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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스터디 자료입니다.
6장 논리학의 구성원리 재론−관념론인가 유물론인가?: 포이어바흐
이제까지 대체로 과학으로서의 논리학의 신기원을 이룩했던 헤겔의 긍정적 성과에 대해서만 논의했다. 이제 사고에 관한 헤겔의 관념론적 입장과 관련된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대가’와 헤겔의 입장을 전혀 용인할 수 없게 만드는 헤겔 ‘논리학’의 결함−이것은 유물론적 철학을 개진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을 다뤄 보기로 하자.(인간190)
역사적으로 볼 때, 포이어바흐는 사고를 철학의 제일원리인 존재와 대립시키는 이원론자들을 배격한다. 따라서 논의 과정에서, 그는 데카르트류의 이원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논변을 재현하고 있다. 사실 분석적으로 이 논쟁의 맥락을 되짚아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포이어바흐는 칸트로 대표되는 순수한 형태의 이원론뿐 아니라, 그런 이원론을 관념론적 일원론^의 형태로 ‘정당하게’ 극복하기 위한 체계적 시도였던 피히테⋅셸링⋅헤겔의 철학도 역시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이어바흐는 관념론적 일원론의 형태로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이 허구적이고 형식적이며 빈말에 불과할 뿐 아니라, 관념론 일반이 칸트 체계의 기본 전제를 침해한 사실은 물론 그럴 가능성조차 없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는 셸링과 헤겔에 의해 칸트가 근본적으로 극복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헤겔의 철학은 칸트에 의해 특히 부각된 존재와 사고의 모순을 철폐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점은 그런 모순의 철폐가…한 가지 요소, 즉 사고 내에서의 철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인간190-191)
사실, 이른바 절대적 동일철학은 사고작용 자체의 동일성에 관한 철학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고와 그 사고 외부의 존재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헤겔에게는 이미 사고로 표현된 개념적 존재가 실제 존재의 자리를 대신함으로써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웅대하고 심오한 헤겔 철학의 구조 배후에는 사실 “우리는, 우리가 주변 세계를 사고하는 그대로 주변 세계를 사고한다”는 공허한 동어반복이 숨어 있다.(인간191)
그래서 셸링과 헤겔의 철학은 실제로 사고와 존재의 동일성을 전혀 확립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구나 ‘절대적’ 동일성을 확립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철학에서는 사고 외부에 독립적으로, 자족하는 “존재 자체”가 전혀 설명돼 있지도 않고 또 직접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인간191)
그래서 칸트 이원론의 기본원리는 취급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사고하는 정신은 처음부터 감각적이고 구체적이며, 물질적인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특수한 비물질적 존재로 간주됐고, 내재적^ 논리 법칙과 도식에 의해 그 자체로 형성된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또한 헤겔의 논리학은 사고를 초자연적이고 초물질적인 주체의 활동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결과, 주체는 자연과 인간을 자신의 고유한 모습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외부로부터 ‘매개’하는 특수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인간191-192)
더구나 사고하는 정신을 이와 같이 묘사하는 것은 의식이나 정신의 ‘대립물’이자 정신의 형성 활동의 대상이며 재료인 자연과 인간이, 그 자체로는 수동적이고 무정형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은 오로지 사고하는 정신의 형성 활동의 결과로서만 과거에 존재했던 상태로 되고 지금 우리가 익히 아는 그 구체적 형태를 획득할 수 있다. 더욱이 현실 세계에서 경험적으로 분명한 사태는 정신활동의 산물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묘사됐다. 그리고 ‘매개’라는 지극히 복잡한 마술은 ‘신이 주신 재능’을 구실로 해, 이미 추상작용을 통해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얻은 동일한 규정들을 다시 한 번 자연과 인간에 되돌리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에게서 미리 ‘도둑질’을 하지 않고서는, 유심론적 철학은 그 빈약한 규정들 가운데 단 하나도 사고하는 정신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인간192)
