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문. 홍교만. 홍인. 김일호. 한덕운
같은 날 순교한 경기 지역 신자들
권상문 : 1769~1802, 세례명 세바스티아노, 양근에서 참수
홈교만 : 1737~1801, 세례명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서소문 밖에서 참수
홍 인 : 1757~1802, 세례명 레오,포천에서 참수
김일호 : ?~1802, 세례명은 미상, 양근에서 참수
한덕운 : 1748~1802, 세례명 토마스, 남한산성에서 참수
권상문(權相問,세바스티아노)은 1769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한강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은 자신의 형인 철신(哲身, 암브로시오)에
게 아들이 없자 상문을 양자로 들여보냈다. 전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문하로 모여들 만큼 권철신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 권상문은 초기 천주교회 거목인 권철신, 양아버지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았다.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 한강개
권철신과 권일신의 집을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내포 지방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과 전주의 유항검이었다. 권철신과 권일신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이들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 적극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전함으로써, 천주교는 전국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던것이다. 그래서 한강개는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강개는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이다. 권철신이 살았던 곳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권상문이 양근 한강포 출신이다'라는 기록이 있고, 서양 기복에는 권씨들이 ‘한감개(Han-Kam-Kai〉에 살았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권철신과 일신 그리고 상문은 한강개에 살았던 것이 틀림없다.
권상문은 황사영과도 교류를 하였지만 주로 양근에서 활동하였다. 대학자이자 초기 조선 천주교
희의 거목인 철신과 일신을 각각 양아버지와 친아버지로 둔 그는, 이 두 아버지에게서 학문적인 소양은 물론 신앙적인 기틀도 전해 받았을 것이 확실하다.
그리하여 신자가 된 후 권상문은 1785년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가진 신자 모임에도 참석하였고, 이웃에 살았던 김원숭과 조동섬, 윤유일, 유오 형제 그리고 이준신 등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기도하며 선교도 열심히 하였다. 또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윤유일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주 신부를 찾아가 의심 나는것을 묻고 모르는 것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만큼 그는 신앙을 배우는 데 적극적이었다.
권상문은 1800년 6월 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양근 옥에 갇혔으며, 그곳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서울에 있는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그 후 서울과 양근 옥을 왔다 갔다 하다가 마지막으로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일 년 이상 옥고를 치렀으면서도 그는 하느님을 증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다시 양근으로 보내져, 마침내 1801년 12월 27일(양 1802년 1월 30일) 그곳에서 목이 잘리어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아들 권유로 입교한 홍교만
한편 같은 날 순교한 홍인의 아버지 홍교만(洪敎萬,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은 당시의 양반들이 그러했둣이 학문에 힘쓴 선비였다. 점잖고 사려 깊은 성격에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홍교만은 처음에 서울에 살다가 포천으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렇지만 홍교만은 곧바로 천주교 신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가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먼저 입교한 그의 아들 홍인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진심으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다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주 신부가 집전한 미사에도 여러 번 참례하였으며.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신자가 된 홍교만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관심이 없는 친구들과는 자연히 교제가 끊어졌고. 이로 인해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고 신자로서의 삶에 충실하면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많은 포천 사람들이 홍교만의 말을 들으려고 그의 집을 찾아왔으며. 홍교만은 이들에게 때로는 밤을 새워 가며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런 가운데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아들 홍인과 함께 며칠 동안 몸을 숨기게 되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오래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집으로 돌아와 그날로 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는 동안 홍교만은 결코 혼들리지 않았으며,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였다.
결국, 그는 예순넷의 나이로 2월 26일(양 4월 8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정약종, 이승훈, 최창현, 홍낙민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 한편 3월 27일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홍인(洪鏔, 레오)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포천 옥으로 이송되었다. 홍인은 10개월 정도 옥살이를 하는동안 많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사형판결을 받고 18이년 12월 27일(양 1802년 1월 30일) 포천에서 목잘려 순교하니. 그때 그의 나이 마흔넷이었다.
’육회’ 모임을 이끌었던 김일호
같은 날 양근에서는 김일호(金日浩)가 순교하였다.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김일호는 질학(絰學) 즉 상복의 머리띠나 허리띠 등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의술도 익혔기에 서울과 지방을 다니며 환자를 봐 주기도 하였다.
1779년에 서울로 아사한 김일호는 약방을 운영하던 정인혁과 친해지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신자가 된 후에는 최필제의 집에 묵기도 하였고, 교리를 더 배우기 위하여 초대 명도회 회장이었던 정약종과도 친하게 지내며 모르는 것을 묻곤 하였다. 그리고 황사영, 정인혁, 최필제, 정약종과 함께 육회(六會) 모임을 이끌며 선교에도 열중하였다.
1800년 말 박해의 조짐이 보이자, 그는 황해도로 피신하여 감영의 책실(冊室)로 일을 하다가 이듬해 충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김일호라는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수를 결심하고 1801년 12월 8일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심문 과정에서 김일호는 "초심이 어찌 다시 변하겠습니까? 만 번 죽는다 해도 천주교 신자로 기쁘게 죽겠습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양근으로 압송되어 목 잘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한덕운
충청남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連, 토마스)은 1790년 진산의 윤지충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이듬해 윤지충이 순교한 뒤에도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신자임이 드러나게 되자, 한덕운은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1800년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의일리 부근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곳에서 한덕운은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만 열중하였다. 또한, 신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처럼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