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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五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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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종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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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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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성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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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黃帝 헌원(軒轅) |
6세 |
축융(祝融) 휘 오회(吳回) |
60세 |
회공(鄶公) 휘 광정(匡正) |
31세 |
승공(乘公) 휘 능보(凌甫) |
9세 |
군용(君用) 휘 균(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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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왕(B.C.11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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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왕(B.C.437년) 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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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난왕(B.C.265년) |
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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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말기 羅나라 사람들이 한반도로 대거 이주 -> 한반도 동쪽에 세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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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시조 |
수성으로 동원이관 |
고령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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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례 聰禮 |
14세 |
위 緯 |
6세 |
순손 順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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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성주, 영동, 영주, 현풍, 고성, 양산, 김천, 합천, 청도 등 세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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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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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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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羅姓)은 중국 최조적(最早的) 성씨 중의 하나로 오제 중 첫 번째 제왕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의 6세손 축융(祝融: 諱 吳回)의 후예(後裔)이다. 축융의 49세 병문 휘 전은 상나라 탕왕을 따라 하(夏)나라 걸왕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호국장군을 하사받았으며, 60세 효공(孝公, 諱 源流)은 주(周)나라 문왕의 경사로 시작해서 충모참군에 이르렀다.
효공(孝公)의 차자(次子)인 회공(鄶公) 휘 광정(匡正)께서 주무왕 時 상나라를 벌(伐)하고 주무왕 3년(기원전 1118년)에 의성을 진압하는데 공이 있어 의성(宜城: 현 중국 양양시 의성현)지역 사방 백리를 식읍으로 받고 의성후(宜城侯)로 제수(除授)되시었다. 이 지역에 나강(羅江)이 흐르는 곳이라 국명(國名)을 나(羅)라 부르게 되니 나국개국시조(羅國開國始祖)이시다. 나국은 주왕실로부터 자작국(子爵國)의 지위를 얻게 된다.
그 후 30세 승공(乘公: 휘 凌甫)에 이르러 이국위씨(而國爲氏: 나라 이름을 따라 성을 삼음)하게 되니 운씨(鄖氏)에서 나씨(羅氏)로 부르게 되니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된다. 승공의 9세손 군용(君用: 諱 均)은 주난왕 병신(周赧王 丙申: 기원전265년)에 생하시어 진시황의 중국통일을 맞게 된다. 이 때 진나라의 만리장성 축성의 고역을 피하여 많은 나씨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하여, 당시 한반도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마한(馬韓)으로부터 동쪽 지역을 할애 받아 세거(世居)하니 진한(辰韓)의 근간을 이루었다(據 ⟪삼국지위지동이전⟫). 이때부터 후삼국통일까지의 세계(世系)를 고증할 만한 자료가 없어 소목계통(昭穆系統)을 알 수 없다. 하지만 한반도의 나성(羅姓)은 이로부터 이며 일본(一本)이다.
금성나씨는 기록(記錄) 상으로 후삼국 통일 때 공을 세운 삼한공신대광보국(三韓功臣大匡輔國)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나총례(羅聰禮)를 시조로 6세 손 국영(國英), 11세 손 익희(益熙), 12세 손 영걸 모두 금성군(錦城君)으로 봉(封) 받았다. 14세 손 시랑공 위(緯)께서 수성군사(壽城軍事)로 오셔서 금성에서 수성(壽城: 今 대구시 수성구)으로 이관(移貫)하니 수성관(壽城貫) 1세조이다.
수성 시조공에서 5세조까지는 현 김천 장암리, 성주읍(막동: 幕洞) 등지에 세거(世居)하시었으나 6세 휘 순손(順孫)공께서 세조(世祖) 초에 지동(池洞, 현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못골)에 입향(入鄕)하시니 영남의 모든 수성 종인들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나. 시조(始祖)
1) 금성나씨 시조(錦城羅氏 始祖) 선세고증
씨족지(氏族誌) : 나는 오행 중 징음에 속한다. 羅於五行屬徵音.
만성보(萬姓譜): 나총례는 삼한공신삼중대광이다. 羅聰禮三韓功臣三重大匡.
잠영보(簪纓譜) : 나총례는 고려평장사 금성부원군이며 그 선조는 당태종 때 한림수찬으로 해동으로 왔으며 이 기록은 성원에도 실려 있다. 羅聰禮高麗平章事錦城府院君其先唐太宗時以翰林修撰官竄于海東此條于載姓苑.
