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의 눈
한권의 책을 읽던 중에 하나의 질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잠자리의 눈은 몇 개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하게 된 이유인 즉, 읽던 책속에 인용된 짧은 글 때문입니다. 이 글을 지면에 옮겨 봅니다. <낭독의 발견> 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원재훈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작년 가을에 잠자리 한 마리가 사무실로 날아 왔습니다. 사무실에는 아홉 개의 창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잠자리가 나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잠자리는 아시다시피 곁눈, 홀눈 합해서 만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개의 눈이 다 필요 없습니다. 창밖으로 나갈 수 있는 한 개의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아, 난 지금 만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개가 필요한데...’”
작은 잠자리 한 마리의 눈이 만 개입니다. 눈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니 놀랍습니다. 그 많은 눈 중에 한 개의 눈이 없으므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만 가지의 질문을 막힘없이 답을 한다 하더라도, 정작 한 가지(?)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면 만 개의 답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별 가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길이 참 많습니다. 작은 우리나라 땅에 나있는 길입니다. 도시, 산촌, 농촌, 어촌으로 이어지는 길은 수 십 만개의 길입니다. 비록 작은 나라의 땅일지라도 사람의 생물학적 힘과 지식으론 이 많은 길을 찾을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길이라도 정확하게 찾아주고, 안내해 주는 기기가 있습니다. 마치 옆에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로 지시해 주고, 친절하게 안내해 줍니다. 네비게이션입니다. 길을 잘 아는 네비게이션이라 할지라도 정작 찾고, 안내해 주어야 할 하나의 길(?)을 모른다면, 설령 만개의 눈을 가진 잠자리 한 마리나, 만 가지의 질문에 거침없이 답을 하는 한 사람이나, 모두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6) 예수님은 길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좋은 길을 닦습니다.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고, 수평을 맞추고, 아스팔트를 깔아 고르게 합니다. 좋은 길을 갖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길과는 비교할 수 없고, 비교의 대상이 되질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길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로 동행해야 하나님께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는 우리를 향해서 행복자라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 개의 눈을 가진 잠자리 보다, 세상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있는 네비게이션보다, 만 가지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을 하는 사람보다, 내가 더 행복자입니다. 정작 꼭 보아야할 한 분을 보고, 꼭 알아야할 한 분을 알고, 꼭 가야할 길을 함께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섬김이 박희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