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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미국 탁구선수단 중국 방문. 핑퐁외교 시작
← 핑퐁외교 수립 30주년을 기념해 미국의 헨리 키신저 대표와 중국 대표가 탁구 시범을 보이고 있다.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석한 미국 탁구 대표가 1971년 4월 10일 중국을 방문했다. 1949년에 중화 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로 미국 스포츠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하기는 처음이었다. 국교도 없고, 오랫동안 서로 적대시해 온 미국과 중국이 갑자기 취한 ‘우호 무드’에 세계가 놀랐다. 이른바 ‘핑퐁외교’의 시작이었다.
미국 탁구단의 중국 방문은 탁구대회에 참가한 미국 대표팀이 중국 방문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들의 방문을 주저하고 고민했지만 결국 이들의 중국 방문을 허락했다. 마오쩌둥이 처음에 이들의 방문을 주저한 것은 당 내의 반응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미 제국주의’를 ‘소련 수정주의’와 아울러 ‘최대의 적’이라며 극구 매도하도록 부추켜 온 사람은 마오쩌둥 자신이었다. 그 급격한 변신이 지도부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급진 좌파에게 동요를 안겨 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도록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소련의 군사위협이었다. 1969년의 진보도 사건 등 중-소 국경에서 일어난 대규모 군사 충돌은 그러한 불안감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마오쩌둥은 ‘미국 카드’를 갖고 싶었다. 미국 역시 소련과 냉전 중이었기 때문에 ‘중국 카드’는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조선
[1993년] 남아공 흑인지도자 크리스 하니 피살
← 대 백인정부 강경노선을 주장했던 크리스 하니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군사 지도자이자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인 크리스 하니(50)가 1993년 4월 10일 피살됐다. 크리스 하니는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에 버금가는 흑인지도자로 대 백인정부 강경노선을 주장해온 인물이다.
1942년 건축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하니는 1982년 ANC의 군사조직인 `움콘토 웨 시즈웨`의 총사령관직을 맡았으며 1991년 남아공 공산당의 총서기직에 이어 ANC 전국집행위원회 위원장직을 갖고 있었다. 만델라가 협상을 중시하는 온건노선을 걸어온 반면 그는 흑인의 권력장악을 위한 무장투쟁을 강조해 흑인청년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아왔다.
그는 1990년 망명지인 잠비아에서 돌아온 뒤 ANC와 데 클레르크 정부와의 평화협상이 시작된 뒤에도 협상을 거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지켜와 지난 수 십 년동안 백인들의 공적 1호로 늘 암살의 위협 속에 살아왔다. 하니의 피살은 백인이 지배하는 남아공 정부와 ANC 사이에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됐다./조선
[1916년] 이중섭 李仲燮 출생
← 이중섭
1916년 4월 10일 태어남 / 1956년 9월 6일 죽음
이중섭은 대표적인 한국 근대 서양화가이다. 193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 제국 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문화학원에 재입학해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자유로운 경향을 공부했다. 40년의 짧은 생애 동안 이전에 보지 못했던 단순화된 형식과 선명하고 강렬한 색감, 그리고 과감한 터치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로 향토의 숨결과 희망을 담아 소·닭·게·어린이·가족 등을 그렸고, 특히 소는 당시 한민족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어려운 시대에 개인적 삶의 고뇌를 지극히 진솔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냄으로써 한 시대의 아픔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서양미술의 어법을 완벽하게 소화·흡수하여 개성적인 조형을 성취한 화가로 평가된다./브리태니커
[1941년] 크로아티아, 독립국가 선포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있는 스베티스테판 대성당(오른쪽 탑이 있는 건물)
1941년 4월 10일 크로아티아가 독립국가을 선포했다.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의 영토였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던 달마치야 및 이스트라 등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로아티아는 10세기에 왕국이 수립된 이후 8세기 동안 헝가리에 합병되어 있다가 투르크, 오스트리아 등의 통치를 받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워진 후, 달마치야와 이스트라는 빈의 지배를 받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한 후 크로아티아는 다른 슬라브족 영토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들에게 점령·분할당하자 크로아티아는 1941년 자그레브에서 독립국가임을 선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크로아티아는 인민공화국으로서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었다가 1980년대말 사회주의 붕괴로 비공산주의계 정부가 탄생했으며,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포했다./브리태니커
[1881년] 고종, 신사유람단 파견
←고종
1881년(고종 18) 4월 10일 고종은 일본의 근대문물을 시찰하기 위해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다. 고종은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극비리에 12명을 암행어사로 임명했다. 신사유람단을 암행어사로 위장한 것은 당시 신사척사운동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4월 28일 일본에 도착해 정부 수뇌들과 접촉하고 각 부처의 실무를 조사했다. 박정양·어윤중·홍영식 등이 내무성·농상무성·대장성·육군성 등 각기 담당분야를 시찰한 후 여행기인 문견기록과 사찰보고서를 작성했다. 100여 책에 달하는 이들 기록에는 송헌빈의 <동경일기 東京日記> 같은 일본견문기와 일본의 근대농법을 소개한 안종수의 <농정신편 農政新編> 등이 있다. 신사유람단의 파견은 자주적인 국내 개화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정치세력의 등장과 이들의 역할에 크게 기여했다./브리태니커
