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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신춘 시와 심사평 (tistory.com)
시인의 형님 (tistory.com)
2013 신춘 시와 심사평
2013 강원일보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정선희
눈동자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언젠가 떠나게 되어있지
눈동자는 또 다른 눈동자를 부추기지
검은 눈동자 흰 눈동자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하늘에 있는 구름이 눈동자 속으로 흘러들면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지
구름이 풀린 사람을 본 적 있니? 흰구름이
검은 구름을 침범한 걸 본 적 있니?
그는 눈동자에 발목을 잡힌 사람,
그의 눈동자는 지금 여기를 보지 않고
언제나 저 멀리 허공을 보고 있지
오래전 김시습이 그랬고 임제와 김삿갓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세상에 없는 길을 찾고 있지
구름처럼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고 있지
만약 저들 중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당신도 벌써 구름이 선택한 사람,
만약 스튜어디어스나 등반가를 꿈꾼다면
당신은 벌써 구름에 중독된 사람
사람 마음이 열두 번도 더 바뀌는 것도
구름 때문이야
마음을 붙잡고 싶다면
눈동자를 매달아 두는 게 좋을 거야
쉿! 저기 저 구름
조심해!
[심사평]
참신한 상상력과 현대적 언어감각 놀라워
당선작으로 선정한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은 흔한 소재인 `구름'을 참신한 상상력과 현대적인 언어 감각으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이 돋보였다. 시의 생명인 리듬감도 잘 살려낸 것은 물론 개성적 발상이 놀랍고, 아이러니와 위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다만, 시의 마무리가 다소 가벼운 느낌을 준다. /이승훈 한양대명예교수·이영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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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수박 / 진서윤
수박밭에는 여물지 않은 태양들이 숨어있었다.
햇빛 줄기가 연결된 곳엔 푸르스름한 심장이 떠있고 폭염이 몰려들고 있었다.
양말 목 풀린 실밥처럼
몸이 헐 것 같은 날
거꾸로 자라는 덩굴의 비린 향이 꼼지락거렸다.
직선의 나이에 곡선의 통증이 붉다
모래밭 이랑마다 층층이 쌓이는 바람말이를 먹었다
누군가 손등으로 통통 두드려보고 갔다 그때 문득, 통증에 씨앗이 생겼다.
세상의 모든 음(音)은 보이지 않는 발자국처럼 익어가고 서리라는 말을 들으면 붉은 당도(糖度)가 끈적거렸다.
달의 필라멘트가 끊어진 밤
고양이가 지나갈 때마다 감지 등(燈)이 켜지고
닿기만 해도 탁!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만월(滿月)
수박 속에는 검은 별들이 유영하고 있을 것이다.
푸른 굴절무늬로 온몸을 묶어 놓은 여름, 허벅지 아래로 붉은 씨앗 한 점(點) 떨어졌다.
이후 모든 웃음을
손으로 가리는 버릇이 생겼다.
들판 너머 여름이 이불 홑청 끝자락처럼 가벼워졌다
마르지도 젖지도 않은 이파리를 허리에 감고
수박들이 붉은 속셈으로 익어간다.
◇1960년 함안 출생 ◇창신대 문예창작과 졸업 ◇제6회 세관문예전 시 부문 최우수 ◇2007년 경남여성백일장 장원 ◇2010·2011년 공무원문예대전 시 부문 동상
[심사평]
당선작 ‘수박’은 이미지의 참신함이 돋보였다. 수박의 성장을 인간의 삶에 비유해 삶의 여러 단면을 성찰하고, 무엇보다 그 시적 전개마다 놀라운 언어감각이 심사위원들을 감동시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수박밭’과 ‘밤하늘’의 연계성을 지상의 어둠과 우주의 비밀로 해석해 감각적인 언어로 잘 꿰매고 있어 발상의 신선함을 샀는데, 이러한 점은 투고한 다른 작품들에도 고루 나타나고 있어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에 합당한 언어 감각과 형상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심사위원 김경복·유홍준·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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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일보
소금쟁이, 날아오르다 / 최정희
그녀가 오늘 한쪽 유방을 들어냈어 무거워진 한쪽이 사면처럼 기울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어 기울기를 가진다는 건 양팔저울 한쪽에 슬픔을 더하거나 덜어내는 것
가끔 또는 자주 비가 내렸어 그녀의 눈 속에 살고 있는 소금쟁이는 언제나 눈물의 표면을 단단히 움켜쥐었어 그렁그렁한 표면장력, 그 힘으로 소금쟁이는 침몰하지도 날아오르지도 못했어
오늘 그녀는 기울기를 가졌어 x축과 y축 사이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 걸음을 걸을 때마다 가슴에서 눈물이 호수처럼 출렁였어 그녀는 비로소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 남은 한쪽의 젖꼭지가 짓무를 때까지 오늘 울기로 했어
소금쟁이가 떠났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
[심사평]
생애의 비의가 배어있는 사랑스러운 작품
깊은 생각 없이 그냥 유행의 물살을 타고 있거나 또 현란하게 변해가는 시대의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고 고색창연한 시의 습관에 무심코 젖어있지는 않은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당선작으로 뽑힌 〈소금쟁이, 날아오르다〉는 아주 세밀하게 직조된 ‘작품’이다. 도드라지거나 으스대지 않으면서 나직한 어조로 세계와 통화하는 태도가 무엇보다도 인상적이다. 참신한 시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시 속의 ‘그녀’는 지금 이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우리의 영혼 속에는 표면장력을 잡아주는 소금쟁이 한 마리가 늘 있는 법이다. 곰곰 읽어볼수록 우리들 생애의 비의가 함초롬히 배어있는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심사위원 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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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떠도는 지붕 / 장유정
바람으로 벽을 세운다.
