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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는 어른들께서는 그야말로 참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 모두가 한 분이, 천 분이나 만 분이나 그렇게 제도하실 다 그런 분들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기회가 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말씀을 지금 드립니다.
(첫번째 시간의) 아까 그 삼신三身, 이 대목이 바로 부처인데, 그것은 또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가 부처를 생각할 때는 꼭 항시 '마음'을 염두에 두셔야 됩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운데 들어 있는 법신 보신 화신 그런 공덕이란 말이나 지금 더러는 남도 미워도 하고, 못난 짓도 하고, 그런 내 마음 가운데 들어 있는 법신 보신 화신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불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각自覺이라, 스스로 본래 부처임을 깨달아야 참다운 신앙이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겉신앙밖에는 안 됩니다. 참 신앙이 돼야 자기를 구제하고 남한테도 구제의 소임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마음의 본래 자리가 바로 법신法身 부처님이고, 내 마음 가운데 들어 있는 자비나 사랑이나 지혜나 행복이나 그 모든 것이 또 보신報身인 것이고, 또 내 마음의 공덕으로 이루어지는 우주만유宇宙萬有가 그때는 화신化身이란 말입니다.
나와 우주는 절대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인 문제를 꼭 확실하게 느끼셔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진리를 생각할 때는 항시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봐야 됩니다. 다른 종교와 불교와의 차이는 뭣인가 하면 다른 종교는 뿔뿔이 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있고 또는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가 둘이 있고 말입니다. 자연과 인간과 둘이 있고 하지만, 불교의 기본적인 대승사상大乘思想 이것은 절대적으로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지금 현상적인 겉만 보기 때문에 나와 남이 둘이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도 우리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지금 자연보호 운동을 굉장히 맹렬히 하지 않습니까. 자연보존이라 또는 자연정화라 뭐다 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큰소리 치고 제아무리 그런 캠페인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자연과 나와 뿔뿔이다. 자연은 자연이고 나는 나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온전한 운동이 못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과 같이 자연과 나와 혼연히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다만 일반 중생들은 겉으로 보고 성인들은 안으로 속으로 본질로 봅니다. 우리는 본 바탕에서 볼 것인가, 또는 피상적으로 겉만 볼 것인가 하는 그 차이뿐입니다. 성인과 일반 중생은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성인들은 근본 바탕에서 보는 것이고 일반 중생들은 겉으로 봅니다.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성자 마음과 같이 여는 것입니다. 성자 마음은 우주를 곧이곧대로 그대로 봅니다. 자연의 도리 그대로 보는 것이 성자의 마음입니다. 공자나 석가나 예수나 노자나 다 그렇습니다. 그분들의 시대에 따라서 그때그때 표현의 방편은 다르게 했다 하더라도 그분들이 보신 것은 다 줄거리는 똑같습니다.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봤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분들 차원에서는 나와 남이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자聖者들은 항시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내가 따로 없고 또는 내 것이라고 고집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분들은 자기 소유가 없습니다. 석가의 평생을 보시고 또는 공자나 예수의 평생을 보십시오. 자기 앞으로 무슨 소유를 남겼습니까. 우리 세간 사람들이 그렇게 다 살 수는 없습니다. 없으나, 그분들을 우리가 표준으로 해야 됩니다. 어느 땐가는 우리도 꼭 성자가 돼야 되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라는 것은 종당終當에는 다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한 150억 년 이상이 되면, 그때는 현대 물리학도 증명을 합니다. 파괴가 된다고 합니다. <주: 태양계 50억 년 이후 파괴됨> 그런 때는 자기 생명이나 남의 생명이나 어디가 남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파괴된다 하더라도, 파괴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 생명은 비단 인간 생명뿐만 아니라 소나 돼지나 또는 개나 그러한 축생畜生도 역시 하나의 생명입니다. 근본 자리에서는 그런 축생하고 우리하고도 똑같습니다. 무생물無生物, 생물生物도 근본 순수 에너지 차원에서는 똑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눈앞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나 개 한 마리나 또는 곤충이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진화進化가 되어서 종당에는 사람이 돼야 되는 것이고, 또 사람보다 더 진화가 되어서 천상天上으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에 보면 다 나와 있습니다. 천지 우주가 몇 백억 년 뒤에 파괴될 때에, 그때는 우리 인간 존재나 중생들은 다 높은 천상에 올라가서 우주의 이 형체가 파괴되어도 그때는 파괴가 된 그런 비참한 꼴을 우리가 당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기독교를 잘못 해석한 사람들같이, 사람을 태운 채로, 자기들같이 믿는 사람들만 그냥 휴거로 해서 구제해 올라가고 '다른 사람들은 심판을 받는다' 그런 것이 아니라, 참다운 성인의 인생관人生觀은 우리 중생들이 닦아서 우리 사람보다 못한 중생들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우리 사람도 보다 금생今生에 선량善良한 행동을 많이 해서 천상으로 올라가고, 그렇게 해서 (모든 생명체가) 순수한 천상에 올라갔을 때 우주가 파괴된단 말입니다.<주: 불교 우주관宇宙觀 - 성주괴공成住壞空> 그때는 우주가 파괴되는 그 참화慘禍를 우리가 입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 부처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또 잘 이해를 못한 분들은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욕심도 많고 남도 미워도 하고, 남도 좋아도 하고 내 마음 내가 돌아보아도 하찮은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부처일 것인가? 하찮은 이것은 자기 겉에 뜬 그림자 같은 허망虛妄한 그런 마음입니다.
