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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초등학교장
저서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대경상록아카데미 수필 창작 회원
망일봉 가는 길
필봉 최 해 량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에 모처럼 아내와 같이 함지산에 오른다. 지난주만 해도 출근해 있어야 할 이 시각에 이렇게 여유를 누리고 있으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바빠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찾던 이 산길에 발걸음이 뜸해진 것은 승진하면서부터이다. 10분이면 올 수 있는 곳을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지 않았다니 몸보다는 마음이 많이 분주한 탓이었던 것 같다.
산입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 떠드는 소리 대신에 새소리가 정겹게 들려온다. 며칠 전 내린 비는 먼지를 미리 잠재워 두어 상큼한 내음들이 풍겨온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흙냄새인가. 온갖 나무들이 내뿜는 청량한 냄새에 머리는 맑아지고 입에서는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울퉁불퉁 고운 비탈길에는 솔가지 사이를 비집고 햇살이 비치고 봄을 재촉하며 부는 바람에 솔 이파리 그림자가 흩어지며 춤을 춘다.
오랫동안 찾지 못한 사이에 산은 아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사람들에 부딪혀 산은 온통 생채기로 가득 차 있다. 화톳길은 두서너 사람이 지나쳐도 될 만큼 넓어졌고 길 따라 들어선 아름드리나무들은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내었다. 뿌리껍질마저 다 벗겨진 그 속살을 사람들이 밟고 또 밟아 이제는 반질반질 해졌다. 한 봉우리 오를 때 마다 땀을 훔치고 숨을 고르며 또 다른 모롱이로 돌아간다.
함지산은 그리 높진 않지만 다양한 수목을 품고 있다. 맨 아래에는 참나무, 굴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조금 오르면 아카시아가 큰 키를 자랑한다. 해평 솔은 산 중턱에서부터 골고루 분포하며 사이사이로 춘양목이 고운 색깔을 자랑한다. 봉우리에는 고산지대에서나 자람 직한 싸리나무, 떡갈나무들이 나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만나고 그들이 내뿜는 향기를 맡으며 아름다운 봉우리를 서 너개 넘고 또 모롱이를 지나서야 망일봉을 만날 수 있다.
망일봉은 해를 맞는 봉우리란 뜻이다. 해마다 신년이 되면 북구청의 해맞이 행사가 이곳에서 펼쳐진다. 새해 축원을 기원하며 소망을 비는 행사에 구민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다. 270여 미터의 낮은 봉우리지만 무태, 동변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만치 햇살에 반짝이며 흐르는 금호강이 발아래 펼쳐진다. 골바람은 산을 타고 올라와 땀을 식히고 막혔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준다. 봉우리에는 먼저 올라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땀을 식히고 담소를 나눈다. 칠곡에서 온 사람들 외에도 조야동, 노곡동 심지어 동변동, 서변동에서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강북 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즐겨 찾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등산화를 신지 않아도 좋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는다.
산은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준다. 정상을 향해 묵묵히 걸으며 복잡한 일상을 비우고 재충전을 한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하며 힘을 얻는다. 실의에 젖은 사람들에게는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생각하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해 주고 위로를 준다. 나약한 이들에게는 건강한 몸을 위한 단련처가 되어준다. 직장을 잃고 갈곳 없는 사람들도 산에서는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 산은 이제 강북 주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나도 이제는 망일봉을 자주 찾을 것이다. 산이 품어주는 넉넉함에 몸을 맡기고 이름 없는 나무며 풀과도 친숙해질 것이다. 나무가 품어내는 향기를 맡으며 새소리에 쉼을 얻을 것이다. 이웃 주민들을 새롭게 사귀며 이 공간에 쉼터를 잡을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인생 2막을 펼쳐갈 것이다.
끝없는 사랑
필봉 최 해 량
가을이 무르익어 가던 날, 추색을 좇아 나들이에 나섰다. 남쪽에서는 빛이 바래 가는 단풍이 여기서는 절정이다. 눈으로 무수한 영상을 찍으며 남한강 호수 길을 느릿느릿 달리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아침먹이 사냥에 나선 왜가리가 한 폭의 동양화를 그리고 있었다. 산모롱이를 돌아가자 길가에 애완견 한 마리가 쪼그리고 앉아 오고 가는 차들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 한적한 곳에 웬 말티즈?”
