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와 돌팔이 / 곽주현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아프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누구나 의사를 만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다른 사람보다 병치레가 많았다. 어떤 분은 정성껏 치료해 주었고 간혹 의사인가 의심이 들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축농증(부비강염)을 심하게 앓았다. 10대 후반부터 코가 막히고 자주 감기에 걸렸다. 콧물 때문에 늘 화장지를 주머니에 10여 장씩 넣고 다녔다. 심해지면 머리와 목도 자주 아팠다. 일상적인 생활이 어려워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수술대에 누웠다. 부분 마취를 하고 윗입술 안쪽을 절개하여 수술했다. 마취가 잘 안 되었는지 통증이 심했다. 아프다고 말하면 몇 번이나 주사를 다시 놓았다. 콧속 뼈를 긁은 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너무 고통스러웠다. 대학병원이었는데 교수가 의대생을 가르치는지 ‘이곳을 잘라 내라, 저곳을 파내라.’ 하고 지시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꼭 뇌의 한 부분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몇 해 동안 잘 지냈는데 재발했다. 심해지면 여전히 숨 쉬기가 어려웠다. 그때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괜찮아졌다가도 계절이 바뀌거나 환경이 조그만 달라져도 곧잘 코가 막히거나 누런 콧물이 줄줄 흘렀다. 양, 한방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았다. 수술을 다시 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지만, 첫 경험이 어찌나 힘들었던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지인을 만났는데 그때도 자꾸 콧물을 닦았다. 지금도 그러냐며 텔레비전에서 이비인후과에서 이름난 의사를 봤다 한다. 그분도 심각하게 여러 질병을 달고 사는 사람이라서 모 방송국에서 소개하는 명의(名醫)라는 프로그램을 꼭 시청한단다. 자기는 서울에 있는 그 병원을 찾아가 큰 효험을 봤다며 적극적으로 권한다.
마침 서울 손자들을 돌보고 있을 때라 힘들지 않고 찾아갔다. 어찌나 환자가 많은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예약하지 않아서 2시간 넘게 기다리니 차례가 왔다. 의사는 병 이력을 묻고 나서는 콧물 흡입기를 사용하지 않고 식염수로 헹구어 낸다. 여태껏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방법으로 치료를 한다. 좀 거북했지만 하고 나니 무척 개운했다. 약을 처방하고 소금물로 콧속을 날마다 씻어내라며 작은 풍선 모양의 고무 기구를 준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약을 먹고 자가 치료를 계속했다. 증세가 많이 호전되기는 했으나 재발했다.
수술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영상 촬영 시설이 없으니 다른 병원에서 찍어 오라고 안내장을 써 준다. 비용이 8만 원쯤 나올 거라 했다. 그런데 16만 원을 내라 한다. 왜 차이가 나느냐고 물으니 이런 사진들을 찍었다며 간호사가 목록을 보여 준다. 촬영하지 않는 것이 두 건이나 들어 있다. 항의하니 착오가 있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담당 의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외출하고 없다나. 이런 망나니 같은 사람들. 여러 병원에 다니다 보면 이런 그들의 실수 아닌 것 같은 실수를 가끔 접하게 되어 화가 난다. ‘너희 지금 사람 갖고 장사하냐? 콱 그냥….’
수술대 위의 무영등(無影燈) 불빛이 두렵다. 40여 년이 지나서야 다시 수술을 받았다. 별 고통 없이 40여 분에 끝났다. 메스를 사용하지 않고 레이저로 시술해서 그런다고 한다. 젊은 사람은 귀가해도 되는데 나이도 있으니 가능하면 하루만 입원하라고 권한다. 그렇게 했다. 입원실을 호텔 방처럼 꾸며 놓아 심리적으로 크게 안정이 되었다. 그 후 두 번 치료를 받고 깨끗이 나았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껏 아무렇지 않다. 축농증이 치료되니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명의를 만난 덕이다.
도저히 의사라고 말할 수 없는 엉터리를 만나기도 했다. 내 남동생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해서 동네 의원으로 갔다. 진찰하더니 맹장이라고 한다. 시간 끌다가 복막염이 되면 치료가 어려워진다며 다급한 소리를 한다. 그 병은 수술은 간단하다고 해서 큰 병원은 생각지도 않고 그러자 했다. 주치의가 일주일이면 퇴원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환자는 한 달이 지나도 자꾸 같은 통증을 호소했다. 재발했다며 다시 메스를 댔다. 그래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세 번째 했다. 그러고 나서도 다시 한 번 또 했다. 동생은 20대 후반으로 누구보다 건강해서 씨름판에 가면 가끔 황소를 몰고 왔다. 네 번째 배를 가르고 나니 그 좋던 풍채가 흐물흐물해졌다. 가끔 정신을 잃기도 했다. 그제야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병원으로 옮기겠다고 하니 그제야 가라고 한다. 세 번째 수술했을 때 큰 병원으로 가겠다고 하니 곧 괜찮아진다고 장담하기에 내버려 두었던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
ㅈ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사가 배를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려 보더니, 창자가 서로 꼬였다며 빨리 수술을 준비하라 한다.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동생은 완쾌되었다. 주치의는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혀를 찬다. 억울해서 동네 의원을 고소하려고 변호사와 상담했다. 의료 사고는 입증이 어려워 승소하기 어렵다며 건강을 되찾았으니 포기하라고 권한다. 그 후로 그곳은 환자의 사망 사고로 결국 문을 닫았다.
내 몸을 치료하고 건강을 살펴 주는 의사들이 고맙다. 그러나 의술이 아닌 상술로 대하는 것 같은 의사도 가끔, 아니 자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