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경아
전남 여수 출생. 원광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당선작
용산구 신계동 산27번지 외 2편
침묵은 곁이 되어 주지 못했다
도둑고양이만 조문객으로 어슬렁거렸을 뿐
열쇠 구멍을 찾기 위해
초음파를 쏘지 않아도 되었다
재건축 허가도 받지 않은 거미집의
날실만이 어둠 속에서 가녀리게 떨렸다
뒹구는 몇 개의 라면봉지와 버스카드 한 장
머리맡 약봉지에서 미끄러지듯
터져 나온 흰수염고래의 입김이 얼어붙었다
낯익은 푸른 방에서도 조난을 당한 것일까
누군가는 뒤꿈치가 퇴화해
걸을 수 없다 했고 젖꼭지는 말라붙어
아예 물릴 수도 없다 했다
타살이라는 온갖 추측이 무성했지만
작살에 찍힌 흔적은 없었다
몇 달 전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벌컥벌컥 수도꼭지만 빨다 돌아갔던 흰수염고래
살과 뼈가 바짝 붙어가는 순간에도
수많은 날벌레들이 빛을 내며
온몸을 수색했지만 사인(死因)은 밝혀지지 않았다
폐지 더미에서 흥건하게 새어나온 배내똥의
허기진 진술만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새우떼를 쫓아 신도시로 떠났던 혹등고래도
그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전깃줄마저 철거해버린 재개발 골목에 달빛이 환하다
푸른 방을 향해 아직도 초음파를 쏘고 있을
흰수염고래가 끝내 뭍으로
끌려나오고 있었다
허공 한 채
추락한다는 건
붙잡을 허공조차 없다는 것이리라
시멘트 담벼락 틈새로 세간을 옮기면서
절벽을 움켜쥐는 날이 많아졌다
꽃대를 올리는 의식은 필사적이었으므로
황량한 이파리 몇몇은 잦은 비바람을 향해
돌아눕기도 했다
스팸문자처럼 독촉을 하는 벨소리가
방문을 때릴 때마다
불편한 언성들이 쏟아져나온다
밥값도 안 되는 폐지를 밥 먹듯 쌓아봐도
시린 골목을 화력(火力) 한 장으로 데워 줄
방 한 칸이 내게는 없다
붉게 달그락거리는 구인란의 불협화음은
수다스럽기만 하고
계약서에는 당신의 편익을 위한
권리만 빼곡할 뿐
일용할 양식은 늘 부재중이다
전신주 꼭대기에서 자라나는 자폐적 푸념들
툭 툭 가지를 쳐내버리고
꽃대 하나 올리는 일은
온전하게 허공 한 채를 마련하는 일이라서
주먹을 다시 움켜쥐고 절벽을 허물어 볼 일이다
왕관 해마
―아비의 뿔
죽음을 잉태한 부유물은 포식자에게 노출되기 십상이어서 산고를 치르는 아비는 만날 허물어지기 일쑤였다 연안을 표류하던 몇몇의 아비들은 중심을 잃어 널브러지기도 했고 말미잘의 촉수에 찔린 채 은밀히 거래가 되기도 했다
거친 물살을 타기엔 아비의 제복은 버거웠지만 단단한 위엄이 느껴졌다 암초 더미에 깔려 다리가 잘려나간 후부터 지느러미 대신 꼬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휩쓸리지 않기 위해 비좁은 골목의 문고리를 감아쥐며 힘껏 배를 부풀렸던 저 직립의 부성(父性), 몇 대를 거친 종족에 대한 집념일까 단칸방에 식솔들이 늘어날 때마다 한 치 두 치 뿔들이 자라났다
아비의 트럼펫 연주가 시장 좌판에 깔릴 때마다 왕관은 더욱 빛이 났다 관객들은 신기하다 못해 저마다 뿔을 뚝 뚝 부러뜨려 진열대를 장식했고 그럴 때마다 등지느러미는 파르르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아비는 어느새 주변을 닮아갔다 위장복으로 가시권에서 잠시 벗어나기도 했으나 꼿꼿하게 세운 허리는 굽힐 줄 몰랐고 절망도 포근해지는 거문도 앞바다에서 고집스런 근성으로 배를 부풀리는 신화는 계속되었다
며칠 전부터 가렵던 머리에 딱딱하게 무언가 만져졌다 전설 속으로 사라진 아비의 뿔이 혹 자라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왕관해마: 실고깃과의 바닷물고기, 거문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몇 안 되는 토종 해마. 수컷에는 육아낭(育兒囊)이라는 배주머니가 있어 암컷이 알을 넣어주면 그 속에서 알이 부화되어 새끼를 출산하는 특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당선소감
다시 정지선 앞에 서다
퇴근길 신호대기 앞
바람을 곡예하던 낙엽들이 차창으로 달려와 부딪치다가 차에 치이기도 하다가 결국 몇 번의 중앙선을 넘나들다 이내 부서져 버린다. 그 부서진 잎들은 지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떠밀려와 웅크리며 서로의 온기로 한겨울을 견뎌낼 테다. 누구나 한 번쯤 도로 한복판을 저처럼 나뒹굴고 싶어지거나 중앙선 너머를 기웃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삶의 과적의 무게에 갈라진 생의 지문이 더 깊어지려는 순간 단비 같은 소식에 여리게 뛰는 심장이 요동친다.
