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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59
9월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연중 제2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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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죄인들의 주님은 세세대대로 찬미받으소서!>
언젠가 같이 살던 아이가 초대형 사건을 저지르고 난후, 뒷수습을 하는 과정에서, 조직원 비슷한 분들과 합의와 담판을 짓기 위해, 몇 차례 만나뵌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존재 자체로 엄청난 포스가 느껴지더군요. 그분들 뵈면서 한때 우후죽순처럼 양산됐던 조폭 미화 영화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와 같은 의리라든지 순박함, 유머러스함과는 거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개념있는 배우로 존경받는 정우성 배우 같은 경우, 미화된 조폭 영화로 인해 우리 청소년들이 받을 악영향을 고려해, 조폭 영화에는 일체 출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분들, 한 마디로 얄짤 없었습니다. 타협이나 조율은 시도해볼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듭 대화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분들도 우리와 비슷한 모순투성이에, 결핍투성이인 한 나약한 인간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벗어날수 없는 상황에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저 습관적으로 음지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습관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라, 하지 말아야 할 반사회적 행동이지만, 자꾸 반복하다보니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한번 크게 바꿔보려고 고민해보지만, 조직 나름의 규율도 있고, 세상 사람들의 편견도 크고, 놀던 물을 바꾸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회심 이전 마태오 복음사가의 삶이 꼭 그랬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이방인·창녀와 더불어 상종하지 말아야 할 직업군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 머릿속에 세리=죄인이란 등식이 들어있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의 악행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백성들 사이에서 이런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세리가 출몰하면 집안의 기둥조차 무서워 떤다!’
당시 세리들은 조직원들과 비슷한 형태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준 후, 제 때 갚지 못하면, 찾아가서 ‘와장창’ 소리와 함께, 손에 잡히는 대로 기물을 집어던지고 횡포를 부렸습니다. 집을 빼앗고 토지를 강탈해 갔습니다.
마태오의 경우 원래 이름은 레위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고향이라 다를 바 없는 카파르나움 세관에서 세금 징수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세리들이 복무 규정에 따라,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적정한 세금만 징수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들은 부당한 방업으로 고리대금업, 사채업, 환전업 등 부업을 병행하며, 동족들을 착취해 자신의 배를 원없이 채웠습니다. 자연스레 백성들은 세리들을 독사처럼 싫어했으며, 민족의 배신자요 매국노 취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으로, 열두 명의 사도를 선발하시는데, 그중 하나로 세리 마태오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눈에 이것은 완전 미친 짓이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정도의 신분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어부나 농부들 가운데서 뽑았다면, 큰 마음으로 봐줄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상종해서는 안될 인간, 가난한 백성들을 갈취하고 괴롭히던 매국노, 인간 취급도 못받던 세리 마태오를 떡하니 제자로 뽑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해 안되는 선택을 보고, 저 단체의 미래는 불을 보는듯이 뻔하다. 폭망·쫄망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세리 마태오의 제자단 가입은 당시 유다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 못할 희대의 스캔들이었습니다. 뒷담화하기 좋아하던 바리사이들은 틈만 나면 수군거렸고, 마침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9장 11절)
이런 그들의 속마음을 파악하신 말씀이 그들의 정곡을 찌릅니다. 사이다 같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만성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입니다. 너무나 통쾌하고 속이 다 시원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마태오 복음 9장 12~13절)
역대급 대죄인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신 예수님의 활짝 열린 개방성을 묵상하며, 똑같은 죄인인 저 역시 주님께 감지덕지하며, 그저 감사의 찬가를 반복할 뿐입니다.
“저 같이 부당한 죄인을 당신 가까이 불러주신 자비하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홍빛보다 붉은 감당하기 힘든 죄들, 머릿칼보다 많은 숱한 죄들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롭게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시니, 온몸과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죄인들의 주님은 세세대대로 찬미받으소서! 저는 그저 매일 좋으신 주님 자비와 은총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어제의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딛고 다시 한번 기꺼이 일어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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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을 만들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한 왕과 같은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상이 완성되던 날 “이것이야말로 나의 걸작이 될 거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그 지역에 끼여, 물보라가 조각가 방의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조각을 상하게 하여, 아침에 본 조각은 매우 손상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엄격한 얼굴에서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이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가는 그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상에다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내게로 오라!”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신가요? 십자가에 달려 팔을 벌리신 예수님만큼 예수님의 본성을 잘 표현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예수님이기보다는 자비의 예수님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으신 이유는 무언가 보여주시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주님의 식탁에는 죄인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의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로 가시고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비’입니다. 그 자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은 그래서 그분과 한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정말이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일입니다.