한산종인경성가승(韓山宗人景星家乘) : 시조 휘 업의 4대 손이 총례이다. 사람들은 대흥에 정승 업의 묘가 있다고 전한다. 始組諱業四代孫諱聰禮 世傳大興有政丞業墓云.
경주최보(慶州崔譜) : 문창후 최치원 부인이 나씨이며, 그 아버지가 정승 업이다. 崔致遠文昌侯配羅氏政丞業之女.
동국사략 및 고려기(東國史略及高麗記) : 고려사에 제강삼사가 채록되어 있는데 상서공 나득황, 밀직공 나유, 양절공 나익희 3세의 관적이 그것이다. 이것은 동국여지지에도 실려 있다.
2) 수성나씨 중시조(壽城羅氏 中始祖)
공(公)의 초휘(初諱)는 위(緯)이며, 고려 충숙왕(忠肅王) 복위 6년(1337 丁丑)에 나주 문평에서 출생하시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20년(1371 辛亥)에 문과 급제를 하시고 벼슬은 명경박사(明經博士)와 개성참군(開城參軍)과 전의(典醫)와 직장(直長)과 선속랑(宣續郞)과 상만고(常滿庫) 사도관(使都官)과 좌랑(佐郞)과 조봉랑(朝奉郞)과 흥복도판관(興復都判官)과 선공령(繕工令)을 지내셨고 이 때 휘를 순(純)으로 개명하시었다가 봉상대부(奉常大夫)로 군기소윤(軍器少尹)과 예부시랑(禮部侍郞=차관)을 하시면서 다시 한 번 휘를 홍찬(洪纘)으로 개명하시었다.
선친의 상을 당한 후 수시로 마을 앞에 있는 암반(岩盤)에 올라 멀리 부친(父親)의 산소를 바라보며 배곡(拜哭)하기를 불피풍우(不避風雨: 비바람 가리지 않고)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 바위를 망사암(望思巖)이라 하였는데 나주시 문평면 쌍정마을에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신우갑자(辛禑甲子: 1384년)년에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함께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가 극진한 예로써 우대(優待)하며 위로를 하니, 그때 우리나라가 명나라와 더불어 국교가 원만하지 못한 때인지라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명나라에 가겠다고 못하였는데 특별히 정몽주와 공(公)이 명나라에 가겠다고 함께 말하여 가로대 “신하된 자로 왕의 일에 당하여 비록 물 끓고 불이 훨훨 타는데 이르더라도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하시고 드디어 부사(副使)로써 함께 갔으며 돌아와서 왕이 칭찬하여 상주기를 그치지 아니 하시었다. 대사헌(大司憲)에 특별히 발령받았는데 그때 정치는 문란하고 백성들은 생활이 어려웠으니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사사로이 나라의 정사를 농간(弄奸)하니 안과 밖에서 의심하고 두려워하니라, 공(公)이 선고(先考)의 출처(出處)를 본받아서 내직(內職)을 사양하고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1388년 무진(戊辰)에 지수성군사(知壽城郡事)가 되고 1392년 임신(壬申)에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서 밀직부사(密直副使=정3품)를 하시었다. 그해 7월에 남은(南誾)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1392년에 폐위되자 왕을 수행하여 왕위를 양위(讓位)한 원주(原州)에 이르시었다.
왕이 폐위를 당하여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자 호위하든 병사들을 보내버리고 공(公)은 원주(原州) 손위소(遜位所)에 살면서 문을 닫고 조용히 충절을 지키며 벼슬을 하지 아니하였다. 1393년 계유(癸酉) 9월에 조선 태조(太祖)가 불러 예의판서(禮儀判書)를 명하였으나 불취하시었다.
1399년 정종(定宗) 기묘(己卯)에 원주에서 돌아가시고 14년 뒤 1412년 임진(壬辰)에 공(公)의 아들 봉례공(奉禮公)이 삼향(三鄕: 전라도 무안군)에 이장하고 그 뒤 다시 송림(松林: 전라도 나주)에 이장하였는데 실전(失傳)이다. 1418년 무술(戊戌)에 태종(太宗)이 판서(判書)에 공(公)을 추증하였음이 군지(郡誌)에 기록되어 있다.
