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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글을 먼저 읽으셔야 합니다. => 이스라엘 땅 12, 중동문제의 근본 해법(1)
** 에스겔 희년왕국은 세상 종말이 오기 전에 이 땅에서 성취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당면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겔 37:24,25)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성경이 말한 내용 중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들이 몇 개 있다.
그 첫째는 경제를 다루는 레위기 희년법을 경제적으로 이해하고, 바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성경이 가르쳐 준 희년법을 두고도 토지시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토지를 레 25:23의 말씀대로 사유와 양도만 금지하면, 기간(장기)이나 납부방식(일시불)은 어떻게 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땅은 중국러럼 국공유지로 두어도 사용료(임대료)가 공짜 또는 저가 임대이면, 그 토지는사유토지처럼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이런 시장원리를 잘 모르고 있다.
앞에서 말한대로 처음 제정한 49년 임대와 시한부 기간 거래제도(레 25:15,16)에 대하여, 그 제도가 가진 합리성과 의미에 부합하는 시장 임대료를 책정, 징수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이 문제다. 그들은 구약시대부터 계명을 지키려고 했으나 아직도 지키지 못하거나 해석과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 희년법이다. 그런 희년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여 현실적 적용 방식을 찾아낼 수가 있다.
임대제도는 임대료를 시장가격대로만 징수하면 임대기간이나 거래방식은 문제가 없다. 토지임대 기간이 종료되면 기간을 갱신하여 임대를 계속하면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성장경제에서 고정된 가격과 자본거래 방식을 택하니 토지가 사유제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토지 거래를 금지한 상태에서도 토지 사유제와 같이 땅값(프리미엄, 매매차익)이 발생하여 부동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사회는 방법론을 두고 다시 논쟁과 갈등을 발생시키고 있다.
둘째는 그들이 선지자로 알고 있는 이사야와 이사야서의 내용을 온전하게 믿어야 한다.
이사야서 53장에서 말하는 메시아가 받은 고난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그들은 이사야서를 읽어도 53장이 나오면 읽지 않고, 그냥 넘겨버린다는 일화가 있다. 53장은 메시아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간고를 겪고 죽어야 하는 사실(사 53:3,4)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징계를 받거나 찔림을 당하여 죽어야 하는 이유(사 53:5,10)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이사야 58장이나 61:1,2,3이 말하는 희년에 대해서는 세상 종말이 와야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메시아가 와서 희년을 성취해 주기만을 기다린다. 희년이 세상 마지막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은, 희년에 대한 현실도피적 성향이 강한 기독교와도 비슷한 입장이다.
이사야 53장에 대한 바른 이해와 수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야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받으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재림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들은 이사야서 53장을 해석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중시는 성경 말씀에 대한 무지를 보이고 있으며, 성경 말씀을 스스로 빼버리는 실수를 하고 있다.
셋째는 에스겔 선지자가 알려준 미래에 대한 계시를 잘 모르고 있다.
에스겔서는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에 흩어져 살다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회복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에스겔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언 그 당시 필요했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에스겔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신약시대, 곧 주후 70년 성전 파괴와 132년 바르 코크바 반란 후 세계로 흩어진 모든 백성들이 돌아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잃어버렸던 땅을 다시 찾아서 정상적인 나라를 세우는 일이 모두 포함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문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은 이미 죽은 지 3,000년이 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죽은 다윗이 다시 살아서 왕이 될 수는 없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들이 거주하는 땅에 다윗이 영원히 왕이 될 것이라는 본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예언은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부정했기 때문에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들은 12지파의 백성들이므로 그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에서 영구히 살게되면, 그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혈통을 이을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소위 정통 유대인들은 지금도 족보를 따지고 있다. 부계나 모계 혈통에서 4대가 그들의 조상임을 증명해야 유대인의 신분을 인정한다. 그러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족보에서 다윗 왕의 왕통과 아브라함의 상속권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성경의 족보(역대기, 마태복음, 누가복음)를 따지고 또 살펴서 그 후계자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들은 세계에서 노벨상 수상자 가장 많이 낼(20% 이상) 만큼 똑똑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머리와 지혜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기업의 상속권과 다윗에게 약속한 왕통을 이어온 자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왕통을 이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베들레헴에서 기업 상속권을 이은 자도 예수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3,500년간 레위기 희년법을 무시하고, 불순종한 사실에 대하여 속죄해야 한다. 2,700년 동안 눈여겨보지 않은 이사야 53장의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로 이미 2,000년 전에 오셨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둔함을 회개하고, 되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에스겔이 가르쳐 준 말씀대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왕의 토지를 내어놓어야 한다. 그리고 외국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여 희년법을 준수해야 한다(겔 45~48장).
