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고 창조적이며 스마트한 핀란드인 디자이너 친구가 있다. 어느 해였던가 처음으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중간에 그가 자신의 휴가 계획을 알려 왔는데, 기가 막히고 적응 안 되는 계획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당시 그가 알려 온 계획은 일일이 기억할 순 없지만 대강 이랬던 것 같다.
“기간 정해진 바 없음. 대략 한 달. 장소 일정치 않음. 비상 시 연락 전혀 불가능.”그는 한 달여 정도 무작정 숲에 들어가 있을 계획이라고 말했으며, 외부 문명세계와의 연결 끈이 되는 어떤 통신기기도 휴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밝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제로 많은 핀란드인들에게 에너지의 근원은 숲이며, 그들은 1년 중 한 두 달 정도를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숲’에서 나무와 풀, 물과 공기 등 자연과의 철저한 조우를 즐긴다고 한다. 때론 그 기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게 되기도 한단다. 잡지사에서 일했던 때의 기억까지 되짚어보면, 6월 말부터 8월 말까지 대부분의 디자이너와 스튜디오들이 휴가로 인해 섭외가 불가능했다. 그들은 정말 철저하게 일과 ‘쉼’을 구분하고 있었다. 좀 다르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뭔가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하게 될 그런 휴가 계획을 세워보는 건 어떨까? 물론 인구도 많고 땅덩어리도 좁으니, 그 핀란드인 친구처럼 휴가 기간 내내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그런 곳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론 정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책이나 읽으며 휴가를 보내는 쪽에 많은 표를 주고 싶지만, 사실 마음 한편으론 내가 정말 철저하게 내추럴한 방식으로 자연과 조우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화장실은? 샤워는? 텐트에서 자는 건 불편하진 않을까?그래서 이리저리 웹 서핑을 하다가 이런 걱정거리들을 일거에 해소해주면서 덤으로 잘 디자인 된 제품들을 사용해보는 경험까지 제공해주는 멋진 캠핑카를 찾아냈다. DWR(Design Within Reach)사에서 판매하는 travel trailer 에어 스트림(Air Stream)이 바로 그것. 매끈한 알루미늄 보디와 없는 것 없이 잘 갖춰진 내부 시설, 톰 딕슨(Tom Dixson)과 조지 넬슨(George Nelson) 등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소품들로 장식된 인테리어는 쾌적하고 보송보송한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 틀림없다. 사실 에어 스트림은 1936년 이미 출시되었던 오랜 역사를 가진 여행용 트레일러다. 이 전통의 트레일러가 재조명된 건 2000년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크리스 딤(Chris Deam)에 의해서다. 국제 가구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그는 오래된 빈티지 ‘에어 스트림’을 구해 창의적이고 독특한 부스로 개조를 했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결국 DWR사에 의해 픽업되어 요즘은 좀더 업그레이드된 한정판 모델로 판매되고 있다. 가격은? 5만 달러! 아무래도 이번 휴가엔 어렵겠지만 장기 계획으로 도전해볼 만하지 않을까? 뭐, 꼭 에어 스트림이 아니어도 좋다. 얼마 전 TV에서 자신의 차량을 개조해 잠도 자면서 여행을 다니는 노부부의 이야기를 방영한 적이 있다. 놀라운 건 할아버지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지치지 않는 의지였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지 않을까? 자기만의 방식과 필요에 의해 차량을 재정비하고 준비해 휴가를 떠나보는 것, 이번 휴가부터 당장 실행해볼 만한 프로젝트가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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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여행을 위한 하드웨어는 준비되었고 소프트웨어로 채울 만한 것들에는 뭐가 있을까? 아무래도 부피는 작으면서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것들이 여행에는 제격이다. 그런 면에서 Less, but Better, 적지만 더 좋은 것 혹은 덜하지만 더 좋은 것이라는 모토를 가진 프랑스의 디자인회사 렉손(LEXON)의 제품들은 좋은 여행 파트너이다. 렉손사의 제품들은 콤팩트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다.
