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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요강의 전설
고인이 된 지 오래인 어느 소설가의 콩트를 읽다 말고 배꼽을 잡고 거의 나뒹굴다시피 한 적이 있다. 전직 교육자인 이교창이 말이다. 수십 년 전 일이다. 제목은 ‘두 개의 요강’. 요강? 지금 대도시 어린이들에게 요강이 뭔지 아느냐고 물으면 더러는 고개를 가로저으리라.
그러니 반세기 전만 해도 요강은 남녀노소가 쓰는 필수품이었다 해도 과언 아니다. 이를 대변하듯 하는 광경이 있어 여기 적는다. 남도 부산의 변두리 경우다. 한창 다섯 층짜리 아파트가 여기저기에 들어설 무렵이었으니, 자연스럽게 공터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거기 임시로 밭을 일구고 상추 따위를 심어 놓은 뒤, 자기 집 가족들의 오줌을 요강에 받아 통째로 거기 갖다 부어 가꾸는 할머니들이 많았다. 해서 내친김에 ‘요강’과 ‘문화(文化)’를 접목(?)시켜 보려는 거다. 억지라고?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글쎄다. 여든이 넘은 이교창(李敎唱)은 부정보다 긍정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하는 거다. 아직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니까. 그리고 말이다. 무슨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오줌 상추’를 많이 얻어먹었던 그로서는 그 특유의 부드러운 맛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게 외려 탈이라 하자. 견강부회가 결코 아닌….
요강에 얽힌 비화(?) 하나를 우선 들춰낸다. 고인(故人)이 된 교안의 어느 선배는 요강 없이는 못 살았다. 다리가 불편하고 전립샘이 부실하여 밤중에 소피를 자주 봐야 할 처지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부부 싸움 중 분풀이를 한답시고 자기가 쓰던 요강을 박살 내 버린 거다. 며칠 동안 화해도 안 되고 해서 죽을 맛이었다. 하나 답답한 사람이 샘 파기 마련 선배는 불편한 몸을 버스에 싣고 자갈치 시장에 가서 옹기점부터 찾았더라나? 한데 안주인 이쪽에서 운을 떼기도 전에 입을 막는다.
“과붓집에 가서 바깥양반 내 놓으라 하이소.”
몇 군데 기웃거려 봤으나, 매한가지였다. 선배는 하는 수 없이 동래(東萊) 시장까지 밟게 된다. 하나 거기서도 해결할 수 없었다. 온갖 점포를 훑었지만 돌아온 건 타박이었다.
선배는 신음(呻吟)을 뱉어냈다. 푸념을 섞어서…. 부산의 시장에서 요강을 산다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나 진배없구먼!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더니 어느 행인이 이를 엿듣고 귀띔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거리의 구포 시장 옹기점에 가보라는 거다. 과연 거기-상설 시장이기도 하고 5일 장이 열린다-거기에 요강이 수두룩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이 생각나서 선배는 진한 연두색 하나를 골라 예쁘게 포장까지 해서 의기양양 귀가했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달리 아내가 먼저 부엌문을 열고 반기는 게 아닌가. 그런 아내의 손에 들려 있는 게 같은 색 같은 크기의 사기요강이 아닌가. 요강이 가져다준 서민의 애환(?)을 일별(一瞥)하면서, 그는 몇 번이나 웃었다.
아무리 남도라지만 혹한기엔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기 예사다. 이윽고 2월이 가고 3월에 접어들자 추위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각급 학교에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봄! 그와 더불어 이교창은 이른바 관리직이라는 교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가 만 50세를 넘겨서 서너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승진했다는 부러움도 샀다.
교직 사회에서는 흔히 반신반의해야 할 이런 이야기가 오갔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오르기 힘든 벼슬자리가 교감이라는…. 세 개뿐인 직위(교사 교감 교장)이고, 교감이 첫 번째 승진 자리인 지라 ‘박이 터질’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세세한 사연을 다 적을 수 없음이 유감이다. 어쨌든 교감에서 교장이 되는 것은 순리만 따르면 된다. 떼놓은 당상이라 할까?
