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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대왕의 출생은 왜(일본)과 연관이 있다
지금까지 (1부)에서는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의 의혹에 대해 집중 조명해 보았다. 위대한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무령대왕은 이렇듯 허망하게 부인에 의해 독살당하고 아들인 성왕에게 장중한 장례의식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타국 땅에 쓸쓸히 묻히고 만다.
계묘년(523년)에 붕어해 을사년(525년)에 묻혔으니 3년상을 제대로 치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공주에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3년상 이전에 누군가 시신을 몰래 빼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셔진 무덤의 석실크기(33.5m3)도 부부 합장릉 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일개 귀족인 유주자사 진의 덕흥리 무덤(48.4m3)의 70% 수준이다. 그렇다고 당시 백제가 고구려보다 위상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 진의 무덤투시도. 고구려 귀족의 무덤이 백제대왕의 릉의 1.5배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령왕릉은 부부합장릉임에도 불구하고 단칸이고, 공간도 덕흥리 고분의 70% 수준이다.
(2부)에서는 무령왕의 출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 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자요 안목이 그림과 같고 인자하고 관후하여 민심이 모두 쏠리었다. 동성왕이 재위 23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점령하고 반역하므로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이르러 한솔 해명을 시켜 토벌케 하니 백가가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백가를 베어 백강에 던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좌평 백가는 바로 동성왕을 살해한 장본인이다. 동성왕을 살해할 정도면 군권이 막강한 실권자였을텐데 이상하게 무령왕에게는 맥도 추지 못하고 항복해버린다. 그리고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기록과 대조하면 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삼국사기>에는 21대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 아들인 22대 문주왕이 뒤를 잇고, 그 다음에는 문주왕의 장남인 23대 삼근왕이 뒤를 잇는다고 되어 있다. 삼근왕이 일찍 죽자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24대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즉위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왕위계승도>
21대 개로왕 ----> 22대 문주왕 ---------> 23대 삼근왕
----> 곤지(문주의 아우)-----> 24대 동성왕 ----> 25대 무령왕
동성대왕은 501년 37세의 나이로 붕어했으니 464년생이다. 그리고 무령왕은 523년 62세의 나이로 붕어했다고 무령왕릉 지석에 씌어 있으니 461년생이다. <삼국사기>대로라면 오히려 아들인 무령왕의 나이가 아버지인 동성왕보다 3살이나 많다. 형제간이면 맞을 나이인데 부자간이라니 뭐가 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다. 왜 그럴까?
도저히 <삼국사기>로는 이 의문점을 해결할 방도가 없다. 동성왕과 무령왕의 혈통에 대해 설명해줄 다른 사서의 기록은 없을까? 우리의 현실은 근세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역사 기록이 유실되고 왜곡 조작되어 역사기록이 많지 않아, 그나마 고대사서로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뿐이니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줄 사서도 사실 없다.
<일본서기>는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이기는 하나, 백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많은 편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동성왕과 무령왕의 혈연관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내용을 간략히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삼근왕이 죽자 당시 왜에 있던 곤지의 5왕자 중 둘째 왕자인 말다(末多)가 젊고 총명함으로 백제의 왕(동성왕)이 되어 왜로부터 귀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단순히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 모대가 동성왕이 된다는 기록뿐이다. 여하튼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나 큰 내용은 같다.
▲ 일본의 아스카(飛鳥) 마을에는 개로왕의 동생 곤지를 모시는 신사가 있다. 지금도 아스카네 신사에서는 해마다 곤지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은 곤지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는 장면.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희한한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백제신찬을 인용해 다름 아닌 무령왕의 출생을 기록한 것이다. “25세 무열천황 4년 백제의 말다왕(동성왕)이 무도하여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제거하고 도인(島人 섬사람)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휘는 사마(斯麻)왕이고,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복형이다.
