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20) - 전통과 품위를 찾아서
장마와 폭우로 실종되었던 여름이 처서를 지나서야 제 모습을 찾아 며칠 째 계속되는 폭염이 반갑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본연의 모습을 보여야 제 격이 아닐까?
8월의 마지막을 대구, 경북지방에서 .전통과 품위를 새기며 뜻 깊게 보냈다. 대구에 머무는 동안 읽은 잠언에는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교훈이 들어 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 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 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장 7-9절)
8월 29일은 교직의 정년을 이틀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난 장인의 20주기, 처가인 대구를 수십 차례 방문하였지만 이번처럼 여유를 지니고 이곳저곳을 돌아보기는 처음이다. 평생을 성실과 근면으로 올곧게 살다 가신 장인의 몫까지 알차게 누리는 정년 후의 삶이 뿌듯하면서 송구하다.
1. 대구의 옛 모습을 살피다
첫날, 처제의 안내로 대구의 옛 모습을 간직한 계산성당 부근을 돌아보았다. 평양과 서울에 이어 1903년에 세워진 계산성당은 최근에 주교좌 설치 100주년을 맞이하기도. 성당주변은 장인이 재직하였던 효성여고, 아내가 다녔던 효성초등학교의 옛 터가 있는 곳이기도 한데 그 옆에 저항시인 이상화와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의 고택들이 들어 서 있다.
8월 29일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이다. 그 전야에 이상화 고택주변의 담벼락에 새겨진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마주치는 감회가 별다르다. 그곳에서 다니던 초등하교 시절, 학생들을 대표하여 낭랑한 음성으로 글을 읽던 추억을 떠올리는 아내에게 담벼락의 시를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40여 년 전에 아내와 처음 만난 날, 이 시의 무대가 되었던 대구 수성 못을 거닐었다. 아내에게 결혼하기전 쓴 편지글에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를 썼던 일이 떠올라 다음날 수성 못을 찾아보니 넓은 들판이던 옛 땅에 초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계산성당 맞은편의 청라언덕은 박태준의 노래 ‘동무생각’의 무대이기도 한데 그곳에 동무생각(思友)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옛 중앙초등학교 자리에 조성된 2.28기념중앙공원에는 동심을 자극하는 설치미술들이 전시되고 약령시로 유명한 약전골목은 먹거리집들로 붐빈다.
2. 영남의 젖줄 낙동강을 찾아서
둘째날, 새벽에 장인이 생전에 다니신 송현성당의 미사에 참여한 후 상주에 있는 묘소를 찾았다. 장인의 고향은 낙동강 상류에 있는 상주시 사벌면 퇴강(물미)마을, 선영에 자리한 묘소는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이다. 한미한 시골에서 태어나 일찍 고향을 떠나 가톨릭신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에 진학하여 영어교사가 된 장인은 기울어진 가세를 돌보는 처가의 큰 기둥이었다. 한 시간여 묘소에 질긴 뿌리를 내린 잡초들을 뽑아내며 치열했던 삶 속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것을 감사하는 자녀들의 마음을 성경말씀에서 살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찐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44편)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목에 ‘낙동강 700리의 출발점’이라는 글이 강 언덕의 큰 돌에 새겨져 있다. 큰물이 굽이치는 강가에 터 잡은 작은 마을에는 1899년에 세웠다는 퇴강성당이 고풍스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처가는 오랜 전통의 가톨릭 집안, 처조부가 이곳에 가톨릭의 뿌리를 내린 선각자다. 1999년에 이곳 성당에서 처조부의 선교 100년을 기리는 큰 행사를 가졌다. 처가의 숨결이 깃든 성당을 돌아본 후 교회 터에 세운 팔각의 큰 모정에 잠시 몸을 눕히기도.
상주는 자전거와 곳감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곳곳에 곳감 판매장이 자리 잡고 자전거박물관도 눈에 띈다, 볼거리로는 ‘경천대’라는 경승지가 눈길을 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안내표지를 보고도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한결 여유로운 마음이어서 경천대 안으로 들어섰다. 낙동강 기슭의 절벽에 자리한 경천대는 조선 인조 때의 충신 채득기(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7년간 보살핌)가 말년을 보낸 명승지로 꽤 넓은 경내에는 그를 기리는 유적들이 남아 있다. 낙동강의 물줄기가 휘돌아 흐르는 강가의 풍경이 아름다운 절벽에는 젊은 연인 한 쌍이 다정한 포즈로 사랑을 가꾼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정자에 누워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잠시 눈을 감으니 신선이 따로 없구나.
경천대에서 나와 대구방향으로 접어드니 낙동이라는 고을이 나타난다. 낙동강의 이름이 이에서 따온 것일까, 4대강 사업의 여러 공구들에서는 정비사업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대구에 돌아오니 오후 다섯 시가 가깝다. 옛날을 회상하며 수성 못을 찾아 호수를 바라보며 땀을 식혔다. 예전보다 확장하였을까, 넓은 호수에 오리 모습의 배들이 한가롭게 떠 있고 건너편 광장에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맞춰 열리는 공연준비에 바쁜 모습이다.
3, 전통과 품위를 갖춘 자천교회와 양동마을
셋째날, 아침에 일어나 처가에서 가까운 앞산을 산책하였다. 지금은 어느 곳이나 공원과 휴식처가 잘 가꾸어져서 산책과 운동하기에 편리하다. 대구에 여러 차례 머물러도 앞산을 돌아보기는 이번이 처음, 산책길도 좋으려니와 산 아래로 뚫린 도로도 운치가 있다.
