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미동 사람들'이라는 용어가 생기게 된 것은 오래 전일이다. 망미동은 내가 결혼하기 전 살았던 곳이다.
어느 날 제부가 내뱉듯이 한 용어가 우리 친정식구들을 묶어서 표현하는 것으로 지칭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친정식구에 대한 느낌인데 약간 모자르고 어리숙하고 착하면서도 이것저것 하고싶어하는 열정은 넘치나 잘하지도 못하지만 밉지도 않는 것같은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상태의 집합체를 표현하는 의미인 것이다. 제부가 한번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로 우리 식구들 사이에 스스로 뿐만 아니라 우리 남편도 이용하기 시작했다. 대를 이어 조카들도 애용하기 시작했다. 이모인 내가 약간 어슬픈 행동을 했을 때도 어김없이 망미동 사람들이라고 한다. 또 동생들도 웃으면서 망미동 사람들의 기질이다라고 하면서 키득키득 웃는다. 하나같이 애살없고 매친 곳 없으면서 푼수기가 있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그냥 우리 집에 장가 온 제부가 우리를 비난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가만히 속내를 뜯어보니 그냥 마누라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표현을 그리 한 것이었다. 그 후 우리들은 즐겨 그 단어를 익숙하게 사용한다.
망미동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전화번호의 끝자리가 9129이다. 왜 뒷번호가 우리 것으로 정착되었는지는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망미동 집 전화번호의 끝자리이었을 것이다. 각자 전화기를 소유하게 되니 그 번호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이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어떤 때는 슬픈 소식을 전하기도 기쁜 소식을 전하기도 하면서 우리 망미동 사람들은 오랫동안 가족으로 묶여 왔다.
망미동으로 이사를 오기 전에
우리들은 수정동 산복도로가 있는 곳에 살았다. 그 지역은 부산 시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산 동네였다. 주로 피난민이나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해온 집단이 터를 잡던 곳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결혼을 하신 후 도회지로 삶의 터를 옮겨 오신 곳이 수정동이었다. 수정동은 평지쪽과 산복도로 주위로 나누어져 있다. 오래전부터 터전을 가지고 살던 토착민들은 평지에 살 았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산 가까이 비탈진 곳 에 살았다.우리들은 평지에 있던 학교에서 학생들이 넘쳐나 분가한 신설 학교에 다녔다. 우리 형제들은 산모퉁이 언덕배기인 여기서 놀고 꿈을 키워나갔다. 사춘기가 될 때 우리 형제들의 꿈은 수정동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통학을 하기 위해 버스를 타기위해서도 부산진역까지 가는데 삼십분은 족히 걸렸다. 등교 하기도 전에 길에서 지쳐버렸다. 여름날이면 땀을 많이 흘려 하얀 교복이 얼룩이 지기 일쑤였다. 적게 걷는 산복도로 버스를 타더라도 자존심은 여전히 구겨졌다. 배차시간이 길어 기다리면서도 아래로 내려갈 걸 하면서 후회하였다. 언제나 늦게 나타난 버스 안은 콩나물 시루속처럼 사람들로 늘 만원이었다. 뒤에 서있는 남자들은 얼마나 딱 달라붙는지 몸을 이리저리 피하는 것도 처절했다. 나중에는 가방을 중간에 두고 피하는 요령을 터득했지만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버스안내양은 사람을 많이 태우기 위해 안으로 안으로 밀어넣었다. 짐짝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기 일수여서 그것 또한 고통이었다. 정작 내릴 때는 치마는 치켜올라가고 가방은 겨우 빼내 올 수 있었다. 운 나쁘면 제 때내리지 못하고 다음 역에서 내리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지지리도 궁상스러운 동네를 빨리 탈출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내가 직장을 가졌을 때 아파트 청약을 할 수 있는 주택부금을 들었다. 일순위가 되었을 때 추첨을 통하여 당첨된 행운의 아파트가 망미동에 건설된 것이었다. 형제들이 거의 성장한 이후였지만 꿈의 주택으로 입주하게 된 것이었다. 세련되고 깨끗하고 넓고 쾌적한 곳이었다. 묵은 짐을 가지고 이사한 첫 날은 흥분되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기 방을 소유한 벅찬 감동은 얼마나 컷던가 초인종의 소리는 또 얼마나 경쾌했던가
에리베이터를 타고 만나는 이웃들도 수정동에 살던 사람들과는 달리 잘도 웃었고 차림도 깔끔하고 점잖았다. 우리들과는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아파트 마당은 화단은 자연석을 두르고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다. 산책길에도 나무들이 조경이 잘되어 있었다. 바로 뒷쪽에 산이 있어 자연 경관도 최고였다. 휴일에 작은 가방을 메고 등 산하는 것도 우리집에 대한 자부심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우리아파트는 얼마나 높았던가 우리들도 경비실에 만나는 경비원에게도 웃음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
또 동생들은 더많은 포부와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망미동은 가능성과 허영이 공존하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직장때문에 집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여동생도 결혼으로 엄마의 품을 떠나 새로운 날개를 달았다.
몇년 후 제부가 처가살이를 하기 시작했다. 맞벌이하면서 조카들을 양육하기 위해서는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해서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처가살이하는 제부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장모, 나이 어린 처남도 그리 편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제부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을 것이다.
조카들이 고등학교 갈 무렵 제부 가족도 독립을 하였다. 동생과 생활하면서도 철이 들지않는 아내를 보며 속앓이를 하며 도를 닦았을 것이다. 이때 무심결에 표현된 용어가 망미동 사람들인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한 가족이 같은 공간에 살아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으로 묶어지는 것이 힘들다는 것도 안다. 망미동 사람들이 지나왔던 그 발자국에 대한 삶 자체가 망미동 사람으로 압축되어 표출된 것이리라. 그래서 우리들은 망미동사람이라는 택호를 가지게 된 것이다.
망미동사람의 기둥인 엄마는 몇년 전에 돌아가셨다. 엄마를 울타리로 기대살던 우리들은 부산, 서울, 경주에 몸은 떨어져 있어도 아직도 망미동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 우리들은 새로운 망미동 사람을 길러 대를 이어갈 것이다.
첫댓글 망미동 사람들이 평안하시기를!!!
고위층(수정동) 출신들이었군요? ㅎㅎㅎ
70년대 생활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자전적 소설이네요.
망미동 사람들은 왠지 소박하고 착한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