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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입을 열어 한 세겔을 / 시 8:1-9, 마 17:22-27
우리는 하루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스쳐지나가기도 하며 살아간다. 그들 중에는 만나서 반가운 사람이 있는 반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직종에 따라 기피하는 인물도 있다. 운전하는 사람들은 교통순경을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공무원은 기자를, 장사나 사업하는 사람들은 세무서원이나 소방서원, 그리고 위생담당 공무원들을 그렇게 반갑게 여기지 않는다. 작은 가게로부터 재벌에 이르기까지 세무사찰이나 세금 독촉, 그리고 준조세 성격을 띤 성금이나 떡값 등의 독촉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금 독촉을 받은 이색적인 내용이 나오고 있다. 마태복음 에만 있는 이색적인 기록이다. 마태의 전직이 세리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세금에 얽힌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을 것이다. 사실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각권마다 기록자의 출신성분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마태는 세리였다. 마태복음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유대의 왕족 후소손로 오신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권위를 드러낸다. 또한 2:1절에서는 예수님 탄생 당시에 왕으로 오신 분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요 통역관이었다,. 막 1:17-28절에서는 갈릴리에서 베드로가 제자되는 장면부터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의사였다. 눅 1장에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잉태되는 장면,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임신하는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를 기록한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그들의 직업의식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 오늘날 성도들도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직업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세리 출신 마태가 예수님이 세금독촉을 받았던 일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한 데는 그의 전직과 관련하여 이해가 간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크게 세종류의 세금을 냈다. 1) 국세 : 18세 이상된 모든 성인은 인두세(지금의 주민세)를 로마정부에 냈다. 그래서 로마 황제는 종종 제국 내의 모든 지역에 인구조사를 위한 주민등록을 하도록 했다. 요셉과 마리아가 본적지 베들레헴에 가게 된 것도 인구조사에 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2) 관세 : 물품 유통과 소득에 따라 내는 세금으로서 일부는 로마에, 일부는 지방 관리 유지비에 사용했다. 3) 성전세 : 로미 시민은 쥬피터 신전에 세금을 냈으나, 유대인들은 종교적 전통을 존중히 여겨 성전세를 내게 해서 예루살렘 성전, 각 지방의 회당 유지에 사용하도록 했다. 출 30:11-16절을 보면, 세액은 20세 이상 성인이 1년에 동전 반세겔로서 남자 노동자 평균 임금의 1/2 노임에 해당된다. 납기일은 매년 3월 15일에서 25일 사이로서 각자 주민등록 지역 성전세 징수원에게 납부해야 한다. 성전세를 납기내에 납부하지 못하면, 1차 2차 독촉을 받게 되고, 그래도 납부하지 못하면 산헤드린 공회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야 된다.
예수님께서는 오랜 전도여생을 마치고 고행 가버나움에 돌아왔을 때, 세무서원이 찾아와서 성전세 독촉을 하였다. 본문 24절에서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금 독촉을 받았을 때 예수님이나 제자들에게 돈이 없었던 것 같았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베드로를 시켜서 갈릴리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와서 입을 열면 동전 한세겔이 나올 터이니 그것으로 너와 나를 위해 세금을 내도록 하라고 했다. 몰고기 입 속에 든 한세겔을 꺼내 세금을 납부한 사건에서 몇가지 독특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1.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이적을 행하셨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수십가지 이적을 행하셨어도 다 남을 위해서 하셨지만 이번만은 자신의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서 이적을 행하셨다는 점이다. 세금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신적 권능까지 행하셨다. 그만큼 세금 납부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마 22:21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탈세가 보편화되었고, 탈세를 죄악으로 여기지 않았다. 몇가지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1) 세금을 내는 것은 식민지 종주국인 로마에 충성하는 것이므로 민족성이 강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반 애국적인 행위로 보았다. 2) 세리들의 부패(세금 포탈)로 인해 세무행정 자체가 불신을 받고 있었다. 3)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우선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백성들로서는 세금을 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시면서까지 정직하게 세금을 내도록 가르쳤다.
오늘날 우리들의 형편은 어떤가? 요즘 세금에 관한 현수막들이 걸려잇는 것이 눈에 띤다. 세금문제에 관해서는 신앙인이든 비신앙이든 어떻게든 적게 내려고 애쓴다. 그리고 세금에 관해서는 정직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기부금 확인서, 의료행위나 약값 영수증 등)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다. ‘세금 다 내고 나면 무엇으로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래도 납세의무에 정직해야 한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씀처럼 정직하게 세금을 내눈 분이 애국자이다.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자가 나라를 사랑하는 자이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자이다. 성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시민윤리 가운데 하나가 세금을 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롬 13:7절에서 바울은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정직하게 세금을 내야 한다.
