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의 진화 이끈 인간의 慾望 … 신과의 소통을 꿈꾸다
욕망의 음식문화사. 국수와 인간의 인연, 그리고 조상 국수와 그 후손들
중국에 가서 이름깨나 하는 찬팅(餐厅, 식당)에 가면 주둥이가 긴 주전자로 손님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는가 하면, 도삭면(刀削麵)이라고 해서 밀가루 반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거나 반죽을 올려놓은 도마를 손에 들고 반죽을 칼로 쳐서 펄펄 끓는 탕수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게 하는 진기명기를 선보이는 곳이 많다. 반죽을 밀어서 몇 차례에 걸쳐 접은 뒤 그걸 적당한 너비로 썰어내는 칼국수와는 달리 도삭면은 얇은 판 모양의 살짝 휜 칼로 비스듬하게 썰기 때문에 모양이 마름모꼴의 특이한 단면을 지니게 된다. 문화는 이렇듯 시절과 장소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띤다.
도삭면을 영어로는 knife-cut noodle king이라고 한다.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나라 칼국수 또한 knife-cut noodle이라고 해야지 그냥 knife noodle이라고 하면 서양 사람들이 놀란다. 울면은 한국화 된 중국 면요리다. 이것의 이름을 영어로 crying noodle이라고 하면 좀 우습다. 중국 음식인 溫滷麵(병음 wēnlŭmiàn)에서 나온 울면은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옥수수나 감자 전분(녹말가루)으로 걸쭉하게 국물을 만든 짬뽕이라고 할 수 있다. ‘소금밭 로(滷)’를 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듯, 소금으로만 간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백짬뽕, 하얀 짬뽕이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인간은 창조적이다.
국수 조리법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만들기 어렵지 않고, 먹기 쉬운 데다, 어떤 附隨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국수는 뭇사람들이 애호하는 먹거리로 자리 잡았고 여전히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수타 방식의 국수 뽑기는 가히 혁명적이랄 수 있다. 숙련된 손동작으로 가늘고 긴 국수, 게다가 점성과 탄성이 높은 명품 국수발이 만들어졌다.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는 인간의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이 국수의 진화를 가져온 것이다.
화염산에서 발견된 2,500년 전 국수 유물
국수는 누가 처음 만들어 먹었던 것일까? 놀랍게도 중국 신장성 위구르 자치구 투르판에 자리 잡고 있는 화염산 골짜기에서 2,5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국수 유물이 발견됐다. 너무 더운 곳이라 火洲라고도 불렸던 투루판은 과거 高昌國이 있던 곳이다. 어릴 때 읽은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은 워낙 열기가 대단한 곳이다. 붉은 색 일색인 이 산은 신장 자치구 지역의 톈산(天山) 산맥에 속한 붉은 사암으로 이뤄진 황무지 산이다. 총 길이 98km에 너비가 9km로 타림 분지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고 있다. 평균 높이는 500m이며, 여름에는 기온이 섭씨 50°C 이상 올라가 숨이 턱턱 막힌다. 서유기에서 손오공과 삼장법사 일행은 우마왕의 부인인 나찰녀로부터 파초선을 빌려 마흔아홉 번 부채질을 한 끝에 화염산 불길을 끄고 힘들게 산을 넘는다.
이런 곳에서 국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그건 양손으로 비벼 만든 건조면이었다. 그리고 둥글기는 하되 길이가 짧은 국수였다. 1991년 화염산을 지나는 도로공사 중에 인부들이 골짜기에서 직경 1.5~2m 가량 되는 30여 개의 웅덩이를 발견했다. 2,500년 전 이 일대에 살았던 주민들의 무덤으로 판명됐다. 14구의 미라와 함께 부장품이 다수 발굴됐다. 그 중에는 용기에 담긴 음식이 있었다. 구운 양고기, 좁쌀, 밀로 만든 빵, 그리고 밀과 좁쌀을 섞어 만든 국수였다.
