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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 한 사람
2017년 3월 25일 / 렘 5:1 (참고 / 창 18:22-33)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지극한 대접을 받으시고 “`내년 이맘때쯤에 내가 다시 이 집으로 찾아올 것이오 그때쯤 되면 그대의 부인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하신 후,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가시면서 유황불로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급히 요청했습니다.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명만 있어도 멸망시키겠습니까?” 이렇게 시작된 아브라함의 요청은 의인 45명, 40명, 30명, 20명으로 줄어 마지막으로 애원합니다. “여호와여, 제발 화내지 마소서. 이것이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주께 여쭙겠습니다. 만일 저 성안에 올바로 살고자 애쓰는 사람이 단 열 명뿐이라면 어찌하시렵니까?”(창 18:3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올바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단 열 명만 있다 하더라고 나는 저 소돔성을 쓸어버리지 않겠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까닭이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도 사정하면서 호소했던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소돔과 고모라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 이것은 비단 그 때의 소돔과 고모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고민입니다. 천만 명이 모여 살고 있고, 200만 명 이상이 예수를 믿고 있는 한국 최대의 도시 서울에 의인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찾고 계십니다.
의인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의인은 100% 완전한 결격사유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환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시련이 와도 신앙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 말씀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위임을 받으시는 천갑민 목사님은 아브라함과 같은 분이 되셔서 사랑하는 신명중앙교회 교우들과 함께 멸망당할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의인 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성경에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선지자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B. C. 626년 요시야 왕 13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지자가 되었습니다(렘 1:2, 2:3). 그 무렵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범죄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렘 2:8 / ① 너희의 제사장들은 내게 물어 보는 일이 없었고 ② 백성을 가르치는 스승(레위사람)들도 내가 준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③ 백성의 지도자들도 언제나 내게 대항하여 범죄하였고, ④ 선지자들도 바알신의 이름을 내걸고 떠들어 댔다. 어느 누구도 내게 묻거나 내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한결같이 우상을 숭배하고 전혀 도와줄 수 없는 우상에게만 도움을 요청하였다.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바리새인들도 그러했습니다. 뜻있는 분들이 지금도 과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아니 우리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며 율법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모른다고 말씀하셨고, 유다 백성들이 율법은 알고 있지만 율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 예레미야 선지자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2-3장에서 유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4장에 와서는 그 죄악으로 인해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제안을 합니다.
렙 5:1 / 너희는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빨리) 의인을 찾아보아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넓은 거리)을 둘러보면서 진실한 사람을 찾아보아라. 너희가 거기서 법대로 사는 사람이 있어서,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을 단 한사람이라도 찾는다면 내가 그 성읍 전체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의’는 무엇을 말합니까? 남보다 더 의롭고, 남보다 더 정직한 것이 공의일까요? 사람들은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누가 더 옳고 그르냐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의 세운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공의’란 헬라어에 보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를 의미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주전 7세기로 이미 120여 전에 북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만 숭배하다가 결국 하나님께서 ‘앗수르’라는 채찍을 들어 그들을 치심으로 그 결과 그들은 멸망했는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것은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심판 때문에 멸망당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그것을 강조하면서 유다 백성들에게 그 북 이스라엘을 거울삼아 ‘망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외치는데도, 어리석게 남 유다 백성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 전체가 정신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죄악과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바른 신앙과 바른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긴다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망할 지경에 이르자 오히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급하게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한 사람’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안에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한 사람’을 찾으면 예루살렘 성을 멸망하지 않고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눅 18:9-14).
▶ 예루살렘 성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 때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제안대로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찾아보려고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멸망으로 치닫는 나라를 살려 보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생명까지 걸고 회개를 외쳤습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보다 이스라엘(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의인 열 명도 아닌 한 사람도 없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한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 10명보다 쉬운 조건이었는데 … .
의인 ‘한 사람’만 찾으면 지금까지 지은 죄로 인하여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저들을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그 한사람은 누구입니까? 도대체 그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그 사람만 찾으면 유다 백성의 죄를 사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 예레미야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마지막 제안에 대한 예레미야의 외침에 귀를 기우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자기네들 듣기 좋은 말씀만 듣기를 원했지 심판에 관한 예언은 듣기 싫어하였습니다. 오히려 자기네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모함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렘 18:18). 이에 예레미야는 저들의 하는 짓이 너무 기가 막혀서 울면서 하나님께 안타까움을 호소합니다(렘 18:19-20).
그럴지라도 예레미야는 울며 하나님께 긍휼을 호소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울고 또 울었는데, 왜 그렇게 울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다시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성에는 의인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한 사람’이 되어 저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라는 바벨론에 의하여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향하여 울부짖는 예레미야의 기도는 헛수고였습니까?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였으니 예레미야의 수고가 헛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남아있는 하나님의 종들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에브라임이 바벨론에 의하여 무서운 징계를 받은 것을 마음 아파하시며 7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렘 31:16-18). 저들과 새로운 언약을 일방적으로 채택하셨습니다.