해와 달을 훈제하는 뾰족한 꼭대기에는 바람의 뚜껑이 있다.
날씨 사이에 계절이 끼여 있는 벌판에
조립식 숨구멍을 튼다.
이것을 바람의 집이라 부르고 싶었다.
예각이 없는 벽,
구겨진 바람을 펴 문을 만든다.
환기창으로 들어 온 햇살은 시침만 있는 시간이 되고
불의 씨앗을 들여놓으면 집이 된다.
집에서 흔들리는 것은 연기뿐이라는 듯
발굽이 있는 흰 연기들이 꾸물꾸물 날아오른다.
한 그루 귀한 자작나무, 벌판의 한 가운데 서서 시계로 운영되고 있다 푸른 지붕은 바람의 소관이다. 반짝거리는 나무의 초침이 다 날아가도 재깍재깍 부속품들만 돈다. 흐린 날에는 시간도 쉰다.
빈집을 알리는 표시가 열려 있다
정착하는 곳마다 그 곳의 시간은 따로 있다 자작나무에 붙은 시간이 다 떨어지면 지붕을 걷고 게르! 하고 부를 때마다 게으른 잠이 눈에 든다. 바삭거리는 시간들이 날아간다. 집은 버리고 벽만 둘둘 말아 트럭에 싣는다. 떠도는 것은 지붕뿐이다.
[심사평]
"보이지 않는것 읽어내는 힘 돋보여"
장유정의 '떠도는 지붕'은 이런 우려를 어느 정도 덜어준 수작이어서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쉽게 의견이 일치하였다. 유목민의 천막집인 게르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게르의 잠재적인 구성 요소인 바람과 시간과 불의 운동을 역동적으로 묘사한 솜씨도 볼 만하다. 하늘과 바람으로 숨 쉬고 자연의 움직임을 읽으며 떠도는 유목민의 자유와 야생의 정신을 집이라는 시공간의 형식으로 구현한 시적 인식도 탄탄하고 믿음직하다. /최동호·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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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녹번동 / 이해존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심사평]
“시는 자신을 비워줄 때 조금씩 다가오는것”
‘녹번동’ 외 4편을 응모한 이해존의 시는 그간의 적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어 당선작으로 합의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을 구조(構造)하고 있는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해 사유와 감각을 적절하게 가로지르며 생의 경험이 곧 시의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었다. 모름지기 시는 시여야 한다는 기원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조차 모른다면 시는 언제 찾아올 것인가? /문학평론가 황현산·시인 박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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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섬, 이유 / 김유경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 뭉텅뭉텅 사라지는 몸에서
눈동자는 빛을 잃고,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나온다
아이를 품은 움 같이 보드라운 궁륭, 그 곳에선
바다 밑바닥에서만 나는 해초 내음이 나날이 짙어졌다
마침내 바람이 여자를 온전히 데려갈 때
죽은 여자는 아이를 은행나무 잎 속에 묻어두고
떠난다, 홀로 누워 있었던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수북 쌓인다, 가을 한 철 내내
바람의 장례가 제 열매 다 익도록 잎을 물들이지 않는
은행나무의 사랑 같은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먼 바다 부표를 향해 치솟아 올라 길을 잡고
여자의 푸른빛 인광은 그리운 바다를 향해
따뜻하게 흘러간다, 아이는 그 바다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한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섬도 바람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 약력 1985년 경남 창원 출생. 부산대 사범대학 졸업. 경남대 교육대학원 재학. 현재 경남신문 문화부 기자.