이스라엘은 신관이 바뀌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유일신을 믿으며, 그 유일신 중에서도 단일신 사상을 가진 민족이다. 특히 정통 유대교인(하레딤 또는 하시딤)과 정통은 아니지만, 보수적인 유대교인들(마소라티임)은 신앙심이 투철하다. 이들의 투철한 신앙심은 기독교인들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유대교의 유일신은 단일신이다. 하나님은 있어도 그들에게 성자와 성령을 하나의 신격으로 보는 개념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3위의 하나님은 하나로 믿는 삼위일체 유일신 사상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하신다. 하나님을 말하는 “엘로힘”은 복수다. 그러면서 동사는 단수로 쓰인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다. 여기서 신의 표현인 복수인 '엘로힘'과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한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유대교는 일위일체
여기서 우리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삼위일체설을 끄집어내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바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가 한 분이시지만,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은 오직 일위일체(一位一體) 한 분이신 단일신이다. 그래서 유대교는 기독교에 비교하면 신관이 편협하고, 종교는 배타성이 더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지나치면 삶에서, 인간관계에서 독단적인 신앙의 속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기독교인들 중에도 근본(원리)주의는 유대교와 비슷한 성향이 있고, 이원론에 심취한 신앙은 편파적 세계관을 가진다).
유대교는 메시아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은 레위기 희년법은 물론 제사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소, 양, 비둘기)이 죽어서 내 죄가 속해지는 것이 레위기 제사법이다. 내가 팔아먹은 몸값과 땅값을 형제나 이웃이 값을 치러서 찾아주는 것이 무르기 속량이며, 이것이 희년법의 골격이다. 이러한 무르기나 속량의 법은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완성된다.
그런데 단일신 사상이 강한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신 것을 모르며, 우리 죄를 사해주기 위해 일으킨 십자가 희생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영이 지은 죄의 문제와 육이 지은 경제(빚) 문제를 내가 해결하지 못하면, 이를 남이 대신하여 무르거나 희생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난한 자에 대한 시혜가 구제인 것은 알아도 속량은 잘 모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거나 무르기를 하여도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 맹목적으로 지키는 것이 되고 만다. 드리는 제물은 인과응보의 대가이거나 신에게 바치는 헌물일 뿐이다.
기독교는 속량과 대속의 종교이고, 생활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이 타인에게 피해를 보면 정면 대항으로 바로 갚아주는 것이 문제의 해결 방식이다. 이것이 구약이 말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탈리온(동형보복)'이다(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라도 줄이면 먹이라고 한다). 그래서 같은 단일신 사상을 가진 이슬람과의 대립과 갈등에는 그 해법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동형보복' 사상을 가진 유대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는 어느 한쪽이 승자가 되든, 패자가 되어야 끝이 나고, 다른 해법이 없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상생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준 복음에는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과 유일한 해법이 들어있다. 그것은 약자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강자가 대신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이다. 그것이 값을 대신 치러주는 희생 제사와 무르기다. 그러므로 지금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중동권 국가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영토문제와 민족적 앙금이 깊이 배여 있는 종교 갈등에 그 해법은 다른 방법이 없다. 오직 성경이 가르쳐 준 바와 같이 희생을 치르는 속량의 방식을 수용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값을 스스로 치러주신, 값 치르기의 구원원리가 문제를 근본에서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그래서 유대교는 단일신 사상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유대교인이든 사울이 기독교인 바울이 된 것처럼 신관이 바뀔 수 있고, 성령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가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을 용서하고 수용하며 그들에게도 토지를 분배할 수 있는 배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에게 땅을 내어놓아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1880년대 이후부터 팔레스타인이 사는 지금 이스라엘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시온주의가 꿈꾸는 이스라엘 회복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때는 아랍인들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땅을 팔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서 인구수가 늘어났고, 이렇게 불어난 인구에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영국과 유엔이 제시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리 독립이 팔레스타인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여기에 더 기다리지 못한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독립을 선언해 버렸다. 이에 항거한 아랍 연맹은 전쟁을 일으켰다. 아랍 진영은 여러 나라가 연합한 동맹국들이므로 이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열세인 전쟁이다. 그런데도 전쟁의 결과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이긴다. 그것도 지난 70여년간 4회에 걸친 전쟁이 모두 그러하였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정착촌 건설이라는 명분으로 그 땅을 야금야금 넓혀가고 있다.