[1912년] 조계종 종정 성철[性徹] 스님 출생
← 성철
1912. 4. 10 경남 산청~1993. 11. 4 경남 합천.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다. 25세 때인 1936년 3월 해인사에서 승려 하동산(河東山)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하동산은 한국 불교의 계단(戒壇)을 통일시킨 승려로서, 그의 제자들이 소위 범어문중(梵魚門中)을 형성했는데 성철도 여기에 속했다. 1947년 경상북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답게 살자"고 청담·자운·월산·혜암·성수·법전 등과 결사(結社)를 하는 등 현대의 선풍(禪風)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55년 비구(比丘)와 대처(帶妻)의 분규가 일어났을 때 해인사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어 그해 동안거(冬安居)에서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問)을 했으며,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다. 1981년에는 한국 선불교의 주요특징으로 지적되었던 지눌(知訥)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한 〈선문정로 禪門正路〉를 펴내 불교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83년 문공부등록종단 대표, 1986년 아시아 종교평화회의 고문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불교의 법맥(法脈)〉(1976)·〈본지풍광 本地風光〉(1982)·〈돈오입도요문강설 頓悟入道要門講說〉(1986)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98년] 홍난파 [洪蘭坡 일본식 이름: 森川潤] 출생
1898. 4. 10 경기 화성~1941. 8. 30 서울.
본명은 영후(永厚). 홍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마을 글방에서 한학을 배웠고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수업을 했다. 15세 되던 해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전문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다시 기악과에 입학하여 김인식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있었다. 1918년 일본에 유학하여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입학했다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했다. 3·1운동 후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다시 귀국했다. 그는 도쿄[東京] 유학시절 비록 일본에서 발간한 것이지만 〈삼광〉이라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를 발간했다. 귀국 후 매일신문사에서 기자생활도 했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1920년 4월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라는 곡의 악보를 그의 단편소설집 〈처녀혼〉의 끝에 실었는데, 1925년 김형준에게 노랫말을 부탁하여 지은 노래가 〈봉선화〉이다. 1922년 경상악우회 주관으로 만들어진 연악회(硏樂會)에서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25년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으며 국내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했다. 〈창조〉에 〈음악만필〉을 집필하기도 했다. 1926년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하면서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929년 졸업 후 귀국하여 창작동요 100곡을 수록한 〈조선동요 100곡집〉 상권을 연악회를 통해 간행했다. 1931년 2월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를 역임했으며, 빅타레코드사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홍성유·이영세 등과 난파 트리오라는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3중주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33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동요 100곡집〉 하권을 펴냈다. 1936년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취임하여 경성방송관현악단(지금의 KBS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지휘자로 활약했다. 1937년 한국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했는데, 곡은 모차르트 교향곡 제41번 C장조 〈주피터 교향곡〉이었다.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연악회를 통해서 〈음악만필〉을 간행했다. 조선음악협회의 평의원으로 있으면서 이광수 작사의 국민가요 〈희망의 아침〉을 작곡하기도 했다. 1941년 늑막염이 재발하여 경성요양원에서 죽었다.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 1968년 수원 팔달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 건립, 1969년 난파음악상이 제정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바이올린 곡 〈애수의 조선〉·〈로만스〉·〈여름밤의 별들〉·〈라단조 가보테〉·〈동양풍 무곡〉, 가곡 〈성불사의 밤〉·〈사랑〉·〈금강에 살으리랐다〉, 동요 〈병아리〉·〈고향의 봄〉·〈개나리〉·〈할미꽃〉 등이 있다. 또한 〈음악일화〉·〈동서음악의 비교〉·〈조선문화 20년〉 등의 평론과 〈서울 계신 K형께〉·〈첫 무대의 기억〉·〈악단의 뒤에서〉 등의 수필, 〈최후의 악수〉·〈처녀혼〉 등의 소설도 썼다. 한때 홍난파가 흥사단가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96년 정부는 김세형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면서 그가 흥사단가를 작곡했다고 밝힘으로써 흥사단가의 작곡자는 홍난파가 아니라 김세형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홍난파의 대표곡인 〈봉선화〉를 비롯해 그가 작곡했다는 여러 곡들이 친일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어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1879년] 한말의 의병장 안규홍 安圭洪 출생
1879(고종 16). 4. 10 전남 보성~1911. 5. 5.
