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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의부친 | 헤롯 대왕의 부친. 안티파테르 2세 (이두매 총독) | |||
헤롯 대왕 | 헤롯대왕1세 (BC.37년-BC.4년) 팔레스타인, 유대, 전지역 통치 | |||
부인 순서 | 둘째부인, 미리암네1세 (유대왕가 힐카누스2세 손녀) | 셋째 부인 미리암네2세 | 넷째 부인.사마리아 인 말다케 | 다섯째 부인 클레오 파트라 |
헤롯부인아들 (세지역으로 나누어진 분봉왕 시대 ) | ①큰 아들 알렉산더 처형. ②둘째 아리스토 볼로스 처형 헤롯 대왕이 왕권에 즉위하면서 처형 시킴 | 필 립1세(왕 탈락) 헤로디아의 전남편. (헤로디아의 딸 살로매). | ①아켈라오 분봉왕 . (BC.4년-AD.6년).
②안티파스 분봉왕. (BC.4년-AD.39년). 헤로디아 부적절 결혼 | ③헤롯필립2세 분봉왕. (BC.4년-AD.34년) . 살로매 결혼 |
헤롯의 손자 유대의 대왕 임명 | (쳐형된 둘째아리스토볼로스의아들과 딸) ①아그립바1세 (로마의 황가에서 망명. 유년기을 보냄) (AD.41-AD.44년) ②헤로디아 (안티바스재혼 ③동생,칼키스왕.헤롯 (AD,44년-AD,49년.지방지역.분봉왕 | |||
헤롯의증손자 | (아그립바1세 자녀들 ) ①그립바2세 (AD.50년 - AD.66) ②세명의 자매 첫째 둘째 버니게(행25:13) 셋째 두루 실라(행24:24 |
아그립바 1세 첫째 딸
아그립바 1세 둘째 딸 버니게는 동생 아그립바2세의 누이로 근친 상간의 관계
아그립바 1세 셋째 딸 두루실라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3번)하며 유대 총독 벨릭스와 부적절한 결혼.
2).유대. 예루살렘 7대 총독 통치 후 AD.41년경 아그립바1세 유대 대왕 즉위
유대 예루살렘 총독 정치 (유대 전쟁 전반전 순서 )
①1대코포니우스 총독 (AD.6년- AD.10년)
②2대 암비비우스 총독 (AD.10년-AD.13년).
③3대 안니우스 루푸스 총독 (AD.13년-AD.15년)
④4대 그라투스 총독 (AD.15년-AD.26년)
⑤5대 본디오 빌라도 총독 (AD.26년-AD.36년)
⑥6대 마루셀루스총독 (AD.36년-AD.38년)
⑧7대총독 마릴루스총독 (AD.38년-AD.41년)
3).헤롯 아그립바 1세 (AD. 41년- AD.44년) 을 비호하는 로마의 황제들
①로마 4대 클라우디우스 황제로 부터 유대 왕정 통치자로 임명 .②당시 유대에서는 고넬료가 성령을 받을때부터 안디옥 교회 설립시기 였다
{1}.사도행전 12장. 헤롯대왕 손자 아그립바 1세의 로마에서 망명 생활과 금의 환향
1.유대 혈통이기에 조부 헤롯대왕의 권좌 위협에서 로마로 도피한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 1세
1).로마 제1대 황제 아우그스투스 가문으로 도피 한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 1세의 로마 황가의 생활과 로마 황제들의 비호
(유대 헤롯 대왕은 유대 왕가 혈통이란 이유로 둘째 부인인 유대왕가 의 공주가 낳은 두 왕자을 반란 혐의로 처형시켰다 그러나 둘째 아들인 아리스토볼루스 왕자에게는 아그립바1세 라는 유대혈통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
①로마 제1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BC.27년 - AD.14년
로마 1대 황제 아우구수투스 비호을 받으며 아그립바1세는 로마 귀족 자녀들과 유년기 시절 보내게 된다