어쨌든 일이 묘하게 되려고 해서 그런지 이교창은 그 선배가 사는 동네의 앞 국도를 따라 관리직으로서 첫 출근을 했다. 자동차를 운전할 줄 모르니 비좁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비좁았다. 가방을 들었는데, 받아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부대낀 끝에 학교 앞 정류장에 버스가 닿았다. 두서넛 승객을 내려놓고 버스는 부르릉 소리와 함께 매연을 토하더니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 갔다, 시침이 8을 가리킬 즈음이었다.
마치 전송이라도 하듯 무심결에 손 흔드는 흉내를 내고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몸을 돌려 진입로로 들어서려는데, 맞은편에 새로 지은 간이 주택의 현관문이 열렸는데, 언뜻 보아 신혼인 듯한 여자 하나가 치마 뒤에 뭔가를 감추고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여자가 이윽고 보란 듯이 내놓은 게 있었는데, 바로 요강이 아닌가! 여자는 길가 하수구에다 그 내용물을 쏟아내었다.
여자는 예쁘게 생겼더라. 그런데 첫 교감 출근길 초로의 남자 앞에서 이상야릇한 차림으로 이상야릇한 물건을 내보이더니, 이상야릇한 소리(콸콸)를 동반한 이상야릇한 내용물을 비우다니, 쯧쯧…. 그는 순간 이상야릇한 느낌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야릇한 표정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교직 생활 30년 가까이 되어 직위를 바꿔 제가 앉을 자리를 찾아가는 3월 2일의 오전은 그런 우스개 같은 경험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걸음걸이조차 흔들렸다. 순간 그가 내뱉는 말, 이거 개판 5분 전 아닌가?
300미터쯤 속보로 직진(直進)했더니 교문이 보였다. 부산 강서구에서 가장 큰 대저(大渚)초등학교(당시는 초등학교)다, 1‧2위를 다툴 만큼 역사를 자랑하기도 하는…. 어린이들이 상당수 등교하여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녀석들은 낯선 객인 줄 알고 우르르 몰려들어 꾸벅꾸벅 절을 했다. 인사말을 생략한 채 말이다. 그는 건성으로 답례하는 둥 마는 둥 하고서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데, 화단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멈춰서서 큰소리로 읽는다. ‘개 교육 십 주년 기념비’!
교육자보다 애견가로 여기저기 더 이름이 알려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그렇지 이반 파블로브(Ivan Pavlov)도 개를 실험 대상으로 했었지.”
그런데 어린이들이 가만있지 않는 거다. 녀석들은 이구동성으로
“‘개교 육십 주년 기념비’인 거라예. 할아버지는 누구신데 그것도 모르십니까?”
그야말로 낭패였다. 자신의 무식 아니 무지가 출근 첫날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으니 얼굴을 들기가 힘들었다. 홍당무로 변하기 직전의 낯빛을 억지로 정상 가까이 되돌리는 데 성공한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애들아, 내가 새로 온 교감 선생님이야. 웃기려고 일부러 그래 본 건데, 너희들이 잘도 넘어가 줘서 고맙구나. 어쨌거나 나도 개를 좋아하긴 해. 알아듣겠니?”
그제야 녀석들도 박수도 보내면서, 다투어 앞뒤에서 허리를 굽혀 그에게 인사를 했다. 한 괴짜 교감의 이 ‘부임기(赴任記)’는 두고두고 교육 동지들의 입줄에 오르내렸다. 근사하게 표현한다면 회자(膾炙)되었다? 하지만 아서라, 그런 데까지 ‘회자’가 끼어든다 치자. 이 세상엔 부정의 사상(事象)이 존재하지 않는다.(회자는 긍정일 경우에만 쓴다는 명제를 강조한다.)
어쨌든 출발이 이처럼 코미디나 다름없었으니 어찌 과정이며 결말이 제대로 이뤄졌겠는가? 기네스북이 있다면 거기 등재되고도 남을 일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 그는 그곳에서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세월을 보냈다.