본관은 죽산(竹山). 별명은 계홍(桂洪)·안담살이·안진사. 자는 제원(濟元), 호는 담산(澹山). 아버지는 달환(達煥)이다. 어린시절에 머슴살이(담살이)로 홀어머니를 모셨다.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뒤 일제가 대규모 병력을 이용해 의병들에 대한 살육작전을 벌임에 따라 의병투쟁의 양상도 유격투쟁으로 바뀌고 평민의병장의 등장이 보편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하여 처음에는 유지들에게 도움을 얻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함경도 출신으로 순천 부근에서 활동하던 강성인(姜性仁) 부대에 투신하여 부장(副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강성인이 양민을 살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하자 1908년 그를 군율대로 총살하여 군기를 확립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부대에는 염재보(廉在輔)·송기휴(宋基休)·이관회(李貫會)·송경회(宋敬會) 등이 있었다. 이들은 전라남도 지역의 시장을 돌면서 인원을 보강했고, 그 과정에서 병법에 밝은 오주일(吳周一)이 합세했다. 보성 동소산(桐巢山)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1908년 일본군이 '보성폭도토벌대'를 구성하여 보성·벌교·순천 등지에 포진하여 의병대를 공격하자, 매복하고 있다가 보성헌병분견소의 헌병을 기습하여 2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뒤 대원산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다. 6월 보성군 내에 있으면서 부하를 시켜서 일본군이나 일본군 통역관을 살해하기도 하고, 헌병·경찰 연합토벌대가 습격해오자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8월 장경선(張京善)을 참모로 삼아 병력을 증강하고 진산(眞山)에 집결했다. 이때 헌병분견대 병력이 인근 수비대 경찰과 연합토벌대를 만들어 포위해오자, 의병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직접 천보총(千步銃)으로 적의 선봉을 쓰러뜨렸다. 이에 의병들이 용기를 내어 전투에서 승리했다. 1909년 1월중에 밀정이 있어 아군의 정보가 새나갔지만 이를 모른 체하고 적의 행군요소에 복병하고 대기하다가 세 방면으로 공격하여 적을 무찔렀다. 3월에는 원봉에 주둔하던 적을 기습했다. 이때 와타나베 부대[渡邊部隊]와 2개월에 걸쳐 10여 차례 접전했으며, 와타나베가 한국인 첩자를 보냈으나 이를 역이용하여 와타나베를 처형했다. 보성전투에서는 전과를 거두었지만 유격장 안택환(安宅煥)과 서기 임준현(任準鉉)이 전사하여 장흥 전세가 불리해 백사정(白沙停)으로 후퇴했다. 이때 부하들이 대거 일본군에 투항함에 따라 7월에 부대를 해산했다. 9월 25일 귀향하던 중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밀고하여 부하 염재보·정기찬(鄭基贊)과 함께 토미이시 부대[富石部隊]에 붙잡혔다. 그뒤 광주에 수감되었다가 대구로 옮겨진 뒤 1911년 옥사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39년] 순국지사 송병순 [宋秉珣] 출생
1839. 4. 10 충남 회덕~1912. 2. 4.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병선(秉璿)의 동생이다.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達洙)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뒤에는 근수(近洙)와 외할아버지에게 배웠다. 1888년(고종 25)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3년(광무 7) 고종이 홍문관서연관으로 임명했으나 친일파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해 11월 〈토오적문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두문불출했다. 1912년 일본 헌병이 은사금(恩謝金)을 가져왔으나 거절했고, 일제가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거절한 뒤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저서에 〈학문삼요 學問三要〉·〈사례축식 四禮祝式〉·〈용학보의 庸學補疑〉 등이 있다. 1914년 영동 문충사(文忠祠)에 제향되었다. 1973년 대전역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401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 [Theodosius II] 출생
← Bust of Theodosius II
401. 4. 10 콘스탄티노플~450. 7. 28.