우리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 그리고 한 시간쯤 후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니 그 녀석은 꼼짝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우리를 더욱 자세히 쳐다보고 있었다. 유기견 임을 직감했다. 빨간 목줄을 한 제법 귀여운 녀석인데 어쩌다가 버림을 받았을까? 애절하게 바라보는 눈망울을 외면할 수 없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너,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니?”
“어제 저녁부터요.”
“저런, 밤새 추웠을 터인데 무얼 먹긴 했니?”
“…….”
“사는 곳은 어디니?”
“잘 몰라요. 집안에서만 살아서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아마 네 주인이 너를 버린 것 같은데 유기견 보호센터에 데려다 줄까?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살면 좋겠는데 나 는 개를 아주 싫어한단다. 개는 개처럼 길러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 람이거든.”
내 말에 녀석은 화를 버럭 내었다.
“우리 엄마는 절대 나를 버릴 분이 아니에요. 그런 소리 하려거든 가든 길이나 가세요.”
녀석의 아픈 마음을 후벼 팠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들었다.
“미안해. 내가 실언을 했어. 네 집 식구는 모두 몇이니?”
“넷이요.”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니?”
“별 걸 다 묻네요. 엄마, 나, 언니 그리고 아저씨 이렇게 넷이에요.”
“그럼 요즘 집에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니?”
“글쎄요.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랑 아저씨가 나 때문에 한 번씩 다투기는 했어요.”
“무슨 일로?”
“아저씨 때문이지요. 자기가 나보다 못하다나 뭐, 그런 이유였어요.”
“그런 까닭으로는 너를 버리지 않았을 텐데. 더 생각해 봐”
녀석은 나의 재촉에 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사실 요즘 내가 실수를 하긴 했어요.”
“어떤?”
“밥투정을 했지요. 아저씨가 명퇴를 당했다나 어쨌다나 그 이후부터 내가 먹지도 못할 사료를 막 주는 거에요. 거기에다가 명태포나 육포 간식도 딱 끊는 거에요. 그래서 소리를 좀 질렀지요. 그러면 아저씨가 막 화를 내는 거예요. 참, 어이가 없어서”
이 녀석이 버림 당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알겠다. 너 여기서 계속 기다려 봐야 주인이 올 것 같지 않은데 내가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게. 어쩌면 그곳에서 전보다 더 좋은 주인을 만날 수 있어.”
“싫어요. 나는 여기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엄마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어서 길이나 가세요.”
나는 녀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었다.
1달러의 애환
필봉 최해량
나른한 봄기운을 이기려고 가산산성에 올랐다. 혜원정사를 지나 임도를 버리고 돌부리 군데군데 튀어나온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10여분을 오르자 갑자기 귀엽고 앙증맞게 생긴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왔다. 발꿈치를 들고 일어선 녀석은 이내 앞발을 모으고 나를 바라본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흡사 공손한 선비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예를 나타낸다고 하여 5 덕의 상징으로 사랑받던 녀석이다. 나도 반갑게 답례했다.
“귀여운 친구, 안녕!”
예를 마친 녀석은 잽싸게 다른 나뭇가지로 올라갔다.
‘저렇게 귀여운 녀석이 1달러에 팔려갔다니!’