고 임언기 신부님이 한 말기 간암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가셨습니다. 그 환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 있었고 친척들이 신부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어 신부님이 일어설 때 그가 신부님의 등 뒤에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나 죄 없어.”
이 말은 “나는 의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죄인인데 그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됩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자신의 죄를 잊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죄인들을 심판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도 판단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 건강한 이들이었습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지옥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이 의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죄인만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항상 죄인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행위가 아니라 본성을 보신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는 것을 보시지 않고 음란한 마음이 있는지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살인하는 모습을 보시지 않고 그 사람 안에서 화가 솟아나는지를 보십니다. 화가 나는 것이나 살인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사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다면 그것 자체가 영원히 후회할 죄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이 불효인 것과 같습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본성이 자신이라는 것만 알면 우리는 결코 자비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비를 받은 사람이라야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누구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기도나 제물이나 봉사가 아니라 바로 ‘자비’ 하나뿐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리에서부터 사도가 되었기에 자신이 부르심 받은 이 은총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만이 결코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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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마태오 사도는 본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다. 이 직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다. 세리였기 때문에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착취당하는 그런 처지였다. 이러한 세리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아람어로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태오는 동방으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나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복음: 마태 9,9-13 : “나를 따라 오라”. 그는 예수를 즉시 따라 나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부르신다. 그러니까 마태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마태오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여기에 마태오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사귀었던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여 식사를 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들을 부른 것은 주님을 따라 나서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선다. 제자로 삼는 것도 너무나 큰 죄인인 세리를 뽑고, 노는 것도 그런 부류하고만 논다는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당신의 자녀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응답이 마태오처럼 즉시 일어나서 그분을 따르듯이 응답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 인간의 의지적인 응답에 달렸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스런 인간임을 느끼는 것이지만, 그것을 물으시는 주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항상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삶, 회개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이다. 마태오와 같이 세관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정된 것이었겠지만, 용감하게 그 자리를 떠나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이렇게 첫 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잘 알 수 있고, 또 변화되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마태오 사도와 같이 매 순간 용감한 결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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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록펠러는 세계 최고의 갑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만 아는 수전노였습니다. 그런데 55세에 중병에 걸려 1년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던 중 벽 액자에 쓰여 있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치료비가 부족한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대 줍니다.
여자아이는 록펠러에게 긴 감사 편지를 씁니다. 록펠러는 그 편지를 읽으며 난생처음 행복을 느낍니다. 그 이후로 그는 나누는 삶을 살기 시작하였고 병도 치유되어 98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주님께 먼저 내어 드리는 것을 ‘봉헌’이라 합니다. 봉헌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알기에 하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봉헌할 줄 아는 사람은 주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알기 때문에 이웃에게 자비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향한 봉헌과 이웃을 향한 자비의 정신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바칠 줄은 알아도 자비롭지 못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세리 마태오의 회개를 못마땅해하고 그를 부르시는 예수님도 못마땅해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희생 제물이 이웃에 대한 자비로 이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희생 제물은 즐겨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받은 것에 감사해서 나의 것을 내어놓는 행위가 봉헌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웃에게 무자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과 이웃을 향한 자비는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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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태 9,9 참조)
‘그곳’은 마태오 복음 9장 1절에 따라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마을’이며 ‘예수님께서 사시는 마을’ 카파르나움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 사도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전합니다.(마르 2,14)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하느님의 선물’인 마태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인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고, 부정한 사람인 죄인들과 어울려서 레위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품위 없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지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그들의 비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영적 의사’이며 ‘죄인을 구원하는 구세주’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부정한 로마의 돈을 만진 마태오의 손은 정화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뚜렷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산상 설교, 선교사들에 대한 가르침, 하늘 나라의 비유들,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위한 권고들이 메시아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그 가르침들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였고, 일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마태오 사도의 열정은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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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영 수녀님]
<친교의 삶>
음식을 함께 나누며 담소를 나눈다는 것은 친교의 표시입니다. 잔치에 음식과 술이 빠질 수 없는 것은 기쁨을 표시하는 가장 직접적인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혼자하는 식사만큼 밋밋하고 재미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끼니를 채우는 것이지 사랑을 먹고 생명을 나누는 잔치의 즐거움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당신의 식탁에 초대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친구로 대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시혜(施惠)의 대상이거나 그저 마지못해 만나야 하는 타인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향의 사람, 나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과의 만남은 쉽지만, 남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출신이었던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은 그 누구도 예외없이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심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에게나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앉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나도 그 자리의 일부입니다.