로마의 귀족의 교육과 로마 의 귀족 생활을 하게 된다
②로마 2대 황제 티베리우스 . AD.14년 - AD.37년
로마 2대 황제 티베리우스 비호을 받으며 청년기와 중년기 을 맞으면서 로마의 귀족들의 자녀들과 어울려 방탕의 생활을 하게 된다
③로마 3대 황제 칼리굴라. AD.37년 - AD.41년
로마 3대 황제 칼라쿨라와는 막후한 친구의 배경으로 칼라쿨라가 황제 등극하자 아그립바 1세을 팔레스타인 지방의 분봉 왕으로 임명되게 된다
④로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AD.41년 - AD.54년
로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등극 당시 황제의 임명 동의안을 로마 원로원으로 부터 얻지 내지 못햐는 어려움에 처하였으나
아그립바 1세는 로마 황제 가문에서 1대와 2대을 거치며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는 동안 많은 소곱 친구들이 원로원의 배경이 있었다 아그립바1세의 친분 배경으로 원로원에 승낙을 받아내자
그의 답래로 본분왕이였던 아그립바 1세을 팔레스타인 유대 .예루살렘 지역의 대왕으로 임명받게 된다
조부가 통치했던 대왕의 자리에 고아의 출신으로 로마 버려진 아그립바 1세는 헤롯인 조부가 죽은뒤 45년 만에 대왕으로 유대 예루살렘에 금의 환향하게 된다
{2}.로마 역사속에 유대의 관계
1.BC.63경 -BC.26년경 로마 삼두정치 시대상
(로마 내정이 혼란한 삼두정치 시대와 원로원의 임명으로 팔레스타인 및 유대왕위에 오르는 헤롯)
1).로마의 삼두정치 시대 로마의 삼두 수장들의 암살과 패전의 죽음
가).봄페이 장군 시대의 암살(삼두정치 1대)
나).씨이저 장군 시대의 암살(삼두 정치 2대)
다).안토니오 장군시대의 패전으로 자살(삼두 정치 3대)
(로마의 삼두 정치 1대 시대 . 삼두 수장인 봄페이 장군의 시대, 팔레스타인및 유대 예루살렘 침략 )
①로마는 삼두정치가 시작되면서 삼두의 수장인 봄페이 장군은 BC.63년에 팔레스타인 .유대을 점령 하면서 동생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있던 유대 왕가의 형인 힐카누스2세에게 동생을 축출하고 유대의 왕권을 맡긴다
②BC.45년경 로마는 삼두 머리인 세명의 장군중 한 장군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복 전쟁중 사망하자 나머지 남은 두 장군 봄페이 장군과 씨어저장군은 정권다툼으로 로마는 내란으로 혼란 상태가 되었다
(봄페이 장군의 내란 전쟁의 실패와 애굽에서 암살)
①로마의 수장이였던 봄페이 장군은 차기 씨이저 장군을 거세하려 하자 씨이저는 반란일으켜 로마의 내란 전쟁을 일으켜 씨어저는 승리하고 로마의 수장이였던 봄페이 장군은 패전하여 애굽으로 도주한다
②애굽에 도착한 봄페이는 애굽 왕정 수비대장이며 과거의 로마 장군 이였던 부하에게 봄페이는 애굽에 도착하자 암살된다
(삼두 2대 수장 씨이저 장군과 부하 안토니오의 시대)
①얘굽에 까지 끝까지 추격한 씨어저 장군은 봄페이 장군을 죽인 애굽 수비 대장이며 로마군인 이였던 자를 처형한다
② 애굽 역시 정권다툼으로 누나를 축출하고 남동생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③씨이저는 클레오파트라와 계약을 맺고 남동생을 축출하고 누나인 클레오 파트라을 애굽의 여왕으로 즉위 시키고 애굽을 정권 장악 정략으로 클레오파트라와 연인관계을 맺고 로마로 귀국한다 (애굽의 막대한 곡물이 중요한 관건이였다 )
(씨이저 장군의 원로원에서 암살)