이것은 주전 1406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땅과 인구가 늘어나고 있으나, 그 대신 아랍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생활에서 자유가 제약되고, 경제생활이 옹색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독립된 정부를 세웠고, 영토를 계속 확보하고 있어서 많이 나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웃 아랍인들과는 철천지원수로 서로 대립하고 있다. 오늘도 그 나라 안팎에서는 이방인 침략과 위협이 계속되고 있다. 하루에도 테러나 전쟁이 없으면 그나마 다행일 정도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땅을 많이 확보하고, 나라의 구성요건은 충분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스라엘 정치와 경제 상태를 에스겔이 말하는 회복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스라엘이 온전하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에스겔이 말하는 성전의 회복과 토지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에스겔 성전의 회복은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구세주(왕)로 인정받는 것을 뜻한다. 에스겔 토지분배는 실제로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땅을 분배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왕의 토지로 인정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땅을 내어놓은 것과 같은 경제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분배될 왕의 토지를 성경 희년법대로 다스리는 나라를 뜻한다. 그러면 그 나라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예수 그리스도가 왕의 신분으로 다스리는 사회이며, 그 땅은 실제로 백성들에게 분배된 상태다. 이때는 왕과 백성들이 이슬람에 속하는 아랍인들과 외국인에게도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겔 47:22). 이것이 에스겔이 말하는 왕의 토지를 분배하는 것과 왕의 희년법 준수 의무가 실제로 시행되는 나라다.
이슬람도 복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이슬람이 폭발적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창 21:13)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 21:18)
유대교와 이슬람교,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은 서로에게 맺혀진 앙금의 골이 너무 깊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보면 이스라엘과 중동 땅의 평화는 요원하다. 현재로서는 인류를 전멸시킬 수도 있는 3차대전이나 핵전쟁도 그곳에서 발생할 위험성이 가장 높다. 이들 이슬람 국가는 이스라엘을 지리적으로 에워싸고 있다. 아랍인들은 언제인가 이스라엘 민족을 지중해에 몰아넣을(진멸시킬) 대상으로 보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결사 항전으로 그들의 위협과 공격을 방어하며, 자신들을 지키고 있다.
여기에 그들은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들이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 세계 도처에서 테러를 일삼는다. 가자지구에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블라,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파키스탄의 알카에다, 이라크의 IS, 나이지리아의 보코 하람, 그리고 최근에는 예멘의 후티 군사(반군)들까지 이에 포함되고 있다. 이러한 무장세력은 성향이 과격하며, 적국에 속한 민족이면 민간인들도 구분하지 않고 살상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이들은 잔악한 살상을 자행하며, 지구의 평화를 크게 위협하는 집단이므로 반드시 근절시켜야 할 대상이다.
지금 이슬람 인구는 2023년 현재 19억 명이 넘어서 20억 명에 육박한다. 나라 전체가 이슬람이 국교인 국가도 20여 개국이 넘는다. 세계에서 기독교인은 수가 줄어들고 있고, 이슬람은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벌써 인구수에서 이슬람 인구가 기독교 인구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들어온 무슬림들만 해도 2023년 기준으로 37만 명이라고 한다.
이슬람 경전, 코란은 생활 자유가 없다.
그런데 코란은 사람이 만든 율법이라 서로 모순된 내용이나 비합리적 규제가 많아서 생활에 불편을 주고, 자유가 큰 제약을 받는다. 예를 들어서 자본 금융 거래의 필수적 요소인 이자를 금지하는 것, 그들의 달력이나 절기(명절)에 계절이 없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심한 경우 여성에게는 문자도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국민 전체에서 문맹률이 50%가 넘는 나라도 있다. 여성은 히잡을 두르고, 차도르를 걸쳐야 외부 출입이 가능하다. 복장 하나에도 자유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 할례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여성의 성적 욕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 여성이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면, 가족은 몸을 더럽혔다고 정죄를 한다. 이런 경우 가족을 죽이면 그것이 알라신을 위한 "명예살인"이다. 파키스탄에서 2015년 한 해에 이런 명예살인의 명분으로 가족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가 1,096명이라는 보고도 있다.