내 스스로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에라도 그들을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든 인간을 친구로서 받아들이는 일, 이 일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중점을 두고 노력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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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혹시, 저더러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변화의 시작>
교회는 오늘 사도이자 복음사가였던 마태오 성인의 축일을 기념한다. 마태오의 죄인에서 성인에로의 길은 어느 날 자기 동네 어귀에서 한창 세관업무를 보던 중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는데서 시작되었다.
마태오는 갈릴래아 지방 카파르나움 출신으로 12사도들 가운데 자신이 집필한 것으로 전해오는 마태오복음서 때문에 누구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전직인 세리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죄인과 다름없는 직업이었다. 그가 오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로 따라 나선 것이다. 세리 마태오의 소명사화와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 이야기는 마르코와 루카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마르 2,13-17; 루카 5,27-32)
마르코와 루카는 여기서 마태오를 ‘레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마르코는 그를 일컬어 ‘알패오의 아들’로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2사도 명단에는 그냥 ‘마태오’로 적고 있다.(마르 3,18)
따라서 마태오복음의 원저자는 마르코복음의 두 부분을 참조하여 ‘레위’라는 이름을 자신을 지칭하는 마태오로 바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승에 의하면 마태오는 동방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선교하다 42년경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즉각 따라 나선 마태오다. 단 한 구절의 간략한 이 대목은 사실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카파르나움 도읍의 나들목에 자리를 잡고 로마제국을 위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 마태오는 이미 당대의 상업적 죄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만약 내가 세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설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본인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 대목을 기록한 마태오복음사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의 부류에 넣고 있다. 그러나 “나를 따라 오라.”는 우렁찬 낯선 이의 목소리에 도대체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혹시, 저 말입니까?” 하고 반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의 반신반의가 믿음으로 기울었다. 이미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는 예수께서 분명히 자신을 지목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는 왔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세리의 직업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태오가 보인 예수추종의 두 번째 행동은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다른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두고 트집을 잡은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과 트집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일에 ‘죄인’이라는 굴레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신다.
더욱이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는 말씀으로 예수 자신의 죄인을 위한 파견사명을 밝혀 주셨다.
뿐만 아니라 유대사회에서 약하고 소외되고 고통 받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워 죄인으로 취급하고, 자신들은 율법이 규정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거룩하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셨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와 용서이다.
이로써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분류되었던 세관원이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래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걸어 다니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마귀와 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로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선물을 이 땅에 선사하시는 것이다.
남을 부정하다고 하여 자신이 정(淨)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리 마태오와 같이 오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나를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추종하여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할 때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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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인생이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뭘까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니신 한 없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런 한 없는 사랑을 오늘 축일 맞이하신 성 마태오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카라 바죠라는 화가가 그린 “성 마태오의 순교”라는 그림이 로마 콜타렐리의 소성당에 걸려있다고 합니다. 성 마태오가 에티오피아 왕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져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림에는 그 순간 천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흔들었던 종려나무 가지를 마태오의 손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귀하고 복된 삶으로 마감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의 한 없는 사랑으로 마태오는 세관에 앉아있다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오는 자기 때문에 모욕과 멸시를 받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한 없는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그리고 마태오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아 갑니다.그래서 마태오의 일터는 민족들의 피땀을 짜내어 돈을 받는 세관이 아니라, 아픈 상처를 싸매주는 병자의 집이 되었습니다. 이제 마태오는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꼼꼼하게 따지고 기록했던 펜과 손은, 주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를 자세히 기록하는 손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인생이란? 아름답게 늙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또한 사랑과 용서, 화해 없이는 불가능한 여정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마음이고, 그 행복은 상대를 위해 내 뜻을 양보하는 자기 포기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이 마음이 저희를 가엾이 여기시고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미사를, 특히 주일 미사를 드리는 이유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면서 하느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느님 안에서 쉬자.”입니다. 하느님께서 미사 안에서 신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각 본당 성전으로 가서 매일 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은? 쉬는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은 마치 나 자신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바라지 말고, 나 자신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하늘을 보려면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별을 보려면 희망도 높여야 합니다. 고운님 자신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성 마태오 복음 사가가 받았던 그 주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누리고 있는 고운님들도 마음을 넓히고, 희망을 높여 귀하고 복된 착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으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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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61)
♧♧ 시편 50편 16-17절….