①로마에 귀국한 씨이저 장군은 원로원의 의원이며 양아들인 부르트스에게 암살당한다
②부르트스는 원로원들과 합세하여 원로원 회의 석상에서 씨이저을 수십차레 난도하여 처참하게 암살한다
(삼두 3대 .안토니오 장군의 씨어저 암살자의 제거와 로마정국의 수습)
①암살된 씨이저장군의 직속 부하이며 집정관 안토니오장군의 암살자에 대한 제거의 계략
②씨이저 장군의 상속권자인 씨이저 조카인 나이 어린 유능한 옥타비아노스와 함께 치밀한 계략을 짜서
③씨이저을 죽인 부르트스와 암살에 가담한 원로원의원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면서 로마 정국을 수습한다
( BC37년경 안토니오 장군의 로마정국 장악과 헤롯이 등장하여 팔레스타인및 유대왕권을 임명 받게 된다)
① 한편 유대에서는 봄페이가 임명한 힐카누스2세가 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②BC.40년경. 그러나 외세의 군대을 끌어들인 힐카누스2세의 동생의 반란으로 유대가 점령당하게 되자 유대의 집정관으로 있던 이두매인 헤롯이 유대을 탈출하여 로마에 도착후
③BC.37년경 .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오에게 로비을 하여 원로원에서 왕권을 임명받고
로마군의 파병으로 유대 팔레스타인을 로마군이 정복하게되면서 헤롯은 대왕에 즉위한다
(안토니오장군의 악티움 해전에서 패전과 애굽에서 자살)
①BC.30년경-BC.27년경. 삼두 수장인 안토니오와 씨이저 상속자 옥타비아누스와 정권 내란 전쟁
②로마을 평정한 씨이저 직속 부하 안토니오장군과 씨이저 상속자 옥타비아누스와 로마의 내전 시작됐다
③옥타비아누스의 계략으로 애굽의 집정관으로 밀려난 안토니오는 클레오 파트라와 염분에 휩싸이며
두사람이 애굽에서 정권을 통치하고 있었다
④애굽에서 주둔한 로마 집정관 안토니오는 로마 옥타비아누스와 정책적 정략의 기 싸움이 시작됐다
⑤애굽의 주둔한 로마 집정관 안토니오는 애굽의 막대한 식량을 로마에 보급하지 않자 급기야 로마는 식량난에 몰리게되자 로마에 있던 옥타비우누스 는 배의 군단을 동원하여 지중해을 건너 애굽을 침공하므로 바다에서 애굽에 있던 안토니오 장군과 해전을 하였으나 보기좋게 로마 본토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함으로 전쟁의 막을 내리고 안토니오는 애굽에서 자살을 한다
⑥로마의 삼두정치시대는 끝이 나고 새로운 로마의 아우구투스(옥타비아누스)황제의 시대가 펼쳐진다
2).팔레스타인 및 유대 예루살렘 지역의 헤롯 대왕의 유대 힐카누스 혈통의 두왕자의 처형
(헤롯의 유대 혈통에 대한 열등과 유대 왕권 혈통 옹립의 반란에 대한 심각한 극도의 신경 과민 )
①BC.37년경 .로마 삼두 3대 정치 안토니오 시대에 안토니오의 세력으로 예루살렘에서 헤롯이 왕위에 오른후 유대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유대인 아닌 두매인이라는 혈통으로 인한 불안감으로 반란이 일어날 염려에 사로잡혔다
②혈통을 중요시하는 유대사회 이기에 유대 왕족인 힐카누스 와 사두개파의 반란 (유대인들의 혈통문제의 반란)을 늘 두렵게 생각했가
③헤롯은 왕위에 오르기전 유대 왕권 야망으로 자신이 이두매인이라는 타민족의 약점을 축소하려고 유대 혈통의 명분을 쌓고자 유대인 왕가의 힐카누스2세의 공주 미리암네1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결혼하고 두왕자를 낳게 된다
④헤롯은 유대 왕가 혈통인 둘째 부인 미리암네 1세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 알렉산더와 둘째 아들 아리스토 볼루스가 있었다 막상 왕위에 오른후에는 자신의 유대 왕위권을 보존하려는 데 집착했다
