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 69
킬리만자로의 사나이
“아버지는 세무공무원을 지내셨는데 젊었을 때부터 등산을 좋아하셔서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에도 오르셨답니다. 어머니와 같이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산도 오르시고 알프스 융프라우도 오르셨습니다. 17년 전 어머니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후 쭉 혼자 집에 계시다가 식사와 규칙적인 생활을 원하셔서 실버타운에 모셨는데 음주가 절제되지 않아 이곳에 오면 음주를 절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요양병원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최근에는 기억력이 많이 떨어지고 음주 후엔 장염에도 잘 걸리고 설사도 자주 하여 입원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딸이 모시고 온 정 할아버지는 81세로 키가 크고 활달해 보이는 분이다. 입원 첫날 나를 왜 이곳에 가두냐며 집에 가겠다고 소동을 피우셨다. 장염이 있어 치료 후에 안정되면 귀가하시라고 하여 겨우 진정시켰다. 회진할 때 이분에게 ‘킬리만자로의 사나이’라고 부른다. 이 말을 들으면 아주 좋아하신다.
“그 높고 험하며 전설적인 킬리만자로산을 오르셨단 말입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 분의 주치의가 될 수 있어 정말 영광입니다. 킬리만자로 등산 이야기를 종종 해주십시오.”
“환갑 기념으로 아내와 킬리만자로에 다녀왔지요. 등산 후 세렝게티 국립공원 사파리까지 하며 거의 3주나 걸렸습니다. 킬리만자로는 해발 2,000m까지 차로 올라가기 때문에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5일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4일차에 4,000m가 넘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지요. 우리 일행 20여 명도 이곳까지 거의 다 낙오하지 않고 왔습니다. 당시엔 산장에 한국 사람이 꽤 많았어요. 정상 정복은 단 3명이 나섰는데 밤 12시에 출발하여 일출을 보며 아침 7시경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산과 구름과 자연의 모습을 보면 힘들었던 트레킹이 환희로 바뀝니다. 집사람은 4,500m에서 고산증세가 있어 중간에 셰르파를 따라 하산해야만 했습니다. 3,000m만 지나도 고산증세를 느끼는 사람이 나옵니다.”
정 할아버지는 평소 알코올성 간질환을 앓아 종합병원 내과에 자주 입원하신다. 수 년 전엔 치매 진단도 받았다. 본인과 자녀들은 연명술이나 심폐소생술을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돌아가시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병원생활 중 이분이 한번은 뛰어내리겠다며 창문을 붙잡고 놓지 않아 직원들이 감당을 못해 급히 주치의사를 찾는 전화가 왔다. 달려가 보니 이분은 아주 흥분이 되어 있었다.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당신들 어떻게 되는지 알지?”
“킬리만자로의 사나이~, 존경합니다. 그 힘든 산을 오르셨다니 정말로 존경합니다.” 하고 외치니 창살을 놓고 병실로 돌아온 적이 있다.
병의 치료보다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직원들에게도 이분에게 ‘킬리만자로의 사나이~’라고 불러라고 부탁한다. 종종 킬리만자로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등산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30대 청년같이 눈빛에 생기가 돈다. 찾아보니 킬리만자로 최고봉을 등정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고 산사나이에겐 최고의 로망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환자를 환자로 보지 말고 한때 최고의 멋진 사나이였던 점을 강조해 주는 것이 정서적인 자부심을 키워주는 효과가 있다.
건강수명이 매년 늘어나 요즘은 80이 넘어도 60대에 못지않게 외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젊게 사는 사람이 많다. ‘인생은 80부터’라는 글을 가족사진 위에 붙여둔 분도 있다.
규칙적인 운동을 해오며 과음이나 과식을 하지 않고 노인 냄새 나지 않게 아침마다 목욕을 다니는 분도 계신다. 문화센터에서 외국어도 배우고 춤도 배우며 친구들과 등산도 즐기는 분도 있고 자기관리를 잘하는 노년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인간의 신체는 선천적인 부분이 많이 차지하고 질병은 유전적인 부분도 많이 관여하지만 의료시설과 생활환경이 옛날보다 훨씬 좋아졌기 때문에 스스로 얼마나 건강관리를 잘 하느냐에 따라 노년의 행복이 결정된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대부분이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은퇴하고도 3~4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시대이다. 노후준비의 1순위는 돈 준비가 아니라 건강 준비이다.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지 40대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나이 들었다고 위축되지 말고 진짜 인생은 80부터라고 외쳐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