이런 사고와 행동은 종교도 아니고, 문화라고 할 수 없다. 코란이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본적 자유를 옥죄는 족쇄다. 이에 더하여 이슬람권의 정치는 거의 대부분 종교를 앞세운 종교 독재나 군주제를 하고 있다.
성경에도 구약의 율법은 자유를 제약하는 규정들이 있다. 안식일은 불을 피우지 못하며(출 35:3), 안식일을 어기면 죽을 수도 있다(민 15:35,36). 비늘 없는 물고기는 먹지 못하게 한 규정도 있다. 그러나 이런 구절은 그 당시의 신앙적 근본을 지키기 위해 제정한 것이었고, 그런 제약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구약의 불합리한 점은 신약에서 복음으로 대체되어 모두 폐기되었다. 성경은 부분적으로 자유를 제약하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것에 근본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계명을 지켜서 복을 받도록 한 것이 율법이다.
성경의 제사는 내가 지은 죄를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대속물의 희생으로 내가 자유하게 된다. 성경의 경제 속량은 내가 진 빚을 형제가 대신 갚아주고 나를 자유하게 한다. 예수님은 병든 자는 고쳐주고, 주린 자는 먹이시며, 상처받은 자는 위로하며 함께 하시는 분이다.
이슬람의 속죄는 인과응보의 방식이다.
이슬람은 죄를 지으면 자기가 그 죄를 직접 갚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슬람 과격파들은 그런 코란의 속죄의 규정을 따라서 자기 죄를 속하고, 신에게 보상을 받기 위하여 불특정 다수를 무차별 공격하는 자살 테러를 감행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런 행위를 이교도에 대한 거룩한 투쟁을 뜻하는 ‘지하드(聖戰, 거룩한 전쟁)’라고 부른다. 코란은 친절이라는 개념은 있어도 사랑이라는 말이 없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성경에 비하면, 사람(마호메트, 무함마드)이 쓴 코란은 너무 저급하여 비교할 가치도 없다.
이슬람은 종교의식도 다분히 행위적이다. 그들은 하루에 5번이나 기도를 하지만, 그것은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라마 불교(밀교)에서 불경을 읽지는 않고 불경이 기록된 법구, ‘마니륜(摩尼輪)’을 돌리는 것과 비슷하다. 염불은 목탁을 두드리는 것이며, 기도는 묵주를 세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말씀에 대한 이해와 성찰에서 나오는 심령의 회개와 변화가 없다. 기도는 그냥 주술적인 행위의 반복으로 공덕을 쌓는 것뿐이다. 속죄에서 고행이나 행위의 반복인 수행(자율 속죄)과 심령에서 성령의 깨우침으로 내 죄를 자복하여 사함을 받는 것(타율 속죄)은 개념이 다르다.
이슬람의 신관도 유대교처럼 단일신을 신봉하는 유일신 사상이다. 이들은 예수를 노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만 알고, 신성은 부정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조작된 사실로 본다.
하나님은 이슬람에게도 긍휼을 베풀고 복음을 전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때부터 이슬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마엘과 그 후손들에게 복을 내리셨다. 그 복은 그들도 한민족을 이루고,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언약이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종(하갈)의 아들도 네 씨니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겠고(창 21:13), 또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창 21:18)고 하셨다.
하나님은 또 에스겔에게 이방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라고 하신다(겔 47:22). 여기서 이방인은 이슬람 종교를 가진 무슬림도 구분 없이 적용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제물로 희생된 것은 기독교인들만 대상이 아니다. 이슬람교도인 무슬림에게 분명히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 사는 팔레스타인들에게 땅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지하드(聖戰, 거룩한 전쟁)’라는 자살 테러는 창므로 상대가 어렵지만, 그레도 기독교는 그들에게 순교자적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와 극단주의자는 소수이면 70%는 문화적인 이슬람이라고 한다. 여기서 문화적 이슬람이란 그 사회 안에서 문화만 무슬림 형세를 하고, 종교는 무슬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를 살려주신 사랑과 영생의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슬람 국가들은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며 소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성경을 접할 기회가 없다. 현재 이슬람 종교를 가진 무슬림들은 80%가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슬람 신도들은 문맹자가 많다. 그들이 성경을 접할 수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믿을 수가 있다. 그들이 성경에 있는 내용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면 믿는 자가 크게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의 전달 수단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중동문제의 해법, 외국인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방법은?