⑤혈통을 중요시하는 유대인들이 자신 을 제거하고 자신과 유대왕가 공주사이에서 낳은 유대 혈통의 아들을 옹립하고 자신을 폐위시킬수 있는점으로 불안하였다
⑤유대사회을 손바닥 들여 보듯 유대사회을 잘아는 헤롯대왕으로서는 유대인들이 유대 혈통인 두왕자을 옹립하는 반란으로 자신을 언제든 제거할수 있은 유대인들 이라점을 잘알고 있었다
⑥헤롯은 외교정책과 정치적.경제적 면에서는 유능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왕권에 집착과 광폭하고 과격한 성격 과 교활은 정신적인 결함까지 거론 될정도였기에 왕권에 도전의 기미가 보이면 누구든 쳐형할정도로 신경과민일 정도였다
(예루살렘. 헤롯의 첫째 부인 이두매 혈통의 왕자 장남 안티파터 모함)
① 로마 옥타비아누스 황제 시대에 로마
황제에게 석고대죄하여 재임을 하게된 유대왕 헤롯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아들인 두왕자을 처형 시키는 대 사건이 발생한다
헤롯의 둘째 부인인 유대 왕가의 혈통에 두왕자을 옹위할수 있는 유대인의 반란의 염려가 깊은 우려에 있던차에 그 내막을 잘아는 첫째 부인의 큰 아들 안티 파테 가 반란의 모함을 하게된다
②첫째 부인의 아들 이며 최고 장남인 안티파테 역시 둘째 부인 유대 혈통 두왕자을 경계하며 시기하여 차기 왕권을 지키기위해
둘째 부인 유대혈통의 두왕자에 대한 반란혐의로 무고하게 된다
③왕권도전에 대한 반란의 음모의 극도의 신경과민이던 헤롯은 둘째 부인 미리암네와 유대혈통의 두왕자 알렉산더와 아리스토 볼루스를 처형하게 된다
④헤롯은 유대 왕가의 공주인 미리암네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처형 시켰다
⑤그 이후 BC.4년 헤롯의 죽기 직전에 사흘전에 첫째부인의 최고 장남인 안티파테을 처형시킨다
2. BC27년경-AD.14년경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아우구투스)등극
1)로마 옥티비아누스 황제의 시대 개막
①안토니오 장군이 애굽의 해전에서 패한후 사망하자 로마는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했다
②로마 옥타비아누스는 어릴적부터 매우 현명하고 명석하였다
③통치력은 원로원에서 인정 받았고 옥타비아누스를 아우구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제1대 로마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로마의 황제 시대가 열렸다
④옥타비아누스 황제의 특이한 여성관으로 매우 특이한 결혼을 하게된다
⑤만찬 석상에 만난 배가 만삭이 된 유부녀에게 매혹 되여 유부녀인 여인을 이혼하게 한후 왕비로 세운다
⑥그녀가 낳은 전남편의 자녀가 제2대 티베리우스 황제이다
⑦옥타비아누스가 자녀가 없자 황비는 전남편의 자녀인 티베리우스을 황제로 추대하는대 최대한 수완으로
결국 즉위하게 된다
2). 해임의 위기를 묘면하는 약삭 빠른 유대 헤롯 대왕은 로마 옥타비아누스 황제 배알
①안토니오 장군 사후 로마의 정권이 바뀌었다. 옥타비아누스황제가 로마에 즉위하자 로마 안토니오 장군의
수하들은 로마 정권에서 축출되였다
②안토니오와 장군의 계열이며 안토니오에 충성한 헤롯대왕은 유대 왕권 해임의 위기에 놓였다.
③유대 헤롯대왕은 로마로 달려가서 옥타비아누스 황제을 배알하여 용서을 빌고 옥타비아누스 황제에게
충성할것을 다짐하며 뇌물공세와 함께 모든 지략을 동원하였다.
