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라는 것과는 친하게 지내는 편이 아니니 당연히 드라마도 보지 못하는 편인데,
지난 해 차마고도 여행중에 만난 현지 가이드는 우리 지상파방송의 드라마 줄거리를 훤히 꿰고 있었고
장시간 차로 이동하는 동안에 그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해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직업군인으로 생활했던 이력때문인지 아내는 이것저것을 묻기도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태양 아래'라는 영화를 강당에서 볼 수 있었다.
중학생 시절 보았던 방공영화 '증언'류의 방식과 비슷한 경로였다.
주인공은 금성학원에 다닌다는 리진미란 8살짜리 소녀,
아버지는 피복 공장 노동자, 어머니는 우유가공 공장에서 일한다고 하는데,
주체사상탑이 보이는 넓은 아파트에서 사는, 집안의 가구도 고급스러운 게 권력층의 수준으로 보이는데,
'인간극장'류의 영상물이라고 만들었지만 철저하게 연출된, 이들의 집도 단지 세트장일 뿐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감독은 촬영이 끝난 뒤에 몰래 카메라를 끄지 않고 살짝 자리를 비켜나고,
그러면 이때라 생각한 북한 간부들이 달라붙어 아이에게 웃음은 어떻게 짓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다 가르쳐주는 내용이 고스란히 영상에 저장된다.
안내원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부엌으로 들어가 찬장을 열어보니 식기와 조미료가 하나도 없고
그래도 괜찮아보이는 그 멋있는 집이 실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그야말로 세트장이었다는거다.
영화 촬영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지자, 여덟 살짜리 소녀가 카메라를 향해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아빠가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고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준비된 대사를 마치자마자 소녀 얼굴에서 거짓말처럼 웃음이 사라진다.
곁에서 지켜보던 안내원들은 감독에게 달려와 몇몇 부분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데,
하지만 카메라는 몰래 계속 돌아가 그 장면도 다 담아냈다.
북한 당국은 외국 감독의 손으로 북한 체제에서 학생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선전하고 싶었던,
나름의 포석이었을 것이다.
거짓을 숨기고 가린다는 것이,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였던 몇몇 연예인 부부들이
헤어진다며 진흙탕 바닥을 보이며 싸우듯이,
당국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그 독재체제가 어린 동심을 어떻게 세뇌시켜 독재자의 노예로 키우는지를 고발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러시아 감독이
“진미야, 소년단에 입단했는데 이제 자기 일상에 대해 무엇을 기대해요”하고 물으니
“조직생활을 하면 경애하는 원수님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웁니다.”
어린 소녀도 제풀에 서글픈지 이 말을 하고는 울음을 터뜨린다.
감독이 “좋은 것에 대해 생각해봐” 하니
“좋은 것 잘 모릅니다”고 대답한다.
자막으로 일부 상황을 전달하지만 드라마를 멀리 한 결과처럼 연출부분과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을씨년스러운 화면처럼 혼란스러웠다.
동심을 빼앗고 노예를 만드는 세뇌.
북한은 국제 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호평을 받자 당장 상영을 취소하라고 협박을 하고
그로 인해 궁금증으로 호기심을 갖게도 된다.
영화속에서 태양절 경축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긴 행렬처럼 영화는 그렇게 거북스럽게 흘러간다.
태양의 후예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지만 젊고 멋진 연기자에 빠져 퇴근하고 돌아오는
지아비도 본체만체하던 지난 한심한 봄날의 수요일과 목요일처럼,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보고 싶던 야한 영화대신 반강제적으로 보았던 영화들,
그로부터 40년이 더 지났는데도 그런 류의 영화를
그런 비슷한 경로를 통해 보아야 하는 현실이 한심하고 착잡했고 '좋은 것은 잘 모른다'던
그 주인공소녀의 현실처럼 슬프기도 했다.
(사진의 오른쪽 소녀가 진미양)
북한 대외 선전 매체 '메아리'는 최근 진미양 집에서 그녀 어머니와 인터뷰한 내용을 19일 보도했다.
진미양 어머니는 "우리 진미는 평양시 군중대회에 참석하신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 꽃다발을
드리는 최상 최대의 영광을 지녔다"며 "(러시아 영화감독이) 의도적으로 짜깁기해서 (진미가)
불순한 영화(태양 아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태양 아래'는 러시아의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2014년 방북해 만든 영화다.
그는 진미(당시 8세)가 소년단에 가입해 김정일·김일성 생일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과 평양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담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진미양의 집과 부모 직업을 조작하고, 이들의 대사와 동선까지 연출하자 실망해
계획을 바꿨다. 북한의 각본대로 찍지 않고 '몰래 카메라'를 동원해 '불편한 진실'을 촬영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파악한 북한은 강력히 항의했고, 러시아는 '태양 아래'의 개봉을 허락하지 않았다.(보도내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