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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끝자락인데도 제주에는 가을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현무암 널려있는 들판에는 은빛 억새가 세찬 바람에 하늘거리고,
잠녀가 물질하는 옥빛 바다는 가을볕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게다
가 제주의 가을은 영주십경(瀛洲十景)에서 귤림추색(橘林秋色)
이라 했습니다. 영주란 탐라처럼 제주의 별칭입니다. 그 말이 무색
하지 않을 정도로 길가 과수원에는 황금색 감귤이 가지마다 탐스
럽게 열려있어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렇게 '놀멍 쉬멍' 제주의 풍광을 만끽하고 제주의 먹거리를 탐닉
하다가, 명색이 답사꾼들인데 제주의 답사지를 외면할 수 없어 우
선 찾아 간 곳이 추사의 유배지였습니다.
옛 제주는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으로 나뉘었습니다. 제주목은 지
금의 제주시이고, 정의현은 동북쪽, 대정현은 남서쪽에 있습니다.
추사 적거지(謫居址)는 옛 대정현에 있습니다. 북쪽 성벽만 남아
있는 대정읍성 안쪽에 바짝 기대어 있습니다.
추사가 유배와서 처음 머물던 곳은 대정읍성 안동네 송계순의 집
이었습니다. 형벌은 가시울타리 안에서만 기거하는 위리안치(圍
籬安置)였습니다. 몇 년 후 추사는 강도순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
고, 유배가 끝날 무렵에는 안덕계곡 쪽으로 다시 옮겼다고 합니다.
현재 추사 적거지로 지정된 곳은 강도순의 집입니다.
추사 적거지 초가집은 주인이 살았던 안거리, 사랑채인 밖거리, 별
채인 모거리, 돼지를 기르는 화장실 돗통시, 그리고 외양간 쉐막으
로 이뤄져 있습니다. 추사는 밖거리에서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고, 모거리 작은방에 기거하며 추사체를 완성했습니
다.
<담장 아래 수선화. 추사는 수선화를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추사는 영조의 사위였던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으로, 당시 승승장
구하던 경주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았고, 24세 때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건너가 청나라 석학들과 교유하며 '해동제일통유
(海東第一通儒)'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35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대사성,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헌종 6년(1840) 55세 때 동지부사로 임명돼 고대하던 연경행을
앞두고 추사는 안동 김씨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가까스로 목
숨만 건진 채 제주도로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유배 온 지 5년째 되는, 추사 나이 59세(1844) 때 추사 생애 최고
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를 그렸습
니다.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
을 안다.'는 글귀를 화제로 삼은 '세한도'는 유배생활 하는 동안 변
함없는 애정을 보여 준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보답으로 그려
준 그림입니다. 고독한 유배생활에서 느낀 비애의 감정을 고결한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 그림입니다.
그해 10월 이상적은 '세한도'를 연경으로 가져가 청나라 명사 16
인으로부터 찬(讚)하는 글과 시를 받았습니다.
이상적 사후 '세한도'는 그의 제자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 뒤 민
영휘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이 후지즈카 치카시(藤
塚隣)에게 팔아넘겼습니다.
1944년 태평양전쟁 말기, 후지즈카는 일본으로 귀국합니다. 서예
가인 소전 손재형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후지즈카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노환으로 누워있는 후지즈카를 만
난 소전은 막무가내로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했습니다. 후지즈카
가 거절하자 무려 두 달간 매일 찾아가 졸랐습니다. 후지즈카는 소
전의 열정에 굴복하여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으니 잘만 보존해달
라는 당부와 함께 '세한도'를 건네주었습니다. 소전이 귀국하고 석
달쯤 지나 후지즈카의 서재는 폭격을 당했습니다.
훗날 소전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선거자금이 부족하자 '세한도'
를 저당 잡힙니다. 저당 잡혔던 '세한도'는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 손창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 지금은 국가의 소
유가 되었습니다. 그 깊은 뜻을 기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한겨울 지나 봄 오듯 - 세한(歲寒) 평안(平安)' 이라는 전시명으로
내년 1월까지 '세한도'를 특별 전시하고 있습니다.
추사는 1848년 12월에 9년 동안의 제주 유배생활을 마칩니다. 그
후 추사는 용산 한강변에 살다가 친구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철
종2년(1851)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2년만
에 돌아와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 은거
하며 봉은사를 오가다 1856년 71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봉은사 판전 현판. 전하기로는 이 판전을 쓴 지 3일 뒤 추사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추사 적거지 옆으로 '제주 추사관'이 있습니다. '세한도' 속 집이 그
림 밖으로 무심히 툭 튀어나온 듯 치장없는 건물이 단아합니다. 언
뜻 봐서는 창고 같기도 합니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했습니다.