옥타비아누스황제는 헤롯의 재임을 인정하게된다
④헤롯은 유대로 돌아온 후 로마 황제에게 충성심을 보이기위해 가이사랴는 도시를 재건하며 황제에게
충성을 보였다
3. 로마 황제 시대의 개막과 유대 소년 아그립바1세 망명생활 시작
1).기구한 운명의 유대의 고아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로마 황제 황가의 생활의 시작
①유대 헤롯대왕이 처형시킨 두 왕자중 둘째 왕자 아리스토불루스에게 태어난 아들 아그립바 1세기 있었다.
조부 헤롯 대왕으로 부터 유대 왕가의 혈통이라는 이유로 아비는 처형 되었지만
유대 왕가 혈통을 이어받은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1세는 역시 언제 처형 될지모르는 운명이였다
②유대인들의 유대 왕가의 혈통을 옹립할수 있는 문제와 조부 권력의 광기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막강한
로마 황제 문중에 보호받을 수밖에 없었기에 로마에 망명의 처지가 된 어린 고아 아그립바 1세 불운한 운명
③아그립바1세의 망명과 피신의 생활은 로마 제1대 옥타비아누스 황제 문중의 보호를 받았으며 생활했다
옥타비아누스 황제 사후에도 로마 제2대 티베리우스 황제의 보호을 받으며 생활하게 된다.
④이러한 아그립바1세의 황제문중의 황가의 피신 생활은 로마 황족과 귀족의 인맥의 배경을 쌓으므로
로마의 귀족들 조차 훗날 아그립바1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아그립바1세의 친구이자 로마 3대 황제 칼라쿨라가 암살되자 로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황제 즉위하나 원로원에서 인증을 받지못하는 위기에 몰렸으나 원로원의 설득할수 인맥의 배경의 실력자 아그립바1세의 도움을 받는다)
2)아그립바1세를 비호하는 각시대의 로마 황제들(제1대 로마황제. 제2대. 제3대. 제4대 황제.)
(제1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BC.27년 - AD.14년). 아그립바1세의 망명 유년기는 로마 황가의 황족 교육과 생활 )
①로마 가이사랴 옥타비아누스 황제는 유대 헤롯대왕에 대하여 말하기를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라리
돼지의 자식이 낫다고“ 표현하였다
②로마 옥타비아누스 황제는 아마도 헤롯에게 처형된 왕자의 자녀인 어린아이 아그립바1세의 운명을
불쌍히 여긴 대목인것같다
③ 헤롯대왕 자신의 아들인 왕자 아리스토불루스가 처형 당한 후에 그 왕자의 자녀인 어린아이 아그립바 1세(헤롯대왕 손자)는 로마황제 아우구스트 옥타비아누스의 황제 문중에 보호을 받으며 유년기을 보내게 된다
④옥타비아누스의 임신한 여인을 황후로 간택한 것으로 보아 그의 특출한 배려의 생각은 남다르다 본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AD.14년경 - AD.37년경. 청,장 년기 로마 황가의 귀족 생활 )
①아그립바 1세는 옥타비아누스 황제에 이어서 티베리우스 황제 역시 황제 문중에서 로마 귀족의 교육을
받으며 유년기를 자라면서
②로마 황제 문중에서 같은 유년기 동갑내기 및 같은 동년배 어린 소년들끼리 철없이 어울리게 되었다
③로마 황제 문중에 소년시절과 청.장년기을 지내며 로마의 막강한 귀족들의 자녀들과 친분이 훗날 로마를
이끌고 가는 고도의 인재의 귀족들이였다
④이들은 후에 황제도 되고 원로원의 의원도 되는 로마의 귀족 엘리트 들이었다.
⑤아그립바 1세의 장래가 보장되고 촉망되는 로마의 막강한 세력들과 인맥이 쌓아지는 유년 시절이 된다
⑥로마 황제들도 평탄치는 못했다 황제와 측근들의 암살과 시해가 있는 험악한 황제의 문중에서도 아그립바
1세는 살아 남았다
⑦이런 과정속에 아그립바1세는 청,장 년기를 맞게 되며 방탕한 생황를 하게 된다.