공(公)께서 4자를 두셨으며 수성(壽城: 대구시 수성구)에 부임할 때에 차자(次子) 광우(光佑)는 수성(壽城)에 살고, 삼자(三子) 명우(明佑)는 공을 따라 원주(原州)에서 살게 되었다.
다. 씨족사략(氏族史略)
1) 금성(錦城), 수성(壽城)
금성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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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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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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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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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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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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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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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총례 |
→ |
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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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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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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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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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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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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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聰禮) |
恩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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含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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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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廷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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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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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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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빈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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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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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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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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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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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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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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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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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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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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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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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
14/수성1세 | ||
∖ |
효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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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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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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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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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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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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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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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孝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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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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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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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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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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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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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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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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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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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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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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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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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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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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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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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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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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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 |
|
순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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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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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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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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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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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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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나씨의 시조는 고려 초에 삼한벽상일등공신(三韓壁上一等功臣)에 오른 나총례(羅聰禮)이며, 아들 은고(恩誥)가 자의대부(資義大夫)로 공빈승(貢賓丞)을 지내고 금산군(錦産君)에 봉해진 것을 시작으로 11세손에 이르기까지 3명이 대광(大匡)의 벼슬에 오르고 4명의 부원군(府院君)과 5명이 봉군(封君)되어 벌족(閥族)의 지위를 차지했다.
고려 말엽에 주로 명성을 떨쳤던 금성나씨는 금성군(錦城君) 익희(益熙)의 손자 문규(文奎)가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가 치적을 남겼으며, 상장군(上將軍) 수겸(守謙)의 9세손 계종(繼從)은 고려에서 예문관제학(藝文官提學)을 지내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켰다.
조선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대(代)에 문명(文名)을 떨쳤던 세찬(世纘)은 문규(文奎)의 7대손으로 당대의 권신(權臣)인 김안로(金安老) 간악함을 탄핵하다가 여러 차례 장류(杖流)를 당했으나, 김안로가 사사되자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세찬의 증손(曾孫) 무춘(茂春)도 광해군(光海君) 때 기개(氣槪) 높은 학자로 명성을 떨쳤고, 학정(學正)으로 있을 때 폐모론(廢母論)이 대두되자 검열(檢閱)로 있던 엄성(嚴惺)과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 당했다.
그 외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득황(得黃)의 13세손 치용(致用)이 임진왜란 때 향병(鄕兵)을 이끌고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 막하(幕下)로 들어가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였으며, 그의 사촌 대용(大用)은 거북선과 해선(海船)을 제작하는 데 공을 세워 삼지창(三枝槍: 일명 당파창, 끝이 세 갈래로 갈라졌고 길이가 일곱자 여섯치 임)과 청룡도(靑龍刀)를 하사받아 평양성(平壤城) 방어에 공을 세운 승윤(承潤)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라. 본관지 연혁(本貫地 沿革)
1) 수성(壽城)
대구광역시의 가운데 동편에 위치한 곳으로 경상북도 경산시와 경계를 이룬다. 신라시대 위화군(渭火郡, 또는 上村昌郡)에 해당한다. 경덕왕이 수창군(壽昌郡)으로 개칭했다. 고려 초에 수성군(壽城郡)이 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 수성군사(壽城郡司)로 개칭되어 경주에 속하였다. 1390년(고려 공양왕 2년) 해안현(解顔縣)을 겸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1394년(태조 3) 대구겸관으로 두었다가 1414년(태종14) 대구에 편입시켰다. 수성구 지명은 신라시대 수창군을 고려 초 수성군으로 개칭한데서 유래한다.
2. 高靈入鄕
가. 선향지(先鄕地)
수성군사 나위(羅緯)공의 손자이신 만(蔓)공께서는 김천 장바우(장암동)아며, 그 손자 상지공은 선남면 오도방(문방리, 오도리)이다.
나. 입향지(入鄕地)
“公居星州東茶山坊池洞一名智洞”
공(順孫)께서 성주 다산방 지동(池洞)에 입향하셨으며, 지동을 일명 지동(智洞)이라 하였다. 을사보서(乙巳譜序)에 그 연유를 순손공의 증손(曾孫)인 경문공(景文公)이 한편의 시로 노래했다. 그 시에 다음과 같은 부연 설명이 있다. “어찌 어진 곳을 가려서 취하지 못한다면 의(義)라는 지(智)를 얻을 수 있으리오(取擇不處仁焉得智之義).”
