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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부활절 제5주일)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행8:30~40; 요일4:7~16; 요15:1~8
부활시기 후반부가 되면 우리는 복음서 본문으로 요한복음의 말씀들을 읽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는 선한 목자에 관한 본문을 읽었고, 오늘은 포도나무에 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다음 주일과, 부활주일 마지막 주일인 그 다음 주일에도 비슷한 요한복음의 본문을 읽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핵심은, 지난 주일에 우리가 보았던 아빌라 데레사의 기도시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마십시오/ 아무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도/ 하느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시다/ 인내함으로써 모든 것에 도달하십시오/ 하느님을 품은 자는/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느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nada te trube/nada te espante/ todo se pasa/ Dios no se muda/ la pacencia/ todo lo alcanza/ quien a Dios tiene/ nada le falta/ solo Dios basta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한 주간 얼마나 하나님을 품어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품는다는 말이 실제적으로 좀 어렵게 다가온다면, 이 데레사의 노래나, 지난 주일에 우리가 읽었던 시편 23편 말씀이나 요한복음의 말씀, 아니면, 다른 식으로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얼마나 묵상해 보았는가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는 이 분리감은 우리에게 수많은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마틴 레어드가 <침묵수업>에서 말했던 수많은 “마음의 드라마”나 “마음의 비디오”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말이지요. 엄밀히 말하면 이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의 드라마를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유일한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오늘 요한복의 말씀으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무언가를 덧붙이고 획득하여야 내가 “무엇인가”(somebody)가 될 것이라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nobody)도 아니라는 착각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 감각, 감정, 영감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은 높은 한라산이나 지리산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날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버리면,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너무나도 강박적으로, 나의 생각, 감각, 감정, 영감에 사로잡히고, 그것 자체가 유일하고 불변인 세상을 맞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철저하게 나의 “마음의 드라마”나 “마음의 비디오”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자주 묵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중심” “자기 드라마”로 돌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상처를 묵상하고, 자기 과거를 묵상하며, 자기 현재의 행위를 묵상하고, 자기 생각을 묵상하고, 자기 마음을 묵상합니다. 여기서 묵상은 반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반성입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학교에서 강제로 쓰라고 해서 썼던 일기장은 반성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은 이러이러 했다. 내일은 그러지 말아야 하겠다.” “오늘 철수와 싸웠다. 내일은 더 사이좋게 놀아야 하겠다.”
여러분, 반성도 때로는 필요하겠지요. 담백하게 반성해야 할 때도 물론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메타노이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와 우리를 둘러싼 사건들이 우리의 “마음의 비디오”나 “마음의 드라마”로 확장되고 발전되면서, 모든 것이 “나”, “나”, “나” 중심으로 향하는 경향성을 말하는 겁니다. 자기반성이 엄청난 자기중심성이란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이 “나”, “나”, “나”를 말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더 행복해지고자 하는 일인데, 이것이 우리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아직 잘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이 첫 문장만 보면, 이 본문은 심판 본문처럼 읽혀집니다. 너희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버린다, 불에 태워버린다, 심판 하겠다 라고 읽힙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문장이 오늘 본문의 중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중심입니다. 여기서 “머물다”라는 단어, <메네인>이라는 말이 1절에서 8절까지에서 8번 나옵니다. 10절까지 하면, 11번 나오지요.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여러분, 여기서 머물러 있다는 말은, 어쩌면 오늘 포도나무 비유에서는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립니다.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는 당연히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머물러 있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예수님은, 머물러 있어라 하는 말을 이렇게 자주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만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머물러 있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쪽으로든 떨어져 있지 말라는 것이지요. “머물러 있으라”는 말은, 당연히 붙어 있는 가지와 나무의 관계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머물러 있으라”는 말에는 어떤 의도 혹은 의지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머물러 있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의지를 내서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은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아버지는 농부라고 한 말씀을 먼저 살펴봅시다. 포도나무와 농부, 우리 생각으로는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두 대상이지요. 우리가 지난 주일에 보았던 목자와 양의 비유도 그랬지요. 포도나무와 농부, 목자와 양, 이 둘은 떨어져 있는 서로 다른 대상입니다. 우리가 이런 우리의 이미지로 이 비유들을 생각하면, 이 비유를 이해하는데 치명적인 한계를 맞게 됩니다. 아마도 예수님이나 유대인들도 그것을 알았겠지만, 그들이 볼 때 그 두 대상의 내적 관련성으로 보아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임을 알았고, 이런 비유들은 그런 내적 의미를 나타낸 것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보기에 포도나무와 농부, 그 둘은 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그리고 이 삼라만상과 분리된 어떤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 모든 것을 있게 하신 바탕이며, 그 모든 것을 이루는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그런 하나님을 어떤 대상으로 생각해서 우리와 떨어져 있다는 착각으로 살고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는 이 보편적인 착각이 바로 우리 모두의 “원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착각을 만회하고자 하나님을 대신할 것들을 세상에서 찾게 되지요. 