(로마인으로 부유 황족 생활화된 아그립바 1세의 방탕과 유대 갈릴리 방문 )
①로마의 황제 문중에서 자라난 유대 아그립바 1세는 로마 귀족층생활로 청장년기 보내며 로마귀족의 자녀
들과 어울리며 방탕하며 방황하자 로마에서 잠시 쫓겨나게 된다 (누구에게선가 꾸중을 들었던것 같다)
②로마에서 유대 갈릴리 지역 분봉왕 안티바스왕 방문하게 된다(재혼한 여동생 헤로디아에게 간다)
③그시기는 AD.27년 이후 갈릴리 분봉왕 안티바스와 헤로디아와 재혼이후시기 였다
④아그립바1세의 여동생은 헤로디아 였으며 갈릴리 안티바스왕은 족보상 이복 삼촌인 동시에 매형.처남이 되기도한다 혈족간에 결혼이였으니
⑤유대 갈릴리에 온 아그립바1세 의 방탕한 생활태도는 한마디로 안티파스왕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였든지
이곳에서도 안티바스왕에게 꾸지럼을 듣고 유대을 땅을 떠나 로마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갈릴리 다녀온 아그립바1세 의 두가지 변화)
①하나는 유대 지역을 다녀온 아그립바1세의 변화는 유대교에 대한 성경 율법의 공부을 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유대사회의 유대인들의 구조와 유대인의 혈통과 유대교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공부을 하여 유대사회에 대한 유대전문가 되어 마치 유대인의 행세을 하게 된다(로마에서는 유대사회의 전문가 되었다)
②둘째는 추후 AD.39년 유대인들이 유대 갈릴리 안티바스왕을 로마에 고소하자 아그립바1세는 친구 제4대 칼라쿨라 황제에게 유대인들의 편을 들어 그를 추방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안티바스를 축출하고 그의 통치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3).로마 제3대 칼라쿨라 황제 시대(신으로 자처하며 정신적 결함있는 무서운 폭군)
(제 3대 황제 칼리굴라 AD.37년 - AD.41년 광폭한 폭군 위력 )
①로마황제는 신에 해당한다 그의 말은 곧 법이며 법의 집행자이다. 로마황제의 권력은 감히 표현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막강한 힘의 세력이였다(황제의 황명은 유대인들의 목숨은 낙엽과 같은 존재이다)
②시리아 총독이 왕의 명령에 시간을 늦추자 칼라쿨라의 귀에 들어갔다. 황제을 전통을 보내 전통을 받는
즉시 시리아 총독(유대 총독보다 상급기관이다)을 향하여 그 자리에서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③칼라쿨라 황제는 성질이 급하고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정신적 결함도 있었기에 그에게 충언한 사람들은
없을 정도의 폭군이였다
④칼라쿨라 황제가 등극한 후 아그립바1세는 황제에게 무엄한 행동을 했다.
더더욱 바른 말을 함부로 하였다는 괘심죄에 해당됐다.
다른 사람같으면 아그립바처럼 그렇게 하지못했지만 그리했다면 그 자리에서 참수형이였다.
⑤칼라쿨라 황제에게 무엄한 행동과 바른 말은 불충죄로 아그립바1세는 잠시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⑥그러한 칼라쿨라황제는 아그립바1세를 바로 석방하여 준다
⑦칼라쿨라 황제와 아그립바1세는 소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⑧칼라쿨라황제의 폭군의 기질로 아그립바1세의 로마황정에 배경은 위상을 찾지하게된다
(제3대 황제 칼라쿨라 황명 BC37년 정치적 특혜을 받은 아그립바1세 팔레스타인 지방 분봉왕으로 임명)
①칼라쿨라황제의 로마에 아무 공로도 없고 로마 가문도 없는 떠돌이 아그립바1세을 배려하는 마음은 그의 통치 시작과 함께 아그립바1세에게 특혜로 팔레스타인 북부지방을 주어 통치 왕권을 주게 됨으로 아그립바1세와 친분관계가 얼마나 돈독함을 알수 있다
②AD.37년경 레바논 지역의 헤롯 필립2세의 통치지역에 임명하였고 또다시 추가로 갈릴리 지방을 통치 영역을 확대하게 한다 실로 파격적인 인사였다.그러나 아무도 칼라쿨라의 황명의 이의를 달지 못한다.
