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롤>을 보고
박은희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캐롤>(2015)은 195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두 여성의 사랑을 차분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소금의 값』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아름다운 음악과 감각적인 영상이 어우러져 깊은 여운을 남긴다.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감탄이 나올 만큼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루니 마라는 눈이 부실 정도로 예쁘다. 두 주연 배우의 훌륭한 연기와 매혹적인 음악은 영화의 모든 장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영화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시선'이다.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와 딸의 선물을 사러 온 캐롤은 수많은 사람 속에서 서로를 강렬하게 눈에 담는다. 테레즈의 카메라는 캐롤을 촬영하고, 캐롤의 눈빛은 테레즈의 일상을 흔들어 놓는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거창한 고백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서로를 향해 멈추지 않는 시선과 그 속에서 번지는 감정의 파동을 통해 서서히 완성된다.
이러한 눈빛의 교차는 마음을 울리는 대사들과 만나 깊이를 더한다. 이제 막 사회에 나와 방황하는 테레즈에게 캐롤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 같아.“
라는 말을 건네며 그녀의 세상을 뒤흔든다. <캐롤>은 단순히 성소수자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를 넘어, 눈빛과 감정의 변화를 시각적·언어적으로 정성스럽게 담아낸 작품이다.
화면은 매혹적이고 격조 높은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깔린 진짜 정서는 역설적이게도 '불안'이다. 1950년대 미국이라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두 여성이 느끼는 사랑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촬영을 맡은 에드워드 라크만 감독은 당시 뉴욕의 공기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거친 입자감이 특징인 16mm 슈퍼 필름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이 필름 특유의 질감은 인물들의 억압된 감정과 비밀스러운 열망을 더욱 아련하게 전한다.
특히 영화에서는 비가 오거나 흐린 유리창, 거울, 쇼윈도 등이 자주 등장한다. 비 내리는 차창이나 먼지 낀 백화점 유리, 식당의 통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이들을 가로막고 있는 사회적 장벽처럼 느껴져 답답함과 불안을 준다. 다가갈 수 없지만 갈망하게 되는 사랑의 본질이 유리를 통해 비치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나올 때 한 명은 앞모습, 다른 한 명은 뒷모습으로 엇갈려 찍힌 장면들도 반복된다. 이는 두 사람의 감정 거리가 아직 온전히 좁혀지지 않았음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인 것 같다.
영화 속 두 사람이 마주하는 불안은 저마다 색깔이 다르다. 테레즈가 겪는 불안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자'의 미숙함에서 온다. 초반의 테레즈는 확신 없는 삶을 산다. 일도,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심지어 먹고 싶은 음식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테레즈는 자신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캐롤을 향한 마음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여행 중에 먼저 스위트룸을 선택하고, 캐롤이 가자고 했을 때 주저 없이
"네“
라고 답하는 모습이 그렇다. 다만 아직 어리기에 감정의 깊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노련한 캐롤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받으며 흔들리기도 한다. 처음 겪는 거대한 감정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은 테레즈의 흔들리는 눈빛과 서툰 몸짓을 통해 날것의 불안으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반면 캐롤이 마주하는 불안은 '모든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자'의 현실적인 두려움이다. 캐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지만, 당시 사회에서 그 대가는 가혹했다. 남편 하지는 캐롤의 성 정체성을 빌미로 딸의 양육권을 빼앗으려 압박한다. 언제 어디서 자신을 심판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두 사람의 여행을 미행하며 음성을 녹음하던 사설탐정 때문에 극대화된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동차 안과 낯선 모텔 방들은 이들의 관계가 발 디딜 곳 없는 공중에 떠 있음을 보여준다. 뿌연 안개 속을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처럼 미래는 불확실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행복 속에서 두 사람은 이별의 예감에 몸을 떤다. 사랑하기에 불안하고, 불안하기에 그 사랑은 더욱 간절해지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인물들이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이 외로운 여정 속에서 캐롤의 곁을 지키는 친구 애비의 존재는 큰 위로를 준다. 10살 때부터 캐롤을 알고 지낸 애비는 캐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위기 때마다 도움을 준다. 세상이 등을 돌릴 때 이런 진짜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캐롤에게 행운이자 불안을 버텨낼 힘이 된다.
캐롤은 남편과의 이혼 소송 중 결정적인 말을 던진다.
"내 본성에 반해서 사는 건 우리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캐롤은 아이의 양육권을 잃을 위기 속에서도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위선적인 엄마로 살아가기보다 자신에게 솔직한 인간이 되는 것이 도리어 당당한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현실의 벽 앞에 테레즈에게 편지를 남기고 떠나며
"내 천사, 널 자유롭게 해줄게“
라는 말을 남긴다.
이 이별의 고통은 테레즈를 수동적인 소녀에서 온전한 홀로서기에 성공한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혼자 남겨진 테레즈는 불안을 견뎌내며 스스로 카메라를 들고 주체적인 사진작가가 된다. 이후 다시 재회한 자리에서 캐롤이 나직하게 건넨
"사랑해“
라는 말은, 예전처럼 숨어 다니는 불안한 고백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찾은 자의 당당한 확신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선언처럼 보인다. 수많은 남자들 사이에 당당하게 앉아 어울리는 캐롤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캐롤을 향해 많은 사람을 헤치고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는 테레즈의 모습이 교차 된다.
마침내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치는 그 순간, 카메라는 이들의 재회를 멀리서 묵묵히 바라보며 두 사람의 사랑을 존중한다. 첫 만남의 시선이 우연이었다면, 마지막 만남의 시선은 사회가 주입한 거대한 불안과 장애물을 모두 깨부수고 도달한 온전한 스스로의 선택이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시선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캐롤>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을 어떻게 뒤흔들고, 동시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진짜 사랑은 나를 온통 흔들어놓는 불안을 동반하지만, 그 불안의 터널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영화는 증명한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뜨거운 열망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겨울이 오면 눈을 감고 그 시절 뉴욕의 쓸쓸하고도 따뜻한 공기, 그리고 불안의 유리창을 깨고 걸어 나간 두 사람의 당당한 눈빛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