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전주 서천교 성지
지번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 1가 351-1
이곳은 성 조윤호 요셉(趙~, 1848-1866년)이 1866년 12월 23일 치명한 곳이다. 1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나 돈독한 신앙 생활을 어려서부터 익혔다. 1864년 부친을 따라 전주 근처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이 루치아와 결혼한 그는 1866년 12월 5일 부친 조화서 베드로(趙~, 1815-1866년), 정원지 베드로(鄭~, 1846-1866년), 이명서 베드로(李~, 1821-1866년) 등과 함께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인 조화서는 일찍이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전교 활동을 도왔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로 부친 조 안드레아(성 조윤호의 조부)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주해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고 이 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최 신부의 전교와 성무 활동을 보필했고 그 후 전주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주했다.
마침내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체포된 이들 부자는 혹독한 고문과 배교의 강요 속에서도 서로 격려하며 오직 진리만을 말하기로 다짐했다. 옥에서 아버지는 아들 윤호에게 "네 마음이 변할까 염려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 하고 격려했고, 이에 아들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라며 죽음의 두려움보다는 배교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서로 독려했던 것이다.
특히 아버지 조화서는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체하며 자신을 회유하려는 관장의 유혹에 여러 번 넘어갈 뻔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마침내 조화서는 모든 유혹과 형벌을 이겨내고 12월 13일, 전주 전동 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리고 아들 조윤호 역시 부자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던 당시의 관례에 의해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이 지난 12월 23일 인근의 서천교 밑에서 순교했다.
조윤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해 2006년 서천교 인근 전주천변에 세운 모자이크 벽화.조선 시대에는 처형에 있어서도 몇 가지의 원칙이 있었다. 참수를 하는 죄인에게는 하루 전에 쌀밥과 고기반찬을 주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하고 참수 후 사흘 간은 누구도 그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법도 있었다. 또 다른 당시의 관례는 같은 날 부자를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정해져 있어 아무리 대역죄인도 부자의 관계에 있다면 몇 일간에 여유를 두고 처형을 하였다. 성 조윤호 요셉도 그런 경우이다.
조윤호 성인이 받아야 할 처형방법은 참으로 참혹한 것이었다. 다름아닌 서천교 밑에서 빌어먹던 거지들에게 조윤호 요셉의 목을 감은 끈을 서로 조르게 한 것이다. 결국 거지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는 후에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시복 시성되는 영광을 얻었다. 당시 거지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 짓을 하곤 했는데 이들의 시체가 하도 참혹해서 거지가 끌고 가면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굳건한 믿음으로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 부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전주교구는 2006년 5월 서천교 인근 순교터에 조윤호 성인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0월 31일)]
성 조윤호(趙~) 요셉(1848-1866년)
성 조윤호 요셉(Josephus)은 조화서 베드로(Petrus)의 아들로 충청도 신창에서 태어났고, 부친을 따라 1864년경부터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였으며,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부인과 함께 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깊은 신심과 세심하리만큼 성실한 수계생활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또 젊은 조 요셉은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과격하고 용감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1866년 12월 4일 포졸들이 아버지 조 베드로를 체포하여 집에서 심문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부친 베드로는 아들에게 멀리 피하라고 당부하자 요셉은 “아버지, 저더러 이제 어디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저도 같이 묶여 가기가 소원입니다. 이제껏 믿어온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게 저도 잡혀가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되는 날을 그 얼마나 기다렸는지요.” 하며 아버지와 함께 잡혀 압송되었다.
전라 감사 앞에 불려나간 요셉은 먼저 문초를 받은 아버지가 배교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배교하라는 감사의 말에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실 줄 압니다.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배교할 생각이 없으니 통촉하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감사가 성교회의 도리를 가르쳐 준 사람과 서양 책을 어디에다 숨겼느냐고 묻자 그는 “성교 도리를 가르쳐 준 분은 1839년에 치명하신 할아버지이며, 책은 가진 것이 한 권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감사는 다시 한 번 이 젊은이를 배교시켜 보려고 시도했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포졸들은 사형장으로 향하는 긴 여행 중에서까지 배교하면 잃어버린 재산을 모두 다시 찾아주겠다고 하면서 그를 꾀어보았다. 그러나 “나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말은 그만 두십시오” 하고 거절했다. 1866년 12월 23일 포졸들은 그에게 큰 칼을 씌워 먼 길을 뛰어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그는 기진맥진하였다. 형장에 도착하자 관리가 사형 선고장을 그 앞에 가져다 놓자 그는 태연하게 서명한 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이에 기가 질려버린 감사가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묻자, 요셉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음식이라 무척 맛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감사는 바지를 벗기고 엎드리게 하였다. 손을 머리 위로 묶고 양쪽에 서서 곤장을 교대로 치기 시작하였다. 곤장은 수없이 부러져 나갔고 얼마를 쳤는지 친 사람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렇게도 빳빳하던 고개가 드디어 푹 숙여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요셉이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요셉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뒤늦게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 포졸은 장터로 모여든 거지 떼를 시켜 밧줄로 목을 매고 양쪽에서 당기니 숨을 거두었다. 조 요셉의 장한 순교로 그의 집은 연 3대의 순교자 가문이 되었다. 때는 1866년 12월 23일이요,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