쉽게 말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어떤 대상을 줄기차게 찾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대상은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에, 데레사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결국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연히 붙어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를 두고 계속해서 머물라고 했는지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당연히 붙어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안다고 해도, 실제로 삶에서는 그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럼 “가지가 포도나무에 머물러 있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쩐 일인지 하나님과 분리된 의식, 분리감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의식이 좀 너무 추상적이라면, 하나님 자리에 행복을 넣으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복”(지극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지복직관”이라는 말이 있지요.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기쁨(행복)을 지복직관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과 행복과 분리된 의식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지요. 행복을 행복 자체로가 아니라, 우리가 뭔가가 더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넌 행복과 분리될 수 없어. 니가 바로 행복이야. 너는 행복의 바다에서 출렁거리는 또 다른 행복한 파도야.” 받아들여집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복과 분리될 수 없다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드 멜로 말대로, “조건 없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저런 것을 갖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못해”라고 단정하지요. 아니면, “나는 이런 저런 것을 갖지 못해 행복하지 않아,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 못 되서 행복하지 않아”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단서가 붙어 있지 않는 행복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조건 없이 행복해지기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분리된 의식을 말하는 겁니다. 분리감이죠. 따라서 뭔가로 채워져야 하지요. 그런데 세상에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은 우리가 행복을 걸도록 길들여져 있는 “그 무엇”(대상들)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의식을 가지려면 어디에 머물러야 할까요? 다시 말하면, 진정 우리가 행복하려면 우리는 어디에 머물러야 할까요? 그렇지요. 하나님 그분이지요. 행복 자체지요. 그래서 아빌라 데레사는 “하나님을 품는 자는 아무것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행복 자체에 머물러야지요. 단서가 붙은 조건들에다가 아니라 행복 자체에 말이지요. 그럼 우리 속에서는 금방 “내가 원하는 것이 빠진 행복?” 그런 게 있을까? 하는 의혹이 올라옵니다. 그만큼 우리는 쇠뇌된 것이지요. 철저하게, 조건 없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넘어서는 데도 한참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혹은 행복 자체에 어떻게 머물러 있을까요?
우선은 “알아차리기”를 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의 세계에서 마음의 비디오를 찍고 있을 때, 그때마다 그걸 알아차리려야 합니다. 우리는 알아차리는 순간은 생각(대상)에서 떨어져 나오는 때입니다. 아주 찰라지만, 대상에서 떨어지는 순간이지요. 대상에서 떨어진다는 말은 바탕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정말 찰나가 되겠지요. 우리는 곧바로 다른 생각으로 또 드라마를 쓸 것입니다. “내가 미쳤지, 또 이런 생각을 했네!”라는 생각 말입니다. 우리는 다시 생각이라는 대상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때마다 알아차리기를 해서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것이 행복에 머무는 연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생각의 드라마 속에 머물기 때문에, 이 일을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 관상기도이고 향심기도입니다. 향심기도는 별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향심기도 시간 내내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단순한 일이고, 정말 힘들지 않고 하는 일입니다. 우리 존재의 본래상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그렇게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은 “나 중심의 드라마”로 돌아가려는 우리의 원심력의 작용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이런 연습이 필요합니다. 나중에는 애쓰지 않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뒤로 물러가면 애쓰지 않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이 알아차리는 일은 성경말씀을 묵상하거나 좋은 시를 읽거나 좋은 구절을 묵상하는 적극적인 “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일상생활에서는 이렇게 적극적 묵상을 해야 하지요. 내가 바로 하나님 안에 있음을,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고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좋은 말씀, 노래, 시, 이미지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접촉하는 감각을 갖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머무는 훈련은 “운동”입니다. 우리가 운동의 효과는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압니다. 특히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 우울증이나 정신적인 약함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운동은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었습니다. 우리가 운동을 할 때는 호흡이나 우리의 근육이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집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현존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리고 조금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자비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온유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과 접촉하여 그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라고 하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위 부정적인 문장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린다.” “내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쓸모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버린다.”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을 잘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늘 하나님의 평가를 받고 판단을 받는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말들이 향하는 모든 내용의 핵심은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입니다. 이 말씀의 다른 버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행복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이 어디에 달려 있는지를 명심하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것에 달려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하나님에게도 달려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은 행복 그 자체에 달려 있고, 사랑 그 자체에 달려 있습니다.