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두지파(3) - 유다 지파 / 창 49:8-12
터미널에 가면 자동 승차권 판매기가 있습니다. 구간을 선택한 다음 카드나 돈을 넣으면, 차표가 나옵니다. 기계는 그냥 기계일 뿐입니다. 기계는 누가 무엇을 하기 위해 가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만큼의 액수만 넣으면, 누가 돈을 넣든 상관하지 않고 표를 내놓습니다. 자기 집에 가든, 친구 집에 가든, 아니면 여행을 가든, 가족과 다투고 집을 떠나가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가는지 묻지 않습니다. 카드나 돈만 넣는다면, 도둑질을 하기 위해 차를 타는 사람에게도, 표를 내놓습니다. 물론 다른 자동판매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드나 돈만 넣으면, 사탕이 나오고, 장난감이 나오고, 음료수가 나오고, 심지어 음식도 나옵니다. 기계는 말이 없습니다. 이가 썩은 아이가 사탕을 사기 위해 돈을 넣어도, 기계는 무어라 하지 않습니다. 기계는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그냥 카드나 돈만 넣으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기도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향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하는 기도는, 마치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는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동판매기에 돈을 많이 넣으면 많이 나오고, 적게 넣으면 적게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은 복을 받고, 적게 하면 적게 받는다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무조건 많이 하면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방인들의 생각입니다. 이런 단순한 생각은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주어지지 않을 때 의아하게 여기거나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무조건 많이 한다고,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달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로 하여금,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세워나가십니다. 때로 기도 응답을 통해 위로를 주기도 하시고, 때로는 거부하기도 하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이런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지, ‘하늘에 있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을 ‘하늘에 있는 전능한 기계시여!’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열두 지파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상고하고 있습니다. 연속 설교의 특성상, 앞의 내용과 일정부분 겹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에서 형성됩니다. 야곱이 네 여인에게서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정리해 보면, 레아에게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여섯 명을 낳았습니다. 라헬에게서 요셉과 베냐민, 두 명을 낳았습니다. 레아의 종 실바에게서 갓과 아셀, 두 명을 낳았습니다. 라헬의 종 빌하에게서 단과 납달리, 두 명을 낳았습니다. 야곱에게서 자손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입니다. 야곱은 3대 신앙입니다. 1대인 아브라함, 2대인 이삭에 이은 3대 신앙입니다. 1대 신앙이었던 아브라함은 고생을 무던히도 했습니다. 그에 비해 2대 신앙이었던 이삭은 비교적 형통했습니다. 그런데 3대 신앙이었던 야곱이 고생을 꽤나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3대 신앙이면, 신앙을 꽃피울 거 같은데, 의외로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장자권과 축복권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자기 잔머리를 굴리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아버지와 형을 한 번 속였는데, 삼촌한테 자기는 10번이나 당했습니다. 단순한 사기를 당한 것도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혼 사기를 당했습니다. 자기가 그토록 사랑한 라헬이 아닌, 레아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칠년 머슴살이가 자칫 허사가 될 뻔한, 일생일대의 아찔한 위기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속사정이 있습니다. 외삼촌이란 사람이 조카의 그런 약점을 이용하여 결혼 사기를 쳤다는 데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라반이 갑으로서, 을인 야곱에 대해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 말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처음 칠 년 동안은 기쁨으로 머슴살이를 했고, 다음 칠 년 동안은 어쩔 수 없이 했습니다. 수단이 좋은 라반이, 레아와 결혼 후, 일주일 만에 라헬과도 결혼을 시킴으로, 야곱의 의심을 불식시키긴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일주일 만에 결혼을 두 번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혼생활을 출발했으니, 야곱이 레아를 마음에 들어 하겠습니까? 처음부터 야곱의 마음은 라헬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마음에 들어 한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29:17-18절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단지 라헬이 예뻐서였습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이처럼 남자들에게는 단순한 면이 있습니다.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문제는 이런 말이 근래에 들어 나온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4세기 경 이야기입니다. 그리스에서 프리네(Phryne)란 고급 매춘부가, 신성모독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애인이자 변호사인 히피리데스가 “이렇게 아름다우니 용서해달라”며, 재판원들 앞에서 옷을 벗겼고, 그걸 본 재판원들은 아프로디테의 현신이라며 무죄선고를 내렸다고 합니다. 아프로디테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와 사랑의 여신입니다. 