"악인에게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내 계명들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네 입에 올리느냐?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뒤로 팽개치는 너 이거늘."
* 악인에게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내 계명들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네 입에 올리느냐?
이 구절에서... 다윗은 스스로 참된 이스라엘 백성임을 내세우며 계명의 준수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실행에 옮기지 않는 자들, 곧 외형적인 제사 의식만을 경건의 전부라고 여기는 자들을 향해 매우 강력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행하라고 강요하는데(로마서 1장 18-20절. 참조), 그것은 스스로 계명을 범한 죄 위에 위선의 죄까지 덧붙이는 행위입니다. 이 구절에서...다윗은 이런 악인들을 향하여 단호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입술로만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뒤로 팽개치는 너 이거늘...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인 계명을 마음속에서 경시하던 것을 이제는 공공연히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상태로 나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이 구절과 유사한 표현이 열왕기 상권 14장 9절과 느헤미야기 9장 26절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모두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이방신을 숭배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 시편 50편 18절….
"너는 도둑을 보면 함께 뛰고 간음하는 자들과 한패가 된다."
* 도둑을 보면 함께 뛰고...
도둑과 한통속이 된다는 말로 이는 곧 악을 행하는 자들을 멀리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과 친교하며 같은 죄악을 일삼는 것을 가리킵니다.
* 간음하는 자들과 한패가 된다...
이는 곧 겉으로는 계명을 말하지만, 그들의 실제의 삶은 간음하는 자와 다를 바 없는 부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시편 50편 19절….
"너는 입을 놀려 악행을 저지르고 네 입술은 간계를 엮는다."
즉 자신의 입을 모든 악한 말, 특히 사기와 거짓말에 사용하는 데 내 맡기고 있다는 뜻으로 적극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데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 시편 50편 20절….
"너는 앉아서 네 형제를 거슬러 말하고 네 어머니의 아들에게 모욕을 준다."
여기서 ‘형제...’는 이스라엘 동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슬러...’라는 말은 ‘치욕스럽게 한다.’라는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형제에게 모욕을 주며 멸시하고 중상모략하기 일쑤인 악인들의 오만하고 성미가 까다롭고 고집이 센 모습을 지적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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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새벽마다 30km 정도 자전거를 탑니다. 출발하는 시간은 새벽 5시 30분쯤, 주위가 어두운 시간이라 보이는 것도 없고 (자전거 라이트를 켜면 바로 앞에만 잘 보입니다) 사람들도 없습니다.
이렇게 약 1시간 30분 정도 자전거를 타니 조금 지루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자전거를 탑니다. 어제 아침에도 음악을 들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르막길에서 어느 할아버지께서 저를 향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전거 속도를 줄여서 “어르신, 왜요?”라고 묻자, “강화 읍내 가는 버스가 언제 오나?”라고 물으시더군요.
분명히 버스가 올 때가 되었는데 오지 않으니 자전거 타고 가고 있는 저를 세워 물어보신 것입니다. 버스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거의 이 시간에 버스가 지나갔던 것을 기억하면서 조금만 기다리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서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는 순간, 오늘은 아무것도 듣지 않고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를 눈으로 먼저 보았기 때문에 멈춰서서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지, 만약 보지 못했더라면 할아버지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스스로 차단했던 소리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특히 다른 이들의 도움을 잘 듣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반성으로 이어폰을 다시 꽂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귀 기울이고, 더 많은 말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길은 먼저 들을 때에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오는 이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그분을 따를 수가 있었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서 많은 재산을 축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돈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복음서를 집필하기도 하지요. 여기에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많은 사람을 초대해서 식사하는 것을 보면 사교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사는 데 있어서 부족한 면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심 자체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부르심에 곧바로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마태오 사도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내 귀를 막아서 주님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주님의 구원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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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태고 있는 것}
아는 지인의 결혼식에 갔다가 주례 선생님의 인상 깊은 주례사가 생각납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사람이 30을 넘으면 고쳐 쓸 수가 없습니다. 그저 보태서 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지 못한 부분을 내가 보태서 쓰는 것입니다.”
