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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법흥왕실록
1. 개혁주의자 법흥왕과 불교의 융성
(? ~ 서기 540년, 재위기간 : 서기 514년 7월 ~ 540년 7월, 26년)
법흥(法興)왕은 지증왕의 장남이며, 연제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원종이다. 그는 키가 7척이고 성품이 관대하여 사람들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원종이 왕위를 이은 것은 이미 소지왕 대에 결정된 일이었다. 소지왕은 아들이 없었기에 6촌 아우 지대로(지증)를 부군(副君)으로 임명하여 후계자로 삼았는데, 이때 지대로의 아들 원종도 국공(國公)의 위치에 오른 상태였다. 국공은 작위나 품계는 아니지만, 혹여 부군이 죽거나 심각한 병에 걸릴 경우 그 지위에 대한 승계권을 가진 자를 의미했다. 따라서 원종은 소지왕 시대에 이미 왕위 계승권을 확보했음을 알 수 있다.
소지왕이 죽고 부군이었던 지증이 왕위를 잇자, 원종은 곧바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지증왕은 64세라는 늙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에, 태자 원종은 지증왕 시대의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원종은 지증왕이 실시한 일련의 행정 조직 개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원종은 이미 태자 시절부터 왕권의 일부를 거머쥔 상태였다는 뜻이다.
514년 7월에 왕위에 오른 법흥왕은 국가 기반 확립을 위한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재위 4년(517년) 4월에는 후에 6조 체제의 근간이 되는 병부(兵部)를 설치하여 국방 및 병력 행정 체계를 일원화했다. 7년(520년) 정월에는 법령을 반포하고 관리들의 관복을 제정했다. 관복은 붉은빛과 자줏빛 두 가지 색으로 구분하여 등급을 표시하도록 했다. 또 18년(534년)에는 상대등이라는 직위를 신설, 이찬 철부를 초대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사를 총괄하게 함으로써 이른바 ‘재상정치’ 시대를 열었다. 23년(539년)에는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고,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했다.
법흥왕은 내적으로는 이 같은 과감한 개혁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외적으로는 영토 확장에 열을 올렸다. 그가 확장한 영토는 당시 붕괴 직전에 놓여 있는 가야 제국(諸國)들의 땅이었다.
가야는 서기 42년에 변한의 9개국이 모여 연합 국가를 형성했고, 얼마 뒤에 신라에게 3개국을 잃어 6국만 남았다. 가야는 개국 시점에서부터 157년 동안은 이른바 ‘수로왕 시대’ 를 구가했는데, 이는 금관가야의 왕이 ‘머리왕’ 이 되어 나머지 5개국 왕을 지배하는 형태였다. 서기 199년 무렵에 이와 같은 연합 국가 형태가 무너지자, 6가야는 때론 독립적인 형태로, 때론 몇몇 나라끼리 연합하는 형태로 서로 협조하며 지냈다. 그런 상황에서 왜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아라가야(임나)는 일본의 구주 지역으로 진출하여 축자국 등에 터전을 마련하는 한편, 왜를 자국으로 끌어들여 섬진강 유역과 그 주변의 남해 일대를 자유 무역 도시로 개발하였다. 덕분에 가야 제국들은 고질적인 문제였던 작은 영토와 취약한 국방력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488년에 백제의 동성왕이 임나의 다사 등 네 개 현을 강제로 점령하여 복속시키는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졸지에 임나의 상권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가야는 이 일에 반발하여 백제와 일대 전쟁을 벌이며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백제는 왜를 압박하여 임나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왜국 내부에서도 백제의 임나 장악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는 세력이 있어 백제의 임나 장악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백제와 왜, 가야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신라의 지증왕은 금관가야의 동조 아래 임나의 중심지인 함안 지역에 병력을 투입하고 백성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522년에 가야의 구형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자, 법흥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냄으로써 양국은 결혼동맹을 맺었다.