[심사평]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삶의 구체성 속에서 길어올리는 김유경의 시는 시상을 끌고 가는 기량에 있어서나 시어를 낯설게 만드는 방식에서 단연 돋보였다. 넘치는 수사의 욕망에 절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서사를 내장한 이미지들의 날렵함이 그 흠을 오히려 더 빛나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의 고른 수준도 신뢰감을 주었고, 무엇보다 시 너머에 대한 지향을 통해 고정된 형식을 뒤흔드는 신인다운 패기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장고 끝에 김유경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이 새로운 시인이 시 장르만의 특장을 고집스럽게 파고들어 가면서도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는 무서운 신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허만하, 최영철, 손택수(이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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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삼거리 점방 / 김승필
감실감실 화랑 성냥 양초 넣고
시오리 길 전봇대 돌아 발쪽발쪽 막걸리 주전자 딱지 쫀득이 파리채 넣고
귀신같이 동네 사람 죽은 걸 척척 알아맞힌 칠복이 아재 담상담상 검정 고무신 허리띠 넣고
머리빡 기계독 오른 동네 아이 밀어 넣고
오다마 삼양라면 박카스 크라운산도 브라보콘 농심새우깡 크라운 조리퐁 뽀빠이 맛동산 회똑회똑 넣고
넙죽넙죽 상둣도가 지나갈 때 눈 한번 꿈적하고
무뚝뚝이 아버지 악다구니 밀어 넣고
알금알금 파리똥 범벅 밀레 만종 액자 춘길 아재 이발소 면도 거품 집어넣고
쑥부쟁이 구절초 애기똥풀 쇠비름 고들빼기 똘똘 말아넣고
후루룩후루룩 뚝딱 마시면 배부르겠다.
▲1968년 신안 출생 ▲전주대 국어국문과 졸업, 목포대 국어국문학 석사 ▲광주 정광고 교사 ▲우리 고전 캐릭터의 모든 것(공저), 국어 선생님의 시배달(공저)
[심사평]
“토속적 사투리 신명 돋운다”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이 응모되었지만, 나는 김승필씨의 ‘삼거리 점방’ 외 세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우선,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능숙하게 이어지는 가락에 의성어와 의태어를 적절하게 배치하며 정겨운 그림을 그려나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토속적 사투리가 구수하게 녹아들어 신명을 돋운다. 그러나 김씨의 작품들은 토속적이기만 하지 않다. 그 안에는 강렬한 메시지가 숨어있다. 사라진 정다운 것들, 변방으로 밀린 타자의 경험. ‘친구’에서 죽은 매미의 말라버린 눈구녁에 대한 두 개의 해석이 충돌한다.
김정란 ▲서울 출생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2000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상지대 교수
[심사평]
“잘 익어 맛있는 동치미 같았다”
늦게 씨를 뿌리기는 했지만 텃밭에서 자란 무가 제법 통통하게 자랐다. 뽑아놓은 무를 쓱쓱 씻어서 한입 베어 무니 입안에서 퍼지는 아삭거리는 소리는 소리대로 귀가 즐겁지만 그 맛도 참 달다. 한나절 소금 간을 해놓고 물을 부었다. 오늘 아침 항아리 뚜껑을 열고 맛을 보았다. 아직 함께 넣은 마늘, 생강이며 대파 등의 양념 맛이나 무엇보다 붉은 갓 빛이 제대로 우러나지 않아서 조금 더 시간을 기다려야겠지만 짜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안심을 했다. 김승필의 ‘삼거리 점방’은 잘 익어 맛있는 동치미와 같았다. 언어를 다루는 그 맛이 아삭아삭 거리며 그 안에 곰삭은 젓갈 맛이 감돌았다.