우리 본심本心이 양지良知라. 우리 본심 이것은 석가모니와 공자와 예수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우주를 사무쳐 보고 우주와 하나의 생명인 그 마음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어떤 종교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을 성자의 마음같이 활짝 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그 가운데는 끝도 갓도 없는 자리가 법신인 것이고 말입니다.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능력이나 원만한 그 자리가 바로 보신인 것이고, 이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현상계, 내 몸뚱이나 네 몸뚱이나 일체 존재 이것은 화신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합한 것이 결국 내 마음의 본체本體이고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다르게 제가 말을 하면, 불교에 나와 있는 술어를 한도 끝도 없으나 우선 중요한 것만 여기에다 넣었습니다.
진여眞如 바로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진여라, 또는 여래라, 진리는 바로 진리란 이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란 말입니다. 여래란 말입니다. 여래라. 바로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주가 모두가 다 생명 덩어리입니다. 다이아몬드나 금金이 다이아몬드나 금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증명합니다. 다이아몬드도 내내야 탄소炭素가 지금 거기서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탄소는 무엇인가? 탄소는 원자 핵核을 중심으로 전자電子가 적당히 거기에 알맞게시리 돈단 말입니다. 원자핵은 무엇인가? 또 전자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현대 물리학은 측정測定을 못 합니다. 왜 측정을 못하는고 하면 부단히 변화무상變化無常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위치를 알려고 생각할 때는 속도(운동량)를 모르는 것이고, 진동하는 속도(운동량)을 알려고 생각할 때는 위치를 모른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 독일의 이론물리학자)의 불확정성不確定性 원리原理라. 물질도 저 끄트머리 가서는 결국은 확실히 알 수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자는 물질이라는 것은 본래로 진동하는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여서 하나의 모양만 낸 것이지 본래는 에너지energy뿐이다.
그러기에 에너지가 바로 물질이고 물질이 바로 에너지란 그런 말씀 이것이 현대 물리학의 결론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결론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 바로 본래에서는 에너지뿐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식으로 말하면 색즉공色卽空입니다. 색즉공입니다. 우리 중생의 그 제한된 탐욕심貪慾心이나 분노하는 마음瞋心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痴心이나 그런 독스러운 마음 그런 흐리멍덩한 마음에 가려서 우리 중생은 지금 겉밖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밝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 우주의 겉 이것은 움직여 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 하나의 가상假相에 불과한 것이지, 본 바탕은 모두가 다 순수한 에너지고, 또는 생명이고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이 우리가 지금 사는 세계 좋다고 싸우고 궂다고 싸우고 서로 아귀다툼하는 사회, 이 사회의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다. 이것을 지금 현대 물리학이 증명합니다.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540?~B.C.480?)의 만법유전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이고, 또는 법성法性이라. 우주의 성품性品이란 말입니다. 내 마음이나 부처나 이것은 바로 우주의 성품입니다.