우리가 지지리도 못살던 1970년대에 다람쥐는 수출 효자 동물이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찮게 여겨지는 금액이지만 당시 1달러는 큰돈이었다. 이 돈을 벌기 위하여 다람쥐 잡이 전문꾼 들도 생겨났고 연간 30만 마리의 다람쥐가 수출되었다고 한다. 다람쥐뿐만 아니라 여인들의 삼단 같은 머리는 가발로 팔려나갔고 소변까지 수출했다. 이런 몸부림은 우리가 수출대국에 진입하고서야 겨우 멈췄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여름철이면 우리 마을 앞 갱변에 미군들이 야영을 왔다. 이 이색 풍경은 우리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꽁보리밥 도시락을 사들고 훈련하는 장소를 따라다녔다. 어쩌다 꽁보리밥과 그들의 전투 식량 시레이션을 바꿔 먹자는 제의를 받는 운 좋은 날도 있었다. 그 일은 우리에게 큰 무용담이었다. 미군들이 사격한 뒤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탄피를 주워 공기총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는 지프차를 따라가며 “키브 미, 쪼꼬렛”을 연발했다. 먼지 날리는 길을 달려오는 아이들이 가련했던지 껌이나 초콜릿을 던져주면 서로 먼저 주우려고 야단이었다. 어쩌다 1달러 지폐라도 한 장 얻으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철조망 밖에서 바라보는 식사 시간은 더 경이로웠다. 치킨과 오렌지를 받아 드는 식단을 우리는 침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이번 여름 아프리카 선교여행을 다녀왔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빈민촌에 교회를 세우고 헌당했다. 흑인 빈민촌은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비참했다. 양철과 판자로 비바람이나 겨우 막을 수 있도록 지어진 네댓 평 크기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좁은 집 안에 대여섯 명의 식구가 산다고 한다. 화장실은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집과는 불과 수 미터 거리에 있었다. 예전의 가난했던 우리 모습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우리 일행들은 그들과 함께 일을 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힘이 들었지만 손짓 발짓은 만국 공용어로 손색이 없었다. 일하는 순서가 달라 서먹서먹했지만 땀은 교감의 통로가 되었고 열정은 언어를 이기는 힘이 되었다. 밀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으며 페인트칠을 하면서 친구가 되어갔다. 그렇게 지어진 양철 교회는 하나님 앞에 바쳐졌다. 비록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도 이들은 강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행색이 아무리 초라해도 누구 하나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축복받는 사람들이 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선교여행을 마치고 먼저 귀국하는 일행과 작별하고 친구 한 사람과 남아공 주변의 잠비아, 짐바브웨, 케냐를 돌아보기로 했다. 먼저 케냐의 마사이마라로 향했다. TV에서나 보았던 수십만 마리의 누 떼와 얼룩말 무리가 마라강을 건너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수도 나이로비에서 사파리 전용차를 타고 시내를 벗어난 지 두 시간, 비포장도로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사바나 기후가 만들어내는 건조함은 자동차 바퀴가 자나 갈 때마다 싯누런 먼지를 토해냈다. 그렇게 두 시간여를 더 달리자 키 큰 아카시아 나무들이 덤쑹덤쑹 서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접어들었다. 빨간 망토를 걸치고 허리에 칼을 차고 손에는 막대기를 든 키 크고 깡마른 사람들이 지나간다. 바로 마사이족들이다. 양 떼를 몰고 가는 목동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차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막무가내다. 자기 땅에 들어온 우리를 이방인으로 여길뿐이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염소와 양들이 엠메 엠메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길은 더 험해지고 우리 몸은 좌우로 더 흔들리며 춤을 춘다. 자그마한 언덕을 내려가니 개울이 나왔다. 그런데 길 가운데 긴 장대를 가로 걸친 마사이족 한 사람이 우리를 막아섰다. 통행세를 받는 것 같았다. 운전 기사는 이런 모습이 익숙한지 차에서 내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손에 1달러를 쥐어 주었다. 그 사이 한 소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차창 밖에서 손을 내밀었다. 얼른 허리 가방을 뒤져 간식으로 준비해 간 과자 몇 개를 손에 쥐어 주었다. 거친 피부에 맨발, 눈이 퀭한 그 아이는 고맙다고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웃음 머금은 얼굴로 답례했다. 어린 시절 우리 마을 앞에 찾아온 미군들에게 손을 내밀던 내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지지리도 없이 살아 다람쥐까지 잡아 1달러에 수출했던 우리의 모습들을 오늘 이곳에서 발견하고 순간 가슴이 멍해졌다.
‘아이야, 용기를 잃지 말고 꿈을 가져라. 가난의 굴레도 벗어 버려라!’ 마음으로 끝없는 응원을 하며 누 떼가 부르는 마라강으로 향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