곤지가 왜에 향하였을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도로 보내 도읍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도 각라(各羅)의 바다 속에 주도(主島)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고로 백제인이 주도라 이름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島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동성)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이를 이복형이라 함은 미상이다.“라는 기록이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출생에 대해 <삼국사기>와 전혀 다른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인 <일본서기>의 이 기록이 과연 맞을까? <일본서기>에 기록된 1대 천무왕이 실제로는 15대 응신왕이고, 신공왕후의 기록이 120년이나 올라가 있는 등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사서이다. <일본서기>말고 다른 사서의 기록은 없을까?
참고로 일본에서는 무령왕의 모친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오는 중에 각라도(各羅島)에서 무령왕을 낳았다하여, 지금도 후쿠오카 북쪽의 가당도(加唐島)에 무령왕 유적지를 만들어 놓았으나 사실 무령왕과 일본열도의 가카라시마(加唐島)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각라도나 가당도나 다같이 가카라시마로 발음된다.
일본은 가당도를 각라도라 하며 무령왕의 유적지를 허위로 만든 것이다. 그 이유는 백제를 반도사관으로 묶어 한반도에 있다고 해야 왜의 주무대가 일본열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일본의 치밀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국의 주산군도 앞바다 어딘가에 각라도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 일본 큐슈 북부 가카라시마(加唐島)에 있는 무령왕의 탄생지(?) 역사왜곡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사서에 보면 이상한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남북조시대의 남조였던 송나라의 사서인 송서(宋書)의 기록으로, 478년 왜왕 무(武)가 송 순제에게 바친 상표문의 내용이다. 거기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있었던 엄청난 역사적 사실과 함께 백제와 왜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귀중한 내용이 들어있다. 다음은 원광대 소진철교수의 저서 <금석문으로 본 백제 무령왕의 세계>에서 인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썼다.
“왜왕 무는 이 상표문에서 자신의 왜국을 백제의 봉국(封國 제후)이라는 개념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빛나는 군사적 업적을 거두어 무려 200개가 넘는 주변의 대소국들을 평정해 지금은 그 강역을 크게 넓혀 왕도가 융성하고 크다고 했다. (중략)
그는 망해가는 백제를 위해 고구려의 침략에 결연히 대처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갑자기 닥쳐온 자신의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喪)을 입게 되어 대군의 출동도 중지하고 긴 세월을 상중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제는 때가 와서 다시 병갑(兵甲 전쟁준비)을 가다듬고 망부의 유지에 따라 적의 강토를 무찌르겠으니 폐하의 큰 은덕을 간청하는 바라 했다. (이하 생략)“
여기서의 왜왕 무를 일본학자들은 자신들의 천황인 웅략(雄略)으로 보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왜왕 무는 웅략이 아님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이 왜왕 무는 누구일까? 왜왕 무는 다름아닌 소년 시절의 무령대왕이었던 것이다. 왜왕 무가 상표문을 올렸을 때가 478년이고, 무령왕 지석에 따르면 무령대왕은 461년생이니 왜왕 무가 17살 때이다.
그리고 위 상표문의 내용인 “갑자기 닥쳐온 자신의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喪)을 입게 되어 대군의 출동도 중지하고 긴 세월을 상중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는 내용의 부형(父兄)은 475년 겨울 고구려 장수왕의 대군에게 7일간의 공격 끝에 한성이 함락당하고 붙잡혀 처형당한 백제의 개로왕과 왕자들이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상표문으로 인해 후에 무령왕이 되는 왜왕 무는 개로왕의 친아들임이 밝혀진다. 이 무령왕의 츨자(出自)에 대해서만은 <일본서기>의 기록이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곤지는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을 데리고 왜로 갔을까?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왜왕(倭王)에 부임하기 위해 왜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곤지는 천황이 아니라 백제에서 파견한 제후인 왜왕으로 보아야 한다. 소년 무도 나중에 왜왕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일본 사학계는 명문에도 없는 칠지도 헌상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성립이 불가능한 웅략천황을 왜왕 무에 비정하는 등 천황(天皇)은 바로 왜왕(倭王)과 같은 존재라고 하면서 고대사의 실체를 크게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천황’과 ‘왜왕’은 전혀 그 계보를 달리하는 전혀 다른 실체라는 것을 이 상표문이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다.