또는 중도中道라. 조금도 치우침이 없단 말입니다. 중도는 우리가 공부해 가지고서 뒤에 중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이 바로 중도란 말입니다. 어디에 치우침이 없습니다. 자비나 지혜나 사랑이나 행복이나 다 원만히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물질에 치우침도 없고, 또 정신精神에 치우침도 없고, 모두가 다 정신(마음)뿐인데 물질은 정신이 잠시간 모양을 가상을 나툰 거란 말입니다. 그렇기에 본래 하나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금강경을 보실 적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 인간이 보는 상은, 나라는 상我相, 너라는 상人相, 중생이라는 상衆生相, (수명이 길다 짧다 하는 상壽者相) 이런 상은 모두가 다 이것은 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 같단 말입니다.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불교가 어렵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일반 사람들은 불교를 우리 중생이 보는 차원에서 해석을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보통 이 '바이블Bible'은 쉽다고 생각을 하겠지요.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님은 어렵게 말씀을 해서는 누가 못 알아먹습니다. 갈릴리 해안(호수)에서 어부나 그런 사람들이 알아먹겠습니까. 베드로나 모두 그 사람들이 어부漁夫인데 말입니다. 따라서 소박하게 말씀한 것이지, 예수의 뜻도 똑같이 우리가 느끼는 감투나 식욕食慾이나 또는 이성욕異性慾이나 이런 것은 모두가 다 허망虛妄한단 말입니다.
허망하다고 느껴도 우리가 참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허망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는 그것만 가지고 싸운단 말입니다. 감투 가지고 싸우는 추태가 지금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종교를 공부하는 것은 당장에 성인은 못 된다 하더라도 성인들이 우리한테 말씀한 말이 옳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분들 말씀은 다 옳으니까 말입니다. 그분들 말씀은 우주의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옳은 것입니다. 다소간 약간의 차이 있게 말했다는 것은 그 시대 상황 따라서, 또는 교화敎化 중생 따라서 근기根機에 맞추어서 말씀했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그분들 본래 뜻은 다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경을 보나 논어論語를 읽으나 또는 바이블을 보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의 철학자)의 철학서를 보나 허심탄회虛心坦懷라. 자기가 금생에 나와서 쥐꼬리만큼 배운 것 말입니다. 학교에서 배우고, 대학에서 배우고, 어디서 배우고 우리가 그런 선입관념先入觀念을 배제하고서 허심탄회하게 생각할 때는 다 같아 버린단 말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살 때입니다. 그래야 화해和解가 됩니다. 여러분들 이슬람의 알제리에서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을 보십시오. 프랑스의 비행기를 납치해 가지고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자기들도 죽고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이슬람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마호메트(Mahammad, 570~632, 이슬람교의 창시자)의 뜻이 거기에가 있지도 않은 것인데, 마호메트도 위대한 성자입니다. 따라서 마호메트의 가르침도 역시 근본 뜻은 기독교와 똑같습니다.
다만 그때그때 시대 상황에 따라서 약간(조금) 표현을 달리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바이블(기독교)을 보나 불교를 보나 가장 핵심을 봐야 한다 말입니다. 불교도 소승을 봐서는 그때는 다른 가르침하고 자꾸만 충돌이 됩니다. 대승을 봐야만이 불교도 하나가 되고 다른 종교하고도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실상實相이라. 부처라는 것은 바로 우주의 참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가상假相을 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세간적인, 성인이 아닌 한에는 다 가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Socrtes, B.C.470~B.C.399)도 먼저 자기 무지無知를 알아라. 우리 범부는 자기 무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아, 내가 무던히 공부했는데, 내가 무엇을 봤는데 꼭 자기 아는 것을 고집을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남하고 그때는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대로 고집하기 때문에 서로 피차 다투게 되겠지요.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지금 가상假相을 봅니다. 우리 중생들이, '내가 성자가 아니다', 내가 성자가 아닌 것을 어째서(어떻게) 아는가? 나한테 '나'라는 관념觀念이 있고 욕심慾心이 있고 또는 기분 사나울 때는 불룩거리고 말입니다. 우주 만유가 무엇인가?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과거는 무엇인가? 이것을 모를 때는 성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인이 아닐 때는 항시 겸허謙虛해야 됩니다. 이른바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먼저 자기 무지를 알아라. 자기 부족을 먼저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참다운 지혜智慧를 구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로 실상實相이라. 우주의 참다운 모습이란 말입니다. 또는 보리菩提라, 참다운 지혜입니다. 보리라는 것은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라. 또는 진아眞我라. 참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지금 나는 망아妄我라. 망령될 망妄, 나 아我자 그래서 그때는 망아라 합니다. 우리 범부의 나라는 것은 그때는 올바른 나가 못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나와서 자기 업장業障에다가 금생에 지금 쥐꼬리만큼 배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성취한 성자의 나는 그때는 참다운 나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되고 석가가 되고 공자가 되고 그래야 이제 비로소 진아眞我란 말을 붙입니다.
