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국수 / 김석수
추석이 지났지만 푹푹 찌는 무더위는 물러갈 기세가 아니다. 그렇지만 예전 같으면 지금쯤 먹기 어려운 콩물 국수를 아직도 즐길 수 있다. 집에서 20여 분 걸어가면 ‘맷돌 콩국수'집이다. 신호등을 두 번 건너서 땀을 흘리면서 언덕길을 올라간다. 골목을 빠져나오면 찻길 옆에 한옥이 즐비하다.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식당이다. 마당에 간이 화장실과 조그마한 화단이 있다. 밖에서 보면 허름한 주택이다.
현관 문을 열면 거실과 안방에 탁자와 의자가 눈에 띈다. 키가 작은 여종업원이 반갑게 맞이한다. 어떤 날은 손님이 많아서 등나무 아래서 기다려야 한다. 화단 안쪽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맷돌로 콩을 가는 사장은 팔뚝이 굵다. 찌는 듯한 더위에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려도 그 집 콩국수 맛을 보려고 모두가 참고 기다린다. 자리에 앉으면 김치와 콩나물이 나온다. 한 그릇에 9천 원이고 곱빼기는 2천 원을 추가한다.
콩물은 몽글고, 고소하다. 면은 쑥 향기가 물씬 난다. 양이 많다. 식당 벽에 콩과 쑥의 효능을 길게 설명한 액자가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콩은 단백질이 풍부해서 밭에서 나는 고기다. 콩을 먹으면 중성 지방과 콜레스테롤이 낮아져서 몸이 건강하다. 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동맥 경화나 심장 질환 예방이 된다. 노화 예방과 피로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쑥은 위장과 간장, 신장 기능을 좋게 한다. 피를 맑게 하고 살균, 진통, 소염 작용으로 면역력을 키워 준다.간 기능에도 도움을 주며 속을 편하게 해 준다. 콩과 쑥은 더위에 지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에게 더없이 좋은 음식이다.’ 이 말이 모두 옳다면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는 것 같다. '몸에 좋다니 곱빼기로 먹어 보자.'
게 눈 감추듯이 한 그릇 비우고 나면 배가 불룩하다. 그 집의 콩물은 신혼 시절 아내와 함께 자주 찾았던 순천 장대 다리 옆에 ‘장대 콩국수’ 집을 생각나게 한다. 1965년부터 3대째 장사하는 집이다. 걸쭉한 콩물에 쫄깃한 면 맛이 일품이다. 반찬은 깍두기 한 접시다. 향이 아주 상큼하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양에 놀란다. 값도 싸다. 쑥 향기는 없다. 아내와 나는 광주로 이사 온 뒤로 순천 처가에 가면 가끔 그 집에 갔다. 지난여름 지나는 길에 들렀더니 예전 맛이 나지 않는다.
‘알콩달콩’은 담양에서 살면서 자주 갔던 콩국수 집이다. 이곳은 면을 반죽하면서 울금을 섞는다. 울금은 ‘강황’의 덩이 뿌리를 말린 약재다. 가을에 덩이뿌리를 캐서 잔뿌리를 다듬고 물에 씻어서 햇볕에 말린 것이다. 이 집의 면발은 강황분 색깔처럼 노랗다. 서리태 콩을 갈아서 콩물을 만든다. 콩물이 진하고 강황 냄새가 난다. 검은깨를 고명으로 콩물 위에 얹어 준다. 한여름 주말에 가면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지난번에 아내와 함께 백양사 가는 길에 들렀더니 손님이 많아서 사람 대접 못 받고 나왔다.
동네 도서관 근처에 콩국수를 파는 식당이 몇 군데 있다. 그중 한 곳은 메밀 국수 집인데 여름에 계절 메뉴로 콩물 국수를 만든다. 메밀 면에 콩물을 붓고 어름을 몇 개 넣는다. 맛은 별로지만 먹을 만하다. 식당이 좁아서 점심 무렵에 가면 그곳도 자리 잡기가 어렵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가끔 갔다. 또 다른 곳은 팥죽을 파는 곳인데 여름에만 콩물 국수를 먹을 수 있다. 소금보다 설탕을 많이 넣었는지 콩물이 달다. 처음 먹기에는 좋지만 먹고 나면 맛이 개운치 않다. 값도 비싸다.
무덥고 지루한 여름을 보내면서 이곳저곳 콩국수 집을 기웃거렸다. 음식점마다 맛과 향기가 다르다. 손님을 맞이하는 식당 분위기도 다르다. 맛도 중요하지만 향기가 좋으면 더 가고 싶다.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과 종업원의 웃는 얼굴에서 사람의 향기를 느낀다. 음식은 양념뿐만 아니라 ‘정성’이 들어가야 맛있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은 향기롭다. 서늘한 가을에 훈훈한 사람의 향기가 사방에 널리 퍼지는 날이 빨리 오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