동로마 황제(408~450 재위).
온화한 성품에 학문을 좋아했으나 남의 말에 쉽게 잘 넘어가 인척들과 대신들의 손에서 번갈아 국정이 이루어졌다.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383~408 재위)의 아들인 그는 402년부터 부왕과 함께 공동통치를 했으나 408년 부왕이 죽자 동로마 제국의 단일군주가 되었다. 처음에는 어린 테오도시우스를 위해 동로마의 민정총독인 안테미우스가 섭정을 했으나 그는 414년에 쫓겨나고 누이인 풀케리아가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로 섭정을 했다. 통치시대 내내 그는 한번도 직접 국정을 관리해본 적이 없었다. 테오도시우스는 통치기간중 아프리카의 반달족과 페르시아, 그리고 훈족을 막기 위해 여러 번 군대를 보냈다. 그의 군대는 422, 447년 2차례에 걸쳐 침입해온 페르시아군을 격퇴했으나 로마의 아프리카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고(429) 있던 반달족에 대해 벌인 군사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테오도시우스는 훈족의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에 대해 회유정책을 폈으나 훈족은 441~443, 447년에 각각 도나우 강 지방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또한 그가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한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적인 교리를 내세우자 이에 대한 분쟁으로 인해 큰 논란이 일기도 했고,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공의회에서 해임당했다.
테오도시우스는 3가지 사업에 그의 이름을 남겼다. 첫째, 413년 콘스탄티노플 주위에 난공불락의 성을 쌓은 일인데 사실은 안테미우스가 한 일이었다. 둘째, 425년 콘스탄티노플 대학을 건립한 것으로, 그는 실제로 이 일에 관여했다. 셋째, 312년 이후 제정된 법령들을 성문화한 테오도시우스 법전(438 간행) 편찬을 감독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사냥중 사고를 당해 죽었고, 딸 리키니아 유독시아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425~455 재위)와 결혼했다.
[1512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 [James V] 출생
1512. 4. 10 스코틀랜드 웨스트로디언 릴리스고~1542. 12. 14 파이프 포클랜드.
스코틀랜드의 왕(1513~42 재위).
통치기간 전반 절반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친(親)프랑스파와 친잉글랜드파 사이의 싸움판에서 볼모와 같은 처지였다.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한 이후에 그는 로마 가톨릭 신앙을 지지하며 프로테스탄트 귀족들과 대립했으며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이룩했다.
제임스는 생후 17개월에 부왕인 제임스 4세(1488~1513 재위)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친프랑스 입장에 있던 올버니 공작 존 스튜어트와 친영국편의 선두에 있던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사이에 권력 장악 싸움이 심화되는 가운데 각 진영은 서로 어린 국왕의 영지를 차지하려고 했다. 제임스의 어머니 마거릿 튜더는 남편인 앵거스와의 제휴를 중단하고 올버니와 손을 잡음으로써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1524년 올버니는 프랑스로 물러났고 앵거스는 제임스를 1526년부터 연금시켰다. 제임스는 2년 동안 연금 상태에 있다가 1528년 탈출했고 앵거스를 잉글랜드로 몰아냈다. 1530년 이미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자신의 권력을 굳혀놓고 있었다. 1534년에는 숙부인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와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538년 프랑스의 귀족 마리 드 기즈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고 잉글랜드와 대립관계에 놓였다.
1542년 헨리 8세의 군대가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자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의 이반(離反)으로 무력해진 제임스의 소규모 군대는 잉글랜드로 국경을 넘었으나 1542년 11월 24일 국경 근처 솔웨이모스에서 힘없이 꺾였다. 이 패배는 제임스로 하여금 신경쇠약에 걸리게 했을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딸이며 적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메리 스튜어트(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태어난 지 1주일 만인 1542년 1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자들 중에는 메리 스튜어트가 1567년에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포기했을 때 섭정이 된 머리 백작 제임스(1570 죽음)가 있다.
