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허비란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를 말한다고 한다.
성삼문 선생의 출생지가 이곳 홍북읍 노은리
최영장군사당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에 있으며 최영장군이 1316년에 출생한 곳이다.
사당은 삼봉산 중턱 가파른 언덕에 있는데 사당에는 '기봉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홍성군에서는 1995년 제1회 최영 장군 영신제를 거행한 것을 비롯하여 2007년에도 대제를 올려 장군의 충의와
공덕을 기리고 있다.
성삼문선생유허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삼문유허지는 그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성삼문이 출생한 집터이며
그의 사후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서원이 건립된 곳으로 유허 안에는 사당인 충문사가 있고
왼쪽 언덕에 노은단이 있다.
유허비는 전각 안에 모셔져 있다.
.
최영장군!
고려말 그는 최고의 무신이자 쓰러져가는 고려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국운이 다한 고려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 불사이군의 충신이었다.
최영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성삼문 선생 유허지 (成三問 先生 遺墟址)
성삼문 선생 유허지 (成三問 先生 遺墟址)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에 있는 성삼문 선생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그가 태어난 집터이다.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성삼문 선생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그가 태어난 집터이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최엉 장군
최영은 고려 말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영의 가문은 왕건의 고려 개창을 도운 철원 최씨(동주 최씨라고도 함) 가문으로 그의 5대조 최유청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냄으로써 고려의 유수한 문벌 가문 중 하나로 발돋움하였다. 최영은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다.
그가 무인으로서 첫발을 디딘 것은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수차례 왜구를 토벌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 당시 왕을 압박하고 권세를 누리던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힘을 보태면서 호군(護軍)으로 출세하였다. 조일신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 공민왕의 시종했던 공을 들어,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와 왕이 된 이후 그 방자함이 도를 넘어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 자였다. 안팎으로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는 고려왕실의 해결사로서의 최영의 일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최영은 원나라의 원군 요청에 따라 중국으로 출정하여 당시 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는 원∙명 교체기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고려의 주권을 완전히 되찾아오기 위한 공민왕의 뜻이기도 하였다. 이후 공민왕의 뜻을 받든 최영은 밀직부사 유인우의 휘하에서 원나라에 맞서 싸워 100여 년간 빼앗겼던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의 땅을 되찾는데 일조하였다. 이 쌍성총관부의 땅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최영은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인이었지만 쌍성총관부 지역의 원나라 관리로 있다가 공민왕 시기 고려조정과 그 뜻을 같이하여 쌍성총관부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북으로는 홍건적을, 남으로는 왜구를 막아내며 고려를 외침으로부터 지켜낸 대표적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일본의 이키∙쓰시마∙기타큐슈∙세토나이카이 등을 근거지로 삼았던 왜구는 14세기에 이르러 근 40년 동안 한반도의 해안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최영은 삼남지역 해안에 창궐하는 왜구를 격파하여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라는 별명을 얻으며 왜구들의 공포 대상이 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왜구에 시달렸던 삼남 지역 백성의 신망도 얻었다. 또 북쪽에서 침입한 홍건적을물리치기도 하였다.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홍건적은 중국 본토에서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의 지배를 타도하자고 일어난 농민 반란세력으로 이즈음 원나라 군대에 밀려 고려에까지 침략해 들어왔다. 홍건적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한때는 홍건적이었다. 최영은 홍건적이 국경을 넘어와 서경까지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쳤고, 1361년에는 개경까지 점령한 홍건적을 격파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국외 세력의 외침에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최영은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에도 고려왕실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공민왕을 시역하려 한 김용의 흥왕사 변을 진압하고, 공민왕의 반항에 위기를 느낀 원나라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보낸 군사 1만 명을 의주에서 섬멸하였다. 한때 최영은 신돈의 모략으로 6년간 유배 길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신돈 실각 후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앙 무대로 진출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왜구들을 격파하여 왕실과 백성들로 신망을 얻었다. 이렇듯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환란에 최영은 동분서주하며 고려왕실과 국가의 보호자로서 그 명성이 드높아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영 [崔瑩] - 외적을 물리치고, 고려왕실을 보호한 명장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