그렇다고 해서 어찌 아니 부(否) 일변도(一邊倒)와만 싸웠겠는가? 가물에 콩 나듯 때로는 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평을 들을 만한 행적도 남겼으니 그걸 뭉뚱그려 적어 보려는 거다. 비중을 따지거나 선후를 비교하지도 않고 생각나는 대로 서술해야 되레 이 이야기의 존재 가치가 평가받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웬일일까?
교감의 자리는 오르기도 힘들다는 걸 앞서 들먹었었다. 중언부언하는 셈인데, 그 업무를 수행하기도 힘듦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는 교장을 발 보필하고 아래로는 교직원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 둘 사이의 샌드위치로 흔히 비유되는 게 교감의 신세라 흔히 이야기하던 시절에 그도 그 자리를 보전하려 애썼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왜 그런 인사(人事)를 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교육에 대한 식견이나 자질 혹은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그를 대저초등학교에 승진 발령을 낸 자체가 모험이었음은 진즉에 드러났으니 말이다. 교감 경력 소유자를 보냈어야 할 자리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터였으니….
대신 학교장은 대단한 분이었다. 다음 자리가 교육장이나 시 교원연수원장으로 물망에 오를 정도로. 해서 그분은 4월 초에 서울에 6개월 동안 연수를 떠나게 된다. 얼떨결에 이교창 그가 교장 직무 대행을 맡게 된다. 발령을 따로 내지 않는 조건이었다. 교장 회의 등에 대신 참석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그게 영광스럽다는 생각을 그는 하지 않았다.
한 달쯤은 무사히 지나갔다. 모든 교육 과정은 그런대로 정상 운영했고 특색을 살려 생활지도에 애썼다. 직무 대행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건 5월 5일이었다. 저녁에 집으로 전화가 왔는데 한 어린이가 지나가는 과속 트럭에 치여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충격의 비보(悲報)였다.
부모 없이 할머니 슬하에서 지내는 어린이란다. 할머니가 준 돈으로 길 건너에 있는 가게에 과자를 사러 갔다가 참변을 당했다는 게 아닌가? 담임을 불러 같이 어린이의 할머니에게 위로를 하러 갔다. 할머니는 망연자실해 있었다. 따라 울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집안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문상(?)을 마치고 돌아 나오려는데, 마루 끝에 사기요강이 하나 얹혀 있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녀석이 겁이 많아서 해가 지기 무섭게 요강을 끌어안고 있었다는….
엄격히 말해 학교로서는 담임이나 교감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평일에 등하교 지도를 잘못한 것도 아니고 집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교창은 적잖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학교 운영 잘못이라는 자격지심에까지 빠져 허우적거렸다.
전화로 학교장에게 늦게 보고했는데, 장거리 전화를 받는 그분은 되레 위로를 보내면서
“신경 너무 쓰지 마시오. 불가항력이니….”
신문에는 아주 작게 보도되었다. 당연히 교육청에다 보고를 했다. 담당 장학사며 과장도 학교장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학교에서의 직접 잘못은 없었으니 그들도 교장 직무 대행일 따름인 이교창을 더 이상 다그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열흘이 채 못 넘겨 또 다른 어린이의 부음을 이교창이 담임 교사로부터 듣게 된다. 5월 14일, 일요일 아침이었다. 5학년 어린이가 익사(溺死)했다는 거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샛강에서라는데 무엇보다 늦봄이라 어른이라도 수온이 낮아 물에는 들어갈 엄두조차 못 낼 거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아니나 다르랴, 담임이 덧붙이는 말이다.
“뭔가 좀 이상합니다. 어린이가 5월 중순에 강에서 수영할 리도 만무합니다. 혼자서 신발을 밖에 가지런히 벗어 놓고 한가운데서 사체로 발견되다니….”
담임교사를 만나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갔다. 어린이는 거적때기 비슷한 것을 덮고 누워 있었다. 따로 장례를 치르지 않고 오후에 어디 야산에라도 묻겠다는 할머니의 말이었다. 눈물이 범벅이 된 채 할머니가 하는 말이다.
