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내기 다마내기
부산 북항 美軍전용 8부두에서 전포동을 관통하는 철로 우암선을 통해 탱크, 장갑차, 군용트럭이 화차에 묶여 하루에 수도 없이 북으로 가는 열차에는 미군 MP가 무개차에 승차 하거나 난간에 매달려 검은 선그라스(레이 엔 벤) 붉은 가죽장화에 호각을 물고 지휘봉을 휘두르며 사고예방을 위해 철길에서 코크스를 줍던 민간인 접근을 막으려 애쓰던 6. 25 전란 상흔이 여전히 남아 있던 때입니다.
우암선 철로는 우암동, 전포동 판자촌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다녔던 철길입니다.
모두들 먹거리 입을 거리 잠 잘 곳이 부족하였지만 우리 집은 부친이 ‘교사’라서 그런대로 동네 또래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정도로 이웃보다는 사정이 나았지요.
내가 8살 국민학생 시절.
우리 집 앞 철길옆 ‘기와집’에 군인 가족이 이사를 왔습니다.
군용트럭에서 이삿짐을 내릴 때 어른들이 나누는 말씀은 육군중위가 전후방 교대로 서울에서 부산의 군수기지 사령부로 전입을 왔다는 겁니다.
도심이지만 이웃이 이사를 오는 것은 ‘작은 사건’으로 이웃들이 거들기도 했었지요.
우리가 어릴 때는 국군의 ‘다이아몬드’는 우상인데 그 중위는 내가 보기에도 귀공자 타입으로 ‘매끈한’ 용모였고 그 부인도 ‘세상에나! 저런 여자도 다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편 버금가도록 뽀오얀 피부에 ‘조물주가 정성들여 만들었지 싶은’ 미모였습니다.
제게는 그 부인보다 ‘중위’의 딸과 아들이 레이스 달린 치마와 멜빵 바지를 입고 아버지 손을 잡고 지프차에서 내렸을 때 “세상에나!” 그 남매는 백설공주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그런 ‘표백된 얼굴’로 온실 속의 화초 같았습니다.
‘우짜 몬 저래 이쁜 지집아가 있을 꼬? 머시마도 영판 가시나 같네?’
나는 이삿짐이 정리되고 ‘시차’(?)가 적응될 즈음 아버지 심부름을 빙자하여 ‘기와집’을 들락거리다가 동생 성민이는 6살, 그 누이는 7살 연년생으로 아직 학교 갈 나이가 아니란 것과 부산에 친척이 없고 기차가 위험하여 아이들이 길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첩보를 입수(?) 했지요.
당시 우리들의 놀이라는 것이 ‘연탄재 던지기’ ‘비석 치기’ ‘깡통 차기’ ‘땅따먹기’ ‘자치기’ '말타기' 등으로 흙먼지 속을 뒹구는 것인데 우리들이 뒤엉켜 노는 것을 언제나 그 남매는 손을 꼭 잡고 멀리서 해바라기하며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겁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 억양 강한 경상도 사투리와는 다른 서울 말씨의 이방인, 레이스 달린 치마에 뽀얀 피부의 남매는 시락국 위의 뜬 참기름이었고 부러움과 시기심으로 보는 토박이들에게 따돌림의 대상인지라 놀아주는 상대가 없어 남매는 언제나 흙먼지 속에 뒹구는 하이에나를 보는 금강앵무 수준의 관전자였습니다.
추위를 막아 줄 두꺼운 옷이 없어 일 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살아 누런 콧물을 줄줄이 잇고 있던 우리와는 판이하여 딴 세계에서 온 듯 한 그 남매를 동네 하이에나들은 보이기만 하면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 고기♬”라고 많이도 놀렸고 그 남매는 눈물을 찔끔 그리며 집으로 피해갔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무 죄 없는 ‘고래 고기’가 왜 그곳에 붙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놀릴 때 힘도 없는 제가 친구들에게 ‘그만 두라’며 그 남매를 보호하려고 다툼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린 마음의 애틋함인가? 여물지 못한 풋사랑인가?
저의 마음 한구석을 ‘서울내기’가 자리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고 가슴앓이가 시작되자 용기를 내어 과감히 실천에 옮겼습니다.
‘기와집’ 대문을 기웃거리다가 “성민아! 놀자!” 어린 흑심을 드러냈지요.
