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홍승용 선생님의 아도르노의 철학의 제일원리 비판에 관한 글을 이번에 방법서설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 아도르노가 데카르트의 제일원리라 비판하는것은 데카르트의 진리 인식의 방법론입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의 제일원리는 과 의 형이상학 장에서 펼치고 있는 사유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의심할수 없는 명제인듯합니다.
제일원리와 관련해 아도르노가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철학자는 데카르트다. 데카르트(1596~1650)는 흔히 베이컨(1561~1626)과 함께 근대철학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아도르노는 그들 두 사람이 합리론이냐 아니면 경험론이냐 하는 공식적 구분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유사한 방법의 정신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여러분이 예컨대 베이컨을 읽고 데카르트를 읽으면 전자의 것인지 후자의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 경우 바로 과학 일반의 정신이 특수한 철학 학파의 정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이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학의 정신은 일차로 다름 아닌 방법의 정신입니다.”(224)
1 ---->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어떤 저작을 얘기하는지 이해불가입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를 말하는것 같기도 한데 사실 데카르트 학문의 정수는 방법서설의 본문격인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일건데 전 베이컨이 광학과 기하학에 조금의 식견이라도 있는줄은 알지 못합니다.
데카르트가 설정한 첫째 규칙은 “모든 성급함과 모든 선입관들을 극히 세심하게 피하고 명석하고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 내가 의심하게 될 어떤 동기도 없게 될 것만을 내 판단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225)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도르노는 우선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에서 “자율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인식하지 않은 어떤 것을 단순히 독단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데에 반대하는 모티프”(225)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철학에 ‘전제 없는 인식 같은 것은 없다’고 비판한다.(226)
2 ---> 명석판명은 직관적으로 나의 이성이 참이라고 인식하는 그 무엇입니다. 이는 유클리트 기하학의 공리체계 같은것으로 블완전한 인간이 참인것을 직관할수 있는 장치로 데카르트는 절대자인 신의 존재를 상정합니다.
또 성급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진리의 초시간적 핵심이 드러날 때까지 평온하게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이에는 “진리 자체가 시간이나 속도(Tempo)와 같은 것을 가질 수 있고 또 내가 그것을 요구하게 된다는 생각은 담겨 있지 않다”(226)고 지적한다.
3 ---> 데카르트의 의도와 다른 명석판단 또는 진리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성적 사유의 토대인 명석판명의 대상은 초시간적인 대상입니다. 유클리트 기하학의 5가지 공리가 초시간적인것처럼....
무엇보다 아도르노의 비판은 명석하고 판명한 지각에 대한 요구를 겨냥한다. 예컨대 어떤 순수한 감각자료를 궁극적인 것이라고 볼 경우, 그것은 그것을 산출하는 어떤 감각기관에 의해 매개되어 있으며, 또 역으로 이 감각자료가 없다면 감각기관에 대해서도 논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관건이 되는 계기들은 이미 이 기본적인 예에서도 어떤 제일원리와 그것에 이어지는 것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조건짓는 것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230)
4 ---> 이도 명석판명의 명백한 오해입니다. 좋은 정신,훌륭한 이성(양식)에 의한 명석판명한 직관은 감각자료에서 근거하는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도르노는 “명석하고 판명한 지각에 대한 요구를 엄밀히 추종할 경우, 바로 이러한 추종을 통해 그것이 스스로 해체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230)이라고 비판한다.
5---> 명석판명한 직관 위에 세워진것이 유클리트 기하학이고 근대로 와서는 뉴튼 물리학인데 이 이론이 내재적 모순에 의해 해체되었다는 소리는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내가 대상을 제대로 고찰하기만 하면 그것이 자체 내에서 내적으로 요동하며, 경직된 것도 내가 그것을 충분히 오래 바라볼 경우 말하자면 현미경으로 볼 때처럼 우글거리기 시작한다는 이 계기를 일단 여러분이 강조할 경우, 그로부터 또한 판명성의 요청 속에 주어진 그와 연결되는 대상들과의 구분도 결코 전래적인 사유 속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231)
데카르트의 둘째 규칙은 “내가 탐구하게 될 모든 난관들을 가장 훌륭히 풀기 위해 가능하고 필요한 만큼 여러 부분들로 분해하라”는 것이다.(233-234) 아도르노는 이러한 요구에 서양 주관주의 및 합리주의에 따라다니는 세분화되고 복잡한 것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다고 보며, 그로써는 대상의 복잡성을 실제로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다고 비판한다.
6 ---> 근대 과학은 뉴튼 물리학 위에 세워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데..... 뉴튼 물리학이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는데 실패했나요?
“세계가 합리적으로 될수록 말하자면 이때 나는 그만큼 덜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즉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하고 전혀 생각도 없고 전혀 개념도 없는 요소들로 끌어내려집니다. 하지만 이때 실제로 단지 아주 단순하고 아주 초보적인 것만 남는다면, 그러한 요구는, 내가 대상의 복잡성을 본래 이해하려고 하지만 대상이 이미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나간다는 점, 그래서 나는 대상을 실제로 그르쳤다는 점, 또 그럴 경우 나에게는 사태를 쪼개서 얻은 사소한 것들만 남는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입니다.”(225)
7---> 과학사가 증언하는 계속되는 반론은 그렇지 않다는것. 데카르트 인식론의 핵심은 단순한것에서 복잡한것을 구성하는 이성의 힘
아도르노는 데카르트의 요소분석 규칙이 수학적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유래하지만, 자연과학은 요소분석과정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단지 의식의 질서범주들을 통해 사태 자체를 확인하려는 시도 내지 모델로서만 고찰하는 데에 반해, 철학자들은 종종 자연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질서개념들 자체를 이미 사태 자체의 질서처럼 서술한다고 비판한다.(235-236)
셋째 규칙은 다음과 같다. “질서에 따라 내 사고를 이끌어가는 것, 즉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인식하기 쉬운 대상들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말하자면 단계적으로 가장 복합적인 대상의 인식으로까지 상승하는 것이다. 이때 나 자신은 그러한 대상들 가운데에 자연적인 방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어떤 질서가 있다고 전제한다.”(249) 여기서 아도르노는 인용문 끝의 ‘전제한다’는 말에 주목한다. 데카르트와 이후의 철학자들은 스피노자부터 헤겔까지도 데카르트가 전제하는 데에 머무는 그러한 질서를 독단적으로 사태 자체에 기인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250)
8---> 전제한다는것은 어떤 텍스트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방법서설이나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에는 없는데....
