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은 결과에만 관심이 있어 요점 정리하였다.
저서 <순흥안씨 선계변정록>,저자 안종채, 안상천. 발간 2001년
변정(辯正) : 옳고 그름을 따져 바르게 고침. 그냥 오류 수정이라고 쓰지 않고 변정이라고 쓴 이유는 헌납공파의 파조이신 안도가 노비변정도감에 근무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저서의 목적: 순흥안씨 족보의 선계에 문제가 있어 이를 바루고자 한다.
주장: 안종채·안상천님이 소청한 내용 (Misleading claims)
주장1. 안원숭·안원형·안원린은 안목의 세 아들임을 확인한다. 세 아들은 1341년 한날 한시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죽성군 봉군을 받은 원형은 (신)죽산안씨로 탐진군 봉군을 받은 원린은 ㅌ탐진안씨로 분관하였다. 그러므로 원래 뿌리가 순흥이므로 순흥안씨로 복관한다.
주장2. 오성군 안우는 태원안씨 원나라 사람이다. 안우는 순흥안씨도 아니다. 오성군 안우는 탐진군 안원린의 아들도 아니다. 즉, 탐진안씨 중에 오성군 안우를 시조로 모시는 파는 안원린을 시조로 모시는 오성군파는 순흥안씨 탐진군파로 받아 줄 수 없다.
순흥안씨 선계의 족사연구한 결과 위와 같이 변정(바르게 고친다)한다는 주장이다
올바른 이해 (Correct understanding)
주장1의 이해 : 1) 안복초의 묘지명과 삼탄 이승섭 문고에서 원형은 죽성군 봉군을 빋은 것이 아니라 광산군 봉군을 받았다. 2)<김태현의 처 개성왕씨 묘지명>이나 <김광재의 묘지명> 등에 인목의 아들은 원숭 한 명이다. 안목의 손자 세 명이 문과 급제를 하였다. 3) 원숭·원형·원린 삼 형제가 1341년에 동시 급제한 기록은 없다. 반면에 원형의 아들 면이 1341년에 문과 급제하였고 손자 노생이 1376년에 문과 급제하였다. 그리고 면과 노생의 본관 기록은 죽산이고 부 원형도 당연히 죽산 안씨이다.
결론1: 안목에게 세 아들은 없다. 아들은 원숭 1인이고, 원형은 본관이 죽산이다. 원린은 어디에도 없는 인물이다.
주장2의 이해 : 1) 원나라 안우의 시호는 문강공이며 세조(쿠빌라이)를 모시던 문신이고 그 묘는 중국 자주에 있다. 원나라 문강공 안우의 손녀 안조동과 고려인 오성군 안우의 나이가 비슷하다. 원나라 안우와 고려인 안우는 두 세대 차이가 난다. 1343년 어향사 안우가 고려사 열전에 출현할 때는 문강공 나이가 100세 전후이고, 1352년 공민왕 즉위년에는 문강공 나이가 110세 전후이고, 1360년 고려-홍건적 전쟁 때 문강공의 나이는 120세 전후이다.
2) 고려사 발간 시에 기록된 세종실록지리지의 변안열 소개를 보면 변안열은 공민왕을 따라 온 심양인이라고 명시 되어있다. 반면에 안우는 고려사에는 탐진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강진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세종대의 공식 행정명칭인 강진을 사용하였다. 오성군 안우가 원나라 사람이라면 원나라 자주인이라고 명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안우는 탐진인이다. 세종실록지리지 시대에는 강진에 6성이 살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안씨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우택이 강진읍성 남쪽애 았었다고 한다. 안우는 탐진인이다. 안우는 원나라 사람도 아니고 순흥인도 아니다.
3) 안우는 1352년에 전리판서 응양군상호군이다. 나이가 40대 후반이나 50대이다. 조일신의 난 딘압 일등공신을로 특진 정3품이 되었다. 안우는 1305년 전후 출생, 안원린은 1324년생. 안우의 연배가 안원린보다 높다. 결론2: 안우는 고려 탐진 출신이다. 그 당시는 출신 지역이 본관이 되는데 탐진의 오성군(탐진의 별호) 봉군까지 받았다. 안우가 안원린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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