[2004년] 미술사학자 최순우씨 옛집 개관, 시민문화재 제1호
[2000년] 남북정상회담 서울-평양에서 동시 발표
2000년 4월 10일 오전10시. 남북정상회담이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평양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 장관이 송호경(宋虎景) 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2000년 3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첫 접촉을 한 이후 세 차례 중국에서 만나 남북합의서에 서명한 결과였다.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불과 사흘 앞두고 터져나온 빅 뉴스는 전세계 매스컴의 이목을 서울로 집중시켰다. 국민들은 그러나 한나라당 133석, 민주당 115석, 자민련 17석으로 야당인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줬다. 남북한은 1994년 6월에,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그해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으나,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회담이 열리지 못했었다.
[1970년] 폴 매카트니 비틀스 탈퇴, 비틀스 10여년 만에 해체
← McCartney live in Prague, 6 June 2004
1970년 4월 10일, 비틀스(The Beatles)의 소속사가 폴 매카트니(McCartney, Paul, 1942~ )의 탈퇴를 공식 발표함으로써 10여년간 전세계 젊은이들을 열광과 흥분 속으로 몰아넣었던 영국 출신의 4인조 록그룹 비틀스가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비틀스 기획자 엡스타인이 약물과다복용으로 사망한 뒤 구성원 간에 내연해 온 불화가 폭발한 것이었다.
비틀스의 깃발을 처음 올린 사람은 존 레넌이었다. 고등학생 때인 1956년에 쿼리멘이라는 록그룹을 조직한 레넌은 이후 폴 매카트니(1957년)·조지 해리슨(1958년)과 합류, 영국 리버풀과 독일 함부르크를 오가며 명성을 쌓아갔다. 마지막으로 링고 스타가 합세하고 진용이 갖춰지자 이들 19∼22세 더벅버리 4인조는 1962년 EMI사와 계약을 맺고 비틀스 이름으로 데뷔 싱글앨범 ‘Love Me Do’를 발표한다.
뒤이어 나온 앨범들이 잇따라 히트하자 이들은 미국 정벌에 나섰다. 1964년 2월 7일, 뉴욕 케네디 공항은 이들을 맞는 3000여 소녀팬들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이틀 후 TV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을 때는 7300만이나 되는 미국인이 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8년간 12개의 앨범과 211곡이 발표됐고 팔려나간 앨범만도 1억6000만장에 달했다. 20세기 최대 음반 판매 기록이었다.
1960년대가 그 종말을 고할 무렵, 록 뮤직 세계에 발생한 사건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비틀즈(The Beatles)의 분열이다. 팝 뮤직의 세계에 눈부신 빛을 끊임없이 던져주던 그룹이 바로 그들 비틀즈였던 것이다.
4월 10일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는 인터뷰를 통해 비틀즈를 탈퇴할 것을 선언했고, 비틀즈는 해체되고 만다. 각 신문은 이 역사적인 종말을 대서특필했고, 그 사실을 접한 팬들 중 6명이 아쉬움의 표시로 자살을 한다. 17일 폴의 첫 솔로 앨범 Macartney가 발표됐다. 조용하고 담담한 앨범이었다. 이번엔 린다에게 The Loverly Linda를 헌사 했다.
5월 8일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 Let It Be가 발표됐다. 15개월이라는 긴 제작 기간을 거쳐나온 이 앨범의 타이틀은 원래는 Get Back이였으나 Let It Be로 발표되었으며 타이틀 곡은 폴의 철학이 담긴 솔로 곡이었다.
75년 비틀즈가 법률적인 문제를 매듭짓는데 까지 많은 반목과 유대를 가지게되고 80년 존 레논이 총에 맞아 숨짐으로써 끊임없이 논의되었던 재결합이 불가능해지면서 비틀즈는 역사 속의 그룹으로만 생각되어져왔다.
폴은 꾸준한 음반활동을 통해 인기를 모았고, 존은 요코와 결합해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 냈으나 조지는 방글라데시 기아 공연을 비롯한 평화의 전도사로 링고는 영화와 음악을 오가며 자신의 꿈을 펼쳤다.