열반涅槃이라. 영원히 행복스럽단 말입니다. 번뇌煩惱가 조금도 없이 우리 생명도 몸뚱이야 천 번 만 번 바꿔진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죽고 자기 남편이 죽고 아내가 죽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누구나가 다 슬퍼서 자기를 지탱하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생명이 자기 몸뚱이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조금도 아낌없이 한 점의 회한悔恨도 없이 자기 몸을 바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자기 생명이 자기 몸뚱이에 있지를 않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자체는 원래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과거 전생前生에도 나라는 생명이 있었고 또 내생來生 죽은 다음에도 있습니다. 이 몸뚱이는 과거에 있던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쓰는 몸뚱이는 과거에 있던 것도 아니라 금생에 부모님의 연緣 따라서 잠시간 나와서 이와 같이 몸이 됐단 말입니다.
죽은 뒤에는 금덩어리같이 귀한 내 몸이 그대로 있을 것인가. 화장火葬하면 재가 되고 묻으면 썩어서 없어지지 않습니까. 죽은 다음에는 이 몸뚱이 어디에도 흔적도 없단 말입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금생만 잠시간 부지하는데 금생마저도 잠시간 동안도 그 풍재風災라, 수재水災라, 화재火災라, 지진地震이라, 얼마나 고난苦難이 많습니까. 남한테 배신당하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으로 인생개고人生皆苦라. 인생은 결국은 따지고 보면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고생의 물결 위에서 우리가 지금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반涅槃이라. 비로소 작은 나, 망령된 나를 떠나버려야 참다운 나가 되어서 영생永生으로 행복한, 몸뚱이야 그때 교통사고를 만나서 죽으나 어떻든 간에 우리는 항시 행복스럽단 말입니다. 이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살아야 제가 아까 허두에 말씀드린 바로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극락極樂이라. 다시 위없는 행복이란 말입니다. 극락은 저 극락세계가 어디에 별도로 따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현상적인 눈에 보이는 그런 물질세계를 떠나서 참다운 정신세계 순수한 정신으로 돌아갔을 때는 바꿔서 말씀드리면 성자가 되었을 때는 바로 그때는 어디나가 다 극락입니다. 주인공主人公이라.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주인공입니다.
민주주의도 참다운 주인공 자리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망령된 알듯 말듯한 사람들이 주인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혼란스럽고 남한테도 혼란을 일으키고 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성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해야 참다운 민주주의가 됩니다.
묘각妙覺이라. 다시 위없는 깨달음이란 말입니다. 그냥 알듯 말듯한 깨달음이 아니라 다시 위없는 불교 말로 하면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이른바 그야말로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위없는 가장 평등하고,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가르침이 바로 묘각이고 부처님 지혜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부처고 이런 것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마음인데 우리가 짧은, 한 70년도 못 사는 우리 인생 가운데서 이렇게 훌륭한 마음을 개발할 것은 뒤로 제쳐 버리고서 그 엄한(엉뚱한) 것 때문에, 감투를 제아무리 높이 써 봐도 그것은 별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요새(요즘) 그 고베 지진을 보십시오. 그 (참화를 당한) 3,000여명 가운데는 위대한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주: 고베 대지진 1995.1.17 발생, 진도 7.3, 사망자 총 6,434명> 부자도 많이 있고 학자도 많이 있고 말입니다. 그런 것이 그 사람들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도 언제 오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정말로 다른 허드레 것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저는 그 기독교 예수님 말씀 가운데서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가 자기 제자들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제도하려 나아갈 때란 말입니다. 