박남준 ▲영광 출생 ▲1984년 시 ‘할메는 꽃신 신고 사랑노래 부르다가’로 등단 ▲제13회 천상병 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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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문
하현달 소묘 / 조선의
한 끝을 힘껏 당겨 가만히 놓으면
다른 한 끝이 길이 된다
활시위는 지상을 향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과녁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아직 다 그리지 못한 한쪽 눈썹
마당 모서리에 반쯤 보이는 길고양이 꼬리
뒤꼍 항아리 돌아 핀 흰 철쭉꽃이거나
추녀를 넌지시 들어 올린 풍경소리거나,
어둠이 빛을 좇아 하늘로 오르기 시작하면
비어 있는 그늘에 풀씨들이 날아들어
지상의 벼랑 위에 피는 꽃들은
극한의 향기를 오로라의 남극으로 잇는다지
지하도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전리층의 프리즘 속으로 사라지고
한 시절 끝 간 데 없이 오로라와 연결된
달빛의 통로를 빠져나오면
활시위의 과녁 위다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풍경소리가 추녀 끝 아래쯤에서 멈추기를 기다려
당신의 눈썹으로 달을 그리는 일,
그 끝이 다른
한 끝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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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가난한 오늘 /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심사평]
「가난한 오늘」을 두 시간이 훌쩍 넘는 고심 끝에 골랐다. 신체 말단이 잘리고 헐고 바랜 자는 상처 받은 자이고, 그 상처는 가난의 흔적일 것이다. 일체 엄살이 없다. 아픔을 과시하는 헤풂을 절제하고 가난에 형상을 부여하는 힘은 정신의 야무짐에서 나온다. 싯구와 싯구 사이에 여백이 그 시적 물증이다. 수사가 덜 화사하고 주제가 소박했지만 아픔과 미망에 대한 표현의 간결함에서 사물에 감응하는 시인의 정직과 내핍의 염결성을 느꼈고, 그것에 깊이 공감했다. 이 시인의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지금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가난한 오늘」을 당선작으로 뽑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 (장석주.장석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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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일보
고로쇠 옆구리 / 김정애
뚫어야만 다스려지는 상처가 있다
뭉툭한 옆구리에 핏물을 가두고
거친 호흡으로 살아가던 나무가
잎사귀의 언어로 조용히 말을 걸어올 때
꿈의 밑동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세상에 저문 울음들을 끌어안고
복수腹水를 다스리는
노모의 시간
살갗 밑으로 가는 뿌리가 자라나고
산을 들어 올릴 듯 무거워진 몸으로
때론,
내 것의 체취도 조금은 빼내고 살자며 옆구리를 들춘다
콸콸콸 쏟아내는 물속에는
어머니의 깊은 한숨과 불면의 시간들이 우러나 있고
혈관을 따라 울려 퍼지는 피의 음악이 스며 있어
꿀떡 삼킬 순간을 놓치고 숲에 안겨본다
바람을 휘저으며 폭포를 향해 뻗어가던 기상과
쇳물을 다스리는 철의 여인 같던 고집이
명치 한복판을 뚫고 뼈의 무늬로 흐르고 있다
우글거리는 잎사귀를 향하여
응달을 다스리고 있다.
[심사평]
'고로쇠 옆구리'는 고로쇠 나무를 '세상에 저문 울음을 끌어안고' 살아온 어머니의 삶에 비유한 작품으로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부터 우러나온 경험을 형상화하는 시적 능력이 뛰어났다. 평이한 시어로 삶에 대한 깊이을 들어내는 깊은 안목을 가지고 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 긴장이 좀 풀린 감이 있었다. 이 세 작품을 갖고 숙고한 결과 최종적으로 김정애의 '고로쇠 옆구리'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구조의 완결성 면에서 다소 부족한 점은 있지만 함께 응모한 '섬진강을 굽다'와 '꽃잎을 번역하다'에서 보여준 뛰어난 언어감각과 사물과 삶에 대한 이면을 성찰하고 탐색하는 태도가 녹록하지 않음을 높이 평가하기로 했다. / 김경윤 시인·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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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적도 / 조율
옥탑방 평상에 앉아 수박에 칼을 찔러 넣는다
수박의 적도 부근쯤이다 지구본으로 따진다면
한 중앙에 위치한 에콰도르의 어느 도시 정도가 되겠지
이곳은 뜨거운 열대우림, 곰팡이가 타잔처럼 천장을
오르는 옥탑방, 생각한다, 왜 나에게는 선글라스를 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그런 적도가 지나가지 않는가?
눅눅한 근로계약서에 손가락을 빌려줄 때마다
낮은 태양이 양철지붕 위로 더 무겁게 녹아 내려붙는다
가로줄이 많은, 빈칸이 많은, 적도가 많은
주름진 종이 속에는 엷은 비늘이 숨어 있다
적도를 벗어난 열대어의 서글픈 눈망울이 끔뻑인다
온통 경력자들만의 구인광고 박스, 열대성 기후 속에서
적도는 옆구리 뜨거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지구의 허리춤을 적도가 점점 조이고, 조여 오면
이거 벨트에 구멍을 하나 더 뚫어야 하나?
난간에 서서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수박씨를 뱉는다
내가 맞히지 못한 뒤통수들은 달동네에 엉킨 오르막길을
왜 이렇게 가뿐히 풀어내는가? 수박씨 속에도 적도가
있다던데 그곳은 영영 바람 한 점 없단 말인가?