지동으로 입향(入鄕) 한 순송공께서 농사짓기에 편리하도록 잿길을 내셨고 가뭄을 막기 위하여 못을 만드셨다. 길손들이 그 잿길을 하동현(河東峴, 一名 河東路)이라 일컬었고 몽리민들이 그 못을 하동못이라고 일컬었다.
하동로는 임하 선생이 강 건너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에 있는 영벽정(映碧亭)을 제목으로 읊은 시에 실려 있다. 그만큼 많은 길손들이 이용했다는 것이리라. 역시 경산지(京山志)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다. 입향조(入鄕祖)
수성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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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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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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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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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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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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緯 |
→ |
광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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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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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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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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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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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光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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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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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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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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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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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지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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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막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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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선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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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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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諱) 문규가 서해도 안렴사를 지냈다. 자(子) 휘(諱) 위가 공민왕조에 예부시랑을 지냈는데 뒤에 가서 수성군으로 봉해졌다. 수성군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 휘(諱)는 광우인데 충주목사를 지냈다. 증조 휘(諱)는 만인데 서운관도정을 지냈다. 조 휘(諱)는 유겸인데 순흥부사를 지냈다. 선고(先考) 휘(諱)는 상지인데 사헌부 감찰과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선비(先妣)는 하빈이씨인데 판서 예(芮)의 여이다. 공은 조선 문종조에 음사(蔭仕)로 하동부사가 되어 좋은 치적을 남기셨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 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을 보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가슴에 새기고서 은거지를 찾다가 공의 마음에 들었던 곳이 바로 이곳 지동(池洞)이었다. 공이 이곳에 집을 일으켜 “취원정(聚遠亭)”이라하고 예악시서(禮樂詩書)를 벗으로 삼고 한가로이 보내셨다.
배(配)는 숙인 성주배씨(星州裴氏)인데 좌사간(左司諫) 한(閑)의 여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의 차례는 수경(守經), 처경(處,經), 권경(權經), 문경(文經)인데, 수경은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이 되었고, 처경은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냈고, 권경은 소윤(少尹)을 지냈고, 문경은 생원(生員)이 되었다. 장녀는 종실(宗室) 덕성군(德城郡) 민’의 아내가 되고, 차녀는 찬성허비의 아내가되었다.
수경이 2남 1녀를 두었는데 이동(異童), 서동(瑞童)이다. 이동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고, 서동은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를 지냈다. 여(女)는 별재(別才) 곽거(郭琚)의 아내가 되었다. 처경이 1남1녀를 두었는데 석동이다. 석동은 성균생원(成均生員)이 되었고, 여(女)는 생원 허적(許積)의 아내가 되었다. 문경이 1남을 두었는데 윤행이며, 윤행은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이동이 1남을 두었는데 경문(景文)이다. 경문이 중종 조에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상언(上言)하고 나아가지 아니했다. 지동(智洞) 남쪽 언덕에 휴휴당(休休堂)을 짓고 지평(持坪) 원정 여희림(園亭 呂希臨)과 도의교문(道義交文)하시었다. 서동이 1남을 두었는데 윤문이다. 윤문이 만호(萬戶)가 되었다. 석동이 1남을 두었는데 옥문이다. 옥문이 별재(別才)가 되었다.
윤행이 1남을 두었는데 귀필(貴弼)이다. 귀필이 현감(縣監)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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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원정(聚遠亭) |
하동지(河東池) |
나. 분파명(分派名)과 세거지(世居地)
수성6세(금성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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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7세(금성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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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8세(금성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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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9세(금성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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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10세(금성23) | |
순손 順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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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 守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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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異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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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 景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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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규 應奎 |
부장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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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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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기 應箕 |
참봉공파 |
통훈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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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訓大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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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두 應斗 |
기암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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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벽 應碧 |
생원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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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 瑞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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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문 潤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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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삼 應參 |
만호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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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서 應瑞 |
첨추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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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경 處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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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 碩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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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문 玉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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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연 應連 |
밀양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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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 權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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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文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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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행 允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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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필 貴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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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종 承宗 |
봉사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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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장공파(部將公派): 고령 다산(못골), 김천 개령
2) 참봉공파(參奉公派): 고령 다산(고방), 성주, 양산, 포항
3) 기암공파(奇菴公派): 고령 다산(논실,아시터,장척), 영주, 군위
4) 생원공파(生員公派): 경남 고성
5) 만호공파(萬戶公派): 합천 덕곡(율원)
6) 첨추공파(添樞公派): 고령 성산(득성,상용)
7) 밀양공파(密陽公派): 대구 달성(옥포.간경)
8) 봉사공파(奉事公派): 충북 영동, 김천 개령
3.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主要人物)
가. 조선시대(朝鮮時代)
나경문(羅景文) : 호는 서하당이요, 음사 나이동의 아들이다. 계속하여 친 상(親喪)을 당하니 여묘(廬墓)살이를 독실(篤實)하게 했고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세상에 드러났다. 중종 때 유일(遺逸)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야천 박소(朴紹), 송야계(宋倻溪), 원정 여희림(呂希)林, 김칠봉(金七峯)과 종유(從遊)했고 벽진인 이기현이 행장을 지었다.
