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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영혼을 바로 오늘 밤에 / 시 39:1-13, 눅 12:13-21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설교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잇다. 웨슬리가 어느 날 ‘기독교인과 재물’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는 먼저 ‘돈을 벌 수 있을 만큼 많이 벌어라’라고 말했다. 앞줄에 앉아서 열심히 설교를 듣고 있던 한 신사가 ‘아멘’ 했다. 웨슬리는 둘째 대목에 가서는 ‘돈을 저축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저축하라’라고 했다. 그 신사는 또 ‘아멘’ 했다. 그런데 웨슬리는 마지막으로 ‘돈을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 남에게 전부 주어라’라고 말하면서 설교를 끝냈다. 예배가 끝난 후에 그 신사는 설교에 대하여 말하기를 오늘 설교가 참 은혜로웠는데 마지막 부분 때문에 그 설교가 망쳤다고 했다.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제 설교도 망칠지 모르지만, 웨슬리의 설교가 망쳤다고 했던 그런 이유에서라면 저는 과히 개의치 않겠다.
오늘 본문인 13절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께 부탁을 드린다. 말하자면 청을 넣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좀 색다르고 여느 질문과는 다르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가 대체로 병고침을 받으러 오는 사랍들이거나, 율법에 대하여 여쭈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따위로, 시비할 꼬투리를 잡으로는 목적을 가진 자들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계기로 귀한 진리의 말씀을 해주시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엉뚱한 사람 하나가 나타나 엉뚱한 질문을 예수님께 한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자기의 형에게 명령을 해 달라고 청하고 있다. 예수님을 일종의 재판관으로 여기고 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아니 물질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재판장이 아니다. 더구나 물건을 나누어주는 재판장이 아니지요. 그 젊은이같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 유대인 사회에서는 해결사가 랍비였다. 노련한 랍비가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랍비들은 지혜가 있어서 어느 쪽의 마음도 상하지 않게 해결을 해주곤 했다. 그러고보면 그 젊은이는 예수님의 지혜와 권세를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유산 때문에 불화하여 다투고 있는 형재간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청한 것을 보면 그렇다. 일찍이 그같은 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그 젊은이는 형제간의 의가 나빴던 모양이라고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버지되는 사람이 자녀들에게 유산을 미리 나누어주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에 따르면 형이 동생의 두배를 가지게 되어 잇다. 형제가 둘인 경우 유산을 세몫으로 나누어 그 2/3를 형이 가지고, 1/3을 동생이 가지게 되어 있다.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형은 부모를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젊은이의 아버지가 졸지에 새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형이 부모를 모실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 동생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형이지만 두몫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반반씩 나누자 했을 것이고, 형은 ‘무슨 소리냐, 율법이 말하지 않느냐, 내가 부모를 모시건 안모시건 형은 형이다. 그러므로 두몫은 내것이다’ 하고 버티지 않았나 생각된다. 시비가 될만하다. 저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게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간다. 동생은 기어이 절반을 받아내겠다는 욕심이고, 형은 1/3만 주려고 한다. 이 경우, 율법이란 어느 쪽으로든지 통하는 것이다. 형은 형대로 자기한테 유리한 쪽을 고집하고, 동생은 동생대로 그러하다. 도대체 해결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동생되는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다. 이 젊은이는 랍비에게도 갔었고, 재판장에게도 갔었다. 그러나 아무데서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이 본문을 두고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형제가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형이 부모를 모시지 않고 동생이 부모를 모셨다. 형이 장가를 못가서인지, 아니면 며느리가 고약해서인지, 아무튼 형이 제구실을 못하고, 동생이 형 대신 부모를 모시던 중에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 유산을 나누게 된다. 동생은 당당하게 주장한다. ‘아버지는 내가 모셨왔으니 2/3은 내가 받아야 하오. 형은 1/3만 받으시오. 법률상으로는 당신이 형이지만 부모를 모신 입장에서는 내가 형이오.’ 이 말도 말이 된다. 이래서 유산분배 문제를 해결보지 못하고 시비를 벌이고 다투고 하면서 오늘에 까지 왔고, 이제 예수님께 하소연하러 왔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어렵게 말하면 ‘유산’이지만 쉽게 말하면 ‘돈’이다. 돈문제이다. 물질문제, 재물문제이다. 이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전념하다보니 형제간에 유애가 간데가 없어졌다. 동생도 없고 형도 없다. 서로가 원수로만 보이게 되고 말았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가난한 것만 같고,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는 것만 같다. 