③AD.39년경 헤롯 안티바스를 해임하고 갈릴리 지역등 추가 통치권을 임명하게된다
(AD.41년경. 제3대 황제 칼라쿨라와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
①로마 3대 칼라쿨라 황제는 광폭하고 싸이코적 폭군의 기질 은 아무도 말릴수 없었다
②이전의 황제들은 현명하여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어나기전 유대인들을 토닥이며 그들의 자존심과 온유 정책을 사용했다
③그러나 칼라쿨라 황제는 유대에 대한 심기가 대단히 불편했다 칼라쿨라황제의 유대인에 대한 분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황제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다른 식민 국가는 로마가 전쟁에 승리하면 황제에 로마 대한 존경과 환호와 환영하며 황제에 대한 제사도 열심히건만 유독 유대인들 만큼은 로마가 전쟁에 승리해도 냉대하며 로마에 대한 존경심은 없었고 더욱 성전에서 황제의 제사도 지내지 아니하며 로마에 대한 정책적 불만과 반란의 항거로 일관하며 말썽만 부리는 유대인들은 로마 정책에 대항하는 유대인들이었다.
④칼라쿨라 황제는 독특하고 건방진 작고 작은 민족 유대인들을 벼르고 있었다. 로마제국을 체면을 묵살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로마인들도 반유대인 감정이 있었던 시대였다.
⑤이전의 황제들은 온건적 태도로 정책을 펼쳐왔다
그러나 칼라쿨라황제는 사정이 틀렸다 막강한 시리아 군대을 동원하여 유대의 자존심을 철저히 뭉개트리는 작전을 하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신들을 세워서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망가트리려는 칼라쿨라의 황제는 곧 명령하게 된다
보잘것없는 아주 작은 로마 식민 민족인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망가트리고 짓밟아서 로마제국의 막강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였다
⑥한개 로마 군단으로도 전멸시킬수 있는 작은 지역의 유대지역이였기에 유대총독을 배제하고 시리아 총독과 거대한 시리아 군단을 불러들였다
(칼라쿨라 황제의 황명이 시리아 총독에게 하달 됐으며 많은 시리아 군대를 동원하였다)
①칼라쿨라 황제는 유대 예루살렘 총독 마릴루스 (AD.38년-AD.41년)가 있었으나 이를 배제하고
군사력이 많은 시리아 총독에 명령을 내린다. 빠른 시일 안에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여 성전안에 로마의 우상과 자신의 우상을 세울것을 명령한다
②시리아 군병력으로 유대인을 제압하고 예루살렘성전에 우상을 세우라는 명령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모두 참혹한 도살현장이 되어야함을 알고 있었다.
③시리아 총독은 몇날 몇일 번민하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에 문제되는일은 모든 유대인들이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는 반란을 일으키는 특수한 종교 민족이었다.
④성전에 우상을 세운다면 물불을 가리지않는 유대인들의 대 참상이 일어날것은 불보듯 예견된일이였다
⑤그러나 칼라쿨라 황제의 정신적 결함의 폭군의 명령을 설득할수도 없으며 황제의 명령을 불복하지도 못하는 벼랑 끝에 놓여있었다
(시리아 총독은 자신의 목숨의 위험속에서도 많은 유대 백성을 구한 지혜)
(시리아 비텔리우스 총독은 팔레스타인 파견된 아그립바1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①칼라쿨라 황제에게 진언할 사람은 로마 황정에 막강한 배경을 가진 황제의 절친한 친구인 아그립바1세가 있었기에 시라아 총독은 한편 천만다행이였다. 여하간 아그립바 1세는 혼쾌히 승낙하고 로마 칼라쿨라 황제을 배알하고 진언하려고 로마을 향하여 떠난다.
