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문화관에서 <인도의 신화>전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유명하다해도 '아바타'를 보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심심할 때면 잠깐 동네 수퍼에 들리듯 혼자 영화관을 찾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지만, 쟝르에 대한 편식이 심한 편이라서 알 수 없는 미래를 담보로 하는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나무나 꽃은 흔적조차 없고 날카로운 기계음만 남무하는 암울한 SF영화는 킬링타임용으로도 보기 싫어하는 편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황당무계하더라도 '미이라'나 '인디아나존스'같은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팩션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 내가 굳이 '아바타'를 보러 간 것은 순전히 <인도의 신화>전 때문이었다. 인도의 인구수보다 더 많다는 인도의 신. 그 신들은 주신이 있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여러가지 모습으로 하강한다. 이렇게 신이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하강하는 것을 '화신(化身) 혹은 '아바타'라 한다. 이를테면 힌두교의 3대신 중의 한 명인 비슈누의 화신은 10개인데 마트스야(물고기), 쿠르마(거북이), 바라하(멧돼지), 느리싱하(반인반사자),바마나(난장이), 파라슈라마(용사), 라마, 크리슈나, 붓다, 칼키 등이다. 인도 그림이나 조각을 볼 때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동물이나 신들이 모두 '아바타'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인터넷에서 가상현실 게임, 채팅이나 메일을 쓸 때, 사용자를 대신하는 그래픽 아이콘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이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 '아바타'란 단어가 익숙했던 것은 이미 인터넷상에서 보통명사처럼 쓰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러가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것은, 서양 사람이 서양 신화가 아니라 인도의 신화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흥행의 보증수표라는 찬사가 무색하지 않을만큼 이국적인 소재인 동양의 신화(인도를 동양으로 볼 수 있다면)를 서양인의 입맛에 맞게 소스를 치고 양념으로 버무려 퓨전식으로 요리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서양의 문화적인 차이를 뛰어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에 가 닿는 매력이 있는 영화다. 그렇다고해서 무작정 감동했다는 뜻은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특별한 감동없이 2시간 40분을 끌고 나갈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스토리는 뻔하고 밋밋했다. 그런데도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화면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영화속에 펼쳐진 아름다운 세상과 뛰어난 상상력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 속에 녹아 있는 신화때문이었다. '아바타' 속에는 서양 신화에서부터 인도의 신화, 그리고 장자의 꿈까지 다양한 신화의 세계가 종횡무진으로 엮어져 있다. 영화속에 복선처럼 깔려있는 신화의 세계를 살펴보면 감독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했던 세계가 좀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가까운 미래에 지구는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나먼 행성 판도라에서 대체 자원을 채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판도라의 독성을 지닌 대기로 인해 자원 획득에 어려움을 겪게 된 인류는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Na’vi)’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 원격 조종이 가능한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탄생시키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한편, 하반신이 마비된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 설리(샘 워딩튼)’는 ‘아바타 프로그램’에 참가할 것을 제안 받아 판도라로 향한다. 그 곳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된 ‘제이크’는 자원 채굴을 막으려는 ‘나비(Na’vi)’의 무리에 침투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임무 수행 중 ‘나비(Na’vi)’의 여전사 ‘네이티리(조 샐다나)’를 만난 ‘제이크’는 그녀와 함께 다채로운 모험을 경험하면서 ‘네이티리’를 사랑하게 되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간다. 하지만 머지 않아 전 우주의 운명을 결정 짓는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면서 ‘제이크’는 최후의 시험대에 오르게 되는데…. (이상은 '아바타' 홈피에서 펌해왔음)
1) 판도라 영화 첫머리에서 등장하는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이다. 감독은 왜 하필 행성 이름을 '판도라'라고 했을까? 마치 천상의 세계를 보듯 아름다운 행성인만큼 '아프로디테'나 '헬레나' 혹은 '헤라'나 '나르시스'로 할 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판도라'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판도라' 신화가 가지고 있는 다중적인 의미때문이 아니었을까. 판도라는,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의 나라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자 제우스가 대장장이인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해서 흙으로 빚게 한 여자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형제인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는데 제우스의 속셈은 뻔했다. 여자를 이용해 인간세상에 재앙을 주고자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프로메테우스는 에피메테우스에게 경고를 보내지만, '뒤늦게 깨우친 사람'이란 뜻이 의미하는 것처럼 좀 덜 떨어진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를 아내로 취한다. 