나진기(羅振紀) : 호는 성재(省齋)요, 나언효(彦孝)의 증손이며, 이학가재문인(李學稼齋門人)이다. 효우(孝友)가 지극히 돈독(敦篤)하고 경의지학(經義之學)을 연구하고 강론했으며, 심근(心近) 등을 전사(傳寫)하는 등 글을 익히고 외우는데 침식을 잊었다. 진사 이병운이 비문(碑文)을 지었다.
나학순(羅學洵) : 호는 송오요, 사마 나언겸의 현손이다. 일찍부터 학문을 즐겨 하였고 몽와 김창집의 수명(受命) 때 힘을 다해 호상하였고 노강서원을 창건했다. 후손 나정열이 행장을 지었다.
나중욱(羅重煜) : 호는 담와요, 나진기의 손자이다. 평생을 조용히 살면서 글로써 세상 사람들이 높이 받들었다. 號澹窩 振紀孫 以書 籍自娛爲世所推
나수경(羅守經) : 절의 나순손의 아들이다. 총명하고 학문에 힘썼다. 세조 때 생원이었다. 節義順孫之子 生有美質聰悟出 倫硏經不怠 世祖朝生員
나언겸(羅彦縑) : 음사 나응기의 아들이다. 명종 때 생원이었고 벼슬을 직장이었다. 蔭仕應箕子 明宗朝生員 官直長⟪조선환여승람 蔭仕編⟫
나처경(羅處經) : 호는 아당이요 사마 나수경의 아우다. 세조 때 벼슬이 밀양부사이었다. 號芽堂 司馬守經第 世祖朝官密陽府使⟪조선환여승람 蔭仕編⟫
나이동(羅異童) : 사마 나수경의 아들이다. 성종 때 벼슬은 한성판윤이었다. 司馬守經子 成宗朝官漢城判尹⟪조선환여승람 蔭仕編⟫
나서동(羅瑞童) : 나이동의 아우다. 성종 때 벼슬은 밀양부사이었다.異童弟 成宗朝官 密陽府使⟪조선환여승람 蔭仕編⟫
나응기(羅應箕) : 유일 나경문의 아들이다. 중종 때 벼슬은 기자전참봉이었다. 遺逸景文子 中宗朝官 箕子殿參奉⟪조선환여승람⟫
나이준(羅以俊) : 1602(선조35)∼1686(숙종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수성(壽城). 자는 택우(宅于), 호는 매헌(梅軒). 하동부사 순손(順孫)의 7대손이다, 조(祖는) 세겸(世謙)이며, 부(父)는 용(瑢)이다. 1635년(인조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46년(인조2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53년(효종4) 정언(正言)이 되었고, 1663년(현종4) 장령(掌令)에 이어 수찬(修撰), 교리(校理), 보덕(輔德, 정三품)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자 부교리가 되었으며, 집의(執義),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774년(영조50) 성묘(聖墓)를 지켰다는 공(功)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사계서원(泗溪書院)에 배향되었다.나이인(羅以仁): 본관은 수성(壽城). 호는 북헌(北軒). 양절공(養節公) 나익희(羅益禧)의 후손으로 하동부사 나순손(羅順孫)의 7대손이며, 참봉(參奉) 나경문(羅景文)의 고손자이다. 안시명(安諟命)의 손자사위이다. 천성이 착하였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였다. 성리학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뜻을 밝혀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손처눌(孫處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형 나이준(羅以俊)과 더불어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높았다.
