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리추원당(仙橋里追遠堂)
상주 > 서부권 > 화동면 선교리
- 화동면은 서남경계에 팔음산(762m)이 솟아 있으며, 대체로 300~500m의 구릉성 산지를 이룬다. 동북부 산지에서 석천이 발원하여 면 중앙부를 지나 남쪽으로 흐른다. 경지는 이들 소하천 연안을 따라 분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감등이며, 반곡리, 판곡리 일대에서는 흑연이 생산된다. 이소(以所), 선교(仙橋), 판곡(板谷), 어산(於山), 신촌(新村), 반곡(盤谷), 보미(甫尾), 양지(陽地), 평산(平山) 등 9개 동리가 있다.
백두대간의 남한구간 중심지로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며 중화지구의 중심지로서 산과 물 자연자원이 풍부하여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추원당이 있는 선교리는 1, 2리로 나누어진다. 선교리 주변의 유적지로는 기념물 제 113호에 지정된 김준신의사 제단비와 낙화담이 근처에 있으며, 신잠이 세운 봉암서당, 세종의 어필 만사를 새긴 목판을 보관하는 어만각, 김우태와 김시태를 봉안하고 있는 도안서원이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
선교 1리 마을로는 갈평. 새터. 서당마이다.
갈평
마을 주변에 농토가 많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농촌생활을 했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사람은 많이 살지 않는다.
새터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어 살면서부터 새터 또는 신기(新基) 마을로 칭한다.
서당마
이 마을에 신잠이 세운 18개 서당 가운데 하나인 봉암서당이 있어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는 뜻으로 불리는 이름이다. 산 아래 위치하는 마을이라 양봉을 많이 한다.
선교 2리의 마을로는 태하. 큰마. 골마 이다.
큰마(臺上마을)
이 마을의 자연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하(台下)
대상마을 밑에 위치했다고 대하마을로 통한다. 이 마을에 선교리 추원당이 위치하며, 재사 앞으로도 삼백의 고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감나무가 있다.
골마(谷村)
큰마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골짜기에 위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 칭 : 선교리추원당(仙橋里追遠堂)
소 재 지 :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 543-3(대하)
(원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 543-3 )
건 축 주 : 조형원
소 유 자 : 풍양조씨
건축 이야기
속리산이 꾸불꾸불하게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고, 금강 넓은 물이 출렁출렁 흘러 서쪽으로 들어오니 산수가 빼어나고 맑은 기운이 쌓여 있으니 진짜로 군자들이 숨어서 살 만한 고장 화령의 봉황산 아래에 위치한 영모재는 낙안(樂安)군수를 역임한 조형원(趙亨遠)과 그 후손들의 재실이다.
이곳은 선교공(仙橋公)이 처음으로 들어와서 터를 잡아 세거한 마을이요, 봉산공(鳳山公)이 당을 짓고 산 좋은 고장이다. 조형원은 검간 선생의 넷째 아들인데 풍성(豊城)에서 태어나서 성대한 문벌로 훌륭한 아버지께 나아가서 가정에서 시례를 익혔다. 병자호란 후에 시국을 비관하여 이곳에 은거하였다.
건축 특징
붉은 벽돌로 쌓은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대문 칸 또한 현대식으로 되어 있다. 문은 스테인레스 봉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안에 동남향으로 자리하며, 담장 안 모서리에 굵은 향나무가 꿈틀거리며 날아오를 듯이 서 있다.
온돌방 측면의 벽 위에 반침이 설치되어 있으며, 지붕의 중도리 간격이 매우 좁다. 근래에 수리한 흔적이 있으나, 창호 및 고식의 문틀이 주목되는 곳이다. 마루 아래에는 손잡이가 없는 옛날 가마가 한 채 있다. 전면에서 후면까지 마루 밑이 트여있다.
건축 구성
담장 안 넓은 터에 막돌과 시멘트로 기단을 쌓고, 울퉁불퉁한 주춧돌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정자를 동남향으로 앉혔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구조이며, 가운데 2 칸은 대청이며, 양쪽에는 온돌방을 시설하였다. 왼쪽 마루위로 올라갈 수 있게 가져다 놓은 큼지막한 디딤돌이 정겹다.
온돌방 전면에는 툇마루를 놓았고, 앞에는 살대로 난간을 세웠다. 양쪽 온돌방을 데우는 아궁이가 있는 기단이 안쪽으로 움푹하게 파여 있어 다닐 때에 조심스럽다.
현판
추원당(追遠堂)
추원당 왼쪽 마루 위 벽에 걸린 현판이다. 하얀색 판에 양각하여 글자에 검은 색을 칠하였다.
관련인물
- 조정(趙靖)
1555(명종 10)∼1636(인조14).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안중(安中)이며, 호는 검간(黔澗)이다. 선영 묘 아래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그 이름이 ‘검(黔)’이라서 이것을 취하여 아호를 삼으니 대개 그 뜻이 잠깐 동안이나마 차마 그 묘역을 잊을 수 없으며, 또 ‘黔 ’과 ‘儉 ’의 소리가 같으므로 검소절약 한다는 뜻도 취한 것이라고 한다. 광헌(光憲)의 아들로,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1599년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검간문집》과 《진사록(辰巳錄)》이 있다.
-조형원(趙亨遠)
1585년(선조18) ~ 1643년(인조21).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자는 경회(景會)이고 검간(黔澗) 정(靖)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4) 무과에 합격하고 선사포(宣沙浦) 첨사(僉使)로 나갔고 이어 낙안군수(樂安郡守)가 되었다. 이때 계급이 승진되어 동경진장(東京鎭將)이 되었으며 청백리로서 안정된 정치를 하여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만년에는 정방산성(定方山城)에서 도적을 토벌한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가선(嘉善)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선교리에 은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