법흥왕은 524년 9월에 직접 가야 땅으로 행차하여 개척한 영토를 둘러보았고, 가야의 구형왕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법흥왕과 회견하였다. 이때 법흥왕과 구형왕이 회견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아마도 자신의 귀순 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보인다.
532년에 구형왕은 마침내 왕비 및 노종, 무덕, 무력 등 세 왕자와 함께 금관국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했다. 법흥왕은 구형의 귀순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내렸다. 또한 셋째 아들 무력을 신라 조정에 입조시켜 대신으로 삼았다. 이로써 가야는 약 500년 동안 유지된 왕조를 폐하고 신라에 병합되었다.
신라의 가야 병합은 신라의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에 자신을 얻은 법흥왕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534년에 자체적으로 연호를 정했던 것이다.
법흥왕 대에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불교의 공인이다. 눌지왕 때 인도 승려 묵호자가 들어와 신라에 불교를 전한 후로 소지왕 때에 다시 아도화상이 들어와 불법을 퍼뜨렸다. 하지만 신라는 전통적으로 선도(禪道)를 숭상하였기에 불도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그러나 불도가 나날이 퍼져 사회 문제로 등장하자, 마침내 신하들이 불교를 강하게 탄압할 것을 주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법흥왕은 불교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오히려 불교를 공인하고 널리 유포하기를 바랐다. 법흥왕의 불교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마침내 법흥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불도를 흥하게 할 방도를 묻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러 신하가 이구동성으로 불교를 반대하며 왕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그때 왕의 근신이자 불교 신자였던 박이차돈이 나서서 불교의 심오한 교리에 대해 설파했다. 이 때문에 여러 신하가 그를 죽여야 한다고 간언하자, 결국 법흥왕도 이차돈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차돈은 자신이 죽고 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을 예언했는데, 그의 목을 치자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젖빛처럼 하얀 피가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로 감히 불도를 비방하는 자가 없었다. 법흥왕은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재위 15년(528년)에 공식적으로 불법을 인정하고 시행하였다.
법흥왕은 ‘법을 흥하게 하다’라는 그의 묘호가 말해 주듯 불교에 매우 심취한 인물이었다.
그는 540년 7월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능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마련되었다고 전한다.
2. 법흥왕의 가족들
법흥왕의 여자 관계는 대단히 복잡한 편이다. 법흥왕뿐만 아니라 신라 사회는 성적으로 자유 분방하여 왕들의 여자 관계가 매우 복잡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사항은 알 수 없다. 다행히 법흥왕의 여자 관계에 대해서는 『화랑세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그 대략을 여기에 옮긴다.
법흥왕의 정비는 소지왕의 딸 보도부인 김씨이며, 후비로는 위화랑의 딸 옥진궁주와 소지왕의 후비였던 벽화부인, 백제 동성왕의 공주 보과 등이 있다. 이들 이외에 묘도부인도 있었으나, 그녀는 삼엽궁주의 아들 미진부와 사랑에 빠져 사통하였다. 지소태후가 그 사실을 알고 묘도를 미진부에게 출가시켰다(그녀와 법흥왕 사이엔 자식이 없었으므로, 여기서는 그녀를 법흥왕의 부인들 이름에서 제외했다).
법흥왕은 네 명의 부인에게서 아들 둘과 딸 셋을 얻었다. 정비인 보도부인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는데, 그녀가 곧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이다. 후비 옥진궁주에게서는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그의 이름은 비대이다. 후비 벽화부인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는데 이름은 삼엽이다. 후비 보과부인에게서 1남 1녀를 얻으니 모랑과 남모이다. 이들 중에서 보도부인, 옥진궁주, 보과부인, 비대, 모랑, 남모, 삼엽에 관해서 언급한다. 벽화부인은 소지왕실록에서 이미 다룬 바 있어 생략하고, 지소태후는 진흥왕실록에서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보도부인 김씨(생몰년 미상)
보도부인은 소지왕과 그의 왕비 선혜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삼국사기』는 그녀의 성을 박씨로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성이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소지왕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법흥왕이 소지왕 재위 당시에 태자의 직분에 해당하는 국공의 직위에 있었던 점으로 미뤄 볼 때, 그는 소지왕의 사위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따라서 보도부인은 『화랑세기』의 기록대로 소지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여기서는 그녀의 성을 김씨로 기록한다). 그녀가 언제 법흥왕과 결혼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화랑세기』에 따르면 법흥왕이 태자 시절에 이미 그녀는 법흥왕의 부인이었다.