포이어바흐는 존재와 사고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이상과 같이 해석함으로써 무엇보다 특히 스콜라적으로 새롭게 된 ‘합리화된’ 신학을 간파했다. 유심론에서 말하는 절대정신은 성경의 하나님처럼 환상적 산물이고,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추상적 규정들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논리학과 관련된 사고작용은 실은 인간의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부터 추상돼 인간 외부에 자리 잡고 있는 특수한 존재의 활동으로 취급됨으로써 인간과 대립한다.(인간192)
포이어바흐는 헤겔 관념론의 근본적 오류(헤겔의 체계가 관념론적 관점의 가장 적적한 표현이기 때문에 헤겔 관념론은 관념론 일반의 오류이기도 하다)를 (일반적이고 전체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존재와 사고의 관계문제를 다시 설정했다. ‘사고 일반’이 어떻게 ‘존재 일반’과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물음 자체가 이미 사고(인간으고부터 소외된 사고)를 외부 존재와 대비되는 독립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이 물음이 성립될 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헤겔식으로 이해된 존재, 즉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범주, 사고 내의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라는 감성적이고 대상적인 실재 세계는 이미 사고를 포함하고 있다. 존재는 돌⋅나무⋅별뿐 아니라, 사고하는 인간의 육체도 포함한다.(인간193)
그래서 존재를 사고가 배제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존재를 부정확하게 말하는 것이고,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을 미리 존재로부터 배제하는 것이며, 더욱이 존재의 가장 중요한 ‘술어’들 중 하나를 존재에서 제거하는 것, 즉 존재를 ‘불완전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포이어바흐의 논증은 스피노자의 사고과정의 반복이고, 스피노자의 사고를 발전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더 현대적인 철학 용어로 번역한 것이다.(인간193)
결국 모든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귀착된다. 즉 사고를 일반적으로 물질적(감성적⋅대상적) 존재인 인간으로부터 구별하고, 사고를 처음부터 고정시키며, 감성적⋅신체적⋅물리적 존재와는 다른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아니면 사고를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속성(‘술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포이어바흐는 의학⋅생리학 등과 같은 자연과학의 논증을 유물론을 위한 결정적 논증으로 간주했다. 의학에 의지한다면, 유물론은 유물론^과 유심론의 논쟁을 좌지우지하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도 같은 것이 돼 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궁극적 설명을 요하는 문제는 물질의 가분성이나 불가분성이 아니라 인간의 가분성이나 불가분성이고, 신의 존재나 비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나 비존재이며, 물질의 영원성이나 일시성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성이나 일시성이고, 인간 외부의 세상 천지에 산재해 있는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두개골에 집중돼 있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지 않는 한, 인간의 두뇌만이 이 논쟁에서 문제시된다. “인간의 두뇌만이 이 논쟁의 원천이자 궁극적 목표다.”(인간193-194)
포이어바흐는 철학의 근본 문제가 이상과 같이 확고한 사실의 터전 위에 뿌리박아야 자연스럽게 유물론적으로 해결된다고 여겼다.(인간194)
사고는 살아 있는 두뇌의 현실적 기능이고, 두뇌라는 물질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두뇌라는 물질을 염두에 둔다면, 사고가 어떻게 두뇌와 ‘결합’하는가, 사유와 두뇌가 어떻게 연결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매개해 주는가 하는 물음은 일반적으로 매우 어리석은 물음이다. 왜냐하면 그 ‘양자’가 따로 분리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두뇌의 현실적 존재가 또한 사고이고, 현실적 사고는 살아 있는 두뇌의 존재다.(인간194)
철학적 범주를 통해 표현된 이런 사실은 “그 둘 사이에 어떤 중간적 존재도 허용하지 않으며 물질적 존재와 비물질적 존재를 구분하거나 대립시킬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 영혼과 육체의 직접적 통일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물질이 사고하고 육체가 정신이며, 또 역으로 사고가 물질이고 정신이 육체라는 점을 핵심적으로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된 존재와 사고의 ‘동일성’은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참된 철학의 공리, 즉 스콜라철학적 증거와^ ‘매개’를 요하지 않는 하나의 사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인간194-195)