그래서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고, 차라리 ‘저 인간’이 죽어 없어졌으면 좋을 것 같은 상황에까지 다달았다. 이뿐만 아니라 가문도 욕되게 만들었다. 유산 가지고 형제 사이가 망가졌으니 망신이요, 죽은 부모에게 욕을 돌리는 결과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아랑곳 없다. 오직 재물에 대한 욕심만으로 눈에 핏발이 서 있을 뿐이다. 부모고 형제고 이웃이고 가문이고 다 안중에 없다. 마침내는 남의 힘까지 빌리려든다. 예수님의 힘을 빌리려고까지 혈안이 되었다. 재물과 소유, 돈, 그리고 이기적인 행복의 노예가 될 때에 사람은 이렇게 추해진다. 내 이익 밖에는 생각하는 것이 없다. 상대방 생각은 조금도 해주지 않는다. 이런 일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만 보는 일인가? 오늘 우리네 세상에서도 돈 때문에 부부 사이가 나빠지는 집이 있다. 돈 때문에 형제 사이가 원수같이 되어 버린 집도 있다. 두루 살펴보면, 돈으로 인해 사람의 격이 얼마나 초라해지나? 얼마나 추해지나? 그로 인해 세상이 얼마나 탁해지고 복잡해지나?
오늘 본문의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찝찝한 비유 이야기에서 농사에 대풍을 맞이한, 어떻게 보면 사업에 크게 성공한 부자는 오늘 우리들이 흔히 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을 자기 자신에게 독백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비유 이야기의 절정은 이렇게 성공에 도취되어 안심하고 생을 즐기자고 자기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바로 오늘 밤에 이 부자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통첩이 여운을 남기는 질문과 함께 왔다는데 있다. ‘너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비유의 끝에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이 비유를 결론짓고 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으니라.’
실로 우리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무서운 말씀이 어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주변에 흔히 일어난다. 지난 해 괌에서 대한항공 여객기가 추락했을 때 인천의 한 새마을금고 이사장이 죽었다. 엄청난 재산을 남겼는데 자녀들, 손자들까지 모두 죽었다. 그런데 재산이 몇천역에 이른다. 죽은 이사장의 형제들과 사위하고 재산 싸움이 붙었는데, 1심에서 사위가 승리하자 재판에 불복한 형제들이 2심에 상고를 해서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소요사태가. 499명이 죽음, 예견된 사태임, 내가 죽을지는 몰랐을 것. 며칠전 전군간 도고에서 차사고로 일가족 4명이 죽음.) 이런 사고를 통해 일어나는 일들을 볼 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공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랍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공평하게 대한다는 사실, 죽음 앞에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갑자기 닥치는 죽음, 위로받을 길 없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준 이런 죽음의 사건은 우리들 모두로 하여금 다시 한번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 자신의 삶의 목적과 자세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든다. 이것은 먼저 죽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 주는 마지막 봉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부자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그가 사업을 함에 있어서 흔히 우리 사회에서 보는 것 같이 거짓, 협잡, 사기, 강탈 등의 불법적이고 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나? 또는 복지부 장관직을 사임한 주양자씨처럼 부동산투기나 매점매석 등의 비도덕적이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었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 부자는 여러분들처럼 부지런히 일하고 알뜰하게 저축하여 재산을 모았다. 오늘 우리 사회의 제반 법이나 경제윤리에서 볼 때 아무런 잘못을 범함이 없이 성공한 부자이고, 가장 존경받고 모범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재산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21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곧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허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예수님은 보았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것’이란 무엇을 뜻하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들에 있어서 부하게 되는 것’을 이미한다고 풀이하는 성서 해석가가 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고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빈곤한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인 부자는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신 자기 자신만을 믿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를 공경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그를 기쁘게 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성공하고 그가 무엇이 되었다 할지라도 어리석고 아무 의미가 없음을 성서가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의 도리와 본분, 인간의 의미와 행복이 어디 있느냐 함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를 내신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 있다. 이 어리석은 부자의 문제가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않고’ 신이 아닌 ‘인간의 손에 내맡긴’ 것이다. 