비록 그녀가 법흥왕의 정비이긴 했으나, 법흥왕은 그녀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법흥왕은 소지왕의 후비였던 벽화부인을 좋아했고, 결국 그녀와 관계하여 딸을 하나 얻었으니, 곧 삼엽궁주다.
법흥왕은 또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그녀는 보도의 씨 다른 동생(아버지가 다름)인 오도였다. 오도는 보도의 어머니 선혜왕후가 정부였던 묘심과 관계하여 낳은 딸인데, 인물이 출중했던 모양이다. 법흥왕은 오도를 몹시 좋아했는데, 정작 오도는 법흥왕보다는 김위화랑을 더 좋아했다(위화랑은 벽화부인의 남동생이며, 화랑도의 제1세 풍월주가 되는 사람으로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의 선조이다). 그래서 그녀는 몰래 위화랑과 정분을 맺고 딸을 낳았는데, 그녀가 옥진궁주이다.
그 뒤로 법흥왕은 정비 보도부인에게 눈을 돌렸고, 덕분에 보도는 한동안 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태어난 딸이 지소였다.
하지만 보도에 대한 법흥왕의 관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보도가 늙어 가자 법흥왕은 어느덧 한 어린 소녀에게 관심을 두었는데, 그녀가 바로 위화랑과 오도 사이에 태어난 옥진이었다.
법흥왕이 옥진을 좋아하자, 법흥왕의 어머니 연제태후는 보도왕후를 출가시켜 비구니가 되게 했다. 이 때문에 보도는 결국 비구니로서 생을 마감했다.
옥진궁주 김씨(생몰년 미상)
옥진궁주는 김위화랑과 오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화랑은 오도에게서 딸 둘을 얻었는데, 장녀가 옥진이요 차녀가 금진이다.
오도는 원래 법흥왕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녀가 몰래 위화랑과 정을 통하여 옥진을 낳는 바람에 법흥왕은 위화랑과 오도를 몹시 원망하였다. 그래서 옥진의 어머니였던 오도를 강제로 아시공에게 시집보내 버렸다. 그 때문에 옥진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 품에서 자라지 못했다.
세월이 10여 년 흘러 옥진은 어느덧 아리따운 소녀로 성장했다. 그리고 박영실에게 시집갔다. 법흥왕이 어느 날 그녀를 보고 반하여 총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영실의 곁을 떠나 법흥왕의 후비가 되었다. 그 뒤로 법흥왕은 다시 위화랑을 측근에 뒀고, 대신 정비였던 보도부인은 궁에서 내쫓겨 비구니가 되어야 했다.
옥진은 법흥왕과 관계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가 비대이다. 그 이후의 옥진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보과부인 부여씨(생몰년 미상)
보과는 백제 동성왕의 딸이다. 법흥왕이 소지왕 때에 국공 자격으로 백제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보과를 만났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결혼동맹을 맺은 상태였고, 그래서 신라의 왕족 비지의 딸이 동성왕의 후비로서 백제 왕궁에서 살고 있었다. 보과와 법흥왕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아마도 그녀일 것이다.
법흥왕과 보과는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몰래 관계를 가졌다. 법흥왕이 신라로 돌아간 뒤에 보과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고민 끝에 보과는 백제 왕궁에서 빠져나와 신라로 와서 법흥왕과 살게 되었다.
법흥왕은 보과에게서 1남 1녀를 얻었는데, 그들이 남모공주와 모랑왕자이다.
비대(생몰년 미상)
비대는 법흥왕의 아들이며, 옥진궁주 소생이다. 법흥왕은 비대를 총애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비대의 외조부 위화랑과 법흥왕의 딸 지소의 반대로 무산됐다.