웃기지도 않지만, 남자들의 심리를 시사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예쁜 라헬을 얻고자 결혼도 두 번하고, 안 해도 될 머슴살이도 7년 더 했습니다. 야곱의 가정은 한 남편을 두고, 두 아내가 경쟁을 해야 하는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레아도 행복하지 않고, 라헬도 행복할 수 없는 환경이 설정되었습니다. 그럼 두 여자와 사는 야곱은 행복했을까요? 두 아내 사이에 끼어 있는데, 야곱인들 행복할 리가 있겠습니까? 야곱은 티 나게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레아는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함에, 자신을 불행한 여자라고 여겼습니다. 남몰래 속울음을 삼켜야 했고,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잦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레아의 그런 모습이 영~ 안 돼 보였던 모양입니다. 레아의 그 딱한 사정에 짠한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의 가정에 개입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1. 유다 지파의 기원
창 29:31-35절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의 태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첫아들 르우벤이 태어났습니다. 르우벤은 레아의 희망이었습니다. 르우벤은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반전의 카드였습니다. 아무리 예쁜 라헬이지만, 아들을 낳아준 자신을 당해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레아의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습니다. 정말 야곱이 레아를 자주 찾아왔습니다. 레아가 좋아서라기보다, 르우벤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뭐 그러면 어떤가요? 자기 품에 안긴 르우벤 아닙니까? 레아는 자기의 괴로움을 돌보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아무도 자기 괴로움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자기 괴로움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괴로움을 돌보십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고 돌보십니다. “돌보다”라는 말은 국어사전에서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각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우리를 얻기 위해서,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얻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 제단에 희생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에게서 한 순간이라도 눈을 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한 레아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레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시므온입니다. 레아는 아들을 낳고, 기도 응답의 아들이란 뜻으로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지었습니다. 레아는 시므온을 볼 때마다, ‘너는 내 기도 응답의 아들이다’란 마음을 가졌습니다. 시므온을 낳자, 잠시 발길이 뜸해졌던 야곱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레아는 시므온을 낳을 때의 해산의 고통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응답도 받았고, 남편 사랑도 회복했으니, 레아에게는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물론 잠시지만 말입니다. 기도 응답을 받아 둘째 아들을 낳았던 레아는, 하나님께 아들을 또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레아에게 꽤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가 레위를 낳은 것입니다. 레위란 이름의 뜻은 ‘연합’입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은 배경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앞에서 “잠시지만” 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이 때문입니다. 라헬은 아들을 하나도 못 낳았는데, 자기는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도, 남편의 사랑을 만족스럽게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레아는 셋째 아들에, 다시 희망을 걸어봅니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야곱은 야곱대로 처신하기가 어렵습니다. 레아는 레아대로 불만이겠지만, 아들을 갖지 못한 라헬을 생각하면 안 돼 보입니다. 아내를 둘 둔 남자의 비극입니다. 셋째 아들 레위를 낳았지만, 레아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불안해서였습니다. 레아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이 이어져 넷째를 낳았습니다. 레아는 넷째 아들의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유다란 이름의 뜻은 ‘찬송’입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 레아가 이제는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나보구나!’이고요, 다른 하나는 ‘레아가 남편의 사랑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했나보구나!’입니다. 저는 후자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레아의 신앙이 그만큼 성장했을 것으로 봅니다. 레아는 자신이 여태껏 ‘남편 바라기’로 살아왔음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라헬에게 가 있을 때, 마음이 불편하여 견딜 수가 없어,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자기에게 손해였습니다. 평생을 이렇게 살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넷째를 낳고는, 내가 이제는 ‘주바라기’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바라기’로 ‘명예바라기’로 ‘권력바라기’로 ‘건강바라기’로 ‘사랑바라기’로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이 시간 나는 여태껏 무슨 바라기로 살아왔는가를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남은 삶을 ‘주바라기’로 살기를 바랍니다.
