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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탐방기
*탐방일자:2012. 2. 22일(수)
*탐방지 :경북 영주시순흥면내죽리소재 소수서원/소수박물관
*동행 :나홀로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들른 것은 부석면의 부석사(浮石寺)를 둘러보고 나서입니다. 신라의 의상대사가 화엄종을 열어 불교사를 새로 쓰게 한 고찰이 부석사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시대를 열어 사찰시대의 종언을 고하게 한 서원은 여기 소수서원입니다.
조선조 지리학자인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 소수서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소수서원은 명종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기까지는 백운동서원으로 불렸습니다. “영천 순흥부에 죽계가 있는데, 소백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들이 넓고 산은 낮으며 물과 돌이 맑고 밝다. 상류에 있는 백운동 서원은 문성공 안유를 제사 지내는 곳이다. 명종 때 부제학을 지낸 주세붕이 풍기 원으로 있으면서 창설한 것이고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이다.” 1418년에 즉위한 우리의 성군 세종대왕께서 즉위 첫 해에 중국의 백록동 서원을 염두에 두고 서원을 설립하는 사람을 포상하겠다고 공표하셨지만, 정작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이곳 순흥에 세워진 것은 중종38년인 1543년의 일이니 공표에서 건립까지 장장 125년이 걸린 셈입니다.
중종36년인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고려의 유학자 안향이 살던 집터가 퇴락한 것을 보고 그 곳에 안향의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으며 그 2년 후 우리나라 최초의 백운동서원을 세워 강학장소로 삼았습니다. 그 후 후임군수 퇴계 이황이 명종임금께 요청해 임금께서 손수 쓰신 ‘紹修書院’의 현판과 토지를 내려주셨습니다. 이로써 백운동서원은 명종5년인 1550년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의 공인을 받은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태동된 것입니다.
부석사입구 상가의 버스종점에서 풍기 가는 버스에 올라 서원 앞에서 하차했습니다. 소백산에서 발원해 죽구계곡을 거쳐 여기 청다리까지 흘러온 죽계천은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남북으로 가르며 서천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청다리에서 죽계천을 따라 백 미터 넘게 옮겨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은 후 오른 쪽 죽계교를 건너 숲속을 지났습니다. ‘ㄱ'자 건물의 충효교육관을 일별한 후 후문을 통해 소수서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사료관입니다. 이 서원에서 배향하는 안향, 안축, 안보 및 주세붕 등 네 분을 소개하는 안내판 및 역사와 기능 등 서원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안내판이 전시되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주세붕이 기린 안향은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으로 1243년에 태어나 1306년에 세상을 뜨기까지 유학진흥과 미신타파에 힘 쓴 분입니다. 초명이 안유이고 호가 회헌인 안향은 원나라를 오가며 ‘주자전서를 베껴와 우리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연구한 분으로 사후 문성공으로 추존되기도 했습니다. 사료관의 전시물 중 제 눈을 확 끈 것은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원류도(源流圖)였습니다. 고려조의 회헌 안향에서 조선조의 퇴계 이황을 거쳐 율계 정기에 이르기까지 120여명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을 계보화한 도표로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소중한 자료였습니다. 이밖에 스승께서 제자들에 강학하시는 모습을 미니아춰로 보여준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직 잔설이 남아 있고 날씨도 냉랭해 겨울이 봄의 문턱에서 머뭇거리듯이 저 역시 얼마 남지 않은 겨울방학을 아쉬워하며 신학기로 가는 문턱을 성큼 넘지 못하고 있다가, 여기 사료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동들의 모습을 보고 한시라도 빨리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습니다.
서원은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뉩니다. 사료관에 이어 찾아간 곳은 제향영역의 문성공묘와 영정각, 그리고 전사청입니다. 강학영역 서쪽에 자리한 영정각에는 이 서원이 배향하는 네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이렇듯 서원 안에 영정을 모시는 영정각을 두는 것은 다른 서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례라 합니다. 문성공 안향, 문정공 안축, 문경공 안보와 문민공 주세붕의 위패를 모시는 문성공묘는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서원의 중심 건물은 유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부하는 강학당입니다. 남쪽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白雲洞’의 현판이 붙어 있는 이 서원의 강학당인 명륜당을 만나게 됩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 북벽에 명종임금이 손수 쓰신 ‘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원본은 소수박물관에서 보관중이라 합니다. 천정의 대들보에 칠해진 단청은 세월의 중압을 못 이겨 많이 바랐으며 서까래 바로 아래 벽면에는 한시를 적어 넣은 여러 개의 판때기가 부착되어 있어 과연 공부방이다 했습니다. 유생과 스승이 묵는 동제는 서제는 강학당 뒤에 거의 일렬로 배열한 바, 지락재와 학구재, 직방재와 일신재가 그것들입니다. 서원이 넓지 않아 나갔다가 정문으로 다시 들어가 또 다시 둘러보고 나자 서원의 전체적인 윤곽이 잡혔습니다.