2. 예수님은 오해를 받지 않는 생활을 하심으로 남들의 모범이 되셨다.
일을 아무리 잘해도 남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면 오해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오해받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전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전세를 낼 의무가 없다. 본문 25절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세 독촉을 받았을 때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라고 물었다. 임금이 세금을 거두어 들일 때 백성들에게는 징수하지만 왕자에게는 징수하지 않았다. 26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27절에서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라고 대답한다.
신앙생활도 때때로 오해를 받을 때가 있다. 근검절약하는 분을 인색하다, 경건한 분을 위선자라는 등으로 오해하며 말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해받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오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진실이다. 진실만이 서로의 마음을 열게하고 신뢰감을 갖게 한다.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다른 어떤 세금을 납부하셨다는 말은 없지만, 성전세 납부만은 기록되어 있다는 점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전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준다 하겠다. 당시 성전세는 빈부귀천이 없이 모두가 반세겔씩 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을 한다면 적어도 성전에서 이틀 일한 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부터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성서에 보면 또 하나의 세금이 있다. 바로 십일조이다. 십일조의 조(租)자는 세금이라는 말이다. 세금은 의무이다. 십일조는 믿는 자들의 의무이다. 십일조는 세무서에서 걷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에게 드렸다는 점이 다르다. 당시 유대인들은 재산이나 토지를 가진 분들은 토지 소산의 1/10을 성전에 냈다. 십일조는 두가지 성격이 있다. 1) 십일조는 내 것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 중에 1/10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십일조 헌신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기본도리이며 의무이다. 2) 십일조는 영적 씨앗이다. 고후 9:10절에서 바울은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라고 말했다. 십일조는 더 많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축복의 씨앗이다. 그래서 말 3: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십일조를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3.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온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27절하에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세금을 내면서, 다른 제자들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어려운 형편만 생각한 나머지 남의 어려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형편이 좋을 때는 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잊어버린다는 말처럼 자신의 어려웠던 때의 심정을 잊어버리거고, 지금 남이 당하고 있는 어려운 때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처지, 어떤 형편에든지 간에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동정을 가지고 사셨다. 여기에서부터 사랑이 출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을 보라. 가나 혼인잔치 집에 가셔서는 포도주가 떨어져 낭패를 당하게 된 혼인집에 깊은 관신을 갖고 도와주셨다. 여러고 성을 지나실 때는 돈과 직위는 있지만 따돌림을 받고 있던 세리 삭개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그의 집을 찾아가셨다. 수가성을 가셨을 때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꿔야했던 불행한 여인에게 관심을 갖고 희망을 주었다. 갈릴리 바다에 가셔서는 밤새도록 수고하엿으나 고기 한마리 잡지 못해 실망하고 있던 어부들에게 깊은 동정과 관심을 가지셨다.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다. 그뿐 아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어 달리는 극한 고통 가운데서도 어머니 마리아의 노후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다. 심지어 자기를 십자가에 죽게 만든 뭇 사람들을 무한히 동정하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신앙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평화의 길이다.
지금 북한에서는 굶주려 죽어가고, 탈북한 여인들은 중국에 가서 사창가나 농장의 노예로 팔려간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 민간단체들이 북한돕기 운동을 벌여 북한에 식량을 공급하고 있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 지금부터 27년 전인 1970년에 서독 수상 브란트가 동독을 방문하여 동독 수상 스토프를 만나 동서 총리회담을 처음으로 가졌다. 그때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 외에는 아무런 합의점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후 2년간 끈질긴 대화 끝에 ‘동서 기술조약’을 만들어 평화공존의 길을 열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독일은 통일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남북관계가 별로 신통하지 못하다. 위정자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통일을 안하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 남북관계는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편견을 가지고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애정어린 관심을 키워갈 때 한반도는 통일이 되고 평화가 찾아오리라고 믿는다. 롬 12:17-18절을 보면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말씀한다.
여러분, 모든 일에 진실하고, 모든 일에 성실하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대하자. 세상은 험하다. 악의 세력이 성난 파도처럼 우리를 덮고 있다. 그래도 낙심하지 말자.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을 붙들고 굳세게 살아야 한다. 미움과 다툼이 있어도 평화를 찾자. 어둠이 있어도 계속 빛이 되어야 한다. 불의가 있어도 계속 의의 길을 힘있게 걸어가자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신다. 우리가 맡은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크신 은총으로 함께 하실 줄 믿는다. 책임과 의무를 잘 감당하므로 하나님의 축복받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자. (1997-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