“자슥아가 세숫대야 물로 겁 냈십니더. 지 발로 거까지 들어갔다고예? 어림도 없습니더. 지 어미 애비에게 홀린 거 같습니더.”
어린이의 부모가 둘 다 병으로 이승을 오래전에 떠났다고 할머니는 덧붙였다. 이상한 사건이 일어난 토요일 오후 할머니가 아이를 몸 나무랐다나?
“그랬더니 몇 시간이나 제 어미 아비를 찾는다 아닙니꺼?”
사체 옆에 사기요강이 하나 보였다. 이교창은 귀신에 홀린 느낌이 들었고 마침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할머니의 설명인즉슨 요강의 주인은 아이였단다. 그래 마지막 가는 길에 가져다 놓았다는 거다. 할머니의 끝말이다.
“엊저녁에 알라 이모랑 같이 여기서 잤는 기라예. 우리도 여기에다 소피를 밨습니더.”
덧붙이는 말이 또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으니….
“지 어미가 살았을 때 지가 내게 얘기한 적 있었어예. 할머니, 엄마가 밤에 수돗가에서 가끔 오줌 누는 소리가 듣기 싫어요.”
그러니 사체 앞에서인들 함부로 치마를 들추겠는가, 아마도 그런 뜻이리라. 할머니는 요강에 든 오줌을 어디에 비웠는가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했다.
아무튼 그는 학교장에게 전화로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장의 반응은 예상보다 담담했으나 말속에 약간은 절망적인 단어들이 섞여 있었다. 아무리 ‘교내’에서 발생한 사고는 아니어서 담임교사나 교감 교장이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불행도 불행 나름이라며 약간은 나무랐다. 물론 교육청에는 사고 신문에서 활자화되기 전에 보고한 뒤였다, 듣고 나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상대 목소리의 여운(餘韻)조차 섬뜩하게 귓전을 맴돌았다.
물론 교육청에 그는 불려갔다. 안전 교육을 소홀히 하면 어쩌냐는 질책을 들어야만 했음은 물론이다. 과장과 국장의 면전(面前)에서 말이다.
귀교한 그는 머리를 싸맬 정도의 두통을 느꼈다.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궁여지책은 단 하나, 전 학부모와 소통하는 소위 ‘가정통신문’이라는 걸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연거푸 일어난 두 사고를 적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교사 시절에 겪었던 체험을 에두르다시피 하면서 완곡한 표현을 섞어 문안을 만들어서 어린이들 편으로 학부모들에게 발송했다. 대신 어린이들이 읽었을 때 그 어린이들이 받을 충격을 감안하여 한자를 섞었다. 웬 한자 타령이나며 항의하는 학부모인들 왜 없었으랴. 어쨌든 다른 교사나 교감은 오랜 시간 그 자릴 지켜도 겪지 않는 ‘어린이의 죽음’과 네 번이나 맞닥뜨렸으니 어찌 한숨이 나오질 않겠는가?
내친김에 얘긴데, 그는 오래전 어린이가 속절없이 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담임으로서 본 일이 있다. 공교롭게도 둘, 그나마 한 학교에서는 아니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자.
S 읍 소규모 학교에 근무할 때였었다. 소아마비로 말미암아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한 아이가 소죽솥에 빠져서 죽어버린 거다. 그가 받은 충격이 컸다. 이듬해 이웃 학교로 전보되었는데,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니…. 이렇듯 물론 자신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지만, 가슴을 저미는 기억으로 그것들은 그를 괴롭혀 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교장 직무대리로서의 그는 ‘실패’! 그 한마디로 평가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라.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결과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가 관리직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이 부족하다는 걸 자신부터 잘 알면서 그는 일찌감치 고유의 업무 외에 다른 여러 가지와 얽히고설킨 삶을 살아왔으니까. 노인학교 운영이 그 대표적인 거였다. 아닌 밤중에 노인학교? 그걸 설명하자면 이렇다. 당시만 해도 노인학교라는 게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누구든지 공간 마련이 가능할 경우, 구청에 신고만 함으로써 그 장(長)이 될 수 있는, 벼락출세 혹은 신분 수직 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거다. 그도 그 세류에 편승하였으니 시골에서 부산에 전입하기 무섭게 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 노인대학이라 이름하여 노래 중심의 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학장(學長)에 취임(?)한 거다.