②이미 우상을 만드는 작업을 깍고 만드는 일을 최대한 서서히 하라고 명령한다.
③이러한 황제 명령을 시행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첩자들에 의해 로마 당국에 보고되었다.
보고 받은 칼라쿨라 황제의 분노는 무섭도록 대단했다. 머리끝까지 분노한 황제는 시리아 총독에게 전통을 받는 즉시 자결하라는 전통을 보냈다
4).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AD.41년 - AD.54년 즉위
①유대 예루살렘을 떠난 아그립바 1세가 로마 도착하였으나 이미 칼라쿨라 황제는 암살되고
새로운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하려는 시기였다.
②불시의 황제의 암살로 인한 세력 다툼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아직 임명을 받지 못했다.
③원로원에서 클라우디스 자질을 놓고 황제 임명을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④클라우디우스 임시 황제는 오랜 황정생활로 아그립바1세의 인맥의 배경을 알기에 원로원 승인을 받기
위한 로비을 부탁한다.
⑤원로원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승인 가결되었다.
5).제 4대 클라우디우스 황제 보응. 유대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총독이 아닌 왕권을 임명
①아그립바1세는 이미 두차례에 걸쳐 37년과 39년에 걸쳐 레바논과 갈릴리 두지역의 왕권을 임명받았다
②그러나 연이어 신 임황제로부터 총독의 중요지역인 유대 예루살렘지역까지 왕권을 바꾸면서 까지 통치권을 재차 임명함으로
③조부 헤롯이 죽은지 45년만에 헤롯대왕이 통치했던 팔레스타인 및 유대 예루 살렘지역까지 통일된 전지역을 통치할수 있었다
④조부의 권력으로 자신은 쫓겨 로마로 망명하였으며 조부가 자신의 아비를 처형한 불우한 고아였던 아그립바 1세의 삶이였다
⑤로마 황제 1대부터 4대까지 아그립바1세 대한 로마 황제들마다 한결같이 눈물겹도록 배려와 비호는 실로 대단했다
⑥로마황제들끼리는 서로 암투하며 암살하며 황제의 폭군적 기질속에 혼란을 보였으나 이상하리만치 아그립바 1세는 황실이 바뀌어도 황실마다 그를 아끼고 비호하고 보호했다
⑦로마황실의 막강한 배경과 보호을 받은이는 유사이래 찾아볼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로마의 배경과 영광의 자리도 4년을 누리지 못하고 아그립바 1세는 충으로 죽게 된다
(아그립바1세의 아들 아그립바2세까지도 베려와 비호가 이어졌다
로마 황실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네로 황제 베스파누스 황제까지 끊임없이 비호하였다
①AD.44년경. 아그립바1세가 죽은 뒤에도 로마 황실은 그의 아들인 아그립바2세에게도 끊임없이 배려하고 비호하였다
②AD.44년경 아그립바1세가 급격하게 죽자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한 제4대 클라디우스 황제는 오매 불망 나이어린 그의 아들 아그립바2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통치능력의 나이가 차자 어린 나이 임에도 즉각 지방왕으로 임명하는 정말 대단한 배려와 비호을 받았다
③5대 네로황제와 그이후 황제들까지도 아그립바1세의 아들 아그립바2세을 비호하였다
⑤로마 황제들끼리 서로 암살하고 암투가 있을지언정 (통상 황제들이 바뀌면 그 전임 비호세력들은 모두 제거 된다 )
⑥그러나 아그립바 1세와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예외였다 한세기을 흐르면서 유대가 멸먕하기까지
아그립바1세와 아들 아그립바2세을 비호하는 로마황실에 배려는 지속되었다.
⑦그러나 아그립바 1세 사후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도 왕권을 이어 받지만 완전한 로마인이었다.
유대 전쟁시 로마인으로서 로마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