이천 원짜리 금간 수박에서, 무너진 신발장
경첩과 경첩 사이에서, 경력과 초보사이에서 도려낸 적도,
언제나 남은 절반은 절반을 닮아간다
바지랑대를 세워 하늘을 갈라본 적도,
구름을 베어본 적도, 적도 부근에 가본 적도 없지만
바람 잘 날만 있는 이곳은 언제나 바싹 말라가는 무풍지대,
[심사평]
가볍지 않은 삶의 무게 녹아들어
누군가 혼신을 드러낸 작품에 대하여, 타인이 전혀 다른 주관적 잣대로 평가하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작품을 읽기 전에 작품 속의 사람을 읽어야 하며, 그가 겪은 체험의 변용을 진지하게 탐색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는 책임이 따른다. 나는 그 책임을 가능한 한 무겁게 지기 위해, 그리하여 그 결과를 즐겁게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최종심은 '안정적인 작품을 가려낼 것인가, 불안정한 작품을 한 번 믿어볼 것인가'라는 두 가지 화두의 팽팽한 갈등 속에 이뤄졌다. ...............고심 끝에 당선작으로 고른 작품은 조율의 '적도'이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불안정한 작품'의 경우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 중 가장 불안정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산뜻한 교차와 조화, 그 속에 투영된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무게가 시의 불안정함을 상쇄해 주었다. 불필요한 사족, 남발되는 의문사는 물론, 행구분도 그리 전략적이거나 타당성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눅눅한 근로계약서와 달동네를 읽어내는 그의 '옥탑방 평상의 꿈'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의 시는 가볍다. 그러나 단지 가볍지만은 않다. 차별화된 가벼움을 그의 장점으로 승화시켜 나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규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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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탑 / 최길하
탑은 탑보다
탑 그림자가 더 좋다
그림자도 그냥 그림자가 아니라
물고기떼 집이 돼주는 물 속 그림자가 더 좋다
물 속 그림자도
뭉게구름 몇 장 데리고 노는
늙으신 탑이 더 좋다
아침마다 마당을 쓸어놓고
등불같은 까치밥 쳐다보는
우리 종손같은 탑이 더 좋다
[심사평]
“번잡 벗어도 ‘결핍’은 없었다”
‘탑’은 번잡을 다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결핍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호하고 단정하다. 참 경지가 엿보인다. 다만 이것과 다른 작품의 수준에 차이가 나서 이것이 의외적이다. ‘노도서신’은 서포 김만중을 통한 강개가 절절한 궁중언사가 묘미를 더한다. 유장하다. ‘둠벙에게 물어봐’는 고향에서의 유년체험이 성숙한 의식에 대해서 근본에의 환원을 일깨운다. 시다운 시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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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오늘의 의상 / 정지우
성당의 느티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끌리고 있다
팔랑거리는 양떼들을 데리고
계절 속으로 입성하려면 가벼운 체위는 가리고 고딕의 시대를 지나야 한다
폭염은 언덕에 한낮으로 누워 있다
구름의 미사포를 쓰고 그늘을 숙이던 오후는 초록의 전례를 들려주더니
밀빵을 혀에 얹고 한동안 입들이 닫혀 있을 것이다
종탑에는 귀머거리 새가
종소리를 둥지로 삼아 살고 있다
회색을 입고 묵상에 잠긴 성전엔 돌기둥을 돌던 저녁의 의복이 걸쳐져 있다
미사의 요일엔 검은 머리카락을 버리고 히브리어를 닮은 숟가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디저트가 없는
주일 맛 나는 테이블
중세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창문
귀가 잘려진 무늬에선
단풍잎 맛이 나는 오래된 말들이 달그락거린다
촛대처럼 나무가 자꾸 떨어뜨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읊고 가는 가을 울음소리가 스르르 바닥에 끌린다
계단이나 혹은 의자로 배치되어 있는 한 철을
나는 양치기 소년으로 지나고 있다
[심사평]
풍성한 비유로 우리 시대의 삶에 화두 제시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된 ‘오늘의 의상’은 풍성한 비유를 통해 오늘 우리 시대의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특정한 모임에 예의상 입고 가는 의상을 일컬어 ‘드레스 코드’라고 할 때 오늘 우리의 삶에도 특정한 의상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신뢰가 갔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종교적 은유성을 지니고 있으나 결코 종교성에 함락돼 있지 않다는 점이 또한 큰 장점이었다. 함께 투고한 ‘향신료 상인’이나 ‘발소리를 포장하는 법’ 등도 시인으로서의 앞날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앞으로 한국시단의 발전을 위해 자기만의 개성이 두드러진 시를 쓰는 시인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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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쇼펜하우어 필경사 / 김지명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 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볕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저녁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댄다
절벽 한 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 되고
낮이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 약력 ; 1960년 서울 출생 /논리논술 강사
[심사평]