그런데 판도라는, 절대 열어봐서는 안된다는 경고문이 붙은 상자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했던 판도라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속에 담겨 있던 온갖 악들이 뛰쳐 나왔다. 놀란 판도라가 상자를 덮어버리자 안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뚜껑을 열어달라고 호소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행성의 이름이 판도라인 것은 그 아름다움때문일 것이다. 헤파이스토스는 잘 알려진대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남편이다. 비록 절름발이에 추남이라서 아내는 항상 전쟁의 신 아레스와 바람을 피웠지만 아름다운 아프로디테를 가장 많이 본 신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런 그가 아버지인 제우스신의 명령을 받아 만든 여인이라면 아프로디테를 닮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었을까. 더구나 그녀는 인간 세상을 재앙으로 몰아넣을만큼 팜므파탈적인 미를 지녀야한다는 제우스의 언질이 있지 않았겠는가. 신들은 그녀가 만들어졌을 때 자신들이 고른 최고의 선물들을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판도라는 아름다움에 풍요로움까지 겸비하게 되었다. 영화속에 펼쳐진 판도라 행성의 아름다움은 신화속의 판도라 이미지에 걸맞게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곳이다. 판도라의 나비족들은 나무와 동물 등 자연과 영혼으로 대화하고 마음으로 통한다. 행복이 영원할 것같은 평화로운 행성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언제나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속에서 판도라의 상자는 무엇일까? 행성을 침공한 인간들이 아닐까? 비록 나비족들 스스로가 상자 뚜껑을 연 것은 아니지만 뚜껑을 여는 순간 재앙이 시작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2)장자의 꿈 어느 날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꿈 속에 훨훨 날아다니면서도 자기가 장자인 줄을 몰랐다. 문득 깨어나서 누워 있는 자신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꿈 속에 나비가 된 것일까, 나비가 꿈에 나로 된 것일까. 이 얘기는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유명한 '나비의 꿈' 이야기다' 아바타를 보면서 문득 장자의 '나비의 꿈'을 떠올렸던 것은 주인공이 아바타로 변신할 때 잠을 잔다는 것 때문이었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가 아바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잠 들어야 한다. 또 제이크 설리가 깨어날 때 아바타는 깊은 잠에 빠진다. 인간 제이크 설리의 의식 작용에 의해 아바타가 움직이지만, 아바타로 보낸 경험과 기억은 인간으로 살아 있을 때의 제이크 설리의 미래를 지배한다. 그렇다면 제이크 설리가 아바타의 꿈 속의 주인인가. 아바타가 꿈 속의 제이크 설리가 된 것인가. 이런 동양적인 사고방식이 서양인의 사고속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다. 꿈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무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깨어있을 때는 억압당한 생각과 욕망이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자유스럽게 표출된다. 프로이드가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꿈의 해석에 집착했던 이유도, 꿈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의 씨앗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자가 꿈 속에 나비가 된 것은 나비처럼 속박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살고자 하는 장자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리라. 사람의 행동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학설은 인간의 전생연구로 이어지고 최면술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다. 지금 내가 어떤 꿈을 꾸고 있느냐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는 물음과 정확히 일치할 것이다. 캄보디아인들이 꿈 꾼 불가사의한 종교의 세계는 앙코르와트(이 블로그의 대문 사진)로 구현되었다. 태국인들이 지향한 불교의 세계는 아유타야의 탑으로 세워졌고 신라인들이 기원한 영혼의 세계는 석굴암으로 화현되었다. 개인 개인의 꿈이 모여 집단의 꿈이 되었을 때 그것은 문화가 된다. 그래서 문화의 집결체인 예술작품은 한 민족의 꿈과 염원을 읽어낼 수 있는 여의주와도 같다. 그 여의주를 들여다보면 그 여의주를 만들었던 집단이 어떤 꿈을 꾸며 살아왔는 지를 읽을 수 있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아바타'는 2009년을 사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꿈과 무의식이 반영된 이 시대의 문화코드라 할 수 있다. 사실, 서로 다른 공간이나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만나는 영화는 그동안 많이 제작되었다. "백 투 더 퓨처"를 비롯하여 터미네이터""철도원""시월애" 등 시공간에 얽매여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으려는 이야기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영화감독들이 선호하는 주제다. 그러나 그 원조를 찾아가다보면 기원전 4세기경의 장자와 만날 수 있다. 장자가 아바타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함께 나비 꿈을 꾸자고 할까, 아니면 새삼스런 호들갑에 잠 좀 자게 조용히 하라고 할까. 우리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우리가 꾸는 꿈은 언젠가는 현실이 될 것이다. 영화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꿈(혹은 지향점)은 그 영화를 본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속에 잠재되어 집단적인 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상을 통해 심심찮게 봐 왔던 외계인, 인조인간, 로봇의 지배, 좀비, 뱀파이어 등이 난무하는 세계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미래의 집단적인 꿈이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가.