2.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
창 49:8-12절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야곱은 죽기 전 유다를 뭐라고 축복했습니까? 유다에 대한 축복의 핵심은 이거였습니다.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태어났을 때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 찬송입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기도의 내용이 찬송입니다. 이게 우연의 일치일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유다가 자기 이름대로 살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았더니, 그 형제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는 열두 형제 중 넷째입니다. 그럼 그가 형제의 찬송이 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름대로 찬송의 삶을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를 찬송의 대상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교단 헌법 요리문답에 보면 “사람의 첫째 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삶 전체를 바쳐,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가 답입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유다의 이야기를 우리 삶에 적용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받은 축복의 핵심 둘째는 이거였습니다. 10절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규”는 왕권을 상징합니다. 왕이 궁중 집회 때,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규를 휴대하였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이 나오고, 만왕의 왕 그리스도가 나오게 됨으로, 이 축복은 성취됩니다. 성경은 유다의 치부를 한 장에 걸쳐서 드러냅니다. 창세기 38장 전체가 부끄러운 유다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의 예언적 축복기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죽이자고 한 시므온을 설득하여 요셉을 살린 점과, 양식이 떨어져 애굽에 베냐민을 데려가야 할 상황에서, 유다가 보여준 희생과 책임의 리더십이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규를 맡기는 축복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지파에나 규를 맡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찬송 돌리는 삶, 다른 말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에게 맡기셨습니다. 희생과 책임의 리더십을 보이는 사람에게 규를 맡기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후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을 말씀합니다. 계 20: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우리에게 “규”가 맡겨질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걸 바란다면, 이 땅에서 이제는 찬송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주를 위해, 주의 몸을 위해, 주의 복음을 위해, 희생과 책임감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3. 유다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
모세도 죽기 전 열두 지파에게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유다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은, 르우벤 지파에 이어서 나옵니다. 열두 지파 강해 첫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르우벤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은, 축복인 듯 아닌 듯, 아리송한 면이 있습니다. 신 33:6절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안 죽고 살 거라고 하니 축복이긴 한데, 다른 번역서로 볼 때, 이걸 과연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긴 합니다. 확인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새) 신 33:6절 ‘르우벤은 비록 그 수는 적으나, 잘 살게 하여 주십시오, 절대로 망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공) 신 33:6절 ‘르우벤은 죽이지 않고 살려두리라. 다만 얼마만이라도 남겨두리라.’
르우벤 지파에 이어서 유다 지파의 축복이 나옵니다. 신 33:7절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그들의 음성을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모든 대적을 쳐서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야곱의 축복 기도 내용과 거의 흡사합니다. 태어날 때의 엄마의 축복과, 아버지가 죽을 때의 축복기도와, 모세가 죽을 때의 축복기도가 일치하는 것은, 신기하기만 합니다. 유다가 자신의 일생을 이름대로 사는 것도 힘든데, 그 후손 곧 유다 지파가 이름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지파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우리 당대는 물론이고, 다음대까지 잘 믿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가문이 대대로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4. 유다 지파의 지리적 위치
수 15:1-12절 ‘또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남쪽으로는, 에돔 경계에 이르고, 또 남쪽 끝은 신 광야까지라. 또 그들의 남쪽 경계는 염해의 끝 곧 남향한 해만에서부터, 아그랍빔 비탈 남쪽으로 지나 신에 이르고, 가데스 바네아 남쪽으로 올라가서 헤스론을 지나며, 아달로 올라가서 돌이켜 갈가에 이르고, 거기서 아스몬에 이르러, 애굽 시내로 나아가 바다에 이르러, 경계의 끝이 되나니, 이것이 너희 남쪽 경계가 되리라. 그 동쪽 경계는 염해이니 요단 끝까지요, 그 북쪽 경계는 요단 끝에 있는 해만에서부터, 벧 호글라로 올라가서 벧 아라바 북쪽을 지나, 르우벤 자손 보한의 돌에 이르고, 또 아골 골짜기에서부터 드빌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서, 그 강 남쪽에 있는 아둠밈 비탈 맞은편 길갈을 향하고, 나아가 엔 세메스 물들을 지나 엔로겔에 이르며, 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올라가서, 여부스 곧 예루살렘 남쪽 어깨에 이르며, 또 힌놈의 골짜기 앞 서쪽에 있는 산 꼭대기로 올라가나니, 이곳은 르바임 골짜기 북쪽 끝이며, 또 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넵도아 샘물까지 이르러 ,에브론 산 성읍들로 나아가고, 또 바알라 곧 기럇 여아림으로 접어들며, 또 바알라에서부터 서쪽으로 돌이켜 세일 산에 이르러, 여아림 산 곧 그살론 곁 북쪽에 이르고, 또 벧 세메스로 내려가서 딤나를 지나고, 또 에그론 비탈 북쪽으로 나아가, 식그론으로 접어들어 바알라 산을 지나고, 얍느엘에 이르나니 그 끝은 바다며, 서쪽 경계는 대해와 그 해안이니, 유다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사방 경계가 이러하니라.’