가볍고 튼튼한 소재로 만들어진 실용적인 가방부터 특별한 느낌의 알루미늄 수하물 택(luggage tag), 필수품인 랜턴, 여행용 오거나이저(organizer), 쉬면서 지루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휴대용 스포츠 키트들이 매우 훌륭하다. 여행에서 이런 작은 디테일들은 평소보다 더 돋보이고 감동적이다.차별화된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디테일이 좋은 소품에 공을 들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렁주렁 눈에 띄기만 하는 제품들로 어수선하고 산만하게 치장
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한 번에 한 가지씩 포인트를 주는 게 좋다. 렉손사의 제품들이 미니멀하고 모던한 느낌이라면, passport jacket이라는 여권 커버로 여행사 광고 문구가 커다랗게 박힌 비닐 커버 일색이던 우리나라 여권 커버 문화를 바꾼 mmmg사의 소품들은 좀더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다. 국내에선 최초로 여행 문화 상품을 디자인하고 개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여권 커버와 여행 후 정리 작업을 위한 포트폴리오 및 앨범 외에 본격적인 제품들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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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휴가… 하면 단연 사진이다. 새로운 문화, 풍광은 물론이고 소소한 일상마저도 시간이 흐른 뒤엔 다른 느낌으로 읽힌다.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가 강세지만, 좀더 서정적이고 특별한 기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로모 카메라에 도전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거리계 레버를 조절한 다음 셔터만 누르도록 되어 있는, 정말 단순한 기능을 갖춘 로모 LC-A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1980년 후반 구 소련 정세가 악화될 무렵 자취를 감췄다가 1990년대 초반 유럽 젊은이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0년경부터다.초반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지금까지 꾸준히 마니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최근에는 아티스트들의 작업 툴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아마추어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에게도 특별한 애정을 받고 있는 제품이다.작고 앙증맞은 사이즈도 그러하거니와, 카메라 회로의 오류에서 기인했다고 하지만 그것에서 비롯된 카메라 자체의 비네팅 효과(사진의 외곽 부분이 어두워지는 그늘현상)와 다른 카메라에 비해 뚜렷하게 나타나는 왜곡된 색감은 분명 색다르고 서정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남긴다.
마지막으로 준비할 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 몇 권과 음악. 휴가를 떠나는 차 안이나 산책길 어느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읽으면 좋을 만한 책 몇 권을 감히 추천한다면 먼저 이병률의 『끌림』을 꼽겠다. 출판된 지 좀 되었지만 일단 사두면 곁에 두고 가끔씩 읽고 또 읽게 될 책이다. 시인이자 작가인 저자가 10년 동안 20개국 500여 도시를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담아 만든 사진집이자 산문집이다. 어렵지 않으면서 결코 가볍지 않은 여행지에서의 에피소드들이 어딘가 떠나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책이다. 그 다음엔 『걷기의 기적』. 역시 손에 잡기 편한 크기와 가벼운 재질의 종이 덕에 걸으면서 읽기에 편하다. 거창한 여행이 아닌 일상 속에서 걷기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하루에 한 번쯤 하늘 올려다보는 여유를 가지게 해준다.
이런 저런 핑계도 귀찮고 진심으로 혼자가 되고 싶을 때, 경제적인 이유에서건 시간적인 문제에서건 도저히 여유가 없을 때, 이런 재미있는 아이템들은 어떨까? 예를 들면 커버를 배낭에 넣고 다니다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 싫을 때, 혼자 사색을 즐기고 싶을 때, 또는 눈물이 줄줄 흐를 때 꺼내어 뒤집어 쓰기만 하면 혼자만의 세상이 구축되는 제품이 있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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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활동 중인 디자이너 로잘리 모노 드 프로이드빌(Rosalie Monod de Froideville)의 하이드어웨이라는 작품은 누구나 짧은 시간에 혼자만의 공간을 확보하도록 돕는다. 실내용 하이드어웨이 커버를 뒤집어쓰면, 마치 어릴 적 엄마에게 야단맞고 이불 속에 틀어박혀 있던 때와 유사하게 이불 밑으로 쏙 들어간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개인적으론 스웨덴 디자인 그룹 스노우 크래쉬(snowcrash)의 멤버였던 모니카 포스터(Monica Forster)의 구름(cloud)이 더 마음에 든다. 2002년 포터블 미팅룸의 개념으로 디자인되었는데, 가방처럼 메고 다니다가 공기만 주입하면 거대한 풍선처럼 부풀어 쾌적한 공간이 된다. 2002년 봄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서 직접 공간을 체험해봤는데, 생각보다 널찍한 공간과 쾌적한 환경이 만들어진다. 시간을 즐기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여유도 없다고 울상만 지을 순 없지 않은가? 내 휴가는 내가 디자인하자. 성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즐길 수 없다. 어떻게, 어디서, 어떤 식으로 즐길 것인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다 보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덤으로 이번 휴가엔 작은 소품 하나라도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되는 특별한 것으로 준비해보자. 에어 스트림은 무리일 테지만, 로모 카메라를 구입해 거친 손맛이 압권인 사진의 매력에 빠져보는 것쯤이야 작은 활력이 되는 소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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