해마다 시 쓰기 열정 많아 향후 발전 가능성에 무게
고심 끝에 ‘당선작 없음’까지 고려되었으나, 해마다 시 쓰기의 열정을 불태운 투고자들의 고뇌와 절망을 감안하여 향후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쇼펜하우어 필경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쇼펜하우어 필경사’ 역시 수사적 완성도의 미흡함을 드러내고 있으나 앞으로 각고의 정진을 통해 문체를 획득하게 된다면, 오히려 이런 약점을 자신만의 시학을 구축하는 장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특유의 힘 있는 시적 언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심사위원 본심: 엄원태`조용미(시인), 예심: 안상학`김이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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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네팔상회 / 정와연
분절된 말들이 이 골목의 모국어다
춥고 높은 발음들이 산을 내려온 듯 어눌하고
까무잡잡하게 탄 말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는 골목을 만들고
늙은 소처럼 어슬렁거리는 휴일이 있다
먼 곳의 일을 동경했을까
가끔은 무명지 잘린 송금이 있었다
창문 없는 공장의 몇 달이 고지대의 공기로 가득 찬다
마음이 어둑해지면 찾는 네팔상회
기웃거리는 한국어는 이국의 말 같다
달밧과 향신료가 듬뿍 배인 커리와 아짜르
손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어 왼손은 얼씬도 못하는 밥상
그러나 흐르는 물속을 따라가 보면
다가가서 슬쩍 씻겨주는 손
그쪽에는 설산을 돌아 나온 강의 기류가 있다
날개를 달고 긴 숫자들이 고산을 넘어간다
몇 개의 봉우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질긴 노동이 차가운 맨손에서 목장갑으로 낡아갔다
세상에는 분명 돌아가는 날짜가 있다는 것에 경배,
히말라야줄기를 잡아끄는 골목의 밤은
왁자지껄 하거나 까무잡잡하다
네팔 말을 몰라 그냥 네팔상회라 부르는 곳
알고 보면 그 집 주인은 네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날짜가 간절한 사람들은 함부로
부유하는 주소에서
주인으로 지내지 않는다
정와연(본명 정길례)/1947년 전남 화순 출생.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세상의 관절염 어루만지는 숙련된 직녀"
당선작으로 합의에 이른 '네팔상회'는 영리한 작품이다. 관계의 관절염을 앓는 시대를 인식하는 깊이와 언어를 직조하는 내공,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시작점을 찍는 노련함은 유려하게 흘러 과장되지 않게 세상의 관절염을 어루만지는 숙련된 직녀로서 심사위원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었다. 그 영리함에는 안전을 보장해 주는 기존의 직조법을 거듭 재탐색할 것이라는 자세도 포함해 주기로 한다. / 심사위원 오탁번·강은교·조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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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이끼의 시간 / 김준현
우물 위로 귀 몇 개가 떠다닌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 느린 허공이 담겨 있다 나는
내 빈 얼굴을 바라본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닫아놓은 창이다
녹슨 현악기의 뼈를 꺾어 왔다 우물이 입을 벌리고
벽에는 수염이 거뭇하다 사춘기라면
젖은 눈으로
기타의 냄새 나는 구멍을 더듬는, 장마철이다
손가락 몇 개로 높아지는 빗소리를 누른다 저 먼 곳에서
핏줄이 서는 그의 목젖, 거친
수염을 민다
드러나는 싹이여, 자라지 마라
벌레들이 털 많은 다리로 밤에서
새벽까지 더듬어 오른다
나는 잠든 그의 뒷주머니에
시린 손을 숨긴다 부드럽고 가장 어두운
비닐봉지 안에 차가운 달걀 몇 개를 담아
바람에 밀려가는 주소를 찾는다
귀들이 다 가라앉은 물에도
소름이 돋는 중이다
[심사평]
‘따로 없는 詩 쓰는 법’ 모험에 박수를
미성년의 실존적 내면을 다룬 ‘이끼의 시간’은 우물, 검은 비밀봉지, 현악기(기타) 등으로 변주를 거듭하는 은유와 신경증적인 감각들로 이미지와 이미지, 의미와 의미 사이의 연결고리가 불안으로 술렁였다. 동봉한 작품들 또한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불안은 그 무엇도 결정되지 않는 혼돈 속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가능성의 감각과 열기로 꽉 차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완숙한 포도주의 맛과 아직 미숙하긴 하되 미래를 잠재한 떫은 포도주의 맛 사이에서 장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따로 없는 법’을 찾아나선 자의 모험에 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심사위원 정끝별, 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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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히말라야시다 / 신은숙
나무는 그늘 속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수백 겹 나이테를 걸친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
육중한 그늘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갉아먹고 있다
흰 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세월 지날수록 짙어가는 초록은 시간을 삼킨 블랙홀의 아가리다
빨아들이는 건 순식간인지도 모르지, 그 속으로
구름다리 건너던 갈래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치마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삭은 거미줄 어스름 골목 지나올 때
아무리 걸어도 생은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때
부싯돌 꺼내듯 히말라야시다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본다