렘 31:31-33 / … 33) 그러나 이제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체결하려는 새 계약은 계약 자체가 완전히 옛 것과 다를 것이다. 이 계약은 내가 각 사람과 개인적으로 체결하겠다. 나는 이제 나의 새 계약을 돌판에 써서 그들에게 주지 않고 그들 각자의 마음과 양심에 새겨 놓겠다. 나는 이렇게 내 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새겨 놓고 그들의 부드러운 살과 핏속에 넣어 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도록 하겠다.(참고 - 겔 11:19-20, 히 10:16).
▶ 예수님께서 대속의 은혜를 베푸시려고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가실 때에 군중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지만, 그 행렬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안타까워서 우셨습니다(눅 21:41-44). 그리고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식을 나누시면서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새언약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 26:28).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눅 11:13)고 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사도가 되게 하심으로 새언약인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온 세상에 전하여 죄에서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2. 평범한 ‘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한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곳,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뽑으셔서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야곱과 에서 중 하나님께서 야곱을 세우셨습니다. 또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인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또 양치는 목동이요, 뽕나무를 배양하며 뽕따서 밥 먹고 사는 농부인 아모스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그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선한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잘 압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엘리야를 우리와 전혀 차원이 다른 슈퍼맨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약 5:17-18). 오히려 엘리야는 우리들보다 별 볼일 없는 길르앗에 우거하던 촌뜨기였습니다. 오늘도 슈퍼맨 같은 능력의 사람을 쓰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와 같은 평범한 ‘한 사람’을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3.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죄를 멀리하면) 귀하게 쓰십니다.
딤후 2:20 / 부잣집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어서 값비싼 그릇은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이고 값싼 그릇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데 쓰입니다.
위의 20절은 21절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를 든 것입니다.
딤후 2:21 / 만일 그대가 죄를 멀리한다면 순금으로 만든 그릇, 곧 집안에서 가장 비싼 그릇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대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금, 은, 질, 나무 그릇들은 엄연히 질적(質的)인 차이는 있지만, 이 말씀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네가 금그릇이냐? 은그릇이냐? 질그릇이냐? 나무그릇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네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먼저 불의한 일에서 떠나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누구든지 금 그릇처럼 귀하게 사용될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달리 자기를 깨끗하게 한 사람이 제일 귀한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턱대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했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모릅니다. 그 사람의 능력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적인 기준을 그대로 하나님의 일에도 적용하려는 우(愚)를 범하고 있습니다.
요셉이나 다윗은 무슨 능력이나 자격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 아닙니다. 요셉이나 다윗뿐입니까?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니 가깝게는 우리 자신과 옆에 있는 분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우리가 무슨 능력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시 147:5)께서 우리의 겨자씨만한 능력이 필요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오직 죄에서 깨끗케 된 사람입니다.
▶ 마태복음 6:33에 나오는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현대어 성경)는 말씀처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 모두는 ‘거룩’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거룩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눅 11:13, 요 14:12-17)
▶ 금과 은을 귀히 보고 나무와 흙을 천히 보는 것은 세상적인 기준입니다. 목사나 장로는 귀하게 보고 집사나 일반교인은 낮게 보는 것은 성경과는 거리가 멉니다. 귀한 그릇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직분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쓰임 받느냐?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느냐?”입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하인들처럼 말없이 순종할 때에 귀한 일군(축복의 통로 혹은 기적의 통로)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이 마음껏 쓰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귀한 일군의 태도이며, 최선을 다하여 일하고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 입니다.”(눅 17:10)라는 고백을 할 때에 하나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일군이 될 것입니다.
4. 내 자신이 바로 그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 ‘한 사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는 종교 개혁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당시의 메리 여왕은 열심있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모든 개신교 신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왕이 명령을 내린 날 밤, 존 낙스는 자기 서재에 들어가서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는 죽기 살기로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메리 여왕이 중병으로 죽었습니다. 메리 여왕은 죽기 전에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인 존 낙스의 기도가 백만의 대군보다도 무섭다.” 결국 그때 존 낙스 한 사람의 기도가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의 목숨을 살린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흑기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도자가 없는가? 지도자를 찾지 마라. 너희들 스스로가 지도자가 되어라. 네가 하면 되지 않겠느냐?”
천갑민 목사님과 사랑하는 신명중앙교회 교우들이 존 낙스와 같은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염려와 걱정하는 대신에 밤마다, 새벽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한 사람’이 되십시다.
결론입니다.
바위를 깨뜨려 물을 뿜어내고 바다 한복판에 물 벽을 만들어 아스팔트를 걷듯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눈물겹도록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또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칼을 드시자 모세는 엎드려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안 됩니다. 이 백성의 패역함을 용서하소서. 진노를 거두어가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주소서. 그들과 같이 죽겠습니다!”(출 32:30-32). 이런 모세의 애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오늘 위임을 하시는 천갑민 목사님과 천갑민 목사님을 위임목사로 영접하는 사랑하는 신명중앙교회 교우들이 소돔성의 멸망을 막아보려고 6번이나 허리 굽혀 사정한 아브라함, 멸망하는 유대를 위하여 울며 기도했던 예레미야 선지자, 십자가와 부활을 온 세상에 전파했던 사도들처럼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 그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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