큰 공감을 하게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상대방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30년 넘게 가지고 있던 자신의 습관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결국, 고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보태서 쓰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보이면 얼른 내 것으로 보태주면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나약함 모두 인정해주시지요. 대신 당신의 사랑을 우리 삶에 보태주셨습니다. 지금 나 자신이 내 이웃에게 보태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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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람의 몸보다 말과 글이 먼저 간다는 걸 느꼈습니다. 한인 공동체에 미사를 갈 때가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피정 가거나, 휴가를 가면 제게 부탁을 합니다. 주말에는 시간이 있기에 가능하면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인사를 드리면 저를 아시는 분이 한두 분은 계십니다. 친구를 통해서 아는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저의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발 없는 글이 인터넷이라는 도로를 타고 지구촌 곳곳으로 가는 걸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생각보다 젊다고 하시고, 어떤 분은 제가 생각보다 작다고 하시고, 어떤 분은 제가 생각보다 말이 없다고 하십니다. 저를 알아주시고,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분이 계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헤밍웨이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점심을 먹지 못할 때도 있었고, 공원의 벤치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헤밍웨이는 글을 쓰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에게 글을 쓰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고,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헤밍웨이는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글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 봐.” 헤밍웨이가 위대한 작가가 된 건 그의 천재성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진실한 한 문장을 쓰려는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마태오 사도는 ‘마태오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은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 생각날까요? 예수님의 족보, 동방박사의 방문, 이집트로의 피난이 있습니다. 그 장면 장면들이 아름다운 문학의 소재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깊은 위로를 얻습니다. 더 높이 날려는 ‘갈매기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삶의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족한 저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었고, 제 삶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몸소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들의 고통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의 의미를 체험하셨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위대한 작가인 헤밍웨이처럼 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성 마태오 사도는 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도로, 예언자로, 복음 선포자로,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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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탈출의 여정, 따름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마태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바오로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지낼까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부질없는 가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없는 마태오를, 바오로를 상상할 수 없듯이 주님이 없는 우리들 역시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부름 받음은 말 그대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이되고 말았습니다.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섭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은 세리 마태오에세 ‘나를 믿으라’, ‘나를 사랑하라’ 하지 않고 '나를 따라라' 명령하십니다. 주님은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오의 당신을 찾는 갈망을 한 눈에 알아채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러자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무의미한 일상의 늪에서 탈출하여 예수님을 따름으로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하게 된 마태오의 복된 운명적 변화입니다. 이제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오른 마태오입니다. 이제 ‘보고 배울’ 주님을 모신 마태오입니다. 분명한 것은 마태오의 삶에 비로소 목표가, 방향이, 중심이, 의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 예수님이 그의 삶의 목표가, 방향이, 중심이, 의미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이런 삶의 목표와 방향,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님을 모르고 나도 모름으로 무지의 어둠속에 살다가 인생 끝낸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망하겠는지요.
혼자서는 영적성장도 성숙도 불가능합니다. 관계속의 인간입니다. 관계는 존재입니다.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은 물론 이웃과 함께 하는 여정입니다. 하여 주님은 당신 중심의 관계의 공동체로 부르십니다.
공동체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곳은 성전과 식당입니다. 하여 저는 수도공동체의 중심을 둘이라 합니다. 함께 기도하는 성전과 함께 식사하는 식당입니다. 하여 분도 규칙서에 보면 큰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잠정적인 벌로 공동전례에서, 또 공동식탁에서 배제시키도록 합니다만 지금은 거의 시행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에서 배제됨으로 공동체의 중요성을 실감시키기 위함이겠습니다.
공동전례나 공동식사 불참 시는 전후에 그 사정을 장상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공동전례와 공동식사가 공동체 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신 후 곧장 이어지는 공동식사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차별없이 당신 식탁 공동체에 초대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들에 대해 제자들을 대신하여 예수님 친히 명쾌하게 해명해 주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세상에 잘 들여다 보면 병자 아닌자, 죄인 아닌자 하나도 없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잘 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부족해서, 필요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mercy이고 하느님의 언어는 연민compassion이다’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신비입니다. 성소의 신비입니다. 저는 저희 수도원 형제들을 대하면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 같다는 깨달음에 늘 감탄하곤 합니다. 참으로 부족하지만 모두가 각자 필요한 제자리에서 서로 절묘한 보완관계를 이루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헌옷 누더기 공동체’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곧장 뉘우치고 공동체에 감사하게 됩니다.