오전에 영천시 화북면에 있는 자천교회를 찾았다. 1903년,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Erdman)이 신자들과 합심하여 지은 한옥교회는 지금도 남녀 7세부동석의 예배공간이 유지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 교회의 설립자 권현중 장로, 교회 옆의 집과 대지를 기증한 김경환 선생의 기념비가 세워진 이 교회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유서가 깃들인 곳이기도 하다.
설립자 권현중 장로는 대구로 이사 가는 길목에서 이곳으로 부임하는 선교사를 만나 신자가 되었다. 그 길로 되돌아와 교회를 세우는데 반대하는 지역민을 달래느라 면사무소와 지서를 먼저 지어주는 등 교회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고 한다. 6,25 전쟁 때는 이 마을이 폭격의 대상이었으나 미군이 교회 지붕위에 횟가루로 CHURCH라는 큰 글자를 써 놓아 화를 면하였는데 그 덕에 교회 옆의 집을 건진 김경환 씨가 자기 집과 땅을 교회에 기증하여 주민들과 청소년들의 교육장소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누구나 방문할 수 있게 문을 열어 놓은 교회에는 커피와 녹차 등을 마실 수 있게 준비해 둔 인심이 너그럽고 ‘함께한 100년, 함께할 1000년’이라는 표어가 자랑스런 역사를 품고 밝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어서 마음에 든다.
자천교회를 나와 경주의 양동마을로 향하였다. 35번 국도를 따라 가다 28번 국도로 접어들어 한참을 달리니 옥산서원이 나타난다. 처제가 이곳의 독락당에 들른 적이 있다며 가보기를 권한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자리 잡은 옥산사원은 조선중기의 성리학자 이언적을 배향한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내려준 서원)인데 퇴계에 영향을 끼친 학자의 향기가 훈훈하다. 서원의 현판은 추사가 썼고 당호는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서원의 북쪽에 있는 독락당은 이언적 자손의 종택인데 후손들에게 주는 화의문에는 ‘후손들 중 궁벽하여 토지를 두고 다투는 일이 있으면 불효로 논단할 것’이라고 훈계한다.
서원 앞으로 흐르는 계곡이 아름답고 자옥산으로 둘러싼 지세가 운치 있다. 마을 앞 다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청산곡
자옥산 깊은 곳에 초려 한 간 지어두고
반 간은 청풍 주고 반 간은 명월 주니
청산은 드릴 데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마을회관 앞에 있는 ‘옛고을’ 식당에서 정갈한 한정식으로 점심을 들고 10여km 거리에 있는 양동마을로 향하였다.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양동마을은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전통마을이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활짝 핀 연꽃이 우리를 반긴다.
첫 번째 들른 곳은 향단, 경상관찰사를 지낸 이언적의 모친을 모시도록 임금의 배려로 지었다는 고택은 이언적의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그 손자의 호를 따서 향단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 여주 이씨의 종가다.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을 거쳐 그가 살았던 흔적을 양동마을에서 다시 접하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얼마 전에 본 사극 ‘여인천하’에서 꼿꼿한 선비였던 이언적을 본 기억이 남아 있어서 더 친숙한 느낌이다.
동네 안쪽에 있는 서백당은 이 마을에서 가장 먼저 지은 집으로 월성 손씨의 종가라고 한다. 집을 지을 때 뜰에 심은 향나무는 600년의 수령을 간직하였고. 이언적은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에게서 훈도를 받았는데 그 외가가 월성 손씨라고 한다. 서백당이라는 당호는 참을 인(忍)자를 백 번 써 가며 참을성을 기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라는데 내가 봉직한 대학의 교훈이 곧 백인(百忍)이어서 더 뜻 깊다. 뙤약볕을 마다 않고 찾아 온 이들 중에는 유모차에 어린 아이를 실은 젊은 부부, 일본인들로 단체를 이룬 일행, 목포에서 온 고등학생들도 섞여 있다.
양동마을의 문화해설사는 음식 맛이 좋은 호남지방에 비하여 이 지역은 먹을 것이 뒤진다고 겸손해 하는데 이제는 어디에 가도 음식솜씨가 많이 평준화되어서 이번 에 먹을거리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것도 좋았다.
대구로 돌아와 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는 경기장 쪽으로 가려 하니 입장권이 없는 승용차는 통행 제한이다. 화면으로 익숙한 경기장 모습을 살펴보고 시내로 들어오니 도로변에 태극기와 대회기가 나부끼고 곳곳에서 육상대회에 곁들여 벌어지는 축제가 한창이다. 선수들이 숨 쉬고 달리는 도시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도 묘미가 있다. 기대를 모았던 육상 100m경기에서 부정출발로 실격이 나오고 110m허들에서는 금메달을 딴 선수가 규칙을 어겨 메달을 박탈당하는 불상사가 생기고 날씨가 더워서인지 기록이 저조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그 속에서도 감동의 물결이 일어난다. 인구 10만의 카리브해 소국인 그레나다 19세 청년 키라니 제임스는 남자 400m 달리기에서 극적인 역전우승으로 자신과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는가 하면 장애를 딛고 내노라하는 일반선수들과 당당히 겨룬 남아공의 의족선수 피스토리우스와 아일랜드의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제이슨 스미스의 투혼이 아름답다.
힘이 넘치고 씩씩한 선수들이여, 공명정대함으로 영광을 얻으라.
성실하고 근면한 이웃들이여, 전통과 품위를 살려 아름다운 삶을 성취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