유다 지파가 분배 받은 땅 중에, 꽤 유명한 곳이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라헬이 장사된 곳입니다. 기브아에서 윤간당해 죽은 레위인 첩의 고향이고, 룻 이야기가 전개된 곳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왕정 시대까지는 중요한 장소로 꼽혔으나, 주전 8세기에 가서는 명성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초라해진 베들레헴이, 다시 크게 쓰임 받게 됩니다. 메시야가 그곳에 태어나심으로 인해서입니다. 구주 예수 탄생을 위해, 지구상에서 단 한 장소가 선택을 받는데, 그곳이 베들레헴입니다. 유다 지파 내에서 베들레헴보다 더 유명한 곳이 있는데 예루살렘입니다. 유다 지파가 차지하고, 유다 지파가 만든 예루살렘은, 오늘날 종교의 심장부로 불립니다. 세계의 3대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발생한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예수님의 예언대로 티투스에 의해 함락됩니다. 그후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주후 313년 박해가 그치고, 그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로 회복됩니다. 주후 637년에 이슬람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은 회교도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게 500년간 지속되면서, 기독교 유적지는 이슬람화 됩니다. 오늘날 예루살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오마르 황금사원은 691년에 완공된 것입니다. 12세기에 유럽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원정을 오면서, 예루살렘은 기독교 색채를 가진 도시로 변했다가, 이집트 무슬림 맘루크가 예루살렘을 장악하면서, 다시 이슬람식으로 변했습니다. 그후 1517년부터 오스만 투르크가 400여년간 지배를 하면서, 이슬람 양식이 강화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위임 통치 아래 있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1948년에 독립하면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수도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모두 성지로 여기므로, 국제법상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특별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헌법상으로는 예루살렘이 수도지만, 국제법상으로는 텔아비브가 수도입니다.
5. 유다 지파의 상징 보석
출 28:15-21절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유다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은, 첫째 줄 맨 앞에 나오는 홍보석입니다. 홍보석은 다른 말로 홍옥수이고, 카넬리안(carnelian)이라고도 합니다. 카넬리안은 오직 왕족에게만 허락되었던 보석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넬리안은, 유다 지파에 잘 어울리는 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의 별명은 선두 지파입니다. 행진할 때도, 전쟁할 때도, 유다 지파는 항상 선두에 섰습니다. “하나님, 누가 먼저 올라갈까요? 누가 먼저 나아갈까요” 하고 물으면, 하나님의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유다가 먼저 가라.” “유다가 선두에 서라.”였습니다. 삿 1:1-2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삿 20:18절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 일순위 지파였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유다 지파를 상징하는 홍보석이, 대제사장 흉패에 붙이는 열두 보석 중에 첫째 줄 첫 번째에 위치합니다.
하나님의 선택 일순위가 되는 사람이 복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교회가 하나님이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팀 경기를 할 때 주전 선수와 비주전 선수가 있습니다. 축구나 야구의 예를 들면, 센터라인, 또는 척추라인이라는 게 있습니다. 다른 포지션도 중요합니다. 중요하지 않는 포지션이 없지만, 특히 센터라인이 견고하지 않으면, 팀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맨 먼저 센터라인에 들어갈 선수 이름을 적고, 그후 나머지를 채워나갑니다. 감독이 가장 먼저 이름을 적을 수 있는 선수가, 바로 그 팀의 핵심선수이고, 그게 그 선수의 복입니다. 홍보석의 히브리어 본래 뜻은, ‘아주 붉고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붉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화려하게 붉은 것입니다. 홍보석은 풍성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보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일에 선두에 서길 기뻐하고, 하나님의 선택의 일순위가 되는 사람으로, 풍성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갖춘 홍보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다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추한 일도 많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이루고 있는 신앙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마음과 적극적인 신앙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섬김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유다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은 유다지파는, 무서운 광야를 지날 때에, 앞장서서 행진을 했습니다. 유다지파는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도, 맨 앞에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유다와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앞장서서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유다지파를 남달리 사랑하셔서, 넘치는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에 앞장선 유다지파의 삶의 지혜를 본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시므온과 같은 삶의 모습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이 아니라 유다와 같은 삶의 모습으로 살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까이 나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들을 기억하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유다지파가 하나님의 일에 앞장선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우리의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유다지파처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풍성한 축복을, 함께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