그때 제자 한 사람이 예수께 '주여 저는 지금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장례를 모시고 주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말씀이 '죽은 자는 죽은 자 스스로 장례케 하고 그대는 나를 따르라(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누가복음 9:59> 성자의 길, (즉) 성자와 같은 길이라는 것은 자기 아버지 장례를 모실 그런 시간 여유도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급한 것입니다. 당장에 하늘이 무너지면, 벼락치고 지진이 일어나고 땅이 무너지고 그런 때는 경각에 오늘 목숨이 내일 갈지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금방 몇 시간 뒤에 우리 목숨이 어긋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가 못 되고서 부처의 길을 모르고 죽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죽어서는 금생에 닦은 대로 갑니다. 욕심 많으면 욕심 많은 대로 아귀餓鬼로 가는 것이고 아귀 귀신鬼神이 되는 것이고, 성내기를 좋아해 가지고 그런 사람들은 또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阿修羅 세계로 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사리 분별을 잘못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돼지나 개가 되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보통 상식적으로 말할 때는 돼지나 개나 그런 것은 씨가 따로 있지 않는가. 우리 불교에서는 그렇게 안 봅니다. 삼계윤회三界輪廻라, 자기가 지은 대로 돼지가 되고 소가 되고 사람 되고 천상 가고 한다 말입니다. 또는 부처가 되고, 본래 바탕은 부처인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나쁘게 배우고 잘못 살고 잘못된 버릇 때문에 돼지가 되고 소가 되고 나쁜 사람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삼위일체三位一體... 아까 그 삼신일불三身一佛, 부처님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삼신일불, 삼신일불 이것은 불교의 대승경전에는 그때그때 많이 있습니다. 특히 밀교에서는 더욱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삼신일불의 체계는 어디서 이것은 인용을 했는가 하면은 용수보살龍樹菩薩, 용수 보살은 제2의 석가釋迦라 하는 분입니다. 대승불교는 주로 용수보살 때 이렇게 전개했습니다. 용수보살이 낸 책 가운데서 보리심론菩提心論(보리심석론菩提心釋論)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리심론이란 책 가운데서, 그 당시에 인도 사회에서 용수보살은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한 250년 뒤에 나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보다는 또 역시 한 300년 앞서 나오신 분이지요.
그런데 용수보살이 낸 보리심론이라는 그 책 가운데서 그 당시에 왕자나 대신들이나 학자나 그 당시의 최고 엘리트, 그분들한테 한 수도법문修道法門이 이른바 보리방편문입니다. <주: 보리심론은 보리심과 공성空性을 논함>
(그런데 용수보살이 낸 보리심론이라는 그 책은 그 당시에 왕자나 대신들이나 학자나 그 당시의 최고 엘리트, 그분들한테 한 수도법문修道法門이며 이른바 보리방편문은 금타화상께서 보리심론의 공부요령을 간추린 것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보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체계도 있고, 보리방편문이란 그 내용에 있어서 맨 처음 허두가 마음 심心자가 있지요. 그런데 그 앞의 것은 본문을 조금 우리말로 술어는 그대로 두고서 풀이한 것이고, 그다음 것은 한글로 쉽게 풀이한 것입니다 그 뒤에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삼신일불 아미타불) 그런 체계를 그대로 해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요大要는 무엇인가 하면, 한 말씀으로 대요를 말씀드리면 바로 우리 마음이나 또는 우주만유의 모든 것의 근본 성품이 부처다. 그 부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그런 뜻입니다. 한번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니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은 용수보살의 보리심론, 거기에서 그 당시에 가장 최고 엘리트한테 하신 수도법문인데, 그 대요大要가 뭣인가 하면 이것은 우리 마음이나 산이나 냇이나 태양이나 일체 존재의 근본 성품이 바로 부처고, 부처의 대명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고 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모든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이름이 많이 있는 것은 뭣인가 하면 부처한테 들어 있는 공덕이 하도 많기 때문에 일일이 개념적으로 표현을 못해서 그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는다 말입니다.
지혜智慧로운 면으로 해서 문수보살文殊菩薩, 자비慈悲로운 면으로 해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다스리는 면으로 해서 지장보살地藏菩薩 말입니다. 이러는 것이지, 이 부처 저 부처가 뿔뿔이 있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삼신일불三身一佛,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이 하나의 부처님이다. 이것은 불교 사상 가운데서 핵심적인 사상입니다.