가속페달을 밟으며 런어웨이를 질주하는 동안 잃어버리거나 혹은 놓쳐 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 이젠 갓길에 내 자신을 좀 더 느긋하게 비워볼 일이다. 들꽃의 비명소리에 대하여 작은 돌멩이의 속삭임에 대하여 흙먼지들의 비루한 생의 노래에 대하여 방관하지 않겠다. 낮은 곳에서 불안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귀 기울이며 다시 정지선 앞에 시동을 거는 것에 대해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신호대기 앞에서 갈피를 못 잡는 애송이처럼 휘청거리던 나에게 따끔한 충고와 격려를 아낌없이 해주시던 곁들이 하나 둘 스친다. 신병은 교수님을 비롯한 여수 화요문우님들과 여수작가 문우님들, 그리고 부족한 나에게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 유일무이한 고급독자인 남편과 사랑하는 두 아들 관호와 예준,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더불어 나의 가능성에 한 표를 던져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드리고 뼈를 깎는 달콤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치열한 시 쓰기로 보답할 것을 조심스레 다짐해본다.
∥심사평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향한 시가 되길
예심에서 올라온 5명 시인지망생 가운데 강경아 씨의 「용산구 신계동 산 27번지」 외 2편과 김려 씨의 「카드 전성시대(全盛時代)」 외 2편을 시에 시인상 당선작으로 뽑았다.
강경아 씨의 시들은 무척 비극적이다. 강자의 힘이 폭력으로 작용할 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약자는 소외의 고통을 지나 죽음의 벽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강 시인은 깊은 애정을 갖고 억압당하는 그들의 내면에 잠재된 강인한 생명력을 발견하고 그 억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한다. 우리 시단에 어느 때부터인지 많은 시인들이 현실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시선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풍조로부터 거리를 두고 어두운 현실의 이면을 응시하는 뚝심이 오히려 참신하게 느껴진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보다 어떠한 현실에서 살고 있는가의 문제도 무척 중요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현실을 통찰하는 시선의 예리함과 비유적 구조를 유지하며 다양한 이미지를 변용하는 능력이 앞으로 큰 시인으로 발전해 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준다.
김려 씨의 시들은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며 개인의 존재를 증명해주기 위한 기호들이 오히려 개인의 꿈을 억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숫자와 문자 또는 사진 등으로 조합된 그 기호들은 진정으로 개인의 진실을 보여주거나 변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일상적 기호에 길들여지며 살다 보면 “새의 말”, 즉 인간의 언어보다 더 직접적으로 진실을 보여주는 ‘손의 언어’가 “이상한 나라의 언어”로 여겨질 뿐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김 시인은 진실을 주고받기 위한 언어가 장벽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생일날 아침 그릇이 깨진 것을 본다. 그 사소한 경험을 통하여 “깨진다는 것”은 일상적 질서, 즉 관계의 틀을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신호”로 여기는 김 시인의 사유와 상상력이 무척 든든하다. 앞으로 김려 시인은 늘 스스로 깨어짐으로써 일상어의 문법을 파괴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법에 따라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여 “높은 하늘을 날”아가리라고 믿는다.
다시 한번 강경아 씨와 김려 씨의 등단을 축하한다.
심사위원/김석환(시인, 명지대 교수)
공광규(시인,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양문규(시인, 본지 주간)
—계간 『시에』 2013년 봄호
첫댓글 시에/시에문학회, 와 함께 문학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강경아 시인의 글은 여수에 사니 바다가 있고 파도가 있다, 울렁임도 있다. 늘 좋은 시심과 살아가세요.
최재경 시인님..과찬이셔요~~
말씀대로 바다가 있고. 파도가 있고.. 울렁임이 있는 시.. 써보도록 꼬옥~~노력해보렵니다..^^
양문규 주간님 ^^ 더불어 시에 가족과 함께 하는 즐거움 오래오래 같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