너희는 이 땅을 나누되 제비 뽑아 너희와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타국인 곧 너희 가운데에서 자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지니 너희는 그 타국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 같이 여기고 그들도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너희와 함께 기업을 얻게 하되 타국인이 머물러 사는 그 지파에서 그 기업을 줄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47:22,23)
지금 가나안 땅에서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거듭하는 말이지만, 이 문제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해법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 관심사인 이스라엘의 평화, 중동문제의 근본 해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그 땅에 종교와 영토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종교 문제는 양쪽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도 그곳의 땅 문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도 땅을 주는 심령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땅은 레위기 25:23이 말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것도 아니다"라는 신앙고백이 포함되어야 가능하다. 그러한 신앙고백은 팔레스타인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민족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그 땅을 신의 소유라고 말은 하지만, 서로가 자국 소유의 땅이라는 고집을 버리지 않으면, 그곳의 땅 문제는 풀어낼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도 어렵고, 이스라엘이 에스겔서의 말씀에 순종하여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땅을 주는 것도 하늘에 별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며 그 분의 긍휼하심을 따라서, 다시 오실 예수님께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다. 이 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어야 땅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은 아니다. 재림 예수를 맞이할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 미리 그런 순종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2,000년간 비워둔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와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48년 독립을 하였고, 지금은 온전한 국가의 요건을 갖추었다. 여기에 주위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공격을 해도 그때마다 승리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면서, 앞으로 전개될 이스라엘의 미래를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주의를 기울이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미래와 에스겔이 말하는 외국인에 대한 토지분배가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지, 어떤 정책들이 펼쳐지게 될 지가 의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실제로 토지분배를 하게 되면, 생각할 수 있는 가상의 정책들을 추정하여 보기로 하자.
(1) 하나님 나라의 실현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이 땅에서 직접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이나 이 세상의 통치를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문제나 중동문제를 하나님이 직접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의 실현은 재림의 때나 세상의 종말의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 종말의 때는 에스겔이 말하는 12지파의 토지분배와 왕의 토지분배, 그리고 왕과 백성들이 지켜야 할 희년법의 준수가 이미 필요가 없는 때다. 물론 지금의 중동문제의 해결도 그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하나님이 심판가 보상을 통하여 다 이루어 놓으신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년 없는 세상은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두면 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거나 세상 종말이 오면 그 때를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나중에 주인이 오시어 결산할 때, “악하고 게으른 종(마 25:26)”, “주인의 뜻을 행하지 않은 종(청지기, 눅 12:42,47)”이라고 하여 버림을 당할 수 있다. 희년은 주전 1445년 출애굽 첫 희년부터 오늘날까지 사람의 순종으로 이루어가는 것이지, 그 희년을 하나님이 공짜로 갖다 주지는 않는다. 빚의 속량과 토지 무르기는 사람이 사람과 땅에 대하여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기도가 가르치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또는 빚을)를 사하여 주는 것이다(마 6:12, 눅 11:4).
(2) 가나안 땅 정복과 같은 정책의 실현
1406년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때의 방식을 지금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내심 가장 원하는 방식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이스라엘 민족이 살고, 팔레스타인 주민은 모두 죽거나 쫒겨나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여호수아 정복 당시에도 이런 꿈은 실현할 수가 없었다. 팔레스타인 주민과 이방 나라 이슬람 국가들이 승복할 수가 없을 것이며, 세계의 여론이나 유엔의 공식 입장과도 거리가 멀다. 이런 정책은 하나의 가설로 제시를 해보는 것이지,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 방식을 추구하여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리 독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분리하는 독립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당시 유엔이 제시한 안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유엔이 제시한 이 안을 거부하여 지금까지 실현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고 있다. 1993년에도 서로가 분리 독립하는 "오슬로 평화협정"을 맺기까지 했으나 실행단계에서 실패했다. 이를 주도한 이스라엘 라빈 총리는 극우파에게 암살되었고, 팔레스타인 아라파트도 이슬람 급진파나 강경파에게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다.