왜왕 무는 475년 자신의 부형이 갑자기 죽었다고 했는데,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웅략천황의 기록으로는 이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할 수 없다. 웅략천황의 부왕인 <왜왕 제>라고 하는 인공천황은 이 때 이미 서거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웅략천황과 왜왕 무(武)는 전혀 다른 실체로서 왜왕 무의 부왕은 475년 겨울 아차성에서 비명에 쓰러진 백제 개로왕의 태자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기록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왕 무의 아버지인 백제의 개로왕은 어디서 어떻게 비명에 쓰러졌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 무령왕릉을 처녀분이라 발표했지만 미리 사람이 침입했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신발이 옮겨진 것은 귀신이 움직인걸까? 그래서 미리 누군가가 몰래 지석을 갖다 넣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어디인가?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개로왕 21년(475년) 가을에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궁박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구려가 북성을 공격하여 7일만에 빼앗고 옮기어 남성을 공격하니, 개로왕은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쳐 나갔는데 고구려 장군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하고 조금 있다가 왕의 면상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그 죄를 낱낱이 말한 다음 꽁꽁 묶어 아차성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로왕은 이렇듯 치욕을 당하며 죽어갔다. 이 장면이 왜왕 무(무령왕)가 말한 “갑자기 닥쳐온 자신의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喪)을 입게 되어”란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개로왕은 왜 갑자기 치욕의 죽임을 당하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개로왕은 바둑을 아주 좋아하는 고수였다. 이를 갈파한 고구려는 바둑의 고수인 도림이라는 승려를 간첩으로 파견한다. 개로왕과 바둑을 둠으로서 가까워진 도림은 왕에게 나라를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부추긴다. “왕은 국민을 모두 동원시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곧 그 안에다 궁실.누각.대사를 마련하였다. 굉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또 큰 돌을 욱리하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비의 뼈를 장사하고,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까지 이르렀다. 이로써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궁곤하여 나라의 위태함이 알(卵)을 포개놓은 것보다 더 하였다.”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도림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해 미리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켜 놓은 것이다.
여기서 개로왕이 쌓은 하수의 위치가 아주 중요하다. 일제의 식민사학을 고수하는 강단사학계는 한성(漢城)을 한반도 서울로 보기 때문에, 하수를 한강으로 숭산을 현재 팔당대교 부근의 검단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으로 백제를 한반도 내에 가두려는 매국사학계의 엉터리 역사비정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흙을 구워 성을 쌓았다고 했으니 한성에는 연와의 성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 궁실.누각.대사를 마련하였다 하였으니 그 흔적이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궁실.누각.대사는 없어졌다 해도 연와의 성은 존재해야 백제의 수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서울 근처에는 "연토축성" 즉 "연와의 성"이 없고 아니 한반도에도 없다. 또한 한반도에는 그런 지명조차 없다. 현 한강 지역에는 제방(堤防)의 흔적도 사성(蛇城)이나 숭산(崇山)이란 지명도 없다.
연토축성은 과학적 용어가 아니라 역사의 사실적 표현으로 보아야 하는데, 한반도에는 벽돌로 된 성이 없으나 漢水로 불리었던 황하 유역에는 벽돌의 성이 많이 있다. 연토축성은 돌이 귀한 지역이거나 벽돌의 사용이 일반화된 지역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황하지역은 돌보다는 벽돌의 사용 흔적이 더 많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로 보아서 벽돌의 성이 없는 한반도보다는 지명과 일치하는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반도 서울에서 성을 쌓는데 흙을 구워 즉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주변의 산에 돌이 무수히 널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서울의 성터는 모두 돌로 된 성이다. 따라서 우선 “흙을 구워 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에서 한성은 돌이 귀한 지역이기 때문에 한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을 말하자면, 개로왕이 제방을 쌓은 하수(河水)는 황하(黃河)를 말함이고, 숭산은 무술로 유명한 소림사가 있는 하남성 숭산인 것이다. 개로왕의 제방은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중국군사지도에 그 제방이 표시되어 있다. 역시 그 제방의 서쪽 끝은 정확히 하남성 숭산의 북에서 끝나고 있다.
