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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도와 개혁·자주정책 적극 추진
성균관 수장으로 정몽주 등 발탁 신유학 진흥
아버지 이곡은 ‘공녀 차출 폐지’ 상소문 유명
목은 이색 초상화. |
강화도 마니산 꼭대기의 참성단(사진=블로그 ‘바다는 깊고푸르다’). |
공민왕의 그림으로 알려진 ‘천산대렵도’. |
몽골 침략전쟁을 보는 시각
‘칭기즈칸의 세계화 전략’, ‘몽골병법’ 운운하며
13세기 세계적인 침략자이자 도살자인 칭기즈칸과 그 일당을 미화하는 글이나 말을 종종 접하곤 한다. 그것이 “칭기즈칸의 전략을 알면 모든 전략을
안다!”는 맥아더 장군의 언급이라면 나름대로 수긍할 만하다. 맥아더나 미국인은 몽골족에게 끔찍한 재앙을 당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언급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언젠가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분이 1950년대에 펴낸 칭기즈칸
전기를 읽고 얼굴이 화끈해진 적이 있다. 몽골족에 의한 문화재를 비롯한 물질적 손실은 제쳐 놓더라도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 이상의 우리 조상이
목숨을 잃고, 꽃다운 처녀들은 공녀(貢女)로 끌려갔던 사실을 그분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고려와 원나라 왕실의
혼인관계는 어떠한가? 고려의 태자 심(諶)이 원나라 세조의 딸을 부인으로 맞은 후 고려의 왕들이 원나라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지 않았는가?
혼인정책은 충렬왕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계속됐으며 충선, 충숙, 충목 등 세 왕은 원나라 왕비의 몸에서 태어났다. 100년간
고려는 원나라 사위의 나라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이런 혼인관계도 미화하는 글을 볼 수 있다. 왕실이 혈연으로 맺어졌다는 것은
원나라 왕이나 지도층이 고려가 자기네보다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고려를 무력만으로 정복할 수 없는 민족이라고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역사를 해석하고 스스로를 자위해서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이색과 이곡
인간은 막강한 힘 앞에서 목숨을 내놓고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힘이 쇠잔해지면 숙였던 고개를 슬슬 쳐든다. 고려
공민왕이 그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원나라 공주를 부인으로 맞았지만, 원나라가 급격히 쇠퇴하자 개혁정치를 표방하고 자주적인 정책을 펼 수
있었다.
공민왕을 보필해 개혁·자주정책을 추진한 인물 중 하나가 이색(李穡, 1328∼1396)이다. 호가 목은(牧隱)인 그는
어린 시절 천재로 이름이 높았으며, 원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원나라와 고려를 오가며 관리로 일했다.
그의 아버지 이곡(李穀)도
원나라 과거에 합격해 고려와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문장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그는 원나라 조정에 고려의 공녀 차출 폐지를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려 성공한 인물이다.
“딸이 공녀로 선발되면 그 부모와 친척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딸들이 떠나갈 때 옷자락을 당기며 엎어져 길을 막고 몸부림치며 통곡합니다. 그러다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우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목을 매어
죽기도 합니다. 기절하는 자와 피눈물을 쏟고 실명(失明)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나은 편입니다.” (이곡의 상소문
중에서)
이색의 ‘마니산기행’
이색이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탈피하는 정책을 추진한 것은 아버지의 큰일이라고 할 수 있는 공녀제도 폐지 같은 미봉책을 넘어선 것이었다. 우선 이색의 시문집인
‘목은시고(牧隱詩稿)’ 제4권에 실린 ‘마니산기행’ 중에서 한 편을 음미해 보기로 하자.
높은 산, 긴 강을 그
무엇에 비기랴?
웅장하다!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이여!
구름은 산꼭대기를 감싸 흐르고
경사진 절벽은 굵고 높은 나무에
기대었네.
휘파람 길게 부니 바람을 타고 퍼져
울리는 소리가 바윗골에 진동하는구나.
속세를 벗어나
이 산속에 숨어서
불로장생의 묘약을 먹고 살면 좋겠네.
해와 달은 한 쌍의 수레바퀴요,
우주는 한
칸의 집이로다.
하늘이 참성단을 쌓지는 않았을 테고,
도대체 누가 이곳에 만들었는지 모르겠구나.
향이 피어오르니 별은 내려앉고,
음악이 연주되니 분위기 엄숙해지네.
신의 섭리에 공손히 순응해야
하는 법을 알면
어찌 감히 자신의 복을 구할 수 있으리오?
강화도의 참성단! 그곳의 정경을 이색처럼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누가 있을까? 이 길지 않은 시에는 한 폭의 멋진 그림, 엄숙한 음악, 광활한 우주와 만나는 제단 건축, 종교,
그리고 그 어떤 외침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자랑스러운 조국과 그 국민의 자긍심이 어우러져 있다.
이색은 공민왕 집권 초, 24세
나이로 토지제도 개혁, 왜구 대책, 교육 진흥, 불교 폐습 근절 등 개혁에 관한 상소를 올렸던 인물이다. 38세에는 성균관의 수장인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국학진흥을 추진했으며, 정몽주·이숭인 등을 채용해 신유학을 보급하고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참성단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거행되던 한민족의 시조 단군에 대한 제사 일을 맡아 처리하면서 위와 같은 절절한 겨레의 노래를 지었던 인물이다.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쓰러져가는 원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혼돈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시인이자 정치인 이색이 자신의 고뇌를 함축적으로 노래한
시 한 편을 더 소개한다.
시(詩)가 사람을 궁핍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배고픈 자가 시를 교묘히 잘 쓰는
것이라네.
내가 가야 할 길이 현재 세상의 흐름과 다르니
쓰라린 마음으로 혼돈 속을 헤매노라.
얼음과 눈은 살을 찢고 뼈를
찌르지만,
훈훈한 마음을 만나서는 스스로 녹는다네.
기막힌 시구는 가난한 떠돌이 시인 몫이라는
옛사람의 말을 이제야 믿을
수 있겠노라.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