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9월. 내가 모 무역회사에 다녔을 때였지. 대구로 출장을 갔다가 시간이 남아 경북 예천에 사는 고모네 집에서 하루 밤을 잔 후 지금은 없어진 예천 출발 서울행 열차를 타게 되었어. 개찰을 한 후 열차로 향했지. 마침 저 만치 윤기가 나고 잘 빗어 지성적인 것을 느끼게 하는 긴 머리의 여자가 무엇인가 떨어뜨리고 그냥 열차로 올라갔어. 조금 떨어져 서 뒤 따르던 내가 그것을 주었어. 수건이라기에는 좀 크고, 마후라라 하기에는 좀 작은 듯한 것이였지. 거기에서 무엇이라 말 할 수 없는 향기가 났었어. 지금 생각하면 나를 사로잡았던 그녀 특유의 향기와 내음이었던 것 같아.
수건인지 마후라인지의 주인을 찾아 주려고 열차 안을 둘러보았어. 저쪽 창가가 아닌 복도 쪽 자리에 앉아 있더군.
"이거 댁의 것이지요?" 말은 한마디 없이 홍조를 띤 채 목례로 감사의 표시를 하더군. 쌍가풀이 지고 눈이 커 내가 거기에 빠질듯한 아름다운 아가씨였어.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 준 다음 나의 좌석 번호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지. 바로 그녀 옆 창가에 내 자리가 있었어. 신파조로 말한다면 "이것이 왠 운명의 장난이냐? 장난의 운면이냐?"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고 인연인줄 누가 알았으랴.
열차가 출발한 후 난 창가로 스치는 밖의 풍경만 바라보는 척 했지. 실은 내 마음은 옆의 그 아가씨에게 온통 있었는데.
열차에서 커피를 파는 사람이 지날 때 그녀가 커피를 두 잔을 시키는 것 같았어. 나에게 한잔을 건네주더군. "아까는 감사했어요"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의 대화는 시작이 되었지. 예천 Y 여고를 졸업한 후 P전문대 의상학과를 나와 명동 모 의상실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난 대학 졸업 후 소공동에 있는 무역회사에 다닌다고 말했지. 옛날로 말하면 양반 집안인 안동 K씨였어. 그래서 지금도 안동 K씨만 보면 그녀가 생각이 나서 관심을 더 갖게 되지.
그녀가 건네준 커피를 마시며 나는 "남에게 무엇을 얻어먹으면 꼭 갚아야 내 마음이 편한데 오늘 커피를 얻어먹었으니까 다음 토요일에 갚을 기회를 달라"고 했지. 그 당시 나는 음악 다방 "돌체"에 자주 갔었기 때문에 거기서 만나자고 했어. 그 다음 토요일 "돌체"에서 만나 차를 마신 후 그녀는 자기도 누구에게 얻어먹으면 갚아야 되는 성격이니까 다음 토요일 까페 "우산 속"에서 만나자고 하더군. 얻어먹은 것 갚기 위해 토요일마다 한번은 "돌체" 또 한번은 "우산 속"에서 번 갈라 가며 만나게 되었지.
우리의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이 된 거야. 그런 데이트가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되풀이되었는데도 우리는 지루한지 몰랐어. 오히려 재미가 있었고, 마냥 좋기만 했어. 그러던 어느 토요일 "돌체"에서 만나기로 한 날에 난 메모만 남기고 그냥 나왔어. 그 메모에 이렇게 썼어.
"커피를 마주하고 앉은 너에게서 라일락 향기 보다 더 진한 내음을 맞는다. 나는 늘 너와 함께 있고 싶다"
그 다음 토요일 약속을 하지 안 해도 까페 "우산속"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는날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어. 이렇게 써 있는 메모만 남긴 채.
"나를 데려갈 백마 탄 기사는 럭 허드슨, 그레고리 팩 보다 더 미남이고 키 큰 남자이어야만 된다고 늘 생각해 왔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임을 알았어. 나도 당신과 늘 함께 있고 싶어"
그 다음 토요일 "돌체"에서 만나서도 우리는 메모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없었어. 전처럼 차를 마시고, 학교 다닐 때 읽었던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 어릴 적 이야기 등등만 했지.
그해 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토요일 우리 둘은 "돌체"에서 여느 때처럼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지.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다방 안에는 주리엣 그렛꼬의 샹송이 애절하게 흘러나오고 있었어.
눈이 내리네.
당신이 가 버린 지금
눈이 내리네
외로워지는 내 마음
꿈에 그리던
따뜻한 미소가
흰눈 속에 가려저
보이지 않네
하얀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그 모습
애처로이 불러도
하얀 눈만 내리네
그녀가 갑자기 무엇에 취한 듯 "자기 나갈래? 하더군. 그때 난 "자기"란 말을 처음 들었어. 그녀가 더 가까이 느껴지더군. 길거리로 나왔어. 팔짱을 끼더군. 그것도 처음이었어.