물론 그 집에는 비스킷이나 땅콩 같은 이국적인 먹을 거리가 풍부한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그 부인이 저를 싫어하지 않고 반기는 것이 저에게는 큰 용기의 원천이 되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성민이 어머니는 남매가 너무나 허약하여 은근히 부산 적응을 걱정하였고 대문을 열면 철길이라 사고를 걱정하던 터에 ‘일본식 너른 정원’이 있고 ‘제 자식들에게 싹싹한’ 교사집 아들이 동무하자고 와서 수목이 울창한 정원에 데려가서 사고 걱정 없이 놀 수 있는 여건 인지라 아마도 매우 반가운 손님을 맞는 그런 심정이었지 싶어요.
“대웅아 성민이 좀 데리고 놀아줘” 간식까지 챙겨 주며 코끝을 간질이는 서울 말씨는 부산의 거센 사투리에만 적응 된 나의 귀에는 바로 ‘금쟁반에 구르는 옥구슬’소리였고 그 집 안방에서 나던 스킨 향기는 지금 생각해도…….
내가 오후반일 때는 같이 놀다가 12시 경에 등교를 했고 그 놀이 현장에는 언제나 남매가 함께했지만 지금은 그 소녀 이름이 ‘영옥’이었나? 생각이 아련하네요.
이른 봄 오후 반 때입니다.
한참 벚꽃이 만발하여 우리 집 대문 옆 넓은 정원 가장자리에 30년도 더 된 벚나무 아래에서 그 남매와 셋이 놀고 있는데 소녀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쳐다보다가 “벚꽃 한가지를 방안 꽃병에 꽂아 두고 싶은데 꺾어 줄래?”
인형같은 백설공주가 난장이에게 청탁을 한 겁니다. 사건이지요. 큰 사건.
열혈이 넘치는 내가 ‘하늘의 별을 따 주라’고 해도 ‘실시!’할 판인데 그 딴 ‘벚꽃 가지 하나 꺾어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못 들어주겠습니까?
'그런 별것도 아닌 부탁을 무에 그리 어렵게 하노' 갑자기 힘이 났지요.
다람쥐처럼 나무에 올라 아래가지를 타고 윗가지를 잡으며 제일 탐스럽게 핀 꽃을 고르는데 마침 교육대학에 다니는 누나가 등교하면서 ‘우리’를 보고는 놀립디다.
“대웅이 니 그 꽃 꺾어서 저 딸애 주려고 그라 재?”(아시면 그냥 가시지....)
누이는 전개된 '풍경화'를 보고는 내 마음을 꿰뚫은 겁니다.
“아! 아이다! 누부야! 그기 아이다. 그냥 나무에 올라 와 본기라”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이 이토록 강하게 부인하겠습니까?
'누부야는 무당 점바치가? 우찌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꼬? 희안하네!'
누이에게 속마음을 들켜버린 어린 청춘이 얼굴이 홍당무로 달아오르고 가슴이 콩닥거리는 것이 ‘의중을 찔린’ 풋사랑 1급 기밀이 들통 난 그 자체였지요.
그래서 후다닥! 나무를 내려 왔어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누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문을 나섰지요.
영문을 모르는 소녀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니? 꽃을 꺾으면 야단맞니?”
“아! 아이다! 내가 그냥 그래 봉기라. 내 다시 꺾어 줄게”
또 다시 나무에 올라 소담스러운 가지를 꺾어 소녀에게 주었더니 향기를 맡는 표정을 지으며 너무너무 행복해 하였고 나는 천하를 가진 것 같이 만족해하는 순간 학교 간다던 누이가 대문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오늘 체육시간이 있는데 운동화를 안 갖고 간기라…….”
은밀히 숨겨 둔 나만의 비밀이 누이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랐고 소담한 벚꽃을 치마 뒤로 감추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누이를 보는 소녀를 본 누이는 '그 것 봐라! 이 누나 말이 맞지?' 하는 뜻으로 빙그레 웃으며 나를 한참이나 주시하더라고요.
그 때! 어린 마음에 얼마나 무안하고 창피했던지…….
2년여 세월이 지나 그 소녀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 가는 날.
철길 옆 돌담 벽에 등을 대고 해바라기를 하며 서운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멀리서 보고 있는데 성민이는 서울로 간다고 좋아하면서 나에게 뛰어와 멜빵바지에서 색구슬을 한주먹 꺼내 정표로 주며 헤어짐을 아쉬워했지만 그 소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울로 간 소녀를 가슴에서 지우는 데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나에게는 지금도 뇌리에 남는 사건이지요.