나. 현대(現代)
1) 정.관계
나오연 : 제7회고등고시 행정과, 전) 국회의원 3선 (14~16대)
나진구 : 제23회 행정고시, 서울시 제1행정부시장, 중랑구청장(민선 6기)
나동연 : 현) 양산시장 2선(5~6기)
나종택 : 전) 6~7대 경북도의원(2선)
나규택 : 전) 8대 경북도의원(1선)
나병택 : 전) 다산 농협장(2선)
나원식 : 전) 개진 농협장(3선)
나성택 : 현) 다산 농협장(1선)
나명기 : 전)대구지법 민원과장(서기관)
나대기 : 전)경북대학교 사무국장(부이사관)
나경기 : 전) 안기부 대구지부 대공분실장
나남기 : 전) 안기부 부산지부 대공분실장
나원식 : 제48회 사법고시, 현) 서울남부지원 판사
나채목 : 제49회 행정고시, 현) 안전행정부장관 수행비서(사무관)
나영강 : 현)경상북도 농업자원관리원장(서기관)
나채욱 : 현) 서울시(사무관)
나채일 : 현) 세무사
2) 학계, 의료계, 경제계
나인엽 : 전) 대구대학교 공과대학장
나영일 : 전) 대구관광고등학교 교장
나영악 : 현) 대구보건대학교 교수
나건연 : 현) 대구 파티마병원 과장
나용연 : 현) 상주 보은병원장
나진윤 : 전) 성주 수성병원장
나우연 : 현) 경북대 의과대학 교수(제일방사선과병원장)
나주영 : 현)제일테크노그라스 대표(포철관리공단협회장)
다. 외서(外壻): 현대(現代)
나경남 서(참봉공파) : 최월영, 사법고시32회, 현)대구지법 부장판사
나영백 서(기암공차) : 조창래, 행정고시21회, 전)대구경찰청장(치안감)
나영일 서(기암공파) : 최현준, 행정고시43회, 현)감사원 과장(부이사관)
나원식 처(기암공파) : 문현정, 사법고시48회, 현)법무법인태평양변호사
라. 외서(外壻) : 조선(朝鮮)
1) 여희림(呂希林) : 나경문의 1서(壻)의 부(父), 본관 성산(星山)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천지(天之), 호는 원정(圓亭). 성주 출생. 성종 때 원종공신이며 감역인 우창(遇昌)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이용(利用)의 손녀이며, 목사현정(顯廷)의 딸이다. 성주의 천곡사(川谷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적 등을 수록한 『원정실기』가 있다.
2) 김률(金嵂): 나경문의 2서, 본관 상산(商山人)
3) 곽거(郭琚): 나이동의 서(壻), 현풍인(玄風人), 별제(別提).
4. 遺蹟
가. 시조묘(始祖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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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시 문평면 대도리>
나. 입향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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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지동(못골) |
다.입향조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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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지동(못골) |
라. 입향조 후손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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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하재(敬霞齋<다산 노곡>) |
영천재(靈川齋<다산 노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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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재(竹林齋<성산 용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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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문집(文集)
1) 서하일고 : 나경문(유집), 2) 매음문집 : 나이준(문집)
3) 송오유고 : 나학순(유고), 4) 죽와문집 : 나찬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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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일고(목판본 1869년) <입향조 현손 나경문 유집. 2권 중 1권> |
송오유고/매음선생사적 병록 (1811년) <7대손 매음공 이준 사적 병록과 입향조 9대손 송오공 학순 유고> |
바. 서원
1) 사계서원(泗溪書院) : 나이준(羅以俊1602~1686)(경북 영주시 창진동)
효종5년(1654) 사림에서 사계서당을 망궐리 사계에 창건 숙종29년(1703) 사당을 세우고 황효공, 나이준의 위패를 봉안하여 사계서원이라 하고, 정조4년(1780)에 사계서원으로 승격하였으며, 서당 기문은 학사 김응조가 짓고 봉안문과 상향문은 하당 권두인이 짓고, 흥교당 중수기는 황용환이 지었다.