포이어바흐가 셸링과 헤겔을 비난했던 것은 그들이 사고하는 인간에서 성립하는 존재와 사고의 통일(‘동일성’)을 일반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그런 통일을 대립물들의 궁극적 통일, 즉 육체가 없는 사고하는 정신과 사고하지 않는 육체를 함께 결합시킨 결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는 그들이 육체가 없는 정신과 사고하지 않는 육체라는 똑같이 그릇된 두 개의 추상들로부터 현실적 사실의 모습을 그려 내고자 했던 점과, 그리하여 환상으로부터 사실로 추상으로부터 현실로 나아가려 했던 점을 비난했던 것이다.(인간195)
포이어바흐는 관념론자들이 사실로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릇된 추상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유물론자는 직접적으로 주어진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그들과는 정반대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확신했다.(인간195)
셸링과 헤겔은 궁극적으로 대립물들의 통일에 이르기 위해, 신체 없는 사고와 사고 없는 신체가 시원적으로 대립한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했다. 이것은 정신주의가 들어선 잘못된 길이었다. 유물론자라면 인간 개개인의 두뇌에서 사고와 신체의 가상적 대립이라는 환상이 제기되는 방식과 이유를 이해하고 해명하기 위해 그 인간 개개인의 사실로 확립된 직접적 통일(불가분성)로부터 출발해야 한다.(인간195)
결과적으로, 사고하는 정신과 육체의 대립이라는 환상은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순수 주관적 사실, 즉 순수 심리적 사실이다. 그 환상은 사고하는 두뇌가 인간의 여타 기관과 같은 종류의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기관이라는 아주 타당한 이유로 발생하는 것이다.(인간195)
시각기관인 눈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내가 눈으로 별을 보면서, 동시에 눈 자체를 볼 수 없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거꾸로 거울^을 통해 나의 눈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별에서 나의 시선을 떼어야 한다. 눈의 모든 세부적 구조, 즉 시각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눈의 모든 물질적인 내적 조건을 대상으로 관찰한다면,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사고작용에서, 사고의 유기체적 토대와 조건(두뇌라는 육체에서 사고작용이 일으키는 물질적 구조와 과정 자체)이 그 의식 대상이라면, 두뇌는 다른 그 무엇을 사고할 수 없다.” 사고작용을 일으키는 유기체의 구조는 생리학과 해부학의 대상일 뿐이다. 사고기관인 두뇌는 기능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외부 대상들을 향한 활동을 수행하기에, 즉 그 자신이 아니라 타자인 객체를 사고하기에 꼭 알맞다. 그리고 “그 기관이 자신의 고유한 활동이라 할 수 있는 대상에 관한 활동에 열중한 나머지, 자기자신을 망각하거나 부인한다”는 것은 퍽 자연스럽다. 이리하여 두뇌를 포함하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이며 감성적인 모든 것이 사고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다는 환상이 일어난다.(인간196)
하지만 이런 환상은 관념론적으로 해명될 수 없다. 불가피한 환상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그 자체로는 늘 물질적 기관과 물질적 과정의 물질적 작용으로 남아 있다. “나의 경우 혹은 주관적으로는 순전히 정신적이고 비물질적이며 비감성적인 활동이 그 자체 혹은 객관적으로는 물질적이고 감성적인 활동이다.” “고도의 활동인 두뇌 활동에서, 임의적이고 주관적이며 정신적인 작용과 비자발적이고 객관적이며 물질적인 작용은 동일하며 구별되지 않는다.”(인간196)
그리하여 포이어바흐는 이원론과 유심론에 대한 투쟁의 논리로서, 살아 있는 사고하는 두뇌가 하나의 ‘객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변증법적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의 객체 내에는 사고와 감성적⋅대상적 존재, 사고작용과 사고된 것, 관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등과 같이 직접적으로 동일한 대립물이 존재한다. 사고하는 두뇌는 특수한 ‘대상’인데, 이 대상은 상호 배타적인 규정들을 직접적으로 동일화함으로써만, 즉 대립하는 범주들의 직접적 통일이나 동일성을 수용하는 명제를 통해서만 적절하게 철학적인 범주들로 표현될 수 있다.(인간196-197)
사실 포이어바흐는 일반적 형태의 변증법에 익숙하지 못했으면서도,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규정들을 가끔 추적하기는 했지만 끊임없이 교정하고 보충하고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설명은 애매모호하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유지된다.(인간197)