3)비슈누의 화신 그리스 로마 신화와 인도 신화의 공통점은, 신들이 매우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면서도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위엄이나 품위를 갖추기보다는 인간처럼 사랑하고 질투하고 배신한다. 자신을 떠받드는 인간은 축복하고 보호해주는 반면 행여 자신을 모른 체하거나 모욕하게 되면 재앙을 내리거나 몰살시키는 짓도 서슴치 않는다. 이쯤 되면 신이나 인간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신들은 인간에 비해 활동영역이 넓다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제우스신은 마음에 두는 여자가 있으면 헤라의 눈을 피해 체면 불구하고 사람이나 동물로 변신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 비뉴수신의 아바타인 크리슈나가 피리를 불면 그 주변에는 아리따운 여인들이 몰려 드는 반면 또 다른 아바타 칼키는 이 지구를 멸망시킬 존재이다. 이렇게 아바타는 나의 분신이면서 내가 원하는 형태로 재생된 또 다른 존재이다. 아무리 변신을 시도해도 하나의 몸 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인간에게 나의 의지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또 다른 나로 전환되는 아바타의 존재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내가 비록 현실속에서는 무력하지만 나의 분신인 아바타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갖춘 존재로 만들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다. 그러나 그의 아바타는 나비족의 전사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전사가 되어 부족을 구출한다. 판도라의 행성에 오게 된 것도 돈을 벌어 다리 수술을 받기 위해 자원한 것이었다. 아바타에서는 수술을 하지 않아도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면서 컴퓨터라는 가상세계에 빠져 사는 이유가 아마 이런 대리만족때문이 아닐까. 애초에 비슈누의 화신을 열 명으로 만든 것도 인간이고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변신시킨 것도 인간이다. 그만큼 현실이란 시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란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던 것이리라. 자신의 세포를 가지고 자신과 똑같은 복제인간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모두 이런 욕망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나와 똑같은 복제인간을 만든다해도 나의 뜻대로 움직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신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터넷상에서 나를 대신하는 아바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것만 봐도 인간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아바타'를 만든 것은 다만 이런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앞으로도 우리들은 비뉴수의 아바타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아니, 그 아바타는 제우스의 화신일 수도, 시바의 화신일 수도 때론 악마나 귀신의 화신일 수도 있다.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다.
이제 글을 끝맺으면서 다시 판도라의 얘기로 돌아가자. 신화속의 판도라가 상자 뚜껑을 열다가 악이 뛰쳐나온 것에 놀라 뚜껑을 닫았을 때 그 안에서 가느다란 소리로 나가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이 희망이었다. 판도라의 행성은 인간의 욕심과 무차별적인 습격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했다. 판도라의 행성은 인간이 결코 열어봐서는(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결코 물들어서는 안되는 땅. 그곳이 판도라의 행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서 살아왔을까.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마음에 상처를 줄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상자 뚜껑을 열었던가. 뻔한 스토리로 지루하게 전개된 영화였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심각하게 고민할 수 있게 해 주어서 <아바타>는 심오한 철학이 담긴 의미있는 영화다.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는 지 확인해보라고 가르쳐주는 영화다.(조정육) |
출처: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원문보기 글쓴이: 조정육
첫댓글 갠지스 강변에서 이른 아침 들었던 신들에게 바치는 찬가의 음률이 떠오릅니다.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절벽에 아슬 아슬하게 피어있는 꽃향기에 이끌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멈추어 서 있는 꿈 속의 제 모습을 확인해봅니다. 무진당님 고맙습니다()()()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 남았듯이 우리 마음의 내면에는 우리가 이직 디뎌 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무한한 우주가 있을 것임에 마음의 안으로 들어 가도록 노력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극미의 마음 안에 무한대의 또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