4. 삼위일체三位一體
* 삼위일체(三位一體:trinity)...크리스트교의 정통신조
성부
聖父 ..... 하느님
(Holy Father)
천주 성신 성령 조물주
天主 聖神 ..... 聖靈 造物主
(God) (holy Spirit) (Creator)
성자
聖子 ..... 예수
(Holy Son) (Christ)
<325년 니케아(Nicaea)공의회에서 교회의 정통신조로 확정함.>
그런가 하면 지금 세계적으로 18억 인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 삼위일체란 말입니다. 불교는 한 10억쯤 믿고 있는데 기독교는 18억쯤 믿습니다. <주: 2026년 기준 불교 약 5억명, 기독교,천주교,정교회 약 26억명> 만약 우리가 10억쯤 믿고 있는 불교인하고 18억 믿고 있는 그런 기독교인하고 말입니다. 또 10억이 훨씬 넘게 믿고 있는 이슬람하고, <주: 1995년 당시 이슬람 약 11억명, 2026년 기준 약 21억명> 그 세 종교가 서로 옥신각신 싸운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지금 보스니아나 또는 체첸이나 그런데는 주로 이슬람과 기독교가 지금 싸웁니다. 그렇다고 생각을 할 때에 우리 인간은 참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비극입니다. 이 정보화시대라는 것은 사실은 문화의, 문명의 싸움입니다. 전기(전자기계)나 무슨 기후 (문제의) 싸움이 아니라 앞으로는 문명의 싸움입니다.
어느 종교가 가장 위대한가. 가장 위대한 정보가 내내야 종교나 철학 아닙니까. 세계를 주름잡는 종교가 내내야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싫든 좋든 어떻든 간에 세계 삼대 종교의 핵심을 알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공통점을 알아야지, 그렇지 못하고서는 자기 마음도 편치 못하고 자기 가정도 잘못 다스리고 말입니다. 내 아들이나 딸이 기독교 믿고 무슨 교 믿고 할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설득을 시키겠습니까. 부권父權(부모의 권위)이나 (내세우면서) 억지로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결국은 도망치고 말겠지요.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네 아들이나 딸들이 참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배우기는 많이 배웠지만 무엇인가 갈피를 잘못 잡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네 어른들이 정말로 세계 삼대 종교의 핵심을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싸움판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이것은 예수가 애초에 말한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한 불교의 삼신일불三身一佛도 부처님께서 초기에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차근차근 우리 중생들의 지혜가 발달되니까 중생들의 혼란스런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하나의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아까 불교의 삼신일불도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기독교의 이러한 삼위일체 이것도 역시 니케아Nicaea 공의회, 제가 기억을 했습니다만,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재위 306~337) 황제 때 서기 325년 때에 로마 니케아에서 (제1회) 공의회, 기독교의 주교라든가 또는 신부나 기독교 학자가 모여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논쟁으로) 기독교의 학설이 그때 혼란스러웠습니다. 서로 옳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특히 아리우스(Arius, 256~336)란 그 사제가 즉 말하자면 자기 주장을 내세웠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리우스 주장은 무엇인고 하면, 결국은 예수는 신도 아니고, 예수가 사람인데 무슨 예수가 신의 아들일 것인가. 이렇게 주장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에 기독교를 하나로 통일을 시켜야 할 것인데, 아까 말씀드린 바 기독교 학자, 신부, 주교들이 모여서 즉, 말하자면 기독교의 통합을 봤단 말입니다. 이른바 그것이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란 말입니다.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라 하면 기독교에서 유명합니다. 기독교는 가끔 그와 같이 교리가 혼란스러울 때는 공의회를 엽니다. 공의회 때 비로소 이 삼위일체를 책정했단 말입니다. <주: 325년 니케아 신경(Nicene Creed), 38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채택>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성부聖父와 성신聖神(성령聖靈)과 성자聖子가 이것은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하나다. 이른바 성부 성신 성자, 이 삼위가 오직 한 몸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도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까 삼신일불도 외우기가 곤란스러웠는데, 사람으로 태어난 예수가 어떻게 하느님과 같을 것인가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같다고, 기독교의 전체, 이것이 신조, 신앙의 강령인데 말입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그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입니다. 특히 지금 가장 부정하는 곳이 몰몬교입니다. <주: 몰몬교는 성부,성자,성령을 완전히 독립된 개별존재로 믿음> 몰몬교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미국에 와서) 몰몬교에 가 봤습니다만, 유타가 몰몬교의 한 나라와 같습니다. <주: 유타주의 Salt Lake City가 본산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나 석가모니나 부처님이나 본래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겉만 보고 삽니다. 우리가 겉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석가모니는 석가모니고 부처는 부처고 그러겠지요. 그러나 그 알맹이로, 근본 성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려운 말로 하면 본질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하나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성부 즉, 우주를 다스리고 있고 우주를 섭리하는 하느님이나 또는 그 하느님 가운데 들어 있는, 우주 (가운데) 들어 있는 이른바 성령聖靈이 성신聖神이란 말입니다. 우주 자체가 바로 하느님인 것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생명이 바로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또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신비로운 모든 것을 다 갖춘, 무소불능無所不能한, 능하지 않음이 없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없는 데가 없고, 어디에나 있고 또는 능하지 않음이 없는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이것이 성령이란 말입니다.