위화랑은 법흥왕이 비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의 딸 옥진은 골품이 없고 영실과 산 적이 있으니, 옥진에게서 태어난 비대는 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옥진이 골품이 없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 오도가 묘심이라는 평민 출신 승려와 관계하여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실과 먼저 결혼하였으므로 옥진은 법흥왕의 정비가 될 수 없었고, 또 옥진에게서 태어난 왕자인 비대도 태자가 될 수 없었다. 위화랑은 그 점을 지적하며 자기의 외손인 비대가 태자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고 지소의 아들 삼맥종을 밀었다.
위화랑이 이런 태도를 취하자, 옥진은 매우 섭섭해하며 위화랑을 몹시 원망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화랑이 딸을 위로하고 깨우쳐 승복하게 만들었고, 결국 지소의 아들 삼맥종(진흥왕)이 태자에 올랐다.
비대는 이렇듯 위화랑이 대의를 내세워 반대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법흥왕이 죽은 뒤에는 왕자의 신분마저 박탈당하여 일개 귀족 신분으로 전락하였다.
삼엽(생몰년 미상)
삼엽은 법흥왕과 벽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녀는 법흥왕이 태자 시절에 태어났으며, 줄곧 궁중에서 자랐다. 성장한 뒤에 그녀가 아시공에게 시집가 아들을 낳으니, 그가 미진부이다. 미진부는 후에 위화랑의 뒤를 이어 화랑의 우두머리인 제2세 풍월주에 오른다.
남모(생몰년 미상)
남모는 법흥왕과 보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궁궐에서 자랐으며 대단한 미인이었다. 성장한 뒤에 삼엽궁주의 아들 미진부와 사랑에 빠졌는데,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가 미진부를 총애하였기에 그녀 또한 지소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진흥왕 초기에 신라에서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원화(源花)제도와 선화(仙花)제도를 뒀다. 원화제도는 귀족 출신의 미녀를 원화로 삼고, 그 휘하에 수백 명의 낭도를 두는 제도였다. 이들 낭도들을 서로 어울리게 하여 그 중에서 뛰어난 자를 선발하기 위함이었다. 선화제도 역시 이와 유사하지만, 선화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즉, 귀족 출신의 한 남자를 선화로 삼고, 그 아래 여러 낭도 무리를 둬서 그 중에서 능력이 탁월한 자를 선발하는 일종의 인재 양성 단체였던 것이다. 선화는 후에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변모하는데, 이는 제1대 선화인 위화랑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제1대 원화는 삼산공의 딸 준정이라는 여자였다. 그런데 지소태후가 미진부의 아내 남모를 총애하여 준정을 밀어내고 남모를 원화로 삼으려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준정은 남모를 몹시 미워하였다. 급기야 준정은 남모에게 술을 잔뜩 먹인 뒤 강으로 유인하여 익사시켜 버렸다.
하지만 이 일은 곧 남모의 낭도들에 의해 폭로되었고, 결국 준정은 사형을 당했다. 또한 이 사건의 여파로 원화제도가 폐지되었고, 원화에 속해 있던 낭도들은 모두 선화 밑으로 들어가 통합되었다. 그 뒤 선화는 다시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나게 된다.
모랑( ? ~ 555년)
모랑은 법흥왕과 보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남모의 동생이다. 그 역시 남모와 함께 궁중에서 성장하였으며, 소년으로 자란 뒤에는 화랑의 무리에 들어갔다. 그의 매형인 미진부가 화랑의 풍월주가 되자, 그 덕분에 그는 풍월주의 아래 직위인 부제가 되었다.
화랑의 실질적인 창립자인 지소태후는 모랑을 몹시 총애했다. 그로 인해 그는 진흥왕 9년인 548년에 제3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는 위화랑의 딸 준화와 결혼하였고, 그녀에게서 딸 준모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 살지 못했다. 555년에 비사벌(창녕 주변)을 여행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퍼온이 : 시니어 해설사 경덕왕릉 참봉 진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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