사고작용의 산물은 신이나 절대정신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도 매번 사고 바깥에 있는 ‘물자체’와 상호 연관시키고, 비교하며 대조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사고작용이 물질적 대상에 대한 물질적 기관의 물질적 작용이자 물질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개념과 표상은 실재하는 사물과 동일한 시공 속에 존재한다. 동일한 주체가 주변 세계를 사고하고, 또 주위 세계를 감각적으로 지각한다. 그 주체는 감성적이고 대상적인 생물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 개개인이다. 감성적 대상적 주위 세계(객체)의 통일성(불가분성)은 주체의 통일성(불가분성)에 상응한다. 마찬가지로 사고하면서 감각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지, 그 두 가지 작용의 상호 연관을 신이나 절대정신의 도움을 빌려 조정하는 두 개의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사고된 세계와 감각적으로 관찰된 세계는 동일한(즉 현실적으로 하나인) 세계일 뿐이며, 신적 원리의 도움을 빌려 그 양자 사이를 이어줄 특별한 통로나 매개를 찾아야만 하는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아니다.(인간197)
이 때문에 사고에 의한 세계 규정(논리적 규정)이 곧바로 감각적 관찰이나 직관에 의한 세계 규정이 된다. 그리고 논리적 규정 체계가 감각적으로 주어진 직관과 표상의 세계와 맺는 특수한 관계를 묻는 것은 불합리하다. 논리적 체계란 감각적으로 관찰되거나 직관된 세계에 대한 규정성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해 묻는 것은 가상적이고 허위적인 물음이다. 그런 관계는 있을 수 없는데,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원래 직접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사고에 의한 세계의 보편적 규정들(논리적 규정들, 범주들)은 직관에 주어진 사물들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규정성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고와 직관(관찰)은 모두 동일한 실재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다.(인간198)
논리학이 사고를 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규칙들의 체계로 이해되지 않고 실재적 사고과정의 발전법칙에 대한 과학으로 이해된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논리적 형식들도 문장이나 어법의 추상적 형식으로 이해돼서는 안 되고 사고의 실질적 내용을 이루는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실 세계에 관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형식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러므로 판단과 결론이라는 이른바 논리적 형식은 능동적 사고형식도 아니고 인과적 추론 조건도 아니다. 논리적 형식은 보편성, 개별성, 특수성, 부분과 전체, 필연성, 근거와 결론 등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전제하고 있으며, 또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에 근원적 사고형식이 아니라 언제나 임의적이고 파생적인 사고 형식이다. 형이상학적 조건이나 관계만이 논리적 조건이고 관계라는 것, 즉 범주의 과학인 형이상학만이 참으로 심원한 논리학이라는 것, 이것이 헤겔의 심오한 사상이다. 이른바 논리적 형식이란 추상적이고 기초적인 언어형식이다. 하지만 언어는 사고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 수다스러운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인간198-199)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이처럼 형이상학적 형식이나 법칙이 논리적 형식이나 법칙과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헤겔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으나, 양자가 동일한 이유와 근거에 대해서는 헤겔과 아주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고의 법칙 및 형식이 존재의 법칙 및 형식과 ‘동일한 원리’라는 유물론적 해석의 분명한 표현을 보게 된다. 유물론적 입장에서 보면, 논리적 형식은 존재(인간에게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실 세계)를 명확히 파악하는 보편적 형식이다.(인간199)
이 때문에 베른슈타인(Bernstein)과 같은 신칸트주의 철학자는 철두철미한 유물론은 유심론 내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목청을 돋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와 사고가 동일하다는 포이어바흐의 해석은 여전히 옳고, 맑스주의자를 포함한 그 어떤 유물론자도 이를 반박할 수 없다. 물론 존재와 사고의 동일성은 논리학과 인식론의 토대와 관련된 극히 일반적 형태에서 성립한다는 것이지, 그런 토대 위에서 형성된 세부적 지식과 관련해서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나중에 포이어바흐는 이 일반적인 유물론적 진리를 특수한 인간학적 영역에 구체화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논의는 맑스-레닌주의의 해결 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스피노자의 사상에 비해서도 훨씬 빈약한 설명으로 전개했다. 이런 빈약한 논의 때문에 속류유물론자, 실증주의자, 심지어 신칸트주의자까지도 그 후로 계속해서 포이어바흐를 자신들의 선행자 내지 협조자로 간주하는−전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경우가 생겨나게 됐다.(인간199)
