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안개 속에 쌓인 듯, 옅은 회색의 커튼을 쳐둔 창밖 풍경처럼 희뿌연하게 남아 평생을 내 몸속에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 장소는 어디인지 시간은 몇시인지 계절은 언제인지 명확하지도 않고, 그래도 그 안개속에서도 딱 한 장면은 평생을 따라 다니며 밥 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일부러 떠올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부지불식간에 기억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 시절 대부분 집들이 그랬듯이 우리 집에도 책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조그만 장삿 집에 태어 났으니 애시당초 책은 고사하고 활자로 된 무엇을 찾기는 글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책을 둘만한 공간도 없었다는게 더 맞는 말이겠다. 여러 식구들이 단칸방에 살아 가야하니 책상이나 책이나 이런 물건은 사치품에 가깝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나는 입안에 이가 많이 들어 있는 아이 였다고 어른들에게 들었다. 아마 그날도 동네 어느 칫과- 지금처럼 무시무시한 의자와 거울 이런 것이 있는게 아니고, 온돌 방에 앉아 어린 애들을 눕혀 이를 뽑아 주는 곳이었다- 에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간 모양이다.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아마 아버지와 여러 곳을 다닌 기억이 많이 난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했던 같기도 하다. 그래서 집 밖에서 나를 데리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기억에 거의 없다. 그날도 이를 뽑히고(?) 일어난 나는 저쪽에 방 구석에 약간 멋져 보이는 책장이 먼저 보였다. 표지나 모양이 아주 돋보이는 요즘 말로는 양장본인 책이 여러권 가량이 꼽혀 있었다. 난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중 걸리버여행기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이를 뽑은 어린애치고는 난 당돌하게도 아버지에게 저 책이 보고싶다고 말했던 것 같았다. 다행이 그 이름모를 의사아저씨는 깨끗하게 보고 갖고 오라는 말을 했던 같고, 난 그날 그 책을 갖고 와 아마 삼매경에 빠진 것 같다. 아시다시피 거인국이나 소인국 이야기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 이후 알았지만 거인국과 소인국외에도 걸리버가 여행한 곳은 더 있었지만, 그 책에는 단 두 곳이 실려 있었다.
어릴 때부터 먼 곳에서 살아 보고 싶었던 나는 여러 사정으로 아직도 내가 태어난 이곳 대구를 떠나지 못하고 60여년을 살아온 내가, 택하고 제대로 푹 빠져 읽은 첫 책이 여행기였다는게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감회가 복잡해진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움직이는 독서라는 말도 있지만, 그 이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 되고 하면서 여행도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나름 책을 가까이 하며 살아 오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생활에서 책을 읽을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녹록치 않다. 특히 요즘은 수많은 볼거리와 들을 거리 등등 책외에도 우리의 마음과 눈을 앗아가는 첨단 매체가 얼마나 많은가? 직장에 얽매여 있을 때는 퇴직후 그 동안 미뤄 둔 책에 푹 빠져 지내자 하였지만, 퇴직한 지금 난 아직도 하루에 몇시간을 독서에 쏟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스스로 우스워진다. 아직도 늦지 않았겠지, 나의 첫 책 걸리버여행기를 접하고 난뒤 그 기쁨에 다시 빠져들어 볼 시간은.
첫댓글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있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움직이는 독서도 좋지요.
재용 선생님 걸리버 여행기는 어린 시절 추억이지요. 더욱 독서에 힘을 기울여 좋은 작품을 쓰시기 바랍니다.
나도 길리버여행기를 읽고 싶습니다
길리버여행기를 나도 읽고 싶읍니다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남다른 추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인국과 소인국에 대한 묘사와 느낌을 글 속에 추가해 본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진을 기원합니다
오랫동안 강하게 남아있던 독서의 추억 재밌네요.
다같이 어려웠던 그 시절, 그때 읽었던 동화책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참으로 아련한 추억을 떠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