[1963년] 미국 핵잠수함 드레셔호 대서양 해상에서 침몰. 129명 실종
잠수함 사고 중에서 가장 최악의 것은 1963년 4월10일 정기 수리를 끝낸 후 수밀도 시험을 하다 가라앉은 미국의 드레셔(Thresher)함 사고다. 107명의 승조원을 태운 드레셔함은 최대 잠항 심도를 시험하던 중 조종 불능 상태에 빠져 수심 2560m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대개 10m씩 내려갈 때마다 1기압씩 압력이 높아진다. 수면이 1기압이므로, 수심 10m는 2기압, 100m는 11기압이 된다. 특수한 훈련을 받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기압의 한계가 대략 10기압이다. 잠수함은 최고 500m까지 들어가므로 51기압까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하로 내려가면 특수강으로 만든 잠수함의 압력선체가 “쩡쩡” 하고, 잠수함 승조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를 내며 찌그러든다. 드레셔함은 257기압(2560m)의 심해로 들어갔으니 누구도 살 수가 없고, 누구도 구하러 들어갈 수 없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국호 ‘대한민국’ 제정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의 국호였으며 1948년 8월15일 건국과 함께 계승한 우리의 국호이다.
1919년 4월 10일 오후10시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租界)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 밤을 새워 열린 임시정부 첫 의정원(오늘날의 국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호의 결정이었다. 참석 의원은 29명. 처음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이 신석우(申錫雨·1894-1953). 그러나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여운형(呂運亨)의원이 반대했다. “대한(大韓)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자 신석우가 되받았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대한민국’ 국호가 채택됐다.
[1917년] 예술-생활 용품의 울타리를 튼 마르셀 뒤샹의 ‘변기’ 등장
← Fountain by Marcel Duchamp, 1917, photograph by Alfred Stieglitz.
1917년 4월 10일, 뉴욕 그랜드 센트럴 갤러리에선 미술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반역이 이루어졌다. 앙데팡당전(salon des indépendants).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젊고 패기만만한 작가들의 전시회였다. 이 전시장에 남성용 소변기 하나가 등장했다. 주최측은 경악했다.
출품자는 이 전시회의 운영위원이기도 한 마르셀 뒤샹(Duchamp, Marcel, 1887~1968). 그는 어느 공중변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남성용 소변기를 떼어다 《샘, Fountain》이란 제목을 붙이고 ‘r mutt’ 란 이름으로 사인, 당당하게 작품으로 출품했다. ‘r mutt’란 것도 실은 뉴욕 변기 제조업자인 리처드 머튼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20세기의 숱한 미술가들 가운데 마르셀 뒤샹 만큼 생전의 무명과 사후의 영광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작가도 드물다. 그는 만년에 미술가를 포기하고 체스 연구에 생애를 바쳤다. 그러나 뒤샹이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미술을 만든 두 거장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뒤샹의 변기가 함축한 것은 '예술은 더 이상 풍경이나 인물을 손으로 재현하는 테크닉이 아니다'는 메시지였다. 그것은 예술가 정신, 그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뒤샹은 예술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었다. 뒤샹의 미학은 물건이 넘쳐나는 대량생산 시대의 미학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1900년] 서울 종로에 최초의 민간전등 가설
"전기회사에서 작일부터 종로에 전등 삼좌를 연하였더라." (황성신문 1900년 4월 11일자)서울 종로 거리에 가로등이 설치됐음을 알리는 이 짧은 기사는 수천년 동안 내려오던 생활방식을 바꾸는 혁명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해 뜨면 나가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 쉬는 일출이작, 일입이식 농경사회의 수천년 생활습관이 무너지고 휴식의 시간이었던 밤이 활동의 시간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인류가 밤을 정복하려는 오랜 시도에 결정적으로 성공한 것은 1879년 미국의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하면서였다. 모닥불, 횃불에서 석유-가스등에 이르기까지 이전의 각종 등불이 겨우 주위를 밝히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에 비해 전기를 이용하는 백열등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고 급속도로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우리나라에 전등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87년 3월 (6일). 에디슨의 발명 이후 불과 8년 만이었으므로 제법 빠른 셈이다. 더구나 공사 담당자가 에디슨이 설립한 회사였고 경복궁 향원정 옆에 설치된 발전기도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것으로 동양 어디에 내 놔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전등 등장은 사람들의 밤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사랑방에서 호롱불을 밝히며 투전판을 벌이던 남정네들은 대낮처럼 환한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전등을 보러 일부러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나라 `전기의 날`은 이날을 기념해 1966년 제정됐다.