팔짱을 낀 그녀는 자기 몸을 나에게 바짝 밀착시키더니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지 "자기 사랑해" 그녀의 따뜻한 입김이 내 귀를 간지렵혔지. 머리, 어깨 위로 우리의 사랑을 축복해 주듯이 함박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었어.
우리는 덕수궁에 들어갔어. 덕수궁들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어. 그녀가 막 달려가더군. 나와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좋았던지 눈 위에 영어로 HAPPY, LOVE라고 쓰더군. 난 장난기가 발동했어. 그래서 나는 그 옆에서 무엇을 쓰는 척 했지.
"자기 뭐 써?" "응? 나 오늘 너하고 다니면서 쓴 돈 계산하는 거야" 나의 장난기에 그녀는 "몰라, 몰라." 하며 여성 특유의 애교 서린 비음의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내 가슴을 가볍게 치더군.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나도 모르게 그녀를 포옹했어. 그리고 긴 입맞춤이 있었어. 그녀의 입술은 따뜻했고 달콤했지. 그녀와의 첫 포옹, 첫 입맞춤이 그렇게 눈이 내리는 덕수궁에서 있었던 거야. 그래서 덕수궁은 역사의 유적지로서가 아니라 내 사랑이 이루어진 곳으로 더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
다음해 1967년 봄이 다 가기 전에 우리는 화촉을 밝혔어. 단칸방 셋집에서 살림을 시작했어. 살림을 시작한 다음 날부터 우리는 싸움을 했어. 구공탄을 연료로 사용하던 시기라 자다가 밤중에 구공탄을 갈아야 했었어.
"자기 피곤한데 그냥 자. 신경 쓰지마. 내가 구공탄을 갈 테니까."
"아냐. 자기가 마음놓고 자. 내가 갈 테니."
"아냐. 내가 갈게."
옷을 살 때도" 나 의상실에 있으니까 내 옷은 알아서 할 테니 자기 것만 사."
"아냐. 난 괜찮아. 자기 것만 멋진 것으로 사"
"아냐. 내 것은 안 사도 돼. 자기 것만 사" 이런 싸움이었어.
우린 싸움도 사랑이었지.
1968년 사랑의 결실로 그녀 닮은 눈이 큰 딸 하나를 낳았지. 2년 후 그녀 닮은 눈이 큰 아들 하나를 낳았어. 또 2년 후 나 닮은 못생긴 아들 하나를 낳았지.
호사다마라 했던가? 우리의 사랑을 하늘이 시샘을 하였는가?
1978년 그녀의 가슴에 몽얼이가 잡혔어. 원자력 병원의 진단 결과 유방암. 가슴을 절단하는 대수술. "양쪽 가슴이 없어도 좋으니 살아만 다오." 마음으로 울며 기원했어. 직장에 휴가원을 내고 보름 동안 난 병 간호에 온 정성을 쏟았지. 세종로에 있었던 병원 앞거리는 많은 인파로 늘 부쩍대고 있었어. "왜 저 많은 사람들 중 나만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되는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어. 다행이 수술은 잘 끝났고 상처가 다 아믄 다음 퇴원을 했어. 방사능 치료로 그녀의 머리는 빠져갔지. 그래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어, 그저 오래 살기만 기원했지.
그러나 그 때의 수술은 늦었던 거야. 좀 더 일찍이 발견하여야 했었는데. 암에 대한 상식이 나에게 전혀 없었거든. 난 참 바보였어. 그녀의 병이 재발 되었어. 암이 무서운 것은 서서히 자기가 죽어간다는 것을 안 다는 사실이지. 오히려 별안간 죽으면 그런 고통은 없는데. 몸이 마르고 꼿꼿해져 가며 자기가 죽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오히려 멀쩡한 나와 아이들을 걱정했어. 어느 날 둘이 있을 때였는데 여자 생각나면 다른 데 가서 생리적 욕구를 풀거나 자기를 안으라고 하더군. 죽어 가면서도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에 난 그만 그녀를 붙잡고 통곡하고 말았어. 그런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 차라리 살려내라고,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며 나를 잡고 애원이나 하지. 사랑하는 사람아.
1980년 7월 10일.
사랑하는 나와 딸, 아들을 남겨 두고 차마 가기 싫은 저 세상으로 갔어. "우리 가족모두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비록 그녀의 육신은 내 곁을 떠났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내 가슴에 남아 있어.
별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여
꿈처럼 행복했던 사랑이여
머물다간 바람처럼
기약 없이 멀어저 간 내 사랑아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라
지지 않는 사랑의 꽃으로
다시 한번
내 가슴에 돌아 오라
사랑이여 내 사랑아
아 ∼ 사랑은 타버린 불꽃
아 ∼ 사랑은 한줄기 바람인 것을
아 ∼ 까맣게 잊으려 해도
왜 나는 너를 잊지 못하나
오∼ 내사랑
오∼ 내사랑
영원토록
못잊어
못잊어
오늘도 그녀를 그리며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불러보지만 허공의 메아리로 끝나고 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