성부와 성령, 성신에서부터 그대로 오염되지 않은 사람이 즉, 말하자면 성자가 예수란 말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 하단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禁食祈禱를 모시고 마구니魔鬼와 싸워서 비로소 성인이 되어서 성자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지, 싸우기 전에는 과거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그 업장은 가벼웠다 하더라도 그때는 하나의 범부였습니다. 석가모니께서도 (설산의) 육 년 고행苦行 끝에 (마지막)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팔만 마구니와 싸워가지고서 이런 부처가 되었지만, 대각大覺을 성취하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란 말입니다. 대각을 성취한 뒤에 비로소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예수도 역시 범부 중생인데 요단강 하단에서 모든 번뇌를 다 조복調伏을 받고 깨달아서 천지 우주의 도리와 하나가 되고, 그때는 성자, 참다운 신성한 우주의 아들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명실공히 석가모니釋迦牟尼나 달마(達磨, ?~ 528)스님이나 그들은 다 부처이지요.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나 그런 성인들은 다 부처인데, 우리 중생도 욕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어리석고, 지금 이 모양 이대로는 부처라고는 감히 할 수는 없으나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못난 이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가 느껴야 할 그 어려운 점이 이런 점입니다. 이렇게 못나고 못생기고 더러는 남한테 사기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위대한 용수보살 같은 제2의 석가釋迦란 분도 말입니다. 출가하기 전에는 그냥 별짓 다 했습니다. 궁중에 들어가서 궁녀를 희롱하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간신히 역사力士들의 칼날을 피해 살아났단 말입니다. (그때 반성하기를) '아, 욕심이라는 것이 이렇게 나를 망치는 것이구나!' 다른 사람들, 자기 동아리(친구 3명)들은 다 맞아 죽고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해서 제2의 석가라 할 정도로 위대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를 더듬어 보면 어느 누구나 다 심란한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한 50년 가까이 중 생활을 했으나 제가 자기를 반성할 때는 과거에 참, 조금 더 부지런하고 순수했으면 하는 그런 한심스러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 모양 이대로 우리가 (자기를) 생각할 때는 한심스럽지만 말입니다. 부처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이 하느님 아들이고 또는 부처님이고 하느님이고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나중에 또 우리가 배우기도 합니다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천지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로 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에너지 순수한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 몸이 물질이고 내가 지금 끼고 있는 반지도 물질이고, 내가 쓰는 펜도 물질이고 한데 왜 물질이 아닐 것인가. 내 몸이나 내 패물이나 내 만년필이나 이런 것도 다 원자로 안 되어 있습니까. 어느 것이나 원자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그 원자는 무엇인가? 원자 이것은 중성자中性子 양성자陽性子 전자電子 또는 중간자中間子 그런 하나의 소립자素粒子로 돼었단 말입니다. 소립자 그것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지금 현대 물리학에서 모든 물질 구성한 가장 작은 알갱이가 양자(양성자) 중성자 전자 그런다 말입니다. 지금 전기가 있고, 전자가 있으니까 (전등이) 빛을 내겠지요. 그런데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차원에서는 측정을 못 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측정을 못 합니다. 왜 측정을 못 하는가 하면 일정한 공간성空間性이 없단 말입니다.
전자는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모양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움직이는 것만 보이지 일정한 모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不確定性 원리原理라. 일체 물질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이라.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이 물질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없단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평가(결과)가 다 증명들을 했습니다. 물질이란 것은 근원에 들어가면 결국은 물질이 아니어버린단 말입니다. 에너지만 남습니다. 에너지가 빙빙 돌아서 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에너지의 진동여하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자(양성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모여서 산소酸素가 되고 수소水素가 되고 합니다. (또는) 그것들이 모여서 금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되고 또 수水가 되고 합니다.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것들이 적당히 모여서 우리 몸뚱이를 구성했단 말입니다. 우리 세포細胞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일체 물질을 구성한 근본 알맹이가 항시 움직이고 있어서 무엇인가 모르는데 그런 것들이 모여서 된 우리 몸뚱이가 항시 내 것이라고 지금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내 몸 가운데는 지금 세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포가 한 순간도 지금 머물지 않고서 변화무상變化無常합니다. 신진대사新陳代謝에 지나지 않는 이 세포들을 보고 우리가 지금 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니까 내 몸 이렇게 보이고, 못나게 보이고 잘나게 보이고 그럴련가 모르겠지만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자는 근본 바탕을 보는지라, 그 못나고 잘난 몸뚱아리가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됐단 말입니다.