▲ 백제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하남성 숭산(정주 서쪽) 숭산과 산동성 태산 서쪽이다.
게다가 황하유역에는 연와성이 많이 있다.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에는 산이 거의 없기 때문에 주로 황토를 구워 벽돌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참고로 사성은 정확히 어디인지 비정할 수 없다.
그리고 한강변에는 굳이 제방을 쌓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한강은 가끔 범람할 수는 있어도 물줄기가 바뀔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강은 산과 산 사이의 계곡을 흐르기 때문에 잘 범람하지도 않는다. 개로왕은 십수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한강의 범람 때문에 엄청난 국력을 소모하며 한강에 제방을 쌓았다고 보는지....
개로왕이 온 국력을 기울여 하수변에 제방공사를 한 것은 바로 황하의 물줄기가 수시로 바뀌면서 자주 범람하기 때문이다. 황하는 상류에서 산서성의 계곡을 흘러오다가 낙양과 정주의 평야 지대를 지나면서는 어디로 물줄기가 바뀔지 모른다. 상류인 산악지대에 비가 많이 오면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는 그야말로 물바다로 변한다.
▲ 산악지대에서 내려온 황하는 평야지대에서 수시로 물줄기가 바뀐다. 그래서 개로왕이 온 국력을 기울여 제방을 쌓은 것이다. 당시 황하의 흐름은 현재보다 북쪽으로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황하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개로왕은 국력을 기울여 제방을 쌓은 것이다. 결국 이러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국력의 저하를 가져와 고구려 장수왕이 쳐내려오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 것이다. 서울의 한강변에 제방을 쌓는다고 백제의 국력이 저하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한강과 황화는 근본적으로 그 차원이 다른 강이다.
물론 아직도 1500년 전의 흔적이나 지명이 남아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와 묻힌 곳인 안휘성 몽성 지역에 하수(河水) 또는 한수(漢水)로 불리었던 황하가 있고, 숭산이 있고 제방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로왕때 연토축성의 흔적이 서울 지역에는 없다. 한반도에는 연토축성을 한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결국 개로왕의 제방이 우리에게 준 역사적 사실은 바로 백제가 중국 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의 황하변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 개로왕이 서울의 한강변에 제방을 쌓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마 개로왕은 한반도에 와본 적도 없었을텐데 말이다....
게다가 식민사학계는 반도사관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몽촌 토성내의 피라밋을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발표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석촌 몽촌토성의 고분군의 형태는 백제의 명문 기록이 없고 집안 지역의 고구려 고분과 외형이 같다. 결국 이 지역은 고구려 지역임을 나타내고, 다른 피라밋 역시 고구려 고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
서울 남쪽인 중원 고구려비, 경주황남대총의 영락연호 잔, 창녕 진흥왕비에서 비리성은 서울 지역이 고구려 일부임을 나타내기에 충분한데 백제라는 명문도 없는 것을 백제 고분으로 규정해서야 되겠는가? 매국 식민사학계여! 이제 선량한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그만했으면 좋겠다.
▲ 식민사학계가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발표한 고구려식 무덤양식인 피라밋. 왜 공주의 무령왕릉과 양식이 다른지 먼저 얘기해야 할 것이다. 한 나라에 두가지 고분 양식이 있을 수 있나?
동성대왕 시절의 백제 강역
무령왕은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25대 왕으로 등극한다. 바로 직전왕인 동성대왕에 대해 알아본다는 것은 무령대왕이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를 자연스레 알 수 있는 것이다.