둥근 창이 있는 건물 안에는 화가 임옥상이 조각한 추사의 흉상 조
각만 덜렁 있을 뿐 텅 비어 있습니다. 전시실은 지하층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지하층 전시를 보고 계단으로 오르려 했더니 관계자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금줄이 쳐져있어 입술 삐죽거리며 발길을 돌렸
습니다.
대정읍성 성벽 한쪽에 돌하르방 4기가 있습니다. 요즘 것이 아닌
옛 것입니다. '돌로 만든 할아버지'라는 뜻의 돌하르방은 근래에 생
긴 말입니다. 이전에는 '우석목', '벅수머리', '무석목' 등 고을마다
이름이 달랐습니다. 1971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아이들 사
이에서 애칭되던 '돌하르방'이 정식 명칭으로 채택되었다고 합니
다.
돌하르방은 육지의 장승과는 생김새 뿐 아니라 기능도 약간 다릅
니다. 육지의 장승이 사찰장승이거나 마을장승인 것과는 달리 돌
하르방은 읍성의 대문 앞에 세워진 읍성 지킴이였습니다.
제주도의 상징 돌하르방은 현재 47기가 남아 있습니다.
돌하르방 옆에는 근래에 조성한 비석이 있습니다. '삼의사비(三義
士碑)'입니다. 1901년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신축교란(辛
丑敎亂) 때 처형된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세 분의 넋을 기리기 위
한 비입니다.
대정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가 부패한 관리와 결탁하여
주민들을 학대하고 수탈하자 참다못한 주민들이 봉기하였습니다.
제주성을 함락하고 관덕정 앞에서 천주교인들을 살해하자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고 관군이 파견되어 난을 진압하였습니다. 그때 민
중을 이끈 세명의 우두머리가 처형되었습니다.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가 신축교란을 다룬 소설입니다.
대정읍 하모리에 있는 송악산의 본래 이름은 절울이 오름입니다.
낮은 오름이지만 정상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산방산과 형제섬이,
서쪽으로는 알뜨르 들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남서쪽으로는 가파
도와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입니다.
동, 서, 남 세 면은 송악산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가파른 절벽입니
다. 절벽 아래쪽으로는 둥글게 파인 동굴 입구 같은 것이 줄지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이라고 불린 2차대전 때 일제가
만든 군사시설입니다. 제주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 만든 인공 동
굴로 해안 절벽에 15개가 있어 '일오동굴'이라고도 합니다. 소형의
잠수정을 숨겨뒀다가 연합군 함정이 접근해오면 어뢰를 싣고 돌진
해 자폭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굴입니다. 다행히도 연합군은 제
주도가 아니라 오끼나와로 상륙했습니다.
송악산과 모슬포 사이 너른 들판 알뜨르는 제주도에서 보기 드물
게 갖가지 밭작물이 쑥쑥 크는 비옥한 땅입니다. 감자와 마늘 등
밭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에는 군데군데 둔덕처럼 생긴 인공 시설
물이 있습니다. 비행기 격납고입니다. 일제는 알뜨르 평야에 비행
장을 건설하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20여개의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었습니다. 견고한 콘크리트 돔으로 축조하고 그 위에 흙과 풀
을 덮어 위장한 격납고들은 일제가 제주도를 본토 사수를 위한 최
후의 방어기지로 이용하고자 했음을 말해줍니다. 알뜨르 비행장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조종사들의 훈련장이기도 했습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 제주. 고려 때는 원의 지배를 받았고, 조
선시대에는 중죄인의 유배지이기도 했던 제주. 조선말엽에는 관의
수탈을 견뎌야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군사기지가 되어 강
제 노역에 시달리고, 해방 후에도 4.3사건을 겪어야 했던 제주. 육
지와는 사뭇 다른 남국의 풍광 속에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
한 제주가, 모진 시련 견디고 국내 으뜸의 관광지가 된 제주가, 길
길이 날뛰는 역병에 무력해진 나를 다독여 줍니다. 아무리 힘든 시
련이 와도 견뎌내라고 토닥토닥 토닥여 줍니다. 휴식하기 딱 좋은
섬 제주는 위안의 섬이기도 합니다.
자료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사진 제공 :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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