아! 서울내기 다마내기!
첫댓글 들어보니 옛 생각이 나네요. 국민학교 1,2학년 시절이고 서구쪽에 토박이라 아미동,대신동,보수동 산꼭대기까지 판자집이 즐비헸지요
충무동 해안가에도 천막, 판자집에 사는 반친구들이 반장인 나에게 친할려고 자기집에 초대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하교는 야전병원과
군부대로 쓴다고 나무책상을 들고 임시판자교실로 이사한 기억이 남니다. 한반에 75명씩 되었죠.
저희는 육군 형무소와 철조망 한 줄로 구분이 되어 있어서 죄수복(등에 P자를 그린) 빡빡머리 수인을 보며 공부를 했답니다.
그 수인들이 헌병이 보지 않으면 건빵 봉지를 우리에게 철조망 넘어로 던져 주기도하여 우리에게는 '인심 좋은 중대가리' 로 인식되었답니다.
유년 시절의 풋풋한 첫 사랑 같은 진솔한 다큐
이보다 더 재미있을 순 없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기님의 슬기와 재치, 유머, 인간성
모두가 돋보이십니다
참고로 저희 집에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저의 친구가 놀러 오니
오빠가 속으로 그 친구를 좋아해서
무화과 따 준다고 용감하게 올라가다
떨어져서 무릎을 어마무시 다쳐 피가 줄줄 나는데도
안 아프다면서.......쑥스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도 서울내기 다마내기인데요 ㅋㅋ
'자미'를 드릴 그 무엇이 있어야하고 글이든 시든 무조건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재미는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글쟁이'로는 문법이나 구사하는 어휘의 선택 등 너무 부족함을 느낍니다.
우리 '문학회'에서는 평가회가 있을 때 강사를 모셔서 강론을 듣습니다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김선생님의 좋은 댓글에 항상 용기를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나기'에 버금가는 작품이
사소한 글편집의 오류로 '옥에 티'
가 되는군요.
조금만 읽기 좋게 편집을 해 주세요^^
그리고 어릴 적 이름이
'대웅'이셨나요?
동생이 6년 후에 났고 동생을 보기 전까지는 제가 6번째 막내 역을 했지요.
고향 거제에서는 막내에게 대(大)자를 붙여 크게 되라고 호칭하는 집안 내력이 있었지요.
동생이 나자 정식으로 호적에 '영명하신 임군으로.....' 를 뽄 따 영명이라고 했지요.
제 이름은 컴퓨터 상에 대한민국에 6명이 뜹디다. 그 중 김해 세무서장도 포함된답니다. 홍영명!
햐! 천기를 누설했네!
'글쓰기' 상에 띄어 쓰기나 줄바꾸기 등등 신경을 씁니다만 막상 올려 놓고 보니 전부 컴상에 문법(줄바꾸기. 띄어 쓰기, 보기 좋게 줄 나누기 등등)으로
바뀌어져 있네요. 저도 어떻게 할 방법을 모르겠어요.
채미있습니다. 이제야 홍영명 이란 좋은이름을
일게되어 감사합니다. 옛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어서 추억을 좋은추억을 공유해 보입시다.
김샘! 감사합니다.
곰보야 쥐잡아라 쌔또쌔또 나간다 ---- 운아운아 우납세 울고간다 ---- 등 뜻도 의미도 모르고 철없든 시절에 동네아이들 따라 많이 불렀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맞네요.
오비디를 통하여 탱크(위장포를 씌어서), 야포, 지프 등이 전부 북으로 올라가거나 하얄리야부대로 직송했습니다.
열차가 지닐 때면 방패연 연줄에 사기를 입힌다고 유리조각이나 사기 그릇 조각을 철로에 얹어 가루로 내기도 했지요.
그러면 미군 MP들이 철로 주변에 이물질이 있는지 관찰하다가 달려 나오기도 하고.....
큰 대 못을 철로 위에 얹어 납짝하게 만들어 갈아서 칼로 쓰기도......
지금 생각하면 석탄 열차 번호가 '미카' 거나 '티지'를 앞에 달고 고유번호 1234가 붙었고 기관사님이 철길에 얹혀 있는 잡동사니를 보고는
신경이 쓰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