신장 위구르인 지역 어느 식당에 가든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밀어 늘리는 과정을 거쳐 뽑아낸 면발을 삶아낸 후 양고기와 고추를 볶아 만든 고명을 얹은 ‘라그만(läghmän)’이란 국수를 맛볼 수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2,500년 전 인류 최초 국수의 후손이지 싶다. 튀르크족이 중심 종족인 중앙아시아 지역 어느 나라에 가도 라그만을 만날 수 있다. 다만 말은 시공간이 달라지면 소리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지역마다 라그만의 발음이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띤다. 이른바 변이형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라그만을 카자흐어로는 lağman, 우즈벡어로는 lagʻmon, 위구르어로는 leghmen, 키르기즈어로는 lagman이라고 하는데, 원래 이 말은 중국어 拉面[lamian]의 차용어다. 밀가루 반죽을 양쪽에서 당기고 늘려 여러 가닥으로 만든 국수를 지칭하는 拉面은 쇼울라미옌(手拉麵), 쳰미옌(抻麵)이라고도 부른다. 튀르크어는 /l/로 시작하는 말이 없다. 그러니까 유목민이 애호하는 국수 läghmän은 중국 감숙성 蘭州 같은 곳에서 유목사회로 들어온 것이다.
1만개 넘는 동경 라면집
파키스탄 북부 웅장한 카라코람 산맥 중에 산허리를 베어내 세워진 것만 같은 소도시 치트랄과 길기트, 훈자 주민들도 라그만을 즐겨 먹는데, 여기 사람들은 라그만이라 하지 않고, 깔리(Kalli) 혹은 다우 다우(Dau Dau)라고 부른다. 히말라야 산중의 고대 왕국 라다크 사람들은 툭파(thukpa)라는 이름의 국수와 모모라는 만두를 먹는다. 한국인은 각종 라면을 끓여먹거나 컵라면에 끓는 물을 부어 3분도 채 안돼 후루룩 먹는다. 일본은 대를 잇는 전통의 수제라면 가게가 즐비하다. 동경에는 동경 라면거리(東京ラーメンストリート)가 있는가 하면, 아예 4층 빌딩 전체에 각기 다른 라면 가게가 들어선 곳도 있다. 동경에 있는 라면집 수가 무려 1만여 개라니 일본인의 라면 사랑을 짐작할 만하다.
이렇게 국수가 동서로 또 남북으로 전파돼 어느 시점에 이르러 유럽인의 식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827년 이탈리아 반도 남쪽 지중해의 섬 시칠리아에 사나운 아랍군의 침탈이 시작되면서 부터다.
이탈리아 파스타의 유래에 대해서는 세 가지 가설이 있다. 첫 번째 가설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파스타를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는 1260~1269년, 1271~1292년 두 차례 동방으로의 여행을 했고,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1244년에 쓰인 의사의 처방전에 이미 파스타가 등장한다. 두 번째는 고대 로마시대에 벌써 파스타가 존재 했다는 가설인데,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된 폼페이 유물에서 당시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이 잘 나타나 있는데 파스타는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는 시칠리아를 점령한 이슬람 침략 세력으로부터 전해졌다는 가설로 이것이 앞에서 말한 내용과 부합된다. 1154년 한 아랍인 학자가 쓴 지리서에 시칠리아 ‘트라비아’라는 작은 마을에서 만든 ‘이트리야(itriya)’라는 이탈리아 최초의 건조국수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Itriya는 ‘국수(noodle)’를 가리키는 아랍어인데, 히브리어에 들어가서도 그대로 사용됐다. 그러나 중부·동부 유럽 국가들 및 미국 등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사용하는 독일어와 히브리어 등의 혼성 언어인 이디시어(Yiddish)에서는 국수를 ‘록심(lokshim)’이라고 한다. 벤 예후다(Ben-Yehuda)에 의하면, 아랍어 itriya는 아람어(Aramaic) itrai와 atriya와 동족어인데, 아람어 둘은 다 빵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세 단어 모두 ‘작은 케익’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itrion에서 파생된 것이다.