원래 여기 서원터는 숙수사가 들어선 절터였다 합니다. 서원 서쪽으로 당간지주가 서 있는 솔밭과 나지막한 산이 붙어 있어 이 산도 다녀왔습니다. 꼭대기에 오르자 서원은 물론 동쪽 건너편 선비촌도 한 눈에 조감됐습니다. 다시 내려가 죽계천변의 경렴정을 둘러본 후 이 개천 건너 소수서원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건넌 죽계천이 550여년전 수많은 유생들의 수장지였음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세조 3년인 1457년 금성대군이 여기 순흥에서 단종복위를 꾀하다 실패해 이 고을 유생들을 참화를 당하는 '정축지변'이 일어났고 유생들의 시체들이 수장된 것이 여기 죽계천이라는 것입니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원혼들을 달래고자 경렴정 건너편 천변 바위에 '敬'자를 쓰고 붉은 칠을 하고 제사를 지냈다 합니다. 그후 원혼들의 곡소리가 그쳤으며 나중에 부임한 퇴계 이황이 흰 색으로 '白雲洞'을 써 넣어 이 바위를 '白雲洞 敬字'바위라 부른다 합니다.
소수서원에 이어 찾아간 소수박물관은 2004년에 개원한 국내 유일의 유교박물관이라 합니다. 조선조의 숭유억불 책으로 5백년 넘게 간난의 세월을 살아온 불교는 제가 인터넷에서 확인한 것만도 15개소의 박물관을 갖고 있는데, 그 반대편에 서서 호위호가 하던 유교는 박물관이 하나 밖에 없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조 5백 년 동안 우리의 정신문화를 지배해온 유교가 박물관을 하나 밖에 남기지 못했다는 것은 유교는 사대부 층에서만 받들었을 뿐 기층의 백성들은 대다수가 외면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이는 불교나 도교가 보다 주정적이라면 유교는 지나치게 주지적이어서 무지렁이 백성들이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날렵한 외관의 현대식 2층 건물 중 아래층에 전시실이 있었습니다. 소수박물관이 소장한 2만2천점의 유물 중 주종은 고문서와 고책으로 이 둘만도 1만6천점에 이르며, 96개의 현판 소장품 속에는 명종임금이 친필로 내린 ‘紹修書院’ 등의 국보도 있습니다. 아래층 전시실은 4개의 전시실로 나뉘어졌고, 관람객들에 선보이고자 진열된 전시물은 6백여 점에 불과하다 합니다. 제1전시실에서 영주지역의 선사시대상을 보여주는 암벽화를 보았습니다. 제2전시실은 공자에 의해 개창된 유교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발전했으며 그 근본이념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전시물로 채워졌습니다. 지방의 교육기관인 서원과 향교에 관한 것은 제3전시실에서, 소수서원 에 관련된 상세 자료들은 제4전시실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공주이씨의 소장품이 "儒의 道로 仁의 術을 펴다"라는 타이틀로 전시되는 특별기획전이 열려 눈길을 끌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바위그림을 보고 암벽화는 단순히 선사시대의 그림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에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그들의 애환을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 암벽화였다면, 그 속에는 당연히 그들의 문학과 음악이 같이 녹아 있다고 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암벽화는 인류최초의 종합예술품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들른 소수서원의 사액전시관에서 동국도학을 이끌어온 우리의 유학자들을 한 표로 보았듯이 여기 박물관에서는 조선조 후기에 발흥한 실학의 개념도와 실학을 이끌어간 실학자들을 한 표로 보았습니다. 이 둘 모두 사진을 찍은 것은 틈나는 대로 워드로 한 번 정리해볼 뜻에서입니다. 국보급의 사액현판 ‘紹修書院’도 사진 찍었습니다.
제가 전시물을 보면서 가슴이 뛴 것은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원본을 보고나서였습니다. 조선조 성종 때 제주 수령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급히 고향 나주로 가는 중 풍랑을 만납니다. 중국의 절강성으로 표류했다가 귀향한 금남(錦南) 최부(崔溥)는 자신의 험난한 여정을 기록해 ‘錦南漂海錄’이라는 이름으로 임금께 올립니다. 이러한 스토리는 방송대에서 국문학사시간에 배운 것이었지만, 표해록의 원본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그러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조선조 선비들은 과연 어떤 분들이었는지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마침 집에 선비란 어떤 사람을 이르는 가를 적시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라는 책이 있어 도움이 됐습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이신 정옥자님이 지은 이 책에 따르면 조선왕조가 설정한 이상적 인간형은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이룬 자라 했습니다. 학문 즉 문(文), 사(史), 철(哲)을 전공 필수로 하여 이성훈련을 체득하고, 예술 즉 시(詩), 서(書), 화(畵)를 교양필수로 하여 감성훈련을 체질화한 자, 즉 이성과 감성이 균형있게 잘 조화된 인격체가 바로 조선왕조가 설정한 학예일치의 이상 인간형으로 본 것입니다. 선비가 추구하는 이상형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가는 지식인과 공직자들이 최우선적으로 갖추어야할 덕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성훈련을 체득하고 감성훈련을 체질화해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된 분이라면 공의를 망각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 애쓰지는 않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탐방사진>
1)소수서원
2)소수서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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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봤습니다.
전에 한 번 다녀왔는데 주마간산식으로 지나쳐서 그런지, 다시 보니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댓글로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