이 부자가 어리석은 것 중 가장 어리석었던 것은 인간의 위치와 직위를 망각했다는 데에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흙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셨고’, ‘사람들에게 일정한 수명을 주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 인간이라는 사실, 인간의 수명이란 영원에 비하면 ‘바다의 물 한방울이요, 백사장의 모래 한알’에 불과하다는 사실, ‘사람의 행동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드러나 있어서 그 분의 눈을 속일 수도 없고’,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 ‘인간이 잘하면 얼마나 잘하며’,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 등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터무니 없는 자기 의와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와 사랑에 그 존재의 근거와 의미를 가지고 산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인간이 가장 어리석고 비참한 존재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 부자가 어리석은 사람이었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그의 재물을 의지했다는데 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구약의 외경인 집회서 11장의 사상과 매우 상통한다. 집회서에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의 운명과 그 끝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애를 쓰고 인색하게 굴어서 치부하는 사람이 있지만, 결국 그가 얻는 보상이 무엇이겠느냐?’ ‘나는 이제 편안히 쉬며 내 재산으로 잘 살 수 있다’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지를 그는 모르고 있다. 그는 자기 재산을 결국 남에게 남겨놓고 죽어갈 것이다.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공한 자, 출세한 자, 권력을 누리는 자의 비참한 말로를 말해주고 있다. 이 부자의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나? 물질이란 것이 인가느이 삶에 봉사하는 수단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식을 갖지 못한 데에 있다. 이 부자에게 있어서 물질은 생의 수단이 아니라 생의 목적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끝없는 탐욕, 소유욕, 경쟁, 치부, 여기서 오는 성취감으로 이 사람의 배는 부르고 그의 영혼은 병들어 있으며, 생의 목적은 왜곡되고 망각되고 있다. 이 부자는 부를 생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되는 자기 우상화에 빠졌다. 천하에 안하무인 격으로 교만해져서 ‘나는 누를 자가 누구냐?’라고 소리치고, 자신이 최고라는 착각과 자기 과대망상에 빠지고, 자신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게 된다. 그래서 이 세상, 사회, 이웃 모든 사람들이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극도의 자아 중심주의와 이기주의의 노예가 된 사람은 물질의 노예로 전락되기 마련이다. 사람이 물질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물질이 사람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다. 이런 사람은 물질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고 물질이 전부다, 물질이 곧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착각각하는 사람이다.
또 이 부자가 어리석은 사람인 것은 물질이란 함께 나누어 가지고, 함께 써야 하는 것, 물질이란 쓰기 위한 것이지 쌓아두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 부자는 ‘내 소출이 많아 쌓아들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한 끝에 기껏 생각한 결론이 ‘내 곡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들을 거기 쌓아두겠다’라는 것이었다. 이 지구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 한 곡간에 식량을 쌓아두는 것은 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흑인 민권운동의 투사였던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잉여농산물을 저장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하루에 백만불씩 쓰는 사실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이 식량을 비용이 들지 않게 저정하는 곳을 알고 있다. 밤에 굶주린 배로 잠자리에 들어가는 수백만 명의 주름잡힌 위장 속에 그 식량을 저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부자가 어리석었던 것은 자기의 이기적인 삶을 초월하여 어떤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는 자기 중심적인 삶의 자세에 있었고, 자신의 생을 사망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그는 성공하여 자기 재물을 보관할 장소가 없을 정도로 많이 소유한 거부가 된 다음에 뭐라고 말하고 있나? ‘영혼아,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순간을 즐기는 삶, 눈 앞에 보이는 물질, 이익, 세상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이다, 죽음 후의 삶, 구원, 영생 등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하지 않고 ‘내 영혼아,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면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성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해 주고 있다. 요일 2:15-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자 안심하라.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말하던 바로 그날 밤에 ‘너 어리석은 사람아, 바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 심판의 말씀이 내린다. 자기 중심적이요, 현세중심적이요, 세속중심적이요, 향락중심적인 세상 속에 살면서 다시 한번 주님이 음성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