이는 데카르트 비판의 요점이 아니다. 아도르노의 비판은 점차적, 단계적으로 상승하는 방법 자체를 겨냥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대상이 어떤 성질 없고 서로 구분되지 않는 계기들로 환원되어, 우리가 대상에 부여하는 규정들에 비해 대상 자체의 규정은 중요하지 않을 때 사용하는 방식인데,(250) 이에 대해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사유가 한발한발 아주 작은 단위들 속에서 수행될 경우 사유는 오직 실제로 그것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만을 할 수 있습니다.
9---> 유클리트 기하학이나 뉴튼의 프린키피아를 몇 장만 주의깊게 읽었다면 이런 말은 못할듯...
그리고 다름 아니라 사유는 그것에 단순히 주어지고 그렇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앞지름으로써, 이 우월성을 확보함으로써, 아무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고 또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 실제로 발언할 수 있습니다.”(254) 그는 이처럼 사고가 한발한발 이루어질 경우 생산력이 마비된다고 보며, 이와 관련해 ‘사고의 옹졸함’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드 메스트르를 인용해 ‘계단의 우상’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러한 단계적 진행에 맞서 아도르노는 사고가 실제로 이루어질 경우 사고는 날아가지 한발씩 진행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더 이상 날아가지 못하는 사고는 물론 날아갈 줄만 아는 사고와 꼭 마찬가지로 사고가 아닙니다.”(254)
10---> 수학적 증명에서는 날아가기도 합니다. 수능 수학 30번 푸는데도 사고의 비상이 필요한데 당대 1급의 수학자인 데카르트가 그걸 몰랐을리가....
데카르트의 넷째 규칙은 다음과 같다. “어디서나 완전히 다 열거하고 보편적으로 개관하도록 하여, 내가 아무것도 빼먹지 않았다고 확신하도록 하라.”(277) 아도르노는 이 완전성 규칙이 사실상 독단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11---> 독단이 아니고 요청입니다. 완벽한 열거와 검토를 했는지 항상 주의하라.
“어떤 인식은 일반적으로 단지 그 완전성 공리가 관여하는 요소들을 논외로 하면 더 이상의 어떤 요소들도 인식에 부가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거나, 혹은 어느 정도 자의적으로 일종의 결단을 통해 그 이상의 요소들이 부가되는 것을 잘라내고 이미 일단 존재하는 것의 질서에 처음부터 만족할 때에만 그러한 방식에 따라 작동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입문278) 그런데 아무리 단순해 보이는 대상들도 무한한 측면을 포함하며, 따라서 어떤 인식에 새로운 요소들이 부가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완전성 공리는 자의적으로 추가 요소들을 잘라 버리는 수밖에 없다.
12---> 일반적으로 네번째 규칙은 완전성이 아니고 열거의 규칙이라 합니다. 그리고 완전성 공리라는 표현은 데카르트가
사용한 적이 없으며 여기에 쓴 네가지는 공리보다는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론일겁니다.
즉 자의적으로 “여기까지만 인식되어야 하고 그 이상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될 때에만”(279) 적용될 수 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완전성 공리는 단순한 독단이 되고 만다”(279)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아도르노는 완전성 공리의 적용범위를 그것이 구상된 수학의 극히 협소한 영역에 제한해야 한다고 본다.(278)
13---> 열거의 규칙은 수학보다는 분과 학문에서 더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수학은 관념체계의 무모순성만 있으면 되는데 과학이나 개별학문들은 인식대상과의 일치여부가 중요하므로...
첫댓글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대상으로써의 직관은 감각자료가 아닌 본질 직관이라고 하는데 아도르노가 보기에 그 본질직관이란것도 감각자료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데카르트의 진리 방법른을 독단론이라고 보지만 다만 데카르트는 진리를 향한, 본질직관을 알고자하는 끝없는 과학적 요청을 하는 자이다.
데카르트가 직관이라 하는것을 감각직관이라 보는것이 서로 번지수가 다른것 같습니다. 수차례 데카르트는 자신의 직관이 감각과는 다른것이라 했는데... 일테면 데카르트가 그의 철하의 제일원리로 내세운 사유하는 나의 존재성은 감각과는 전혀 관계없는거죠. 이런 데카르트의 직관을 감각이라 주장하며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비판하는것은 데카르트의 이론을 자기의 인식체계로 비판하는것이죠. 제가 읽은 대부분의 학설 비판은 이런식으로 이루어지는데 믄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들뢰즈의 "차이" 개념 비판이나 "긍정성"의 비판이 이런것 같습니다.
각 이론 자체로써는 명석 판명한 이론들 즉 유클리드 기하학, 데카르트 해석학, 뉴튼 역학, 열역학.리만 기하학 등은 저마다 자신의 명석판명성을 주장하는데 그들은 서로 다른 직관을 사용하는 여럿 데카르트주의자 인가?
여럿의 데카르트 주의자라기보다 제가 아는 과학사에서 의미있는 발견들은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주장한 발견의 4가지 방법론을 따른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