‘토요일 휴무’가 시작되기 전 저음이라, 그 토요일 오후를 송두리째 버리는 대신 저명인사의 반열에 오르리라 작심하고 보니 마치 마약에라도 취한 듯 그는 노인학교라면 내로라하는 권위자가 되어 탄탄대로를 걸어오던 참이었다. 이미 여섯 해를 그렇게 살아온 그였으니 천하없어도 토요일 오후는 노인학교에 출근해 있던 세월이 6년째였다. 민요만 가르치기로 결심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어느덧 대중가요에까지 한 귀퉁이를 내어 줌으로써 가장 신나는 공간이 되다 보니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는 혼신(渾身)의 힘을 쏟아 노인대학장 노릇을 해 왔다.
그러다가 6개월의 연수를 마친 학교장이 돌아온 어느 날 이웃의 노인대학(노인회에서 운영하는 진짜 노인학교)의 학장과 구(區) 노인회 회장 등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와 이교창을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 당시까지 D 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던 원로 중의 원로도 섞여 있었다. 롯데를 한국 시리즈 우승으로 두 번이나 이끈 프로 야구 K 감독의 아버지다. 그들은 이교창을 만나기 무섭게 매주 목요일 오후에 한 시간씩만 자기들의 노인학교에 와서 노래 지도를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었으나 그의 공명심이 그를 쓰러뜨렸으니, 수당이나 수고비 없는 조건이라면 나가겠다고 덜컥 약속하고 말았다.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이미 학교장을 만나 먼저 양해를 얻은 뒤라서 두 군데에서의 노인 학생 대상 강의라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셈이 되고 만다.
그걸 제삼자의 입장에서 봐도 갈수록 태산이라는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었으리라. 그가 그로부터 갖가지 사고로 얼룩진 일상을 보내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갈등의 세월에 겪은 기상천외의 일화 비슷한 걸 적어 까발리는 것은 낭패에 속하는 일이지만, 기왕에 운을 뗐으니 몇 개 들먹여보려는 거다.
‘개교 육십 주년 기념비’를 개 교육 십 주년 기념비‘라 우기는(?) 그답게 그는 그 뒤로도 개에 미쳤다고 할 정도로 열정을 바쳤다. 전국에서 명혈로 소문난 암캐를 수소문하여 구입(購入), 스물세 평짜리 아파트에서 대여섯 마리씩 키웠는가 하면, 녀석들이 발정했을 경우 신랑감을 찾느라 방방곡곡을 헤맸다. 오죽하면 ’최다 개 사돈‘을 가진 사람이라는 소문이 났을까?
그 극성에 혀를 내두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음은 보나 마나. 부산에서도 전람회에 출진하여 입상한 바 있는 이름난 수캐는 구하기 어렵진 않았을 텐데, 그는 특히 한국 최고를 고집하였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하여 영국 오즈밀리언 견사(犬舍)에서 작심 번식했다는 암캐 후로다의 혼사를 위해 서울을 찾게 된다. 서울의 지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후로다를 수송 바구니에 싣고 새마을 특실에 오른 것이다. 참으로 무모한 짓이었다.
다행히 녀석은 얌전하게 바구니 안에서 끽소리도 않고 몇 시간을 견뎌 내었다, 대소변도 참아 내었고…. 그러나 서울역에 내렸을 때가 문제였다. 이른바 ’강경대 군 치사 사건‘으로 광장 하늘은 화염병과 최루탄이 맞부딪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속을 발정 난 암캐가 든 바구니를 끼고 뛰는 모습이란 상상만 해도 우스꽝스럽다. 밤이 이슥해서야 사돈집에 도착하여 신방을 차려 준 이야기는 견계 전설의 모태(母胎)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어 의아심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교창에겐 그런 일쯤 비일비재했다는 걸 밝히자.