“나를 따라라.”
한번으로 끝나는 따름이 아니라 날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새롭게 따라나서는 ‘따름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나태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따름의 여정은 바로 끊임없는 ‘탈출exodus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탈출하여 맑게 흐르는 강처럼 사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글에서처럼 말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날마다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여 강물 흐르듯 기도하며 걷는 습관이 참으로 몸에도 좋고 정신에도 좋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 참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수도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이 참으로 경청해야할 가르침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도반들과 ‘더불어의 여정journeying together’이기에 형제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기본입니다. 이어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부르심이 얼마나 심오한지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영예롭게도 이 ‘하나’에로 부름받은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은총에 따라 각자 성소에 충실할 때 성장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와 더불어 참 나의 실현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 부름받은 공동체 형제들인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로 혼자의 성숙이 아니라 ‘더불어’ 모두가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우리 성소의 궁극 목표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공동체에도 ‘불구하고’가 아닌 공동체 ‘때문에’, '덕분에' 온전한 참 나의 실현임을, 또 주님과 우정의 깊이와 함께가는 도반 형제들과 우정의 깊이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주님을 알고 나를 알고 형제들을 알게 됨으로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자유로운 삶입니다. 하느님의 단 하나의 소원은 우리 모두의 구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여 주님의 마지막 한 말씀,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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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
예나 지금이나 천대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를 부정하게 돈거래 하는 사기꾼이나 탐욕스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4-46)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하며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매일 다짐하지만 흔들비쭉인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다윗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12,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루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하여(느헤9,1)회개하였습니다.
요나도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요나 2,3) 세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13)하고 기도했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는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다고 말씀 드렸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는(루가 19,8-9)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오른 쪽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는 확답을 얻었습니다.(루가23,43)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의사로서 다가 가셨고, 외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을 뛰어 넘어 뿌리를 다스리셨습니다. 주님은 진정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그분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차별 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밉살스런 사람은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 싫어도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13,8)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페소서4,1-2) 최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그 은혜로 저는 허물 많은 죄인이지만 오늘도 살아갑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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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세리 출신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전직 세리라는 그의 신분은 예수님 제자단에 대해 당시 종교 지도층의 불신과 의혹의 빌미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르시고 받아들이십니다. 부르심은 궁극적으로 교회 전체와 세상을 위한 것이지만, 우선은 무엇보다 한 인간(마태오)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에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따라라."(마태9,9)
일터인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단순한 명령형의 문장입니다. 단 두 마디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당당하고 거침없고 확신에 찬 신념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적 사명을 띠고 세상에 오셔서, 함께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제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분이 당신 자신의 신원을 이해하고 또 사랑하신다는 것이 이 짧지만 힘 있는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무슨 신분이든, 어떤 부르심과 소명을 살고 있든 자기의 정체성과 신원에 대해 충만한 이해와 확신을 지닌 사람이 타인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고 감사하지 않으면서 섣불리 그 길로 타인을 불러들이는 것은 거짓과 위선을 넘어 사기에 가까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하지요. 부르시는 분의 말씀, 눈빛, 행동,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확신과 행복이 부르심 받는 이의 응답을 끌어냅니다.
"그러자 마태오는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는 자기의 안전지대를 미련없이 박차고 나와 예수님을 따릅니다. 제도적 장치도 신분적 보장도 없고 심지어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젊은 떠돌이 가난뱅이 예언자에게서 그가 본 희망은 무엇일까요?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이것이 바로 마태오가 본 희망입니다. 인간 존재를 단죄와 심판의 눈이 아닌, 자비와 포용의 시선으로 보는 분임을 감지한 것이지요. 물론 마태오를 매료시킨 예수님의 이 관대함이 바리사이들에게는 공격의 단초가 되지요. 하나의 현상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예수님께서 (호세아 6,6)을 인용해 말씀하십니다. 칠십인역 성경에 "자비"로 표현된 부분이 우리 성경에는 "신의"로 번역되었지만 일맥상통하지요. 지금 예수님은 나름 율법 준행에 철저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가,나,다'부터, 'A,B,C부터' 다시 배워라" 하시는 겁니다. 아무히 율법에 정통하다 한들 그 근본 정신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모를 바에야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기본부터 익히라는 일침이지요.