순수 에너지가 바로 부처님이고,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성품性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우주의 성품이라고 말할 때는 법성法性 그런단 말입니다. 그렇게 모양이 없는 것이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모양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 눈으로 해서 잘나고 못나고 보이는 것이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자는 본래 모양이 없는 그 자리, 천지 우주에 훤히 빛나는 광명光明자리를 성자는 바로 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또는 독사毒蛇나 모두가 다 광명으로 빛나 보인단 말입니다. 이런 법문도 뒤에 나와 있는데, 여실하게 나와 있는 법문을 제가 들어서(인용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우선 지금 바로 이해를 하시고, 다음 것을 보셔야 알으시기가 편리하시기 때문에 굳이 제가 되풀이해서 지금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이 나는 못났다, 나한테 배신한 놈, 저놈은 죽여야 된다. 내 부모를 죽인 저놈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이니까 저놈은 죽여야 된다. 이런 것도 역시 겉만 봐서 그럽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누구나 다 근본 바탕에서 영원적永遠的인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위대한 사람들은 남을 정죄定罪를 못하고 심판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톨스토이(Лев Толстой, 1828~1910) 전집全集도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우리 범부는 범부를 정죄定罪하고 저놈 나쁜 놈 좋은 놈이라고 할 자격이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게 한 그런 자기 원수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고 자기를 핍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모시고 안 했습니까. 그런 것이 무엇인고 하면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이 (원수가) 원수로 보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내가 있고 네가 있고 하니까 나한테 삐딱한 사람은 원수고 싫고 하는 것이지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안 보이니까 원수가 있을 수가 없고 미운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지금 현행된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나 불교의 삼신일불三身一佛이나 저는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본래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행된 기독교는 이 성자 이것은 예수만 성자고 다른 사람들은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종교도 함부로 하고 다른 사람도 함부로 할 수가 있는 그런 소지가 있단 말입니다.
불교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도둑놈이나 누구나 모두가 다 본래로 화신불化身佛이란 말입니다. 기독교 사상도 역시 예수의 본 뜻은, 성자는 예수만 성자일 뿐만 아니라 천지 우주에 있는 모든 현상계 나나 너나 도둑놈이나 또는 나쁜 놈이나 모두가 다 성자란 말입니다.
다만 예수나 석가나 그런 분들은 깨달은 성자이고 (자기가) 성자인 줄을 분명히 아는 성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본래는 다 성자인데 미처 번뇌煩惱에 가려서 깨닫지 못한 성자란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구분하면 될지언정 예수만 성자고 다른 사람은 성자가 아니다. 그래 놓으면 결국 다른 사람하고 자기하고 구분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까 다른 종교를 배격도 하고 그런 허물이 생긴다 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도 앞으로는 꼭 예수님의 본 뜻대로 예수만 성자가 아니라 누구나 다 한결같이 성자다.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지금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강원용 목사(1917~2006)나 안병욱 교수(1920~2013)라든가 그분들은 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이 다종교 사회에 그렁저렁 지금 살 때가 아닙니다. 세계화, 세계화 하지만 우리가 정신적으로 철학적으로 하나의 도리(하나의 진리)를 알아야 참다운 세계화가 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세계화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종교인 불교 기독교가 이와 같이 똑같단 말입니다. 이슬람도 내내야 똑같은 것인데 기독교 신앙에 조금 미치지 못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그네들을 교도敎導하고 가르쳐서 참다운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모두를 회통會通하는, 모두를 하나로 보는 진리의 수행자修行者가 할 일입니다!
- 19950120 청화큰스님 카멜 삼보사 순선안심탁마법회 2/14 (복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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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순선안심탁마법회를 복원하여 기존 텍스트의 일부 누락, 의역, 오타 등을 수정하고 큰스님 말씀을 확인하여 말씀 그대로 정리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근념하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