서기 304년부터 439년까지 북중국에서는 16개의 나라들이 흥기했다가 망하고, 서로 물고 물리고 물어뜯는 니전투구(泥田鬪狗)의 대혼란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이 혼란기를 마감하고 북중국을 통일한 강력한 왕조가 세워졌으니, 즉 그것은 선비족의 탁발씨(拓跋氏)부족이 386년에 세운 북위(北魏 386~534)이다.
북위는 439년까지 북쪽에 있던 여러 국가들을 차례차례 평정하여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또 북쪽에 북위가 건립되었을 때 남쪽에는 남제(南齊 479~502년)가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우리는 북위의 왜 백제를 침범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439년 마침내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는 자신의 영토 앞에 있는 백제가 무척 눈에 가시 같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488년 북위가 백제를 공격해 왔다. 백제의 동성대왕은 젊은 군왕답게 이를 과감히 맞아 격퇴하였다. 이 백제군은 백제군과 남제군(南齊軍)의 연합군이었다.
자치통감 권136 영명(永明) 6년(488년)조의 기록을 보면,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여기서 요서, 진평 2군의 백제 땅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북위가 공격해온 곳이 바로 하북성내 백제 강역이었음을 명백히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 10년(488년) 위가 군사를 보내어 우리를 치다가 우리에게 패하였다.” [東城王十年, 魏兵來伐, 爲我所敗]
위서 권7하 고조기(高祖紀)에 “태화 12년(488년) 소색(남제의 세조를 낮추어 부름)의 장군 진현달 등의 외적이 침입해 왔다. 갑인일 예주자사 원근을 시켜 외국인부대를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太和十二年, 簫賾將軍陳顯達等寇過, 甲寅詔豫州刺史元斤, 率衆禦之]라는 기록이 있고, “태화 13년(489년) 정월 소색이 외국인 부대를 보내어 변방을 침략했다. 회양태수 왕승준이 반격해 쫓아냈다.”[太和十三年春正月, 簫賾遣衆寇邊. 淮陽太守王僧儁擊走之]고 기록되어 있다.
동성대왕 10년 (488년)의 백제/남제 연합군과 북위군의 전쟁은 대규모였으며, 이 전쟁이 끝난 후 동성대왕은 다음과 같은 인사 조치를 행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하였다. 이 기록은 백제가 남제에게 보낸 외교문서 속에 포함되어 남제서에 채록되어 오늘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남제서 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백제국조(百濟國條)>
건위장군 광양(廣陽)태수 겸 장사인 고달을 용양(龍驤)장군 “대방(帶方)태수”로,
건위장군 조선(朝鮮)태수 겸 사마인 양무를 건위장군 “광릉(廣陵)태수”로,
선위장군 겸 참군인 회매를 광무(廣武)장군 청하(淸河)태수로 명하다.
대방(帶方)태수가 임명된 대방군은 백제건국의 고토인 대방고지를 말한다.
광릉(廣陵)군은 양자강의 하류입구 북애(北岸) 부근 을 말한다.
광양(廣陽)군은 북경 동북부에 위치한 상곡(上谷)지방이다.
청하(淸河)군은 지금의 산동반도 임뇌, 창읍 지방이다.
즉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장군들의 계급을 승진시키고, 그 논공행상으로 백제영토의 太守로 임명한 것이다.
백제-남제의 연합군에 패전한 북위는, 490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하북성 지구의 백제를 공격해 왔다. 그 당시의 상황을 남제서(南齊書) 권 5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였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이 490년(경오)의 전쟁 상황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495년의 외교문서 속에도 묘사되어 있다. 즉 “지난 경오년 북위가 개전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 신이 사법명등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어 맞받아치고, 밤에 기습으로 번개같이 치니, 흉도가 당황하고 무너져 총퇴각하는지라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 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적의 예기가 꺽이고 그 사나운 흉행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역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去庚午年, 獫狁(북위 지칭)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屍丹野(강시단야). 由是嶊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490년 경오년 전쟁에서 패한 위魏의 문제는 백제의 세력에 눌려 수도를 평성(平城)에서 낙양으로 옮긴다(493년). 전열을 정비한 북위는 다시 494년 12월 대군을 발하여 양양(襄陽), 의양(義陽), 종리(終離), 남정(南鄭)으로 쳐들어가 백제와 남제를 공격하였다.