지금이라도 이스라엘이 라빈처럼 통이 큰 결정을 할 수 있다면 분리 독립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스겔서가 말하는 외국인에 대한 토지분배를 그대로 인정하고, 땅을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내어놓은 것이다. 곧 지금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서로 국교를 트고,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이런 결단은 기대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만큼 큰 심령의 변화가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4) 연방제식 통치나 통치권의 분할 방식
우리는 한 나라의 통치 방식을 군주제에서 민주제로 바꾸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누는 3권 분립의 통치를 알고,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정치와 종교, 그리고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통치 방식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에 준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연방제가 있다. 또 유럽에서 EU가 보여주는 연합체가 하나의 모델이 될 수가 있기는 하다. 이것은 통치권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나누는 것처럼 통치권을 정치와 종교 또는 정치와 경제로 나누어 독립을 시키는 안이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그 하나의 대안으로 정치적 주권(정치, 군사, 치안, 외교 등)과 경제적 주권을 분리하여 전자는 통치권을 행사하는 주정부가 갖고, 후자인 생활 주권은 주민에게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는 방식을 고려해 볼 수가 있다.
여기서 필요한 생활 주권은 종교의 자유와 토지의 자유를 지역 주민에게 완전하게 넘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종교와 경제생활은 중앙정부가 통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통치권을 정교(政敎)의 분리와 정경(政經)의 분리로 나누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의미으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 또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땅은 국가의 소유도 아니고, 어느 개인 소유도 아니며, 태초부터 그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레위기 25:23 말씀에 근거한 안이다. 그러므로 이는 희년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과 국경 없는 세상 통치를 의미한다. 에스겔이 말하는 왕의 희년법 준수 의무와 외국인에게도 토지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통치는, 국경도 허물어버릴 수 있는 제도라고 보는데에서 시작한다. 곧 토지의 완전 자유 보장과 임대료 납부를 통한 자유 시장경제는 정치와 경제의 완전한 분리와 병존의 실천적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말이다.
(5) 천국경제의 복음적 운영방식
이스라엘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한 “포도원 품꾼과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를 그대로 경제적 현상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이 정책을 포도원 주인이 하게 되면 아주 쉽고, 간단하다. 내용상으로도 거의 완전하고, 영구적인 경제 해법이 된다. 이스라엘은 지금 그 땅을 모두 주인에게 내어놓고, 땅을 분배하여 시장원리를 따라 세를 내는 자에게 토지 경작권을 주면 된다(마 21:31). 경제생활에서 자국민과 타국민을 차별하지 않고, 종교와 이념을 묻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신체의 자유와 토지의 자유를 천부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가 없고, 사람은 땅을 떠나서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체의 자유와 토지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기본적인 안전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비유로 가르쳐준 포도원 경제법의 운영방식은 사람이 타고난 천부적 인권과 천부적 토지권을 차별 없이 보장할 수 있는 제도다.
그리고 이 제도 하나로 모든 소유물에서 “네 것, 내 것”이 100% 가려지게 된다(마 20:14,15).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도 분명하게 구별되는 시장경제다(마 21:33,37,43). 여기에 경제는 세금도 필요가 없고, 실업자가 없는 세상이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시장 제약이 필요가 없으므로 자유로운 시장사회가 보장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도에 대하여 기득권층의 강한 저항이 있다는 것을 비유로 보여주고 있다. 또 이 비유의 시행에서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가 구분되고(마 20:16), 순종하는 자에게 나라를 맡기겠다는 말씀도 있었다(마 21:31,34).
에스겔의 온전한 회복은 곡의 전투가 남아있다.
회복을 위한 곡의 전투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겔 38:16)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도 땅을 분배하는 에스겔의 희년제도를 자력으로 수용할 수가 있을까?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맞이하는 심령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천지개벽이 일어나야 가능할 만큼 어려운 것이다.
이스라엘은 희년법을 따라서, 그 나라의 특수한 상황과 여건 때문에, 토지의 사유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독립 후 70년간 이스라엘을 시장경제 체제로 꾸려왔다. 그리고 경제는 전체적으로 성공한 편이다. 그러나 토지제도를 살펴보았듯이 다시 사유제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희년법을 퇴색시키는 정책을 펴려고 하고 있다. 이스라엘 토지제도가 토지의 임대시장보다 자본가격, 곧 땅값을 발생시키는 소유제에 접근하려는 정책을 말한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온전하게(영원히) 회복시키겠다는 말씀을 몇 차례나 반복하신 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의 회복은 세상 종말에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의 종말은 이슬람권을 포함한 이미 모든 나라가 심판을 받거나 회복된 때를 말한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세상 종말이 오기 전에 일어날 사건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기독교인들을 뜻한다고 보는 대체신학의 관점으로 보다라도 이 회복은 세상 종말과는 시차가 나는 회복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위하여 곡의 전투를 남겨두고 있다. 이스라엘을 치러오는 동맹군들이 있어서 큰 전투가 벌어지고, 지진과 천재지변, 그리고 역병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겔 38:19~22).