멀어도 가깝고 으스러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바람 막는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해마다 굵어지고 짙어지는 저 아가리들
쿡쿡 찌르고 찌르면 외계서 온 모스부호처럼 떠돌다 가는 것들
멍든 하늘을 떠받들고 선 나무의 들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삼켜지지 않는 그늘 속엔 되새떼 무리들
그림자 하나씩 물고 석양 저편으로 날아오른다
[심사평]
신선한 상상력·미학적 논리 통해 세계 재해석
예심을 거쳐 올라온 스물여섯 분의 작품을 놓고 심사숙의한 끝에 두 심사위원은 이의 없이 신은숙의 ‘히말라야시다’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구조적 완결성과 언어적 진솔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시인이 한 특별한 사물의 인식에서 촉발된 신선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의 미학적 논리를 통해 이 세계를 새롭게 재해석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이 세계란 하나의 큰 학교이며 삶은 그곳에서 이수해야 하는 일종의 학습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학습은 학교 운동장 한 켠에 말 없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히말라야시다’의 존재론적 의미와 같은 것이 되지 않고서는 일상성을 탈피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 생의 진정한 완성이란 히말라야시다의 나뭇가지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되새 떼의 비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세영. 강은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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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말(馬) / 정와연
수선집 사내의 어깨에 말의 문신이 매어져 있다
길길이 날뛰던 방향 쪽으로 고삐를 묶어둔 듯
말 한 마리 매여 있다
팔뚝에 힘을 줄 때마다
아직도 말의 뒷발이 온 몸을 뛰어다닌다
고삐를 풀고 나갈 곳을 찾고 있다는 듯 연신 땀을 흘린다
저 날리는 갈기를, 콧김을, 이빨 드러내는
투레질을 굵은 팔뚝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을
저 사내 알기나 할까
어쩌면 질풍노도의 시절에 스스로 마구간을 짓고
지독한 결심으로 고삐를 매어두었을지도 모른다
말은 복종하는 발굽과 항거하는 발굽이 다르다
앞발을 굽힐 때 뒷발은 더 빡세게 버티는 법이다
어느 뒷골목의 시간들을 붙잡아
사내의 안쪽을 향하게 단단히 묶었으나
꿈틀거리는 역마살이란 언제까지 갇혀 있을 발굽이 아니다
비좁은 마방에서 수년 째 구두를 깁는 일이
자못 수상하기까지 하다
닳고 닳은 뒤축을 깁는 일과
말의 박차를 박는 일에 우연(偶然)이 있다면 그것은 다 길의 파본이다
발굽을 갈아 끼울 때마다 사내는
박차고 나가려는 팔뚝의 불뚝한 말을 오래 쓰다듬듯 주무른다
이제야 말 한 마리를 다룰 줄 안다는 듯
말과 주인이 따로 없다는 듯이
[심사평]
“명쾌한 논리와 탁월한 언어감각 자신만의 ‘감각의 통점’ 짚어내”
정와연씨의 ‘말’은 다소간 독보적이다. 게다가 명쾌한 논리성과 우월한 언어 감각에 기대고 있다. 당선작 ‘말’은 구두수선공의 어깨 문신에 주목한 작품이다. 문신 속의 말(馬)은 수선공의 내면과 수작하면서 수선공이라는 개별적 삶의 문어체를 획득한다. “닳고 닳은 뒤축을 깁는 일”과 “말의 박차를 박는 일에 우연이 있다”는 두 갈래 상상력을 길의 파본이라 파악하는 삶의 성찰성에 우리는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그의 다른 작품 ‘의태 계절’과 ‘샌들의 감정’에서도 독특한 감각이 드러난다. 그 두 작품은 ‘말’보다 더 풍요로운 문학 생태를 드러낸다. 신춘문예 당선이 일희일비가 아니라 행복한 감정이 되려면, 오랜 훗날에도 진정성을 유지하는 시인이어야 할 것이다./이하석, 송재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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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민일보
그 여자, 마네킹 / 강봉덕
때론, 패션도 종교가 된다
묵언수행 하는 그 여자
침묵으로 한 종파를 완성시킨다
그 종파의 교리는 계절을 앞질러 가는 것
한 계절 똑같은 웃음이나 빛깔
표정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계절에 이르기 전
그 여자의 설법은 고요하고 은밀하다
이 거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술에 걸리듯
그 여자의 짝퉁이 되기 시작한다
포교는 항상 중심에서 변방으로 퍼진다
짧은 치마처럼 간단명료한 표정
미끈한 팔다리로 사람들을 전염시키며
파격적인 노출도 교리가 된다
패션이 변할 때 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표정을 만들며 순종적으로 바뀐다
경기불황이 몰려오면
그녀는 더 화려하고 빠르게 변신한다
사라진 추종자를 다시 불러들인다는 것은
침침한 눈으로 바늘귀에 실 꿰듯 힘겨운 일이지만
손바닥 뒤집듯 가벼울 수 있다는 듯
투명한 벽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 여자, 화려한 변신을 시작한다
나를 버린 사람들이 몰려든다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 할 때까지
[심사평]
세상을 대하는 폭이 넓고 진솔하여
마지막까지 손에 들린 작품은 ‘안녕, 살구’와 ‘그 여자, 마네킹’ 이었다. ‘안녕, 살구’외 3편을 낸 한미정의 작품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솜씨가 퍽 발랄하고 거침없었다. 조금만 더 숙련된다면 다음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하여 ‘그 여자, 마네킹’ 외 ‘짧은 휴식을 위한 변명’과 ‘홀쭉한 등’의 3작품을 낸 강봉덕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쾌히 뽑는다. / 송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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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검은 줄 / 김정경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