존재와 사고의 동일성에 관한 포이어바흐 입장의 특징을 좀 더 세^밀히 분석해 보면 (1) 유물론이라는 점과 (2) 변증법이 결여된 유물론이라는 점 두 가지가 관심을 끈다.(인간199-200)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사고가 물질적 육체의 현실적 존재 방식이라는 사실, 즉 사고하는 육체가 실재하는 시공에서 행하는 활동이라는 사실을 무조건 인정한다. 더욱이 그의 유물론은 정신적으로 이해된 세계와 감각적으로 지각된 세계의 동일성을 인정한다. 결국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사고주체로 인정된 인간 존재 내에서 설명되고 있다. 여기서 사고주체인 인간은 세계 밖을 맴돌면서 세계를 ‘외부로부터’ 관찰하고 이해하는 특수한 존재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을 말한다. 이런 모든 주장은 유물론 일반,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적 교의들이다.(인간200)
그렇다면 포이어바흐의 입장이 보이는 약점은 무엇일까? 대체로 그 약점은 맑스 이전의 모든 유물론이 가지고 있었던 약점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주로 자연을 변형하는 활동인 실천 활동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조차 특정한 자연적 물체의 외형을 따라 움직이는 사고하는 육체의 운동만을 염두에 뒀고, ‘실천’이라는 계기를 간과했다. 피히테는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를 반박했는데(일반적 말해 스피노자를 통해 제시된 모든 유물론의 형태를 반박한 것이다), 그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이미 형성된 사물의 형식과 외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의 ‘저항’을 극복하면서 자연 속에 없는 새로운 형식들을 만들어 내고 그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했다.(인간200)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흐의 유물론도 포함된다)의 주^된 결함은 대상⋅현실⋅감성이 객체나 직관의’의 형식으로 파악됐으며 인간의 감정적 활동, 즉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한 점에 있다. 따라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되는 관념론에 의해−이 관념론은 물론 현실적인 감성적 활동 자체를 알지 못하지만−추상적으로 다뤄져 왔다. 포이어바흐는 사고대상과는 실제로 구별되는 감성적 객체를 원했지만, 그는 인간의 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다.(인간200-201)
따라서 인식 주체인 인간이 주객 관계의 수동적 측면, 즉 그런 상호관계의 피규정적 요소로서 간주돼 버렸다. 게다가 인간은 사회관계의 결합으로부터 추상돼 고립된 개인으로 변형됐다. 그러므로 인간과 그 주위 세계 사이의 관계는 개인의 두뇌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과 개인 사이의 관계로 해석됐다. 그러나 자연뿐 아니라 사회역사적 환경, 즉 인간노동에 의해 창출된 사물세계나 노동과정에서 발전하는 인간관계의 체계 등은 개인 외부에 그의 의지나 의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달리 말하면 자연은 개인 외부에 그 자체로 존재할 뿐 아니라, 노동에 의해 변형된 인간화한 자연으로 존재한다. 포이어바흐는 직관⋅관찰에 주어진 주위 세계나 환경을 출발점으로 삼았으나, 그 출발점의 전제를 탐구하지는 않았다.(인간201)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환경과 직접적으로^ 결합(접촉)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는 직관, 즉 개인의 관찰에 있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가 늘 염두에 뒀던 것은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모든 약점의 근원이었다. 왜냐하면 개인의 관찰에는, 물질적 삶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상호작용하고 있는 다른 개인들의 활동산물이 주어질 뿐 아니라 이미 인간활동의 속성과 형식으로 변형된 자연의 속성과 형식(인간의 대상이자 인간의 산물)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포이어바흐가 ‘관찰’하고자 했던 ‘자연 그 자체’는 그의 시야에 포착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런 “자연, 즉 인간활동에 선행하는 자연은 결코 포이어바흐가 살고 있는 자연이 아니며, 오늘날 그 어디에도(근래에 생긴 호주의 산호섬 몇 개를 제외하면), 따라서 포이어바흐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이기 때문이다.(인간202)
포이어바흐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사회적 관계들이 갖는 현실적 복잡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대다수 개인들로부터 사고를(학문이라는 형태로) ‘소외’시켜, 그들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힘으로 바꿔 놓은 노동분업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헤겔이 우상화시킨 사고(예를 들면 학문 따위)에서 변형된 일종의 종교적 환상만을 봤던 셈이다.(인간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