하지만 교감이 학교에는 연가를 내놓고 그 짓을 했으니 사실이 탄로 났을 땐 징계라도 받아야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토요일 오후 늦게 출발하여 월요일 밤 귀가한 일정이었으니 그래봤자 딱 하루만 학교장과 동료들을 속인 결과라 과거사라 치부하면 한닷 우스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지만….
신분을 건 두 번째 모험 또한 정상인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일이다. 1주일을 통틀어 그가 자유로운 시간은 일요일뿐이었음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하여튼 그는 토요일 오후의 애경사엔 참석하지 못했다. 그 연장으로 일요일은 천하없어도 쉬어야만 다음 주일(週日)을 위한 충전할 수 있었다고 하자. 그래도 토요일 가장 오후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 봄 과 가을엔 노인학교 야유회를 가야만 했다. 최소 버스 두 대, 그러니까 90명 가까운 대단원의 학생들이 움직이는 행사다. 노인만이 갖는 고유(?)의 한 탓이었을까? 아무리 말려도 차 안에서 그들은 길길이 뛰며 춤을 추고 노래하였다. 물론 운전기사가 서행 운전한다지만 흔히 관광춤이라 불리는 그 가무(歌舞)는 폭탄이라 다름없었다. 때로는 연장(延長)하여 2박 3일로 여행을 하는 경우까지 생기는 건 당연하다 치자. 그런 때엔 토요일과 월요일은 거짓으로 연가를 낼 수밖에.
확실히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 대전 엑스포 기간이었으리라.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는데, 행여 시골 노인들이 새끼 울타리로 둘러싸여 하나의 군집으로 이동한다는 보도도 있었으니, 독자들은 상상만으로도 파안대소했다더라. 노인 학생들의 등쌀에 못 이겨 이교창은 남녀 80명의 인솔자가 되어 여행 반 야유회 반의 장도에 오르게 된다. 모두 베트남산 밀짚모자를 쓰고 거기 달린 끈으로 질끈 턱을 동여맨 차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탈의 염려는 줄어들어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기 쉬워 이교창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호사다마?
과연 그게 가능한지 남자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 전말(顚末)은 이렇다. 한참 복잡한 곳을 모두가 손에 손잡고 관람하다가 이교창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여 인원 점검을 했다. 딱 90명이어야 하는데 아귀가 안 맞는 거다. 아무리 거듭 세워 봐야 한 명이 모자란다. 당황한 그는 학생장과 총무에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이르고는 급히 버스로 돌아왔다. 근데 없어진 장본인(?)인 여든이 훌쩍 넘은 여학생이 미안한 표정을 짓고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이교창의 평소 말투와는 달리 버럭 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큰 질책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학생은 울상이었다. 그리고 함구. 그 난감한 표정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순간 버스 운전기사가 위기를 수습해 주었으니…. 일행이 떠난 뒤에 여학생이 뛰어왔더란다. 소피가 마려워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이탈하여 화장실을 찾았으나 문에 들어오지 않아 버스 기사에게 구원을 요청했더라나? 버스 기사인들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순간 학생이 바카스 상자를 가리켰다. 통째로 그걸 건넸더니 여학생은 빈 병 두 개만 가지고 뒷좌석으로 가더란다. 그 뒷얘기는 생략하는 게 도리지만, 지금도 의아스러운 게 있다. 과연 여자 그것도 할머니가 좁은 박카스 병 입구에 정조준(正照準)이 가능할까? 어쨌든 이교창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자그맣게 내뱉는 말, 천려일실(千慮一失)이로다. 요강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쯧쯧. 이교창이 잠시 눈을 감은 동안 부임하고 나서 그렇게 잦 보았던 요강과의 이런저런 사연이 마치 추억처럼 떠오른 게 아닌가? 이교창은 아무튼 자신이 죽어 그 옛날처럼 노인대학 강단에 다시서게 되면 사과를 할 결심이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일. 10여 년 세월이 흐른 뒤 여학생은 딸네 집에 왔다가 밤중 요강에 미끄러져 고관절(股關節)이 부러지는 바람에 이승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속담에 딱 부합되는 다음에 적는 이 일은 모든 이의 정신을 헷갈리게 할 정도로 낭패스러우니 소개하기도 버겁다. 부임하여 첫 번째 맞는 겨울 방학을 맞아 서른 명의 학생을 인솔하여 태국 방콕을 여행한 것이다. 말이 쉬워 ’학생‘이지 일흔이 넘어 아흔 살 가까이 된 노인들을 나라 밖까지 모시고(?) 간다는 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나 할 짓이다. 한데 이태 전 교사 시절 78명과 함께 대북에 4박 5일 다녀온 적이 있는지라 그에겐 그 정도야 그리 큰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았음을 밝혀 두어야겠다. 일화라고 우기기에는 뭣한 갖가지 기상
천외의 일들을 그들은 현지에서 겪는다. 시공의 제약(制約)이 있으니 딱 두 가지만 골라서 소개한다.