청명상하도에 묘사된 국수문화
열사의 땅 투르판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국수문화는 12세기 송나라에 이르러 화려한 꽃을 피운다. 30가지가 넘는 다양한 국수가 카이펑에서 탄생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한 국수문화가 펼쳐진다. 도시의 발전으로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거리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파는 직업이 탄생한다. 자연스럽게 노점 음식 문화가 발전한다. 북송 시대 한림학사였던 장택단이 카이펑의 청명 풍경을 그린 「淸明上河圖」에 묘사된 이슬람 상인들이 중국의 맛진 국수 문화를 서역으로, 지중해 일대로 전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국수 하마스는 건조면이다. 밥알 두세 개 정도 합친 정도로 짧고 가는 국수 하마스는 6개월가량 보관이 가능하다.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는 이슬람 수식문화에서는 가늘고 긴 국수를 손으로 먹는 일이 불편해서 국수문화가 발달하기 어려웠다. 이슬람 건조면 문화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등지로 전파돼 건조 파스타가 발달했다. 아네지 스파게티 박물관 소장의 19세기 나폴리에서 제작된 판화 그림 속 나폴리 사람들은 하나 같이 길 위에서 손으로 긴 스파게티를 집어먹고 있다. 시간이 흘러 파스타에 파마산 치즈 가루 대신 토마토 소스를 이용하게 되면서 건조 파스타는 이탈리아 남부를 넘어 북부 사람들도 즐겨 먹는 음식이 됐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건조 파스타를 먹게 된 것은 불과 6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제 국수의 재료는 밀가루에 국한되지 않는다. 베트남 쌀국수 퍼(pho)는 이미 전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지 오래 됐고, 중국에서는 쌀국수 미셴이 인기다. 벼나 보리 등의 식용작물 재배가 쉽지 않은 고지대에서는 메밀을 가꿔 그것으로 먹거리를 만들어 먹는다. 심지어는 도토리를 가루 내어 국수, 묵, 탕수육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름철에 즐겨 찾고 겨울에는 별미로 호사를 누리는 냉면, 막국수, 메밀국수의 재료가 메밀이다. 부탄에서는 메밀국수 푸타가 축제나 종교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신은 물론 신과 소통하고 의식을 주관하는 람(lam, 신관)에게 올리는 공양 음식 촉(Tshok)이기도 하다. 불교신자에게 촉은 공덕을 쌓고 마음을 정화하여 佛性을 가리고 있는 無明, 즉 어리석음을 걷어내기 위한 중요한 행위다.
17세기에 그려진 태국 수안 파카드 궁전 벽화에는 전통 쌀국수 카놈친 만드는 법이 묘사돼 있다. 그리고 태국에서는 어디서고 이런 쌀국수를 만들어 먹는다. 뿐만 아니라 볶음 국수 팟타이, 국물 국수 꿔이띠오우 등 인간이 못 만들어 먹을 국수 요리는 없다. 물에 알맞게 불린 쌀을 절구에 넣고 빻아 둥글게 뭉친 반죽을 끓는 물에 넣어 표면만 살짝 익힌 뒤, 식기 전에 절구로 빻아 익은 표면과 날것인 속이 골고루 섞이도록 한다. 걸쭉한 쌀 반죽을 다시 고운 망에 걸러 알갱이를 걸러내면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상태가 된다. 이것을 구멍이 여러 개 뚫린 보자기나 양철통에 담아 끓는 물속에서 빙글빙글 돌리면 쌀 반죽이 눌리면서 뜨거운 물속으로 가느다랗게 빠져 나와 국수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타이의 대표적인 전통 쌀국수 카놈친이다. 이를 삶아 국물을 부어 먹기도 하고 건더기가 많은 소오쓰에 비벼 먹기도 한다. 고명으로는 비릿하니 빈대 냄새가 나는 고소를 넣어 먹는데 이것이 더운 지방 사람들의 모기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는데 일조한다. 우리가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엊그제 나는 잔치국수를 먹으며 장수의 꿈을 옹골차게 키웠다. 어제는 볶음짜장면이라고 이름 붙인 간짜장과 울면을 먹었다. 국수를 참 싫어하던 내가 어느덧 국수 애호가가 돼 있다. 어찌된 까닭일까? 내일은 시원한 콩국수를 먹고 후식으로 나오는 甘酒도 한 대접 마실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