5.종문행예(宗門行禮)
가.족보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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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城羅氏族譜序(을사보 1845) |
수성나6씨가승구서 壽城羅氏家乘舊序 |
崇禎後歲在庚申年(168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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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나씨족보구서 壽城羅氏族譜舊序 |
崇禎紀元後九十四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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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나씨족보서 壽城羅氏族譜序 |
崇禎四乙巳年(18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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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나씨족보서 壽城羅氏族譜序 |
甲寅年(19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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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나씨세보 壽城羅氏世譜 |
辛亥年(19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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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나씨세보 壽城羅氏世譜 |
戊寅年(1998) |
6. 효열록(孝烈錄) : 孝子, 孝婦, 烈女 行績
가. 의인나씨(宜人羅氏): 나상지공의 녀(女), 순손공의 매(妹)
○慶尙道星州住故直集賢殿裵閏妻宜人羅氏, 爲其夫廬于墓側終制, 事聞, 命旌門復戶。據⟪조선왕조실록⟫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
나. 羅氏 : 나응벽 녀(女)
관적 수성인. 응벽의 딸로 함안 이응성의 부인이다. 임진왜란 때 왜놈에게 욕을 당하자 스스로 목을 베고 죽었다. 이 사실을 듣고 정려를 내렸다.
다. “나씨할매릉” : 입향조 나순손(羅順孫)의 여(女)
나씨할매는 왕실로 출가 하였으며 “나씨할매릉”은 다산면 노곡리에서 수백년동안 정월 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노곡동제”를 지내며, 2013년 7월에는 고령군에서 “나씨할매릉”보존과 “노곡동제” 활성화를 위한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무덤을 복원 정비를 하였다.
라. 둔옹공(遁翁公) 천정(天井) 효행록(孝行錄)
7. 고령지역 타문중과의 통혼 관계
가.곽지번: 나세겸의 장인.
나세겸(기암공파, 입향조 순손공의 현손)의 장인며, 나세겸은 홍의 곽재우장군의 고모부이시다.
나. 박이현: 순천인(順天人), 나숙(羅琡)의 장인
박이현의 본관은 순천, 자는 여수로 남명 조식과 덕계 오건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과 함께 성주 가천과 무주 등지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대표평에 이르러 전사하니, 후에 공조참의에 추증되고, 공조판서에 가증되었으며, 의민이란 시호를 받았다.
박영서는 무신으로 자는 효원이다. 무과 급제 후 옥구현감을 거쳐 창성부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선봉장으로 남이홍, 정충신 등과 함께 황주의 신교전투에 참가하여 싸움의 와중에 순국하였다. 이에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 충신문은 1625년(인조 10년)에 명정 받은 것으로 충신 박이현, 박영서 부자의 정려를 편액하기 위하여 숙종18년(1692)에 창건한 것이다. 경북 성주 수륜면 윤동에 있다.
8. 맺는말
우리 수성나씨종친회의 역사는 오래지만 그동안의 역사들이 체계적인 기록으로 관리 되지않아 자료 수집에 애로가 많았습니다만, 선조들의 발자취를 쫒아 그 행적을 모두 담고자 최선을 다 하였으며, 많은 기록들을 모두 담아 보고자 하였으나, 저희 문중에 할애된 지면의 제한으로 우선 그 일부를 담았습니다.
수성나씨 종인 여러분! 금번 고령지역성씨편람을 작성하면서 그 중요성을 생각하며 신중을 기하였으며, 또한 고문헌의 기록들을 최대한 참조하여 입증된 자료들만 기록에 옮기려 노력하였다는 말씀을 드리며, 기왕 종친들의 발자취를 기록하다보니 먼저 위대한 선조님의 숭고한 업적 찾기에 최선을 다하였고 현대 인물찾기에 노력하였으나, 아직도 사회 각계각층의 훌륭한 종인이 누락됨은 많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따라서 본 편람에 누락이나 미진한 부분은 종인 여러분들의 많은 질책과 지도편달을 바라며 아울러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구하면서 다음기회에 보다 정확하고 충실한 내용으로 보정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동안 수차례의 회합에 참석하여 묵묵히 최선을 다하신 문중의 여러 어른들과 편집위원님들 그리고 편람정비에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신 나종택종친회장님 그리고 편집위원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모든분들게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가정에 항상 행운이 충만 하시길 빕니다.
2014. 10.
수성나씨종친회
회장 : 나종택, 청년회장 : 나광택, 사무국장 : 나종근(010-3535-7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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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였고 여희림은 수정해야 할것 같고, 천정효행록은 한두줄로 정리해서 추가해야 할것임.
자료는 화요일까지 만들어 줄테니 참조바람
네알겠습니다
가급적빠르면좋습니다
그외다른분도더추가해주시면좋고요
고령박씨
성산배씨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