[1847년] 미국의 신문왕 퓰리처(Pulitzer, Joseph, 1847~1911) 출생
← 죠지프 퓰리쳐
헝가리 출생. 1864년 미국으로 건너가, 1868년 세인트루이스에서 독일어 신문 《베스틀리헤 포스트》의 기자로 활약하다가, 1869년 미주리 주의회(州議會) 의원으로서 정계에 진출하였다. 얼마 후 자기가 몸담았던 신문사 경영자가 되었다. 1878년에는 파산 직전의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지(紙)를 사들여, 《세인트루이스 포스트》와 합병하여 《포스트 디스패치》로 개제(改題), 경영에 성공하였다.
1883년에는 다시 《뉴욕 월드》를 매수하여, 센세이셔널한 뉴스의 보도와 캠페인 등으로 전미국 제일의 발행부수를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허스트의 《모닝 저널》과 맹렬한 경쟁을 전개, 양자의 센세이셔널리즘은 후세에 ‘옐로저널리즘’이라는 악명(惡名)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1890년경부터 건강이 악하되어 마침내 시력(視力)을 잃었고, 1906년에는 ‘자유호’라는 배를 타고 유랑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1903년 6월 컬럼비아 대학에 저널리스트 교육을 위한 기금으로 2만 2000달러를 기증하여 신문학부를 창설하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1917년 ‘퓰리처상’이 제정되었다.
[1829년] 구세군의 창설자 부스(Booth, William, 1829~1912) 출생
← William Booth
노팅엄 출생. 15세 때 신앙을 가지게 되어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었다가 1861년에 사임하였다. 1865년 동부 런던의 빈민굴에서 전도하기 시작한 것이 구세군의 발단이 되었다. 1878년 구세군을 조직, 전도와 함께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시작하여, 《암흑의 영국에서:In Darkest England and the Way Out》(1890)는 당시 빈민들의 실정과 그 구호책을 제창한 명저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구세군은 그의 생존시에 영국을 비롯한 세계 58개국에 걸쳐 설립되었다. 부인 캐서린(Catherine)도 내조의 공과 더불어 설교자, 지도자로서 유명하다.
그밖에
2004년 원로배우 독고성씨 별세
2004년 일본 영화 ‘카게무샤’ 두 주역인 전국시대 앙숙 오다·다케다 가문 화해
2003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삼국유사’를 국보 제 306-(2)호로 승격
2003년 청남대 기자단에 내부 첫 공개
2001년 네덜란드 상원 안락사 합법화 의결. 세계최초로 안락사 합법화
1999년 국방과학연구소, 사정거리 300km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
1999년 독도 유인등대 가동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협상 타결
1997년 공덕동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1997년 야구인 김동엽씨 사망
1995년 북미 직통전화 개통
1995년 중국 혁명원로 천윈(진운) 사망
1991년 남북직교역 승인
1984년 호주 의료진, 최초 냉동 수정아 출산 성공 발표
1982년 유럽연합(EC)10개국, 아르헨티나 상품 수입금지 긴급 결정
1980년 소련. 중국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실효
1979년 과천 제2정부청사 기공
1973년 우리나라 여자탁구 첫 세계 제패
1972년 한국 히말라야 등반대 조난. 한국인 3명 등 15명 사망
1972년 세균무기(생물무기) 및 독소무기의 개발, 생산 및 비축의 금지와 그 폐기에 관한 협약(BWC) 조인
1968년 뉴질랜드 해안에서 워하인호 침몰
1968년 남아공- 요코부스 푸케 대통령 취임
1966년 월남 불교도 키 수상 부에(후에) 선전
1964년 국공유지 불하사건
1964년 소련 저개발국 상품에 관세 철폐 발표
1963년 한국-콩고민주공화국 국교 수립
1961년 한국 국제언론인협회(IPI) 가입
1958년 공군수송기 납북 미수사건 발생
1957년 수에즈운하 개방 재개
1957년 서울대 법대생들 이강석(이승만대통령의 양자)의 입학반대 동맹휴학
1953년 함마슐트 UN 사무총장 선출
1949년 유엔(UN) 안보리, 한국 가입안 부결
1941년 미국 그린란드에 미군기지 설치
1930년 보통학교 조선어사전 제3판 출간
1927년 미국의 생화학자 마셜 니런버그 출생 - 유전정보 해독에 이바지해 노벨상 수상
1882년 각료직에 오른 최초의 여성 정치가 퍼킨스 출생
1755년 ‘동종요법’ 치료체계를 확립한 독일의 의사 사무엘 하네만 출생
1583년 네덜란드 법학자 그로티우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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