남제군은 영주(寧州)자사 동만(董巒)을 비롯하여 3천여 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다. 기세가 오른 북위군은 개전 2달 만에 위 효문제(孝文帝)가 직접 전투지인 ‘종리’에 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백제-남제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위군은 문제를 옹위하여 종리에서 쫓겨 달아나고, 북위의 장군 풍탄이 전사하는 등 결국 북위군은 총퇴각을 하게 된다.
그 뒤에도 태화 21년(497년, 동성대왕 19년) 6월 또 다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 4월에도 또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만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동안 무려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룬 북위는 국고가 탕진되어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결국 “태화 22년 7월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근위대의 1/3을 축소했다. [魏書 卷7 高祖紀下 太和22年紀 ‘后之私府 便可損半 六宮嬪御 五服男女 常恤恒供 亦令減半 在戎之親 三分省一’]”
백제의 강역이었던 하북성, 산동성은 해발 1미터 미만 평지 옥토이고, 북위의 주무대인 산서성은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이며, 태행산맥은 성을 쌓을 수도 없는 해발 2500미터 이상 고산지대이다. 이 태행산맥을 중심에 두고 북위가 동쪽의 평야지대를 얻고자 하였으나 백제의 동성대왕에게 한번도 이겨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와의 5차례의 큰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동성대왕의 주무대는 과연 어디였을까? 식민사학계는 동성대왕에 대해서는 이상스럽게 침묵하고 있다. 그 이유는 동성대왕에 대한 기록이 명확히 사서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침묵하면서도 일부에서는 계속 동성대왕 당시에 백제는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건너가 북위와 전쟁을 했다고 말한다.
독자들은 잘 아시겠지만, 북위는 선비족으로 기마병이 주력부대였다. 식민사학계는 이런 기병들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 한반도에 와서 백제와 전쟁을 했다는 거짓말을 국민더러 믿으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북위가 한반도에 올 이유가 없고, 기병이라 수군이 없어 바다건너 올 수도 없다. 그런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치룬 곳은 어디인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인가?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인가?
아이큐가 안 좋은 사람도 위의 글 몇 줄만 읽어봐도 북위와 백제 동성대왕의 전쟁은 어디에서 일어난 전쟁인지 쉽게 알 수 있건만, 유독 식민사학자들만 모르고 있으니 그들의 아이큐가 백치 수준인지 아니면 일부러 모른척하는 건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무령대왕의 주무대는 어디인가?
무령대왕의 부왕인 개로왕이 쌓은 제방이 중국 대륙의 황하변에 있다. 그리고 바로 전왕인 동성대왕의 전쟁터가 중국 대륙에 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무령대왕의 주무대는 당연히 대륙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느닷없이 무령왕릉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되다보니 이상한 일 아닌가? 심지어 민족사학계는 무령왕릉이 가짜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으며, 식민사학계는 무령왕릉을 썩어빠진 반도사관을 굳히는 유물로 철저히 이용한다.
무령왕릉의 지석은 분명 다시 연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령왕 죽음의 비밀을 밝혀준 남당의 유고집인 고구려 사략/사초는 새로운 각도에서 참조되어져야 한다. 현재로서는 무령왕릉의 의문을 풀어줄 유일한 자료는 남당의 고구려 사략/사초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서는 대륙에서 활동하던 대왕의 무덤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왕 중 유일하게 한반도에서 발굴된 왕릉이다.
마침 남당 박창화선생의 유작인 고구려 사초/사략이 단행본으로 출간된다고 하니 참으로 반갑다. 특히 광복 63주기 광복절인 2008년 8월 15일을 기해 세상에 나온다고 했으니, 이참에 역사 광복이 조만간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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