 몸과 마음을 지니게 될 터이다.”
- Adrienne Rich. On Lies, Secrets, and Silence: Selected Prose 1966-1978 (New York: Norton, 1979), 121-123.
2.
나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여성적 글쓰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여성은 여성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글쓰기로 오게 만들어야 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육체로부터 격리되었었다. 그만큼이나 강고하게 여성들은 글쓰기로부터 격리되었다. 여성이 자신의 육체에서 격리되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여성은 글쓰기에서 격리되었다... 여성은 여성 고유의 움직임으로 글쓰기를 시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계에, 그리고 역사에 임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결과가 아직도, 우리 몸과 정신 안에 있다. 그 과거의 결과들을 반복함으로써 그것을 공고히 하는 것, 그것을 나는 거부한다... 미래를 앞당기기, 이것이야말로 급박한 일이다.
나는 여자로서 여자들을 향해 이 글을 쓴다. 보편적 주체로서의 여자는 여성을 여성의 의미로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여성의 역사가 생겨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여성이라면 공통적으로 누구나 갖고 있는 점, 나는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 그것은 여성이라면 갖고 있는 무한한 풍부함이다. 여성의 상상력은 음악처럼, 회화처럼, 글쓰기처럼 무궁무진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비밀스레 드나들던 자기만의 세상에 대해 내게 묘사해 주던 여성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보지 않은 여성이 누가 있는가? 자기 자신이 괴물 같다고 스스로를 비난해 보지 않은 여자가 누가 있겠는가? ... 다시 말해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고 싶은 기이한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느끼고서, 자기가 비정상적으로 병든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여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여성의 그러한 욕망이라는 병은 여성이 죽음에, 억압에, 차별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왜 글을 쓰지 않는가? 글을 쓰라. 글쓰기는 그대를 위한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대의 육체는 그대 것이다. 나는 왜 그대가 글을 쓰지 않는지 안다. 글쓰기가 그대에게는 너무나 높고, 동시에 너무나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위대한 자들, 다시 말해서 ‘위대한 남자들’에게 국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대는 약간의 글을 썼었다. 하지만 숨어서 썼다. 글을 쓰며 스스로를 벌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리, 끝까지 가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만 현실의 긴장을 완화시키는데서 그쳤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쳐서 고통스럽게 되지 않을 정도로만 긴장을 풀고자 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라. 아무도 그대를 멈추게 하지 못하게 하라. 남자도, 어리석은 자본주의도 그대를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심지어 그대 자신조차도 그대를 멈추지 못하리라. 나는 여성을 쓴다. 여성이 여성을 써야 한다. 자기 삶을 글로 새겨야 한다. 여자들이 돌아온다. 멀리, 영원으로부터, 그리고 추방되었던 ‘바깥’으로부터. 밑으로부터, 어린 시절로부터.
여자들은 세상이 감금한 협소한 인형의 방안에서 빙빙 맴돌며 방황했다. 너는 두려움을 느낀다. 나가지 말라. 벌 받을 것이다. 움직이지 말라. 넘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 두려움을 내면화해 버렸다. 여성들에게 남자들은 가장 큰 죄악을 저질렀다. 남자들은 은근히 여성이 여성을 증오하도록 만들었다. 여성이 여성 스스로의 적이 되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남성의 일을 여자가 집행하도록 유도했다. 여성에게 결핍된 것을 남성을 통해 채우도록, 그래서 남성을 사이에 두고 여자들끼리 서로 미워하도록 가르쳤다. 억압된 우리, 덜 자란 우리, 입마개로 입을 차단당한 우리, 짓밟힌 우리, 도둑맞은 우리,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름답다. 우리는 '결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은 옛 여자에게서 새로운 여자를 해방시킬 때이다. 자기 자신, 그 이상이 되기 위해 우리 몸에 새겨진 옛 여자를 초월할 때이다. 나는 말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새로운 여자를, 곤경에서 빠져나오는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여성은 한 번도 자기 말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글쓰기는 변화의 가능성 자체이다. 글쓰기의 거의 모든 역사는 이성의 역사, 남성의 역사이다. 그곳에 여성이 들어서야 한다. 다른 글쓰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자신을 글로 쓰면서 자기 육체로 돌아와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 그대 자신을 글로 써라. 그대 육체의 목소리가 들리게 해야만 한다. 그러면 무의식의 거대한 자원이 분출할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행위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에게 자기 고유의 힘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이 죄인이라는, 그렇다. 여성은 죄인이다. 모든 것에 대해 죄인이다. 욕망을 가진 죄, 욕망을 갖지 않은 죄, 냉담한 죄, 너무 뜨거운 죄, 지나치게 어머니인 죄, 충분히 어머니이지 않은 죄, 자식을 둔 죄, 자식을 갖지 못한 죄. 먹인 죄, 먹이지 못한 죄... 이 모든 죄책들로부터 구출해 줄 것이다.
육체가 없는 여성은 벙어리 여자, 귀머거리 여자이다. 살아있는 여자가 숨 쉬는 것을 방해하는 헛된 굴레와 같은 옛 여성을 죽어야 한다. 온전한 여성의 새로운 숨결을 새겨야 한다. 여성 마음대로 되기 위한 글쓰기가 필요하다. 여성은 말을 하는 고통. 가슴은 터질 듯 쿵쿵거리고, 때로는 땅이 꺼지고, 혀가 말려드는 느낌 속에 추락하기도 한다. 그건 이중의 슬픔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힘든 행위를 해놓고도, 그 여성의 말이 가닿는 남성의 귀는 언제나 '귀머거리'이기 때문이다.
여성 안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생산하는 힘, 특히 다른 여자를 생산하는 힘이 유지된다. 모성적인 여자, 요람을 흔들어 주는 여자, 베푸는 여자 안에는 그런 힘이 있다. 여자는 자기 자신이 어머니이며 아이이고, 딸이며 자매이다.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여성을 주게 될 때 모든 것은 변하게 될 것이다. 여성에게는 늘 많거나 적거나 간에 약간의 어머니가 있다. 병에서 회복시켜 주고 먹을 것을 주는 어머니, 단절에 저항하는 어머니,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는 힘을 가진 어머니가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충동적인 경제는 ‘아낌없이 주는’ 경제이다. 여성은 자신은 사라지지 않으면서 익명성에 녹아들 줄 안다. 왜냐하면 여성은 주는 자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고유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계산 없이 자신의 것을 탈소유화하는 능력이다.
여인이여, 같은 것에 대해서도, 다른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 말라! 나는 같은 것과 다른 것 모두를 원한다. 타자 전체를 욕망한다. 왜냐하면 살아간다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에게 매순간, 아직 한 번도 그대가 날 쳐다보지 않은 그런 식으로 그대가 나를 쳐다보는 순간, 그대가 내가 그러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이 된다. 내가 글을 쓸 때, 나에 대해서 배제함이 없이, 예측도 없이, 나에 대해 쓰여지는 것은 우리가 될 수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모든 자들이다. 우리가 될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부른다. 지칠 줄 모르는, 도취시키는, 진정시킬 수 없는 사랑의 추구에로 우리를 부른다.
-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