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2]
서편 산 하늘에 먹구름 하나 둘 드리우는가 싶더니 바람이 쌩하고 세차게 불어왔다. 떠나가고 찾아오며, 순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별과 만남의 시외버스터미널, 먼 북녘에서 빗속을 헤치고 달려온듯 버스 한대가 플랫홈으로 찾아들었고, 여행에 지친 사람들을 토해냈다.
계절변화에 심통난 바람이 건너편 언덕배기 외로히 선 등굽은 소나무를 멱살잡이 해댄다. 뭔한 말로, 덩그러니 혼자 선 외로움도 그려려니와 바람은 왜 애꿋게 그러실까?
쳇! 또 비님이 다녀가시려나?
지구온난화 탓인지 요즘 비는 지적대기만 하면 대형마트 끼워팔기 하듯 이삼일이다. 잦은 비님, 이젠 우기(?)로 접어들면 아예 우산장사 편에 서시기로 작정을 하실 것이다.
옛날이 그리워졌다. 7,8년 전 나는 이때쯤이면 점심밥 먹고 운동삼아 햇살 잘드는 과수나무 가득한 뒷동산을 올랐다. 그게 텃밭농사에 그치고 있던 나에게 전원에의 대리만족을 주는 유일한 일상의 즐거움이었을까?
그렇게 산을 오르고, 산야에 꽃피는 순서를 떠올리며, 마음속 하얀 캔버스에 화사한 꽃그림을 그리며 또 붓칠을 해댔다. 그게 내게는 둘도 없는 소확행이었고, 막연하나마 꽉막힌 세월이란 절기를 대하는 그리움이며, 기다림이었다.
봄이면 철맞추어 피는 꽃들, 매화, 생강나무, 목련, 산수유, 복숭아, 개나리, 자두, 살구, 진달래, 벗나무, 배나무, 철쭉...
그러나 요즘은 그러한 봄꽃들도 혼란스럽게 왁자지껄 같은 시기에 앞다투어들 핀다. 벌.나비는 부산하고 무질서한 그들 삶속에서 오히려 궁핍함을 느꼈는지 더러는 떠나며 자취를 감추었고, 생육활동이 소원해져 농부의 마음을 불안케 한단다.
이래저래 예전처럼 자연과의 동화됨과 기다림의 미학도 사라진 듯하여 삶의 감정이 퇴색해 가는 느낌이다.
여기서 '기다림의 미학'이란 '기다림을 통해 얻게되는 소중한 행복과 가치'를 말함이고, 성숙과 인격, 믿음을 수반한다.
기다린다는 것,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기다림의 상징적 표현이다. 흔히들 기다림은 그리움이고, 기다림엔 설렘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다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지만, 그 기다림마다 어떻게 정의를 판정내릴 것인가?
초여름 푸른 잎새 사이를 비집고 올라 온 빨간 튜립 꽃핀 장독대 옆에 앉아 흘러가는 흰구름 쳐다보는 등굽은 노파의 쇠약한 기다림, 고추잠자리 맴도는 뒷산 언덕에서 부지런히 풀 뜯는 소떼들 사이로 산 끝자락 너머의 지평선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는 소년의 대상없는 기다림은 과연 설레이는 기다림일까?
한편으로 기다림은 춥고, 배고프며, 외롭다. 때론 불확실하고, 절망적이며 허무하다.
기다림의 대상은 영영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고, 또한 기다림은 전쟁고아의 눈물 같이 서럽고 기약없어 보인다.
60년만에야 핀다는 대나무 꽃, 3,000년에 피어난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 그리고 혹독한 추위를 겪으며 고산에서 피어나는 백두산의 기생 꽃이나 알프스를 노래하게 하는 에델바이스 꽃의 그 길고 혹독한 기다림의 의미는 또한 무엇을 보상받기 위함일까?
기다림의 '고도'는 무엇일까?
돈, 건강, 행복, 그보다 우선 한 출세?
저마다 기다림이 다를 수 있을 진대, 어줍은 기다림은 기대보다는 오히려 허무함과 야속함으로 변하여 달겨들지도 모른다.
생각이 다르다고 비난하거나, 원하는 방향의 정치를 않는다고 분개해 할 일이 아니다. 속성마다 나름의 기다림에 대한 의미를 품고 있으리라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다.
성경말씀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다. 나라는 실체를 내려 놓으면 탐욕이 사라지며, 마음의 평화가 온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막연한 기다림에 빠져든다.
누군가는 우리들이 기다릴듯 천천히 다가오기를 바라는 죽음의 마지막 단계를 '수용'이라고 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이라는 피를 토하고 싶은 순환과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수용하며, 막연히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불규칙한 기후속에서 꽃들은 또 피고진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숙명이고, 기다림의 고도이다.
숙명적 기다림, 어쩌면 그 마지막 영원의 순간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수용의 단계가 맞을 것 같다. 나의 고도는 어디쯤 다가오고 있을까?
*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의 작가 '사무엘 베게트'의 희곡작품 제목으로 인간의 비극적 초상(존재에 대한 의심, 인간의 부조리, 소외, 고독 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데, 구세주나 희망이란 견해도 있지만, 고도는 그 무엇이라고도 정의 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