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차(菊花茶) 외4편/정은기
사과나무 그림자에 사과 냄새가 날 것 같은 봄
노랗게 우려낸 한 모금 국화향이 입안 가득 행복으로 모여 산 빛 물든 창가에 수채화를 그려낸다
어느 길섶에 달빛 먹고 자랐을 마른 국화 서너 송이 찻잔에 동동 떠다니다 진한 속내 풀어 가슴을 헹궈 주는데
그까짓 매화꽃 지면 어떠랴 지리산 산수유 봄날을 다 보낸대도 난 지금 서정면 갤러리 국화차 한 모금에 마취중인 걸
호암산(虎岩山)
호암산 잣나무 숲에 망초꽃이 하얗게 피었다 지는 걸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 산 기슭 이슬받이 풀 섶에 별같이 슬픈 개동참외꽃 한 송이
저 끝에 눈물만한 설움 남아 세월을 베어 먹어도 사람들은 잘 모르지요
호암산 잣나무 숲에 바람꽃 일고 해비 내리던 날
솔 끝에 부서지는 젖은 목울대마저도 모른 답니다
아무도 모른 답니다
* 호암산 :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소재 관악산 줄기의 산 이름
산소 이장하던 날
밤벌레 울다 지친 마른 칡넝쿨 사이로 나무 숲 바람은 그림자를 일구고 지축을 가르던 통곡 소리 하얀 찔레꽃으로 눕는다
볼 수 없어 견딜 수 없는 나의 어머니 눈물샘을 다 퍼내면 거기서 날 반기실까?
세월 너머 긴 이별 손 없는 윤달이라 뵈 오려 했는데
이미 조각난 유골(遺骨) 마디마다 인연(因緣)의 흔적 놔두시고 한 줌 흙으로 가셨는지
나 오늘 그 흙에 뿌리내린 풀꽃으로 피고 싶네
겨울 연가
풍낙목(風落木)에 기대 누운 들국빛은 어머니 품처럼 곱기도 하다
반쪽은 달빛처럼 얼어붙어 길 위에 누워 있는 노란 은행잎 풍상에 날개 짓 하고
유폐(幽閉)당한 시간의 빈터엔 소포처럼 날아드는 눈송이들
추억은 포도주 향기에 젖는다
나비 눈물
나비 눈물 녹으면 봄으로 변합니다 얼음 속의 박제된.
꽃씨하나 이미 붉어진 볼로 엄동(嚴冬)의 못 지킨 약속들 단단한 껍질 밑에 숨겨두고...
향기 없는 눈밭에 나비 눈물 뿌려지면 이름 불러주길 기다리는 봄이 오면 마른나무 가지도 함부로 꺽지 마세요 그 끝에 산제비 날아와 눈물로 목이 메이는 사람들
박씨를 나누어 줄지 모르잖아요
정은기
1954년 경기 용인 양지 출생 금천 주부 백일장 입상(2000년) 금천 시 낭송회 상임이사 금천 시인회 회원(현) 누리 문학회 운영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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