이 권위 있는 명령에는 예수님의 단호하고도 진심 어린 충고가 담겨 있습니다. 단죄와 심판이 누군가 지은 죄를 근거로 하기보다 제도 엄호를 위한 무자비하고 무관용적인 틀에 기인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라고 초대하시는 겁니다.
사실 사람이 지은 죄는 속죄 제물을 봉헌함으로써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장치가 율법에 마련되어 있지요. 물질로 죄를 벗는 일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자비와 사랑보다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물질로 양심을 가리는 면죄부도 가능한 것이고요.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래야 당신께서 흡족하고 기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인간 편에서 손쉽고 수월한 것과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그분께 기쁨이 되는 것 중 선택해야 합니다.
제1독서는 부르심에 관한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에페 4,7)
먼저 사도 바오로는 부르심의 개별성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저마다" 받은 은사로 자신의 개인 소명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신분이나 직업일 수도 있고 어떤 직분으로 특정되지는 않았지만 고유한 역할이나 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께 이끌려 응답하여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모든 이의 소명은 크건 작건 보이건 보이지 않건 귀하고 소중합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비교 불가한 "저마다 받은 은총"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도록..."(에페 4,12-13)
부르심의 보편성, 곧 모든 부르심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받은 은총과 개인 소명은 온 교회의 이러한 목적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마태오는 세리로서 살아온 개인 체험이 예수님의 자비와 엮이면서 형성된 개인 소명을 통해 교회의 보편 소명에 기여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저마다의 역사와 성향을 지닌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그리고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사느라 분투하는 우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에페 4,1)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권고입니다. 어디서 출발했건 어떤 몰골이건 괜찮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다" 하신 하느님께서 자비를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 각자 고유한 소명의 자리에서 자비로 부르심 받고 자비를 입어 일으켜 세워진 사람답게 자비로이 걸어갑시다.
설령 우리가 약함으로 인해 또 죄를 짓더라도 우리가 베푸는 자비는 희생 제물 못지 않은 속죄와 치유의 약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흡족해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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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젊게 사는 12가지 방법
나이 듦에 대한 시각을 바꿔라
어디에서나 사랑을 찾아라
함께함을 기뻐하라
현재에 살아라
진정한 자아를 찾아라
용서하라
분노와 마음의 소용돌이를 잠재워라
아낌없이 베풀어라
신앙에 기뻐하라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라
감정의 포로가 되지 말라
삶의 균형을 유지하라
-「내 영혼의 리필」에서
♣12가지 방법을 순서대로 기재하지 않고 제 나름대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용서와 분노에서부터 하렵니다. 용서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안되고 용서는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인간의 삶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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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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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9,9)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던 당시에, 마태오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로마의 앞잡이로써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마태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볼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투덜거립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9,12-13)
그래서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희망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자비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 곧 많은 기준이나 조건들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너를 판단하기도 하고 단죄하기도 합니다. 그 잣대로 너를 탈락시키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는데,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을 비판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이신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나도 너에게 자비가 되어줍시다!
"어느 상황에서든 우리는 저마다 예수님을 전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분명하게 증언하라고 부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복음의 기쁨', 12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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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동기 변화>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오늘 예수님이 제자로 삼을 때
기준이 어떠했는지 알려주십니다.
의인이 아닌 죄인, 폼나는 사람 재치시고
볼품없는 사람들을 모으셨죠.
세금이나 뜯어내는 마태오마져 부르실 때
주위에서는 손가락질을 했지만,
변화될 가능성을 보시고 택하신 것입니다.
약함에 강함되시고
부정한것을 정화시키시고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시는 주님이 나를, 우리를
부르셨는데 따르는 이들의 마음은 천차만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불순한 동기를 ~
그러니, 이제라도 순수한 동기로 바꾸어 살 때
죄인이었던 내가 의인이 되가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어제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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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 9)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합니다.
아쉬울 것 없는
첫사랑을
기억합니다.
사랑은
그냥 맡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랑의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부르심은
뜨겁게 시작됩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단순한 믿음에서
따름은 시작됩니다.
믿음 없이는
따를 수 없고
함께하고픈
사랑없이는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결단과
결심의 기쁜
사랑입니다.
자격이 있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예수님 사랑이 있기에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쁘게 따르고
기쁘게 이 순간을
함께합니다.
이것이
참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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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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