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 장
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니
방바닥에 검은 줄 하나 그어져 있다
특수고용자로 분류된 나는
노동조합이 철야 농성 중인 회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문 위에
붉은 글씨로 쓴 부적들 나부끼고
제 이름 외치며 뛰쳐나온 노란 팬지꽃
화단 위에 삐뚤빼뚤 구호를 받아 적었다
나무 기둥의 몸을 열고 나온 날개미들,
좁은 방에 검은 줄 늘려가고 있다
문 걸어 잠그고
쓰다 남은 살충제 쏟아 붓는다
혼자서 살겠다고
혼자만 살아보겠다고 고
쳐 쓰고 또 고쳐 쓰던 자기소개서
개미들이 따라가며 밑줄을 긋는다
고쳐 쓰다만 자기소개서 위의 검은 줄이 흩어진다
[심사평]
"파업현장 현실 인식·시적 긴장감 돋보여"
'검은 줄'은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장/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로 시작되는 시의 첫머리처럼 우리 시대의 아픈 '파업 현장'을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기왕의 사실주의 시들의 상투적인 표현을 벗어나 현실을 다루면서도 시적 주체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숙고 끝에 우리는 언어의 날카로움이 살아있는 '닭' 대신 오늘의 사회 현실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검은 줄'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합의했다. / 박성우, 유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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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손톱 깎는 날 / 김재현
우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손톱은 단단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바깥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톱에 관해선
그것을 잘라내는 법만을 배웠다
화초를 몸처럼 기르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지만
나는 손톱에 물을 주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일 따위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문제아거나 모범생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모범이었으며 문제였을 뿐
그러므로 손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또한 그것의 바깥에 불과하다
오늘, 우주의 뒷덜미가 내내 환하다
당신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덮으려 하고 나는 손톱을 깎는다
우리는 예의를 위해 버리고, 욕망을 위해 남기지만
동시에 손가락 위에 두껍게 자라는 것들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다만 휴지 속으로 던져둔 손톱들과, 날씨
그리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버려진 손톱들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고 있다
[심사평]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 돋보여 .
최근 한국시에서 자주 지적되는 산문화, 언어 낭비, 소통의 문제도 비교적 잘 극복해 가고 있었다.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과 밀도를 주목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 또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신뢰를 보탰다. 뱀처럼 섬뜩한 이미지의 ‘아야와스키의 시간’, 태어날 것들을 위해 스스로를 앓아 주렁주렁 매달린 ‘몰식자(沒食子)’에서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보았다. 하지만 미개척지를 향한 탐색과 언어 실험자로서의 패기가 지나쳐서 억지스러운 조어가 이물(異物)처럼 박혀 있는 것이 다소 눈에 거슬렸다. 시란 사물과 사유를 언어로 갈고 닦아 가장 명징하게 본질을 드러내는 생명체이다. 삶의 타성과 시류와 진부에로의 수압을 잘 견뎌내어 부디 좋은 시인으로 훨훨 날아오르기를 바란다. /시: 문정희 조정권(본심)/김수이 문태준 김민정(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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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쏘가리, 호랑이 / 이정훈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ii]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소沼와 여울, 여울과 沼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좌향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i]'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ii]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심사평]
독특한 개성의 탄생…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 보는 듯
'쏘가리, 호랑이'를 비롯해 이정훈의 작품은 요즘 우리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 그 상상력은 강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산맥을 치달리는 호랑이로 치환시키는 마법을 가능케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향토적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시는 마치 이 땅에 산업사회가 도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언어의 구체성과 밀도를 획득하고 있다. / 황현산 평론가, 황지우 시인, 남진우 평론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