파타야 해변에 숙소를 정하고 그들은 일정을 소화했다. 사흘째 되는 날 산호섬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된다. 망망대해에서 우리 민요 ’뱃노래‘를 열창하면서 그들은 환호작약했다. 천막을 하나 얻고 짐을 내려놓은 다음 각자 편리한 복장으로 모여서 체조를 했다. 한데 그중에 어느 여학생은 일흔이 넘었는데도 40대 여인의 몸매를 자랑하는데 게다가 비키니까지 입고 있는 게 아닌가! 덕분에 그들은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을밖에. 그 여학생이 이야기 말미를 장식할 주인공으로 등장함을 예고한다. 한데 그 정도야 약과인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묶어 터진다. 하나만 양념으로 털어놓자. 그들은 현지에서 캠코더로 동영상을 촬영할 기사를 채용했다. 순조롭게 녹화되었기 때문에 모두 기대했고말고. 귀국 후 희망하는 학생들에게는, 일정 액수를 돈을 지불하고 테이프를 복제하여 나누어 준 건 물론이다. 그런데 다음 주 토요일 그 영상을 시청하다 말고 모두 포복절도하고 말았으니, 어느 공원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데 농담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크게 떠드는 소리와 얼굴이 그대로 고스란히 재생된 거다.
“빨리빨리 박지 뭐하노? 안 아프게 박으래이.”
한창 카메라로 사진 찍는 게 하나의 문화이던 시절 남녀노소가 단체 촬영을 할 경우엔, 위 남녀의 성행위를 상징하는 말이 대유행이었던 시절이라 어지간하면 넘어갈 일이었다. 더구나 우리말을 잘 모르는 태국 기사가 그 정도를 고려할 능력이 없어서 편집을 안 한 결과였다.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어느 여학생이 정색하고 나서 하는 고백,
“내사 마 갓 결혼한 손자며느리와 함께 모두 둘러앉아 시청하는데, 저 노무 할마시가 ’빨리빨리 어쩌고저쩌고’ 하는 바람에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는 기라 마.”
여기서 색다른 사실 하나 소개. 태국의 구석구석에 견공도 흔히 보였고, 특히 시골에 갈수록 요강이 눈에 많이 띄었다는 사실이다. 요강은 지구촌 남녀노소 전 인구 상당수를 관통하는 물건일지 모른다?? 글쎄다. 단정이야 어떻게 지을 수는 없지만….? 67-13
그 노인들과 만나면 부르던 ‘청춘가’다.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고 인생이 늙기는 바람결 같구나
딱 맞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후딱 지나갔으니까. 노인들은 단순히 늙는 게 아니라 쇠약해져 죽는다. 거의 다 70세 이상으로 입학하여 다녔으니 그 시절 그들이 살아 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은 전부 저승으로 떠나, 거기서 이교창을 기다린다. 어떤 근거라도 있느냐고 물으면 즉답을 내놓기 힘들어도 그 자신이 늙고 병들었으니, 궁색해도 변명(?)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근래 밤새 꾸는 꿈이 ‘저승 노인학교’다.