노예제와 군주제도의 폐지에는 희생이 있었다.
1865년경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될 때는 남북전쟁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이 전쟁에서 남북군 양쪽은 약 61만 명이 죽었다. 링컨 대통령은 그 반대자에게 암살을 당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임에도 노예제도가 있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노예제도를 아프리카에서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목화밭과 사탕수수밭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했다. 그리고 그 노예를 해방하려고 했을 때는 내전을 치를 만큼 강한 반대가 있었다. 북부군이 승리하여 노예제도가 폐지되기는 했지만, 노예를 해방시킨 그 속내는 순수한 해방이 동기라고 보기가 어렵다. 산업이 발전한 북쪽에서 신규 노동력이 필요하여 노예를 데려오기 위한 전략의 한 수단으로 노예 해방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군주제도를 무너지게 한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도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나 이를 저지하는 쪽이 모두 피를 흘린 희생이 있고서야 군주제도가 무너졌다. 1792년 9월에는 파리에서 6일 만에 1,200명이 죽는 대학살극도 있었다. 물론 프랑스도 기독교 국가였지만, 군주제도를 혁파하는 데는 그만큼 큰 저항과 희생이 있어야 했었다.
필자가 보기로는 이 세상에 성경의 희년법이 시행되려면, 세상은 어떤 반응과 변화가 있어야 가능할까? 희년법 시행은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사회혁명, 곧 바알 우상이 만들어 놓은 지주제도의 혁파를 의미한다. 기독교 국가에서도 노예제도의 혁파, 군주제도의 혁파에는 큰 저항과 희생이 따라야만 가능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신체를 도구화 하는 노예제도(딤전 1:10, 골 4:1), 군주제도(삼상 8:9), 지주제도(레 25:23)를 원하지 않으신다.
마지막 남은 혁명, 지주제도의 혁파는?
그러면 이제 남은 지주제도의 붕괴는 어떤 변화를 겪어야 가능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땅과 희년법에 대해서는 너나 없이 매우 무지하고, 강한 무시와 거부감을 보인다. 그러나 희년법은 3,500년간 시행해 보지 못한 하나님의 계명이다. 그리고 희년법은 세상 삶에서 필요한 제도이고, 세상 종말에는 희년법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지주제도의 혁파와 희년법의 시행은 이 세상에서 종말 이전에 해야 할 혁명이다. 그러나 쉽게 하지는 못하는 마지막 혁명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에스겔이 예언한 곡의 전투가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위한 전투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바알과 입을 맞추어 온 사악한 지주제도를 혁파하고, 온전한 희년법을 도입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곡의 전투는 이 세상을 심판하는 전투라기보다 세상을 구원하는 전투로 보아야 할 것이다(겔 39:6,7).
그러나 노예제도와 군주제도의 혁파에도 희생이 필요했던 것처럼 인류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지주제도의 혁파에도 곡의 전투와 같은 희생은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에스겔의 예언에서 곡의 전투 후에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뒤에 에스겔 성전이 보이고, 이스라엘 땅에서 토지분배가 이루어져서 희년법이 시행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곡의 전투가 끝이 나고 나라가 회복되면, 에스겔 성전을 지으려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그 성전은 하나님이 보여주기만 하고, 지으라는 말씀이 없었다(하나님은 그 당시 스룹바벨 성전은 짓게 하셨다).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기 때문에 성전을 다시 지을 필요가 없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제3성전을 짓는다고 하더라도 그 성전은 에스겔 성전을 닮은 모형 성전을 짓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지금도 신앙교육에 필요하여 모세의 성막을 제작하여 비치하는 것처럼 모형 성전만 지어야 한다.
그리고 곡의 전투와 큰 이변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그들에게도 새 영이 들어가서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겔 36:26),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심령의 대변혁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치러 왔던 이방의 열국들도 이 곡의 전투를 통하여 살아남은 자들은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보는 때가 와야 한다(겔 39:7). 필자는 그렇게 되길 간구하며,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