다시 약간 세월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 보자. 당시의 D 초등학교 학생들과의 연락은 원천적으로 불가하다. 그들이 40대 중반이 되었다는 것만 짐작한다. 대신 노인학교에서 자원봉사하던 고마운 인사들 중 반(半) 정도만 소통된다. 그러고 다시 중언부언하지만 심지어는 노인 학생 가족 중 전화라도 되는 사람은 딱 혼자 K 여사뿐이다. 앞서 소개한 산호섬에서의 비키니 수영복 주인공의 딸이다.
세상엔 기적과 같은 희한한 사연이 많이 존재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K 여사가 자기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던 동네는 D 초등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른 호쯤 되는, 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부농들이 모여 사는…. 거기에서 이교창의 노인학교에 다니기가 쉽지 않다. 2킬로미터쯤 걸어 나와 버스를 두 번이나 환승(換昇)해야 등교가 가능한 그런 역경을 딛고 열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적을 두고 있었던 거다. 가까운 곳에 노인회가 운영하는 학교가 있는데, 먼 데를 고생고생하면서 다닌다? 까닭이야 몇 가지 되겠지만, 으뜸가는 건, 수업을 하는 날이 평일과 토요일이라는 차이였다. 아무래도 반공일이라는 토요일에는 농사일도 하루 쉬는 명분이 서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 부작용이나 여파는 수업 중에 여실히 드러난다. 노래를 부르다 말고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이 몇 있다. 옆구리를 찔러 깨우면 그들의 대답이 대개 이렇다.
“여기 올라고 어젯밤을 비닐하우스에서 샜는 기라예.”
하도 놀러 오라고 조르는 바람에 일요일 틈을 봐서 이교창은 그 M 동네에 몇 번 가봤다. 국수 대접을 푸짐하게 받고 왔는데, 마침 가까이 있는 전투비행단의 Y 상사도 동행해서 시간을 보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도 유분수지 그렇게 합류하여 민요를 신나게 제창하며 저녁까지 얻어먹고 오는 날도 있었다. Y 상사의 노인 사랑을 남달랐으니 그게 참작이 되어 뒷날 ‘공군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도 서로 연락이 오가는 김*삼, 김부*. 김영* 주*성 예비역 장군들과의 인간관계도 거기에서 비롯되었었다.
지금 다시 추억해 보면 울타리 너머로 보이던 요강이 떠오른다. Y 상사 덕분에 전투비행단장들과의 교류가 빈번했으니, 그 고마움을 더 강조해 무엇하랴.
누가 보더라도 이교창의 건강 상태는 그리 좋지 않다. 코로나까지 그를 훑고 지나간 그에게 누가 장난삼아서라도 묻는다 치자. 죽는 게 겁나지 않느냐고.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내가 갈 곳이 따로 있으니 ‘저승 노인학교’거든? 당신의 그 걱정은 한갓 기우나 노파심에 지나지 않아. 난 밤이면 밤마다 먼저 간 노인 학생 연(延) 수백 수천 명의 꿈을 꾼다네. 개개인을 만나기도 하지만, 전체를 대상으로 수업하던 장면이 수도 없이 전개되는 거야. 말하자면 나에게는 노인학교에 적용(適用)시킬 때는 시제가 없어.”
그러다가 차라리 정색하고 던지는 농반진반으로 여겨지는 그의 여운이 남는 한마디가 귓전에 맴돌기 예사다.
“그 학생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반길지도 모르지. 아이고 우리 선상님 오능교? ‘호강에 바쳐 요강에 * 쌀 천당’이 여긴 기라예. 보고 싶었습니데이.”
거기서도 노인학생들은 표준말을 모른다. 호강에 어쩌고저쩌고의 ‘바쳐’는 사전에 등재되지 않는 말이어서 하는 말이다. ‘바쳐서’를 ‘겨워서’로 데체(代替)해